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르지만, 숙성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다. 와인 한 병도 빛을 맞고, 알맞은 온기 속에서 긴 어둠을 견뎌내며 비로소 깊은 맛을 내듯이, 위스키도 오크통의 숨결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잃는 만큼 그만큼의 향을 얻는다. 오래됐다는 사실이 곧 가치가 되는 건 아니고, 제대로 돌봐진 시간일 때에만 품격이 된다.
나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이 드는 게 단지 숫자가 늘어나는 일일까, 아니면 인생의 결이 더해지는 걸까. 거리에 있는 어떤 어른들은 성질만 남아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가 하면, 또 어떤 어른들은 말수가 줄수록 오히려 더 넉넉해진다. 똑같이 세월을 지나도 저마다 결이 달라지는 이유는, 각자 다른 ‘셀러’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는 햇볕처럼 넘치고, 어떤 환경은 냉장고처럼 서늘하다. 술맛이 장소와 온도, 돌봄에 따라 달라지듯 사람 역시 사랑과 경계, 평소 습관에 따라 자신만의 향을 더하게 된다.
발효와 부패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똑같은 재료와 시간도 돌봄이 없으면 금세 썩고, 관심이 닿으면 제대로 익는다. 내 안의 분노도 마찬가지다. 계속 흔들기만 하면 탁해지고, 잠시 내려놓고 기다리면 가라앉으며 맑아진다. 좋은 와인은 급하게 흔들지 않고, 좋은 사람도 성급하게 단정 짓지 않는다. 품격이란 때때로 속도를 늦출 때 오히려 돋보인다.
오크통의 미세한 숨구멍이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작은 틈이 술을 숨 쉬게 하듯, 사람에게 그런 숨구멍은 곧 관계다. 나를 답답하게 하는 그 누군가가 있는지, 아니면 숨이 고르게 쉬어지는 사람이 곁에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말이 많을 필요 없는 사이에서 우리는 천천히 익어간다. 가르치기보단 들어주고, 결과만 재촉하는 대신 오늘을 함께 바라보는 시선. 그런 관계는 나를 과하게 달게도, 지나치게 쓰게도 만들지 않는다.
숙성 과정에는 빠짐없이 손실이 따른다. ‘엔젤스 셰어’라 불리는 증발의 몫처럼, 사라지는 만큼 남은 것이 더 농축된다. 내 삶에도 이런 몫이 있다. 과열된 자존심, 불필요한 비교, 스스로에게 던지는 의심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날려 보내고 나니, 남은 내 향기가 더욱 선명해졌다. 잃는 게 반드시 결핍을 뜻하는 건 아니다. 어떤 손실은 나를 가볍게, 어떤 비움은 내 향을 또렷하게 해 준다.
나는 그냥 늙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익고 싶다. 겉멋을 내기 전에 내실부터 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실은 커다란 결심보다 낮은 온도의 반복에 있다. 제때 잠들고, 제때 일어나고,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말을 아낄 줄 알고, 듣는 시간에 한숨을 더하고,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만 비교하는 일. 이런 소박한 리듬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내 삶도 제 온도를 찾는다. 숙성이란 결국 온도의 예술이 아닐까.
때로는 디캔팅이 필요하다. 오래 닫혀 있던 병을 열어 바깥공기와 섞듯, 혼자만 곱씹던 생각도 밖으로 내보는 용기 말이다. 글로 끄적이거나, 신뢰하는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보는 일. 바람이 닿으면 잠자던 향기가 깨어나듯, 마음도 그렇게 깨어난다. 말을 아끼는 것과 묵히는 건 다르다. 침묵이 향을 풍성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때론 굳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열어둘 타이밍을 아는 것, 그것 역시 숙성의 기술인 것 같다.
한때는 환경이 나를 규정했지만, 이제는 내가 내 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방의 불빛을 조절하고, 책을 가까이에 두고, 불필요한 소음을 비워내고, 나를 존중해 주는 사람과의 시간을 늘리고, 나를 소진시키는 자리는 조용히 벗어난다. 누군가의 호의에 기댄 친절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선택한 평온 말이다. 내 삶의 셀러를 나 스스로 지키고 싶다. 내 호흡에 맞는 방, 내 마음의 온도로 하루를 익히는 삶.
숙성의 징후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니다. 급하게 쏟는 말이 줄어들고, 고집에도 곧 이유가 생기고, 미움 앞에 경계가 세워지고, 슬픔에도 언어가 찾아온다. 환호 대신 미소, 증명이 아닌 존재, 과시 대신 취향. 설득하지 않아도 내 자리를 지키는 힘. 그 힘이 조용히 향처럼 퍼져간다.
오늘 나는 결심보다 환경을 고른다. 높낮이를 조절하고, 빛과 어둠의 길이를 맞추고, 관계의 숨구멍도 살핀다. 하늘로 날려 보낼 것은 조금 더 날리고, 손에 남길 것들은 꼭 쥔다. 나를 비우고, 새로운 나를 천천히 채운다. 성급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내 병은 더디지만 깊게 익어간다.
나는 늙고 싶지 않다. 익고 싶은 사람이다. 숙성이란, 바로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