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비평

: 지도 밖에서 기호를 유희하는 미아케 쇼의 방법

by 문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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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어(말)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 체계에서 독립할 수 있을까? 종종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단상, 감정, 희미한 추억의 이미지, 혹은 경험하지 않은 사건의 상상을 어딘가에 기록하거나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최대한 초기의 생각들이 훼손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옮겨보고 싶게 마련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단상은 몇 개의 단어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채로, 감정은 번역되지 않은 채로, 이미지와 상상은 형상으로 존재해서 그것들을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해당 언어가 요구하는 일정한 문법 체계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옮겨적고자 하는 초기의 내용은 문법에 의해 번역되고, 수정된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언어(말)라는 것, 나아가 우리가 머릿속에 떠돌아 다니는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의 체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란 쉽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영화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쿨레쇼프, 푸돕킨, 에이젠슈테인과 같은 소련 영화인들은 실험을 통해 몽타주 개념 즉 서로 다른 쇼트가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가 생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여러 영화 공정을 통해 특정 장르에 해당하는 일정한 기호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그렇게 오늘날 영화는 영상 언어로서의 문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 즐거움을 느끼게 될까? 문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귀속되는 것이 필연이라고 못 박아버린다면,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것은 피로감을 낳을 뿐,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말하고, 듣고, 봄으로써 이야기에 이끌린다. 이야기의 즐거움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접하는 데서만 비롯되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문법이 반복되는 가운데 의미가 예상과 다르게 배열되거나 미세하게 어긋나는 순간에서 발생한다. 즉 즐거움은 내용의 새로움과 더불어, 기존의 문법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미끄러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말이 문법에 구속되어 수동적으로 변형되는 데서가 아니라, 말이 문법을 직접 유희하는 순간에 우리는 즐거움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미아케 쇼의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주인공 ‘이’가 경험하는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언어와 단순 번역으로부터의 이탈을 가능케 하는 계기이다. 이때 ‘이’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말’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미세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직사각형의 건물들이 빼곡하게 모여있는 일본 도시의 전경을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빈틈없는 도시의 풍경, 그 어딘가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자신이 만들 영화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더러는 피식하다가 노트에 ‘한국어’로 옮겨적는다. 그의 대본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동료 감독에 의해 영상화된다. 상영회를 마친 ‘이’는 일본 대학생들의 질문에 한국어로 생각한 뒤 일본어로 대답한다.


‘이’가 초기에 상상했던 이미지는 [상상 이미지-한국어 대본-일본어-영상 이미지]로 3차 번역되었고, 작품에 대한 해설은 [사유-한국어-일본어]로 2차 번역되었다. 끊임없이 번역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그의 사유는 말과 기호의 문법에 구속된다. ‘말’에 얽매이다 지쳐 슬럼프를 겪게 된 각본가로서 ‘이’는 “말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다시 말로 되돌아온다”고 독백한다.


갑작스럽게 타계한 지도교수의 생가에서 ‘이’는 얼떨결에 교수의 유품인 필름 카메라를 얻게 된다. 이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필름 카메라는 적어도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를 의미 해석이나 번역 이전의 상태인 ‘리얼’로서 간직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데 있다. 독일의 영화 이론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사진의 성향 중 하나로 “사진은 연출되지 않은 현실을 뚜렷하게 선호한다. (…) 자연이 특히 연출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덧없이 쉽게 변화할 수 있는 자연적 형태 속에서인바, 오직 사진만이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시간을 견뎌온 필름 카메라를 통해 ‘의미화되지 않은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필름 카메라는 ‘이’에게 1차 텍스트로서의 언어수단인 셈이다.

*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영화의 이론 : 물리적 실재의 구원』, 김태환 이경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p.57, 2025.


지도교수의 장례식 이후 ‘이’는 눈이 내리는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웬일인지 읍내의 호텔들이 모두 예약자로 꽉 찬 탓에 ‘이’는 숙소를 찾지 못한다. 호텔 직원이 숙박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추천해 주지만 그곳은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은 곳이다. 표시가 안 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도 밖에 있다. 공간과 위치가 의미화된 ‘지도’라는 ‘기호’로부터 이탈한 곳이다. ‘이’의 여로는 점점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마치 이제부터 ‘이’는 일상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깥 세계로의 여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처럼.


