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성경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씀’(Word)은 예수라는 존재를 의미하고, ‘말씀’으로 비로소 존재 자체가 가능하다는 은유다. 하지만 역사상 여성의 ‘말씀’은 주목받지 못했고, 지워졌다. 그들은 존재했지만, 목소리가 사라진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영화 ‘오마주’는 그곳에서 시작한다. 흥행이 저조한 영화 세 편을 만들고 더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지완(이정은)은 영화 세 편을 찍고 사라진 한국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재원(김호정)의 영화 ‘여판사’의 사라진 음성을 마주한다. 영화 ‘여판사’는 실재했지만, 음성이 사라졌기에 마치 실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혔다.
홍재원을 비롯한 당대의 여성들은 목소리를 갖고 싶었지만 그 시대의 멸시는 강고했다. 홍재원은 10년 동안 스크립터를 했는데도 감독의 기회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여판사’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도 감독을 맡은 건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홍재원은 편집기사인 친구 이옥희(이주실)에게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라고 편지를 쓴다. 여성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세 번째 영화에서 멈췄다. 여자가 아침부터 편집실에 들어온다고 소금을 맞았던 이옥희는 이제 ‘영화’라는 단어가 기억 안 나 말하기를 주저한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지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어머니가 집에 막무가내로 온다고 했을 때 솔직한 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여전히 영화사 대표에게 “무슨 아줌마가 영화를 찍냐”는 소리를 듣는 게 현실이다. 그는 이제 ‘되’인지 ‘돼’인지 헷갈려하며 “시나리오 쓰는 게 무섭다”고 말한다. 이들은 목소리를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다.
‘지워진 목소리’가 영화 속 다른 영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틈입하는 순간이 있다. 지완이 ‘여판사’ 필름을 찾으러 오래된 극장을 찾아갔을 때 에로영화 ‘애마부인’이 상영되고 있다. 여성들은 신음하거나 목소리가 없다. 영화이론가 카자 실버먼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음향 사용에서 위계적 성 논리가 작동한다고 봤다. 여성의 음성은 ‘울부짖고, 헐떡거리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로 제시되고, 서사적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좌절되거나 순종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미셸 시옹은 ‘스크리밍 포인트’라는 자신이 만든 개념을 통해 ‘사이코’ 같은 고전영화에서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을 남성들이 ‘볼거리 조작자’로서 만들어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순간을 “언어가 갑자기 사라진 곳이자 블랙홀”이라고 했다. 실버먼과 시옹 모두가 지적하는 것은 고전영화에서 여성들의 실제 목소리는 지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여판사’의 사라진 음성은 그런 지적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홍재원이 ‘여판사’를 찍으며 원고지에 남긴 메모 “너는 언젠가 지워질 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은 자신 영화의 운명에 대한 예고이자, 여성 운명에 대한 경고다. 그의 영화 장면들은 유독 여성에게만 날카로웠던 검열로 잘려나갔고, 음성은 무관심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구체적인 형상도, 음성도 없이 그림자로만 나타나는 홍재원의 모습이 그것을 상징한다. 지완은 그 그림자를 마주할 때 공포보다는 연민을 느낀다. 자신의 운명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완이 하혈하며 자궁을 적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여판사’의 복원에 안간힘을 쓰는 것일 테다. 생물학적 여성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워진 목소리와 장면을 통해 영화판에서도, 현실에서도 타자의 자리로 밀려났던 여성을 제 지위로 올려놓겠다는 목표가 그에겐 지상 과업이다.
지완은 결국 ‘여판사’에서 사라진 음성을 더빙 녹음하고, 삭제된 필름도 찾아 복원에 성공한다. 지완은 이옥희 집에서 널어둔 이불감에 필름을 비춰 첫 상영을 한다.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검열해 삭제됐던 장면이 펼쳐진다. 손익분기점인 관객 20만 명을 넘어야 하지만 관객 4명이 전부인 극장, “실감이 안 나는” 숫자 1000만 관객이 다녀간 극장에서와 달리 지완의 얼굴은 영화를 처음 마주했던 그때처럼 벅찬 표정으로 가득하다. ‘여판사’의 실존 인물은 독살됐지만, 영화 속에선 주인공이 해피엔딩을 한 것처럼, 지완에게 이 영화의 복원은 현실과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이다. 지완이 복원한 것은 홍재원의 <여판사>지만, 동시에 복원된 것은 여감독으로서 버티기 힘들어 무너져갔던 지완의 영화를 향한 마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