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정과 시간이 머무는 자리, 시네마.
나의 유년은 비디오테이프의 시대가 끝날 무렵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 자그마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이런저런 애니메이션 테이프들을 빌려오셨다. 웬만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그때 다 보았다. 밤마다 가족들과 한방에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잠들던 그 시절의 온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비록 만화영화이긴 했어도, 그 덕에 난 어린 나이에 이미 영상이라는 매체에는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때문에, 여느 영화감독들이나 평론가들이 말하는 ‘극장이라는 공간에 관한 첫 경험과 충격’ 같은 건 내게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오히려 영화에 천천히 스며들어 갔고, 늘 함께였다. 그래서, 운명 같은 건 믿는 편이 아니지만, 내가 영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분명 필연이었다고 확신한다.
길고 긴 영화와의 인연과 추억 탓에, 안타깝지만 영화 <시네마 천국>을 비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네마 천국>이 연출/미학적으로 탁월한 영화인가, 외부로 어떤 정치적 힘을 지니는가, 같은 질문에는 대답할 자신도, 의욕도, 관심도 없다.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감상적인 이야기지만, 내게 <시네마 천국>은 내가 영화에 빠져들던 그 순정의 시간을 고스란하게 떠오르게 하는 애잔하고도 온기 가득한 작품이다. 그러니 이 글이 비평이라기보다는 난잡한 영화 에세이에 지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어떤 이들은 서로를 시기 질투하기도 미워하기도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그곳은 공동체가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천국 극장’*은 일종의 표본집단으로서의 마을 주민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천국 극장’에 모인 관객들은 그 마을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이 가능했다. 광장이 자기 것이라고 부르짖는 광인, 고상한 척 앉아있는 상위 계층, 매춘부, 마을 신부, 사춘기 소년들, 구석에서 성관계를 나누는 연인들, 코를 골며 졸거나 눈물을 흘리며 다음 대사를 일일이 읊는 중년 남성.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주인공 토토도 그들 중 한 명으로서 마을, 혹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작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모였고, 서로를 만나러 극장에 모였다. ‘영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었고, 극장은 그 자체로 마을이었다.
*영화 제목과의 구분을 위해 '천국 극장'으로 직역해서 표기한다.
오늘날의 극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흥행과 수익에 목맨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은 ‘돈이 될 것 같은’ 영화만을 줄줄이 스크린에 내걸었고, 관객의 소비 패턴을 수치화하여 도로 영화를 홍보한다. 개별 작품들은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영화’가 아니라 ‘유행’을 따라 극장에 모이게 되었고, 극장은 표본집단으로서의 군중을 모집하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 영화는 더 이상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OTT 플랫폼의 등장으로 극장마저도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어쩌면 영화는 고향을, 자기를 잃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칠리아를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점차 공동체를 이탈하는 이들이 발생했다. 토토도 그중 한 명이었다. 빠르게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시대에 “이 마을엔 가망이 없”다고 예견한 알프레도의 조언에 따라, 토토는 로마로 떠난다. 자신의 멘토 알프레도, 어렵지만 함께 살아 온 가족들,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르는 첫사랑 엘레나, 그 외 토토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이별하고 영영 고향을 떠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토토는 소속된 공동체에서 떠났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살바토레 디 시타(토토의 본명)는 성공했지만, 토토는 그리 행복한 인생을 살지는 않은 것 같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는 엘레나 이후로 만나보지 못했고, 30년 동안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홀로 대도시에서 살아온 토토는 공허함을 느낀다. 동거인에게 알프레도의 별세 소식을 듣고 그는 드디어 시칠리아로 돌아온다. 이때 그가 탑승한 비행기는 프레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며 착륙한다. ‘현재’인 로마에서 토토의 ‘과거’가 머물러 있을 시칠리아로 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다.
하지만 현재의 시칠리아 마을은 토토가 살았던 시절의 모습과 다르다. 사람들은 늙거나 죽었고, 첫사랑 엘레나도, 스승 알프레도도 그곳에 없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모아주던 극장은 토토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철거된다. 지금의 시칠리아는 토토에게 더 이상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고향’이 아니다. 공동체는 복원될 수 없고, ‘고향’은 그렇게 상실되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예전 그대로의 고향이라는 공간을 복구할 수도 없다. 토토가 느끼는 향수는 해소될 수 없는 감정으로 보인다. 결국 토토는 비행기를 타고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시네마 천국>의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는 이 해소될 수 없는 향수에 대항하여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듯 작중 영사기사로 직접 출연해 알프레도가 유산으로 남긴 검열된 키스신 모음 필름을 상영한다.
텅 빈 좌석들 가운데 홀로 앉은 토토는 스크린을 바라본다. 암전된 극장에서 혼자 빛나는 스크린은 관객에게 그 순간만큼은 현실이 된다. 스크린 현실 위에 서게 된 토토의 시간은 짤막한 필름들의 연쇄에 의해 그야말로 과거로 돌아간다. 영화에 빠져들던 ‘천국 극장’에서의 경험, 영화로 하나 되던 공동체가 공유했던 시간, 영화와 함께 사랑했던 사람들, 그 온갖 유년의 추억들을 재경험하는 순간이다. 그제야 토토는 비로소 진심 어린 눈물과 미소를 지으며 향수에 젖어 들어간다. 알프레도의 필름은 단순히 친구와의 우정만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억이었고, 사랑이었고, 마침내 삶이었던 ‘영화’에 대한 토토의, 그리고 <시네마 천국>을 보고 있는 모든 영화 애호가들의 순정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을 선물하는 매체가 된다.
<시네마 천국>은 내가 영화를 어째서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정치적 힘과 미학에 관한 담론들은 중요한 논의 거리다. 하지만 그런 고상한 논의가 있기 전에, 어쩌다가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관해 말하는 자리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처음 영화에 빠지게 되었던 과거의 한순간, 그 강렬한 경험들을 떠올리지 않는가. 영화 애호가들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순간은 그때일 것이다. 어릴 적 처음 영화에 빠지게 했던 작품들을 암전된 극장에서 지금 다시 본다면, 우리는 분명, 어린아이처럼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볼 때처럼. 그건 단순히 기억의 잔상을 떠올리는 회상이 아니라, 그 시간과 공간에 실제로 돌려놓는 듯한 황홀한 경험이다.
2026. 02. 04.
입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