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느리게 결정하는 용기

『끝까지 남는 사람』

by 박동욱

요즘 일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칭찬은 이것 같다.
“와, 결정 진짜 빠르시네요.”


빨리 답하고, 빨리 판단하고, 빨리 움직이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처럼 보인다.
메신저 알림은 하루에도 수십 번 울리고,
메일함에는 “가능하면 오늘 중으로”,
심하면 “지금 안건 좀 바로 보시죠?”라는 말까지 붙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런 유혹 앞에 선다.
일단 결론부터 내자.
일단 승인부터 하자.
일단 밀고 보자.


속도는 시원하다.

당장은 일을 해치운 기분이 든다.
“정리 끝.”이라는 말이 주는 짧은 쾌감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드는 생각이 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볼걸.”
“하룻밤만 더 두고 볼 걸.”


빠른 결정이 언제나 좋은 결정은 아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
한 번 틀어지면 오래 남는 문제일수록 더 그렇다.


어느 날 오후, 긴 회의가 이어졌다.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말지 정해야 했다.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리스크가 크다.”
“그래도 이 정도는 도전해야 한다.”
“지금 인력으로 버틸 수 있을까?”


회의 시간이 예정된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누군가는 시계를 자꾸 봤다.
다음 회의가 줄줄이 잡혀 있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냥 합시다.”
“그냥 접죠, 뭐.”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리더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오늘 여기서 결론까지 내리지 맙시다.
각자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내일 오전에 다시 모여서 정합시다.”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질질 끌 필요 있을까.’
‘그냥 지금 정하면 되는데.’


그래도 리더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 상태에서 결정하면
누군가는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씹을 겁니다.
아까 못한 말 생각나고,
괜히 억울해지고.
그 마음 안고 시작하면
첫 단추부터 비뚤어집니다.


하룻밤만 두고 봅시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내일도 같은 생각이면 그때 결정합시다.”


그날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집으로 가는 길, 사람들은 각자 생각을 이어갔다.

지하철 안에서 발표 자료를 다시 보는 사람도 있었고,
샤워하면서 리스크를 하나 더 떠올린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굳어졌다.
어떤 사람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확신이 생겼다.


다음 날, 다시 모인 회의에서
어제보다 정리된 말들이 나왔다.
밤사이 머릿속에서 가라앉을 것들이 가라앉았고,
감정은 줄고, 생각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결정은 결국 내려졌다.
하지만 그 결정에는
한 번 더 씹어본 시간이,
한 번 더 돌아본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


느리게 결정하는 사람은
우유부단해서 그러지 않는다.
생각의 속도를 빌려 쓰고 싶어서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회의 안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길, 잠들기 전,
샤워기 물을 맞으면서,
커피를 내리면서도 계속 일을 곱씹는다.


리더는 그 시간을 믿어야 한다.
사람이 스스로 정리할 틈을 얻으면
말의 무게도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물론 모든 일을 이렇게 처리할 수는 없다.
불이 난 상황에서
“일단 하루만 더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끌어내야 할 사람,
지금 당장 멈춰야 할 버튼이 있다.


그래서 리더에게 더 필요한 능력은
결정의 속도가 아니라
결정의 속도를 고르는 감각이다.


“이 일은 지금 여기서 바로 정하자.”
“이 일은 오늘 안에 방향만 잡자.”
“이 일은 최소 하룻밤은 묵히자.”


이 셋을 구분하는 힘.
이 힘이 느리게 결정하는 용기의 핵심이다.


느리게 결정하는 리더는
죄책감을 느낀다.


모두가 빨리 답을 원할 때
“조금만 더 기다리자”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요?”
“우린 뭘 준비해야 하죠?”


그 질문을 들을 때
리더의 마음도 불편하다.
그래도 버틴다.


지금 내리는 빠른 결론이
나중에 더 큰 후회를 낳을 것 같으면
리더는 그 후회를 미리 당겨서 안고 가야 한다.


“조금만 더 보자”라는 말은
책임을 미루는 말처럼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책임을 더 단단히 지기 위한 말이 되기도 한다.


어느 팀장은
중요한 평가를 앞두고 이런 메일을 받았다.


“팀원 A의 태도가 요즘 너무 좋지 않습니다.
이번에 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정리된 사례 몇 가지가 적혀 있었다.
지각, 회신 지연, 회의에서의 무성의한 반응.


이 메일만 보면
당장 불러서 따지고 싶다.
경고장을 쓰고, 인사팀과 상의하고,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팀장은 먼저 A의 자리로 갔다.


“요즘 좀 힘들어 보인다.
괜찮나?”


A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집안 사정을 털어놓았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병원 입원,
밤마다 이어지는 병간호,
깨져버린 수면 시간.


팀장은 바로 징계를 결정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기간을 정해서
업무량을 조절하고,
다른 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조금 느리게 평가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질질 끄는 회피가 아니다.
사람의 사정을 한 번 더 들여다본 뒤
일과 사람을 함께 놓고 판단한 선택이다.


느리게 결정하는 리더는
일만 보지 않는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같이 듣고 싶어 한다.


그래서 결론까지 시간이 더 걸린다.
대신, 한 번 내린 뒤에는

오래 버틸 수 있다.
그 과정에 충분히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속도를 숭배한다.
“빨리 실패해라”,
“빨리 시도해라”,
“빨리 결과를 보여줘라”는 말이 넘친다.


물론 때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리더가 늘 빨라야 한다고 믿으면
사람들은 금방 지친다.
생각할 틈 없이 끌려가고,
납득할 시간 없이 결과 앞에 선다.


느리게 결정하는 용기는
결국 이런 말과 비슷하다.


“네가 이 결정 안에서 함께 살아갈 거라면,
네 마음이 그 안에 들어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겠다.”


좋은 리더는
자기의 불안을 참는 사람이다.
“빨리 정하라”는 압박,
“답을 줘라”는 요구,
“왜 아직도냐”는 시선 사이에서도
한 걸음 더 오래 서 있는 사람이다.


그 기다림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말과 마음을 찾는다.
그 마음이 더해진 결정은
조금 늦게 태어나도
오래 버틴다.


이 장에서 말하는 리더는
결국 이런 사람이다.


빨리 대답해서 유능해 보이기보다,
조금 천천히 대답하더라도
함께 책임질 수 있는 말을 고르는 사람.


속도의 시대에
일부러 속도를 줄이는 사람.
그 느림 안에서
사람을, 관계를, 미래를 함께 생각하는 사람.


느리게 결정하는 용기.
리더의 고집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시간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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