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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PEARL

꼼지괴담

by 김태민

잊고 살았던 이름이나 단어가 불현듯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 뚜렷한 이유나 동기는 알 수는 없지만 오늘 꼼지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꼼지는 방언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아이를 잡아가는 도깨비를 부르는 말이다. 1살 때 안양에 올라와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내 본관은 경상도다. 어린 시절 말을 안 듣거나 생떼를 쓰면 엄마는 꼼지가 온다고 했다.


경산 출신인 엄마는 꼼지는 부모님 말을 안 듣는 아이를 혼내주는 도깨비라고 말했다. 아이들 눈에만 보이고 어른들이 없을 때 몰래 나타나서 잡아가는 무시무시한 도깨비. 꼼지라는 말만 들어도 떼쓰기를 그만두고 울음을 뚝 그쳤다. 우리 집에서는 망태할아버지의 자리를 꼼지가 차지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상 속의 괴물이지만 마냥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세월은 감정을 희석시키고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 한동안 쭉 잊고 살았다. 사실 나는 꼼지를 본 적 있다.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어른들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른들은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이들의 말을 가볍게 여긴다. 착각이 아니다. 선명한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왜곡되거나 퇴색되는 법이 없다.


안양 메가트리아 213동과 214동 사이에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살던 연립주택단지가 있었다. 2층은 주인집이고 우리는 1층에 살았다. 어느 날 부모님이 동네 심방을 가느라 잠시 집을 비우게 됐다. 엄마는 누가 와도 문 열어주지 말고 문단속 잘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30분이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거실에서 느긋하게 TV를 봤다.


<미래용사 볼트론>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간격을 두고 둔탁한 노크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가늘고 높은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낯선 여자 목소리는 떨림이나 울림이 없어서 녹음기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라고 대답하고 현관 앞으로 갔다.


불투명한 젖빛유리 두 개가 끼워져 있는 문 앞에 불은색 형체가 보였다. 빨간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어른치고는 작았고 또래보다는 커 보였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목소리는 코앞에서 들리는데 사람 형상이 아니라 꼭 나무막대기 같았다. 조막손인 내 손바닥만큼 가늘었다. 낯선 여자는 자신을 엄마 친구라고 말했다. 집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겠다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재촉했다.


그때 다시 한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 혼자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 겁이 난 건지 놀랬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안고 경찰아저씨를 부르겠다고 소리쳤다. 낯선 여자는 그 순간 문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심방을 마치고 온 부모님께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괜찮다면서 나를 달랬다.


발소리나 괴이한 형체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 후로 나 혼자 집에 남겨지는 일은 없었다. 90년대는 납치가 사회문제로 대두됐던 시대다. 유괴를 의심한 부모님은 어디를 가든 나를 꼭 데려갔다. 두 달쯤 지나 완연한 가을 무렵 저녁잠에 들었던 나는 밤 중에 일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거실창 밖에 누군가 서있었다. 어둠에 물든 새까만 그림자는 사람 같았다.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대고 있었다. 놀라서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새빨간 몸에 까만 얼룩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형체가 창문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서있었다. 꼼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난동을 부렸다.


검은자위 없는 하얀 두 눈은 얼굴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너무 놀라면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방문을 열자마자 부모님이 덮고 있는 이불속으로 다이빙했다. 겁먹은 나를 보고 아빠는 곧바로 거실로 뛰쳐나갔다. 거실은 텅 빈 채 고요했다. 몸이 허약해서 헛것을 본다고 여긴 부모님은 한약을 지어다 먹였다.


약효가 있던 건지 아니면 두 분의 정성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기괴한 형상을 본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덕천마을을 떠났고 꼼지도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지나 20대 초 다시 꼼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해진 경북 출신 누나가 꼼지를 알고 있었다.


그 무렵 경산에 내려갔다가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서 물어본 적도 있다. 지역 민담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한 꼼지에 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어린아이 눈에만 보이는 꼼지는 총 세 번 나타난다. 꼼지를 봤다는 말을 어른들이 믿지 않으면 꼼지는 다시 나타난다. 어른이 나서서 아이를 데려가지 말라고 표현하거나 행동으로 저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 번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꼼지는 아이를 데리고 영영 사라진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는 이유에 관해서는 알 수는 없었다. 이제 꼼지라는 단어를 쓰는 젊은 세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말은 생명력은 갖고 있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단어의 수명도 짧아진다. 꼼지는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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