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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진동

by 김태민


김태민, <골목길>, 종이에 볼펜, 13x23cm.

이번 주 내내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눈뜨자마자 핸드폰을 들고 날씨를 확인한다. 오늘 기온은 영하 10도다. 올겨울 20cm가 넘는 폭설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삽으로 눈을 퍼다 버리면서 이제 고비는 다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동장군의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중이다.


기록적인 한파의 원인은 북극진동이다. 기압차로 인해 북극의 기후가 변화를 오가면서 극심한 추위를 몰고 온다. 북극 상공의 차가운 공기를 가두고 있는 제트기류가 약해지면 한기는 동아시아로 남하한다. 한반도를 덮친 강추위는 북극에서 온 것이다. 창문 밖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중이다.


설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투를 그린 영화 <더씽>이 떠올랐다. 까마득하게 먼 북극에서 온 찬바람이 온 세상을 얼려버렸다.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된 변화나 사건이 내가 사는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세상 모든 것들은 사실 다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산다.


무심코 버린 쓰레기는 돌고 돌아 태평양으로 흘러들어 가서 거대한 폐기물 섬이 됐다. 사람들이 누리는 편리함은 대부분 자연을 희생해서 얻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미래 같은 표현은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용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착취하고 있다. 사람의 손을 떠나면 전부 쓰레기가 된다.


벌은 꿀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것들을 이용해서 늘 쓰레기를 만든다. 지구는 거대한 폐기물처리장이다.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편리함에 집착하지만 인간은 책임에 관해서는 무심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별일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과정이 생략되면 심각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북극에서 내려온 한파가 한반도를 강타하는 일은 해프닝일 뿐이다. 어차피 겨울은 늘 춥다. 잠깐 불편하겠지만 결국 겨울은 지나간다. 당장 내 삶에 해가 되지 않는 문제는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랑 상관없다는 사고는 무심함을 낳는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눈길을 돌린다. 적극적인 이기주의보다 무심함 같은 소극적인 이기주의를 더 흔해졌다. 이제 무심함은 처세술이자 상식이 됐다. 다들 무심한 이기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산다.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패딩을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빗자루로 집 앞 골목의 눈을 쓸었다.


습설이 아니라 쌓일 것 같지는 않았다. 이틀 전에 내린 눈을 치우려고 나갔더니 누가 나보다 먼저 골목을 깨끗하게 쓸어놨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쌓인 눈을 그대로 놔두면 골목길이 꽁꽁 언다. 방치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다들 돌아가면서 눈 오는 날 빗질을 한다.


딱히 왕래는 없지만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서로 돕고 지낸다. 이웃사촌 같은 단어를 붙이기는 어렵지만 상부상조하는 배려심은 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도 동일한 생활반경 안에 삶은 연결되어 있다. 외면하고 등을 돌리는 무심함을 버리면 작은 배려와 친절을 느낄 수 있다.


북극에서 찾아온 겨울바람이 하얀 가루눈을 잔뜩 뿌리고 간다. 빗질을 끝내면 옥상에 쌓인 눈을 치워야겠다. 겨울은 성실한 계절이다. 빨리 찾아오는 법은 있어도 빨리 물러가는 법은 없다. 봄이 오려면 한 달은 더 걸릴 것 같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빗질을 하다 보니 손 끝이 곱았다. 입김으로 녹이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올라갔다. 홍차를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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