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고은은 언뜻 보면 미끈하고 아름답지만, 골똘히 들여다보면 당대를 향해 따끔한 메시지를 숨겨둔 그림 같다. 경쾌한 색감 때문에 만화처럼도 보이지만 그 안엔 성적 소수자 차별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는 키스 해링 작품처럼. 그런 인상의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김고은의 얼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모찌’(찹쌀떡)처럼 새하얀 김고은 낯빛의 무해함은 관객을 불가피하게 무릎 꺾게 만든다. 연배가 있는 관객에겐 청춘의 한 때를 상기하게 하는 은근한 힘이 김고은의 얼굴엔 있다. 그런데 그건 첫인상일 뿐이다. 그의 눈매는 때때로 매섭다. 김고은이 쌍꺼풀 없는 눈으로 무표정하게 바라볼 때 누군가는 역습을 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의 역습의 눈길이 닿는 곳엔 ‘꼰대적인 것’과 ‘구악적인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고은은 청춘에 대한 환상이면서, 그 환상에 대한 경종이다.
그런 이중적 매력으로 꽂아놓은 두 개의 말뚝 주변으로 김고은은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보통 신인 배우가 하나의 이미지로 이력의 초반을 소진하는 것과 달리 김고은은 계통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가능성을 이리저리 시험했다. 배우로선 행운이었다.
김고은이 장편 데뷔작 〈은교〉에서 연기한 한은교는 시인의 흔들의자에서 하늘하늘 잠든, 어디 하나 탁한 기운이 없는 인물이었다. 원작 소설 『은교』에 이런 문장이 있다.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火印)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 내가 은교의 손을 처음으로 쥐었을 때가 바로 그럴 때이다.’ 그 문장을 각색하면, 김고은은 〈은교〉에서 관객의 기억에 화인을 찍었다. 미숙함에서 비롯하는 싱그러운 관능과, 그 관능의 결과를 스스로 가늠하지 못하는 철없는 미숙함은 이제 막 스무살이 넘은 김고은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3년 뒤 김고은은 〈차이나타운〉에서 다른 말뚝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고은이 연기한 일영은 미숙할 나이에 완숙을 강요받고, 자신의 쓸모로써 완숙을 증명해내야 하는 인물이다. 일영은 한은교의 정반대 지점에 놓여 있다. 일영은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 끝에 결국 이겨낸다. 김고은의 냉연한 눈매에서 관객은 그가 기필코 돌파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은교>, 2012
김고은은 초기 출연작 두 편으로 널찍하게 열어둔 자신의 매력 속에서 마음껏 활공했다. 범작도 있고, 태작도 있었다. 더 날개를 편 쪽은 TV 드라마 쪽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적 에너지의 잠재성을 담지한 채 어느 정도 흥행력도 담보한 젊은 여자 배우가 나왔다는 사실을 한국 영화계는 각별하게 받아들였다.
올해는 김고은의 재능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영화계에서 인정받은 해로 기록될 것이다. 과거 출연작을 보면 그는 여전히, 어떤 의미에선 학생이었다. 그 스스로 작품 선택의 기준에 대해 “진짜 좋은 선배들이 있는 현장을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1등을 할 수 있는 교실이 아니라 좋은 선생님이 있는 교실을 선택해 들어갔다는 의미다. 〈은교〉의 박해일,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협녀, 칼의 기억〉의 전도연·이병헌, 〈성난 변호사〉의 이선균, 〈계춘할망〉의 윤여정 등 거대한 항성 옆에서 김고은이란 행성은 빛을 받아냈다. 스스로 빛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러나 올해 〈파묘〉와 〈대도시의 사랑법〉은 달랐다. 선생님이 좋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졸업을 해야 할 때가 온다. 김고은은 올해 교실 밖으로 걸어 나와 제 한몫을 했다.
배우 최민식은 〈파묘〉에서 김고은의 굿 연기에 대해 “저러다 뭔 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직접 봤을 때 몰입도가 대단했다. 배우의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선배의 애정 어린 설레발이 미량 섞여 있긴 하지만, 최민식의 칭찬엔 김고은을 한 명의 동료 배우로 보증하는 성격도 있다. 이화림이 굿을 하는 장면은 두려움과 번민이 핵융합하며 폭발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만큼은 김고은은 마력을 내뿜으며 스스로 빛났다. 〈파묘〉는 음험한 기운을 샐 틈 없이 가져가는 게 중요한 영화였다. 네 명의 주연 배우가 어디 하나 샐 틈 없이 벽을 세우는 게 중요한 과업이었는데, 김고은은 최민식·유해진에게 밀리지 않고 강고한 벽처럼 서 있었다. 영화가 1000만 이상 관객을 모은 건 그중 어떤 벽도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묘>, 2024
<대도시의 사랑법>, 2024
〈대도시의 사랑법〉은 여기에 비하면 두 배우 얼굴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영화다. 영화는 두 명의 청춘 남녀가 이성애적 사랑 없이 동료애적 우정만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20대와 30대 초반을 통과한 이야기다. 이 영화가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두 명의 얼굴이 나란히 배치될 때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나는 누구야’라고 주장하고 싶은 재희(김고은)의 순한 낯빛과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만 그게 까발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흥수(노상현)의 날 선 콧날이 공명할 때 이 영화는 덜컥 멋지다. 김고은에게 〈파묘〉가 익히 경험해보지 못한 오컬트의 세계에서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였다면,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가 가장 잘 아는 인물 속에서 나이 등 자신의 생물학적 특장점을 가장 크게 부풀린 영화일 것이다.
김고은은 올해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아직 기분 좋은 미열이 가시지 않았을까. 그가 〈대도시의 사랑법〉 개봉 이후 씨네21과 한 인터뷰를 봤다. 이 영화를 선택한 계기를 “영화가 다루는 20살부터 33살까지의 세월, 그 13년간의 시간성이 먼저 다가왔다”고 설명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만큼 명확한 건 없어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20대 초반, 뭔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가 뒤따르지 않는 20대 중후반, 겨우 여기까지 왔지만 이게 맞나 한 번쯤 돌아보게 되는 30대 초반까지의 세월이 공감이 갔다.” 그의 말은 자기반영적이다. 올해 김고은이 33살이다. 숱한 불안과 자괴가 삶의 목록이었던 때를 지나, 한 움큼의 성공을 맛봤지만 이게 맞는지 문득 의심이 드는 나이. 그도 올해 열풍의 한복판을 지나면서도 몇 번쯤은 턱에 손을 괴고 배우로서 이력을 되씹어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각종 상찬보다 이런 반추의 시간이 김고은을 배우로 농익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