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는 용기-2025.02.28

by 누구

포기하는 용기


흔히 사람들은 용기에 대해 말할 때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포기하는 것을 용기가 없는, 비겁한 행동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때에 따라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용기 있는 선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용기가 개인, 더 나아가 개인이 속한 단체를 위하는 선택이 되기도 한다.


불굴의 의지가 가장 강조되는 분야가 스포츠다. 특히 대부분의 위대한 기록을 남긴 선수들 역시 불굴의 의지와 향상심, 승부욕, 투쟁심을 고루 가진 선수들이 많다.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분야기에 특히 중요한 가치들이다. 스카우터들이 유망주들을 칭찬할 때 쓰는 “짐 랫(Gym Rat, 하루 종일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이라는 표현 역시 스포츠 선수들에게 성실성과 향상심이 얼마나 중요한 미덕인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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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라스트 댄스’에서 드러나듯 마이클 조던의 승부욕은 병적인 수준이었다. 조던이 아꼈던 후배 코비 브라이언트는 ‘맘바 멘탈리티’로 회자되는 정신력과 노력의 상징이었다.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 역시 그의 재능만큼이나 성실성과 자기관리, 그리고 수준 높은 워크에식을 업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팬들은 선수들이 이들처럼 끝없는 승부욕과 포기를 모르는 정신은 스포츠 세계에서 미덕으로 찬양 받는다. 이런 현실에서 위대한 선수들에게 포기라는 말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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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도 스포츠계에는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속설도 있다. 이런 속설을 의식한 것인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회자될 리오넬 메시 역시 “나는 축구감독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지네딘 지단이나 펩 과르디올라처럼 이러한 속설을 벗어나는 사례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만큼 명선수가 지도자로서 실패한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속설 역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메시의 발언 역시 위 속설을 의식한 발언이다. 그만큼 스포츠계에서 명선수는 명장이 되기 힘들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훌륭한 운동선수일수록 훌륭한 감독이나 코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성공한 선수들일수록 좋은 선수가 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수로 실패한 이들이라면 좋은 선수가 되는 방법을 알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그만큼 코치나 감독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또한 선수로서의 명성은 리더십에 차이를 가져올 가능성 역시 크다. 아무래도 보잘것없는 이력을 지닌 감독보다 화려한 선수 경력을 지닌 감독이 플레이에 대해 조언하는 게 더 와닿을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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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혀 화려하지 않은 선수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명장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선수 평범한 식스맨이었지만 시카고 불스와 LA 레이커스를 이끌며 쓰리핏만 두 번 경험한 필 잭슨, 무명 선수였지만 최고의 감독 반열에 오른 알렉스 퍼거슨과 거스 히딩크가 대표적인 예들이다. 가까운 예로 51타석 연속 무안타 기록을 남겼지만 LG 트윈스에 29년만에 우승 트로피를 안겨다 준 염경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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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훌륭한 선수 커리어를 가졌으면서 감독으로서 실패한 경우도 많다. 특히 축구계의 안드레아 피를로나 농구계의 스티브 내쉬는 선수 시절 자기 종목에서 똑똑한 선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존재들이었지만 감독으로는 처참한 결과만 남기고 말았다.


이런 사례들 때문에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통념에 어긋나는 명제가 왜 스포츠계에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례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위대한 선수와 위대한 감독은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이 요구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위대한 선수의 가장 큰 특징은 투쟁심, 승부욕, 끝 모를 노력이 결부된,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미덕이다. 그들은 당연히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승리를 추구한다. 특히나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즉, 성공한 선수들은 감독이 되면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승리를 추구하는 성향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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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경기 최선을 다해 승리를 추구한다. 참 아름다운 말이고, 귀감이 되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초등학생과 성인이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경기를 이길 수 있는 팀은 없다. 특히 보통 선수와 특급 선수의 기량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프로 레벨에서 한 팀이 모든 경기를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경기 수가 한정적인 스포츠나 토너먼트 대회면 몰라도 한 시즌에 38경기를 진행하는 축구나 50경기 넘게 진행하는 농구, 100경기는 기본으로 넘기는 야구 등의 페넌트 레이스에서 전승 우승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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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내가 알고 있는 전승 우승 중 최다 승 기록은 2021-2022 시즌 여자 축구 리가 F의 FC 바르셀로나 페메니가 기록한 30전 30승 기록이다. 남자 스포츠에서는 2018-2019 시즌 두산 핸드볼단이 리그와 챔피언 결정전을 통틀어 기록한 22전 22승 전승 우승 기록이다.