늦은 밤 허름한 시골집에 도착한 ‘이’는 무뚝뚝한 집주인 ‘벤조’의 응대를 받고 숙소로 들어간다. ‘벤조’와 대화를 나누던 ‘이’는 숙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보라는 권유를 듣고 ‘벤조’에게 몇 가지 사적인 질문을 한다. 왜 혼자 사는지, 토끼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방 문의 그림은 누가 그렸는지 등. 하지만 그의 질문은 ‘벤조’의 아픈 구석을 건드리는 것들이었고, ‘벤조’는 그런 건 왜 물어보냐며 나무라고 등을 돌린다. 어떤 기억들은 ‘말’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꺼려지고 불편한 때가 있다는 듯 ‘벤조’는 이미지의 번역을 거부한다.


그날 밤 ‘이’는 ‘벤조’에게 “난 끝난 것 같다”며 넋두리를 하더니 그에게 연못에 잉어 양식을 해볼 것을 권한다. 이에 ‘벤조’는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나무라다가, 심심한데 한번 해보자며 ‘이’와 함께 급히 집을 나선다. 어두컴컴한 눈밭과 언덕을 지나 잉어 양식장이 있는 (‘벤조’의 전 부인과 딸이 사는) 가정집에서 잉어 서리를 한다. 숙소로 돌아온 ‘이’는 한밤중의 잉어 서리를 회상하며 근래 이렇게 즐거운 경험은 처음인 것 같다며 미소 짓는다. 필름 카메라도 잃어버리고, 서리해 온 잉어도 꽁꽁 얼어붙어 죽었지만, 일상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건을 경험하고는 그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변환할 수 있을까 상상하며 재미를 느낀다. 목격한 새로운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지 상상하는 것이 그에겐 놀잇감이 된다.


‘이’는 여기서 필름 카메라로, 그리고 본인의 눈으로 직접 경험한 비일상적 사건과 이미지를 직접 본인의 말과 영상 언어로 재구성하면서 기호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엿본다. 중요한 것은 잉어 서리라는 사건 자체가 아니다. 이 사건이 즐거움으로 경험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기존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즉각적으로 의미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말과 영상 언어로 다시 돌아오지만, 그 언어는 더 이상 그를 구속하는 문법이 아니라, 잠시 유희할 수 있는 기호 체계로 전환된다.


‘이’가 여행을 떠나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 ‘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웃으며 여행을 마치고 귀가한다. ‘말’, 즉 기호 체계를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이’는 다시 ‘말’에 구속되는 상태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때가 오면 ‘이’는 다시 기존의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고 기호를 유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날 것이다. 마치 오프닝과 대비되는, 뻥 뚫린 넓은 눈밭에서 자기 발자국을 남기며 마을로 돌아가는 엔딩 씬의 이미지처럼 말이다.


따라서 <여행과 나날>은 ‘여행’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도, 지루한 일상에 즐거움이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그 과정에서 언어와 기호 체계에 대한 유희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유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어떤 조건 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지까지도 사유하게 만든다.


<여행과 나날>의 카메라 시선은 영화가 아닌 사진-카메라처럼 존재한다. 영화 내내 (영화 속 영화의 경우를 제외하고) 카메라는 제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삼각대에 고정된 채로 사물과 인물을 바라보기만 한다. 시선이 움직이는 순간은 패닝을 통해 이미지를 파노라마 사진처럼 담아낼 때뿐이다. 마치 ‘이’가 받은 필름 카메라 같다. 프레임 내에서 조명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자연광과 방 안의 형광등만이 피사체를 밝혀준다. 조명이 약해진 데 반해 음향은 현실의 소리를 그대로 담아내겠다는 양 세밀하게 녹음되었다. 즉, 영화도 쉽사리 이미지를 의미화하지 않는다. 미아케 쇼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들이 의미화되는 순간은 편집을 통해 병렬되는 때다. 이런 정적인 카메라 동선과 그를 통한 이미지의 배열은 영화에 고즈넉한 분위기와 사건의 우스꽝스러움, 그리고 시각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인물의 감정을 첨가해줌으로써 재미를 한껏 높인다. 영화 스스로 자기 문법을 유희하는 순간에라야 찾아오는 재미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사유하고, 상상하는 단상을 외부로 표현하는 데 있어 언어로부터 온전히 독립되어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종종 고통스럽기도 한 기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새로운 사건, 혹은 태도를 갖추는 것이 더 나은 방책일 수 있겠다. 우리가 <여행과 나날>을 다 보았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건, 지도 위 정해진 경로가 아닌 백지 같은 눈밭이다. 중요한 건 그 눈밭 바깥으로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남겨지는 발자국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행과 나날>이, 미아케 쇼가 보여주는 여행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언어가 다시금 구속이 아닌 유희의 장으로 전환될 수 있는 조건을 잠시 확보하는 과정인 것이다.


2026. 02. 02.

마침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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