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커튼월
강남-역삼-선릉-삼성역으로 이어지는 테헤란로는 한국에서 가장 큰 업무지구이자 유흥지구이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극명하게 바뀌는 이곳은, 낮에는 압도적인 비즈니스 밀집지구였다가
밤이면 번쩍이는 식당과 술집이 가득한 유흥의 메카가 된다.
제주도 전체 인구의 20%가 제주 면적의 1%도 안 되는 좁은 땅에 몰려 있는 셈인데,
쉽게 비유하자면 원룸 하나에 50명이 복작거리며 사는 느낌이랄까.
그 숨 막히는 빌딩 숲 중에서도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삼릉공원'이 있는 선릉으로
우리 사무실은 자리를 옮겼다.
"지옥은 텅 비어 있고, 모든 악마는 여기에 있다"(셰익스피어)
서울의 시골 같던 양재를 떠나 선릉으로 '입성'했다.
새로 오신 대리님은 성격이 털털해 금세 친해졌고, 앞서 거쳐온 까칠한 선배들의 장벽을
단숨에 허물어주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장님은 이전 사무실에서 새로 뽑아 데려갔던 그분을 정작 헤어질 때는 그곳에 두고 오셨다.
그 회사는 대표를 필두로 소장, 과장, 대리, 사원까지 5명에 인테리어팀 2명을 합쳐 총 7명 규모였다.
우리 소장님과 실장님 두 분, 그리고 대리와 나까지 합류하니 전체 인원은 12명이 되었다.
데릴사위의 기분이 이럴까. 얹혀 들어간 우리는 내내 셋방살이하는 기분이었고,
실장님보다 젊었던 그쪽 소장님은 안방마님이었고 티나지 않는 티남으로
털털한 대리님이 그를 "나와는 애증 관계"라고 할 정도 였다.
"인간의 감정은 섞이지 않는 기름과 물처럼 제각각의 층을 이룬다"(괴테)
얽히고설켰지만 기름과 물, 수직선과 수평선처럼 결코 하나가 되지 못했던
두 회사의 사람들은 각기 기존의 소장님의 지시를 받으며 일했다.
다소 숙이고 들어간 쪽은 우리 소장님이었다.
다행히 숙일 수 없었던 우리 실장님과 나는 대기업 합사를 나가게 되면서
그 숨막히는 기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기업 합사 현장은 소규모 사무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보안카드 시스템, 특정 파일 접속 권한, 전산 부서의 지원과 간식 가득한 탕비실까지
모든 것이 생경하고 부러웠다.
하지만 아침 9시 전 출퇴근 확인용으로 컴퓨를 켜야 했고 숨죽인 통화 소리 속에서
나는 그저 석 달짜리 '캐드 기사'일 뿐이었다.
업무는 기계적이고 딱딱했다.
거의 모든날이 야근이었고 마감이 다가 왔을땐 압박에 찜질방을 전전하며 눈을 붙였다.
완료 후 받은 이틀의 휴가는 잠 한숨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위대한 것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다"(니체)
앞선 대기업의 시스템보다는 설계의 본질은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함께 작업한 대기업 팀원들은 화려한 학벌을 자랑했지만,
정작 프로젝트를 이끈 실질적인 내공은 지방대 출신인 우리 실장님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만 시스템이 잘 갖춰진 대기업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역시 대기업을 선택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라고 확신했다.
결과물이 좋아질지언정,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정해진 공정만 반복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야근 후 집으로 향하던 길, 불 꺼진 빌딩 숲과 8차선의 넓은 도로와 넓은 보도 옆
1톤 트럭에서 먹던 우동의 온기와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흩어지던 김의 풍경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다.
[prompt]서울의 테헤란로에 위치한 선릉역 10번 출구앞으로 1톤트럭으로 만들어진 우동을 파는 포장마차에서 야근에 지쳐 우동을 먹는 두사람과 넓은 보도와 중앙 분기선에 가로수가 있는 8차선의 넓은 도로를 배경으로 커튼월로 된 높은 건물이 즐비해 있는 곳. 건물의 불은 다 꺼졌지만 야근을 하는지 간혹 중간중간에 불이 켜져있다. 저녘 11시가 넘었지만 늦게 퇴근하는 사람은 꽤 많고 포커스는 포장마차에 앉아 우동을 먹는 두사람이다. 우동국물의 온기가득한 김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계절은 여름이라 우동을 먹는 두사람은 반팔과 말아올린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있고 지나가는 사람도 가벼운 옷차림이다. 가로등이 밝아 하늘은 반대로 거의 보이지 않고 아주가느다란 손톱달만 보인다
고급 책걸상과 커튼월 너머의 시원한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비좁은 사무실로
돌아오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1층 주차장 구석까지 흡연하러 가던 왕복 15분의 고역을 끝낸 것도 큰 위안이었다.
여전히 서먹한 기운은 감돌았지만 시간이 약이었을까.
비슷한 연배의 과장, 대리들과 도시락을 나눠 먹고 선릉 산책을 함께하며
물과 기름 같던 우리도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바쁜 와중에도 쪼개어 연애했지만 결국 그 쪼갠 시간의 만남은 이별이었다.
밥값 포함 월 최대 30만 원이라는 회사의 야근수당 상술에 분노하면서도,
'안 주는 곳도 있다'는 동료들의 짠한 위로에 기대어 야근을 견뎠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아껴 인근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는 것이
그 시기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렇게 9개월이 흐르고 그회사의 오픈빨이 사라졌는지 회사가 가세가 기울어 졌고
인테리어회사를 접었고 우리 소장님은 마치 객식구처럼 쫓겨나게 되었다.
"여기 계속 다녀도 되고 나랑 같이 나가도 되는데, 어떻게 할래?"
그 회사는 월급과 야근수당을 꼬박꼬박 줬지만, 나는 돈보다 의리를 택해
소장님과 실장님을 따라나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회사로 입사했던 막내사원은
안방마님의 은근한 압박이 싫었던건지 집안형편이 꽤나 좋았던 지라 우리 소장님에게
"무보수라도 좋으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아주 달콤한 유혹에 소장님은 억지스럽게도 3명에서 한명더 포함해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우습게도 처음에 뽑아왔던 대리님과 오래 같이 했던 감리 실장님은 그곳에 남겨진 채 버려졌다.
듣기로는 그분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