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의 선율과 봄비의 추억, 그리고 삶의 사색이 주는 낭만
초록 숲 달콤한 풀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힐 때 바람처럼 서걱거리는 기억이 지난 시간을 불러들인다.
힘들었던 세월을 뒤로하고 아카시아 꽃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 때 그 향기 따라가신 어머니의 시간은 지금은 어디에 머무르고 계실까.
촉촉이 내리는 빗방울 바라보며 그 옛날 당신의 품에 안겨 재잘거리던 순수한 아이가 되어 몰려오는 추억을 하나둘 들춰봅니다.
삼베 이불 다듬잇방망이로 꼿꼿하게 물풀 들여 당길 때 "막내가 있어 좋구나" 하시던 목소리가 빗물 되어 스며듭니다. <봄비 내리는 날에, 박남숙 저>
촉촉하게 건조함을 적시는 봄비가 내립니다. 흩날리던 먼지를 가라앉히고, 꽃가루를 머금어 땅으로 떨어지는 봄비는 자연의 섬세한 손길과도 같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내는 마찰음은 사람들에게 거부감보다는 안정감을 주고, 정신을 청명하게 해 주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마치 자연이 들려주는 자장가처럼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어릴 적 마루에 가만히 누워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온몸이 빗속에 빠져 곤히 낮잠에 들곤 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추고 오직 빗소리만이 귓가를 채웠습니다. 빗소리는 마치 정갈한 음악처럼 일정한 리듬을 타며 내 의식을 평온한 고요 속으로 인도했습니다.
멀리 장독대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파동을 보기 위해 비를 맞으며 장독대에서 놀던 꼬마의 추억이 아직도 어른이 된 제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빗방울이 만드는 파동이 신기했는지, 그 동심의 호기심이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비가 오면 마당의 강아지가 웅크리고 개집에 들어가 있을 때면, 그저 만지고 싶어 강아지에게 다가가 장난치고 비를 강아지 발바닥에 묻히기도 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어른이 된 제 추억을 따뜻하게 물들입니다.
봄비는 땅에서 나오는 새싹들에게 반가운 손님입니다. 건조했던 땅의 기운에 숨 쉴 수 있는 시원함을 선사해 주고, 식물들에게 푸르름을 머금도록 하는 힘을 줍니다. 봄비가 내리는 날, 살며시 들여다보면 식물들이 빗물을 머금고 더욱 생기 있게 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학적으로 비가 생성되는 과정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비의 시작은 물이 액체 상태에서 기체 상태인 수증기로 변하는 증발과, 식물의 잎에서 수분이 증발하는 증산작용에서 비롯됩니다. 태양 에너지가 지구 표면의 물들을 데워 수증기로 만들고, 식물들은 뿌리로 흡수한 물을 잎의 기공을 통해 대기 중으로 내보냅니다. 이렇게 대기 중으로 공급된 수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 상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따뜻하고 습한 공기는 차갑고 건조한 공기보다 밀도가 낮아 위로 상승하고, 이렇게 상승한 공기는 팽창하며 차가워집니다. 차가워진 공기 속 수증기는 미세한 입자, 먼지, 꽃가루 등 응결핵을 만나 그것에 달라붙어 액체 상태의 물방울로 응결됩니다.
응결된 수많은 물방울들이 모인 것이 구름이고, 이 구름은 공기 중을 떠다니다 작은 물방울끼리 서로 충돌하고 합쳐지며 점점 크기가 커집니다. 충분히 무거워지는 시점에 중력의 힘에 의해 비나 눈, 우박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순환들이 지속되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줍니다. 물의 변환, 결합, 재탄생, 그리고 다시 물이 되는 과정들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인 자연의 시스템입니다. 비가 내리고, 땅을 적시고, 다시 증발하여 하늘에서 구름을 만들고, 다시 중력의 힘에 의해 떨어지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그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이 물이라는 본성을 잃지 않으며 생과 사를 이어갑니다.
이는 삶이 시작되고 성장하고 소멸했다 다시 태어나는 자연의 순환 곡선과도 비슷합니다. 비의 생성과정을 보며, 순환과 흐름이 이어져 이루어 낸 우리의 시간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삶도 결국 이러한 자연의 순환 속에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에는 낭만이 있습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자연과 사람들 사이의 낭만을 잊고 지내기 쉽습니다. 낭만이란, 우리가 살아가며 정서적으로 서로를 보듬어 주는 그런 감정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보듬어 주고, 인간은 자연을 보듬어 주는 것. 서로가 공생하며 서로를 안아주는 것. 서로의 따뜻함을 느끼며 같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낭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이러한 낭만을 잊은 채 살아갑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빗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를 잃고, 빗방울이 만드는 아름다운 파동을 바라볼 시간을 놓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날,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다시 그 낭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잠시 바쁜 집안일로 지치신 몸을 부엌에 누워 눈을 붙이셨습니다. 그때의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던 모습을 보며 도와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비가 오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어머니에게도 비는 잠시 휴식을 선사하는 자연의 선물이었을지 모릅니다. 어머니의 숨소리와 빗소리가 조화를 이루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비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비는 단순히 물방울의 낙하가 아니라,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는 여유와 위안을 주는 존재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비는 때로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허락합니다.
아직도 가슴속 감성에는 빗방울의 추억과 낭만이 살아 움직입니다. 마루에 걸터앉아 처마 밑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모습과 음률을 듣고 있는 꼬마의 감성은 아직도 어른이 된 가슴속에 생생합니다. 그 시절의 순수한 호기심과 경이로움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물과도 같습니다.
비가 내리는 하루는 그냥 하루가 아닌, 삶의 기억과 추억들이 모인 빗방울의 순환 시스템과 같습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던져주는 시각과 청각의 선율은 삶이 만들어 내는 순환의 음률을 가슴속으로 느끼도록 합니다. 그 선율은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그리고 때로는 그리움을 담아 우리의 감성을 울립니다.
비는 그렇게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잊고 있던 감성을 일깨웁니다. 도시의 소음에 가려져 있던 자연의 소리, 바쁜 일상에 묻혀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다시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현실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비가 내리는 창가에 앉아 사색에 잠길 때면, 우리는 자연의 흐름과 하나가 됩니다. 빗방울 하나하나에 담긴 생명의 순환, 그리고 그 속에서 이어지는 우리의 삶과 추억들.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비는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삶을 돌아볼 여유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자연과의 교감, 과거의 추억, 그리고 현재의 소중함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는 다시 한번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는 낭만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돌아와도,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빗방울의 음률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순환을 노래하는,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선율입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살아 숨 쉬는 그런 추억을 가슴속 깊은 곳에 파동을 일으키는 삶의 소리일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