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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명학동

기억하고 기록하다

by 김태민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다. 아침공기는 산뜻하고 시원했다. 날씨가 좋아서 산책을 했다. 절기 상 곧 백로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가을이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두루미를 봤다. 정말 오랜만에 본다.


두루미는 상록마을 재개발 지구 위를 두어 바퀴 돌다 내려와서 돌 위에 앉았다. 학보다 두루미라는 단어가 좀 더 정감이 간다. 내가 사는 안양8동의 다른 이름은 명학(鳴鶴)이다. 한자 그대로 우는 학을 의미한다. 처음 명학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동네에서 두루미를 자주 봤다.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안양천은 철새들이 겨울을 나는 보금자리다. 백로와 두루미 무리는 강 주변에 모여 살면서 봄을 기다린다. 새들은 먹이를 찾아 수리산 자락이 길게 뻗어있는 상록마을까지 날아왔다. 하지만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면서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공사장 소음을 피해 멀리 떠난 것 같았다.


골목길을 가다 종종 마주쳤던 한국너구리도 명학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자연으로부터 한 걸음씩 멀어지는 것 같다. 명학은 수리산 아래 자리 잡은 동네다. 낮고 푸른 산자락이 두 팔로 감싸 안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자연과 공존했다. 약수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몰라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마당이 있는 집은 꽃나무를 기르고 빨간 벽돌로 지은 연립주택들은 화분으로 만든 작은 정원을 품고 있었다. 봄밤에는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썼다. 9월이 되면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계절의 변화를 눈보다 귀로 먼저 알 수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종 별자리를 구경했다. 옥상에 놔둔 평상에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네에서 높은 건물을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의 하늘은 지금보다 넓었다.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고 사람이 쓰는 언어도 달라진다.


이제 살기 좋은 동네는 대단지 신축아파트를 의미하는 단어가 됐다. 마을은 아파트단지를 부르는 일반명사로 통한다. 두루미마을이었던 명학은 더 이상 학을 볼 수 없는 동네가 됐다. 재개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노후주택은 때가 되면 허물고 결국 새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아파트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남들만큼 살고 싶고 남들처럼 되고 싶은 욕망은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모두가 선망하는 멋진 삶에 자연은 누락되어 있는 것 같다. 단지 안에 넓고 쾌적한 공원을 조성해서 그저 조경물로 삼고 싶어 한다. 포레나 리버는 입지를 설명하는 부사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공존하는 삶을 지향하는 시대는 끝난 것 같다. 불편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주민들의 심정에 공감한다. 낡은 다세대주택은 생활에 불편을 달고 산다. 겨울이면 수도관이 동파되고 여름철은 온갖 벌레가 꼬인다. 벚꽃이 질 때쯤 산에서 날아온 꽃가루가 눈처럼 흩날린다.


장마철부터 초가을까지 늘 폭우와 태풍을 걱정한다. 사람들의 공감대는 시간이 지나면 행동으로 이어진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내가 20년 넘게 산 명학은 기억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덕천마을이나 냉천마을처럼 명학마을 역시 대단지 아파트단지를 의미하는 명사로 변하게 될 것 같다.


조금 멀리 있지만 이별을 미리 준비한다. 거부할 수 없는 변화 앞에서 나는 기록을 선택했다. 기억 속에 남은 풍경과 일상을 글로 표현하고 사진으로 담는다. 핸드폰 카메라로 두루미를 찍었다. 가까이서 찍고 싶었는데 날갯짓을 하면서 금세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공사현장에 굴삭기 엔진음이 천천히 울려 퍼졌다. 지반공사를 하려고 파헤쳐놓은 땅에 벌써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가을볕을 맞고 자란 새하얀 풀꽃무리가 바람에 한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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