스포츠 팀에서 감독은 팀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팀을 성공으로 인도하려면 우선 현재 팀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팀을 이끌지, 어떻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위기를 극복할지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위에서 설명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현실적인 목표와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신이 맡은 팀이 모든 경기를 이길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현실을 쉽게 외면하고, 응원하는 팀과 선수들에게 매 경기 이기길 바라곤 한다. 왜냐하면 패배라는 것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져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늘 어렵기 때문이다. 이게 스포츠를 보는 이유이자 재미라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한 팀의 수장이 팬들이나 선수들과 똑같이 생각한다면 약간은, 어쩌면 아주 많이 곤란하다.


선수 시절의 미덕에 익숙한 스타 선수 출신이 처음 감독이 되어 팀을 이끈다면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포기라는 것은 하면 안 되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의 자리에 오르면 포기와 친해져야 한다. 특히 포기의 미덕은 장기 레이스를 달려야 하는 상황일수록 중요하다. 장기 레이스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승리를 챙길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를 우리는 고사성어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손빈병법에 나오는 삼사법(三駟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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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빈: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책략가 손무의 후손으로, 그 역시 훌륭한 책략가였다.


제나라 장수였던 전기는 전차경주 내기를 굉장히 좋아했지만 번번이 져서 돈을 잃곤 했다. 이 때 전기의 식객 손빈은 전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력에 큰 차이는 없어도 결국 상등마, 중등마, 하등마가 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 중 두 번을 이기면 장군이 승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럼 장군의 하등마를 저쪽의 상등마와 붙이십시오."

"그러면 이쪽이 질 게 뻔하지 않겠소?"

"대신 장군의 상등마는 저쪽의 중등마에게 이기게 됩니다."

"아! 내 중등마는 저쪽의 하등마에게 이기게 되겠고!"

"바로 보셨습니다. 이번에는 2대 1로 승리할 터이니 거금을 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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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법에서 손빈이 쓰는 전략은 각종 스포츠 종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된다. 그만큼 효율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에 앞서 언급한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이가 감독이 되었다면 삼사법의 고사처럼 버릴 경기를 버리는 운영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 코비 브라이언트는 이벤트 행사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전력투구를 요구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져도 되는 경기’ 따윈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스타 선수일수록 현실과의 타협이나 포기를 선택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오히려 팀원들의 동기부여를 떨어뜨린다. 선수들 중에서 국가대표급 선수가 되는 것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전국민이 알 만한 스타가 되는 선수는 더더욱 적다. 그렇기에 대다수 팀원들은 스타 감독의 기준에 부합할 재능이 부족하고, 불가능한 목표를 억지로 추구하다 보면 흥미와 동기부여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는 팀 전체에 무력감을 퍼뜨리며, 그 결과 역시 안 좋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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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더 나아가 한국 야구를 대표했던 국민 타자였던 두산 베어스의 감독 이승엽은 2024 시즌에 4월부터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총력전 선언을 했지만 그 끝은 와일드 카드 시리즈 업셋 패배라는 초라한 결말이었다. 매 경기에 전력을 다하다 보니 선수들이 시즌 막판에 체력이 떨어진 것이 와일드 카드 시리즈에서의 부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선수시절 자신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미덕이 오히려 감독이 된 자신의 목을 조른 셈이 된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언급한 부분이 감독으로 성공하는 절대적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이는 스포츠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포기해야 할 일에 대해 계속 미련을 가지는 사례는 일상 생활에서도 흔하게 찾을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각종 시험을 칠 때 모든 문제를 풀겠다고 달려들면 제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난이도 별로 문제들을 분류한 후 쉬운 문제들을 먼저 풀고 어려운 문제들을 푸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 역시 포기해야 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는 삼사법의 지혜를 활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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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다. 일순간의 창피함이나 꺼림칙함을 감수하는 용기다.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포기할 줄 아는 용기는 포기하지 않는 용기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S. 흥미롭게도 올해 KBO리그 우승팀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 이범호 역시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 특유의 근시안적 운영이 보이지 않았다. 코치 이력부터 차근차근 밟은 효과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포기해야 할 때 과감할 때 포기할 줄 아는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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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에게 30대 6으로 대패를 당할 때 그는 일순간의 치욕적 기록을 감수했다. 무리해서 필승조 투수들을 올리는 대신 야수 박정우를 투수로 올렸다. 시즌은 길고, 같은 1패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삼사법의 지혜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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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1군 감독을 하기 전에 2군 감독은 꼭 해보라는 그의 말이 유독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우승 감독의 후광이 이런 걸까? 모르겠다. 잘생겨서 더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는 KBO 선수 중 응원가에 ‘잘 생겼다’는 표현이 있는 유일무이한 선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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