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피쉬' 리뷰

허풍이 아닌, 삶을 견디고 즐기는 방식

by 문우진
image.png


무수한 사건들과 길고 긴 시간을 거쳐 다다른 삶의 끝자락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는 관계없이 그 끝자락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죽음을 맞이하고 나면 그 후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아마도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기억의 잔상들, 그리고 그 잔상에 기대어 회상하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의 잔상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지난 과거를 회상하던가?


큰돈을 들여 근사한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대개 유명 관광지 앞에서 서로 카메라를 들이밀면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경향이 있다. ‘예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면서 사진을 ‘만든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당시 찍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사진 찍은 기억’만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찍은 사진들의 내용은 ‘사진 찍기’이기 때문이다. 회상에 있어서, 사진은 우리를 과거의 특정한 시점으로 이동시켜주는 매개물일 뿐 그 이미지 자체로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사진을 통한 회상을 완성하는 것은 사진에 찍힌, 혹은 찍은 자들이 구성하는 이야기들이다. 여행 중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말을 나누며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동반자들과 당시의 상황과 사건들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서술하면서 이야기가 형성되고, 그제야 비로소 회상이 이뤄진다.


기억의 잔상은 매개물이자 보충재로서의 이미지 위에 쓰여지는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나온 생애 전체를 돌이켜 볼 때, 이야기로 마땅히 풀 만한 말을 지니지 못한 이미지들만 가득하다면 삶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지금의 나까지 오게 되었음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삶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흥미로운’ 생이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분명히 중요하다.


영화 <빅 피쉬>는 이에 덧붙여서 이야기의 특정 형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는 삶, 그리고 끝내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는 삶의 조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에드워드 블룸(이하 블룸)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들 윌(이하 윌)이 그의 손을 잡고 이야기의 마지막을 완성해 줄 때 마침내 블룸은 옅은 미소와 함께 숨을 거둔다.


그렇다면 블룸은 왜 자신의 이야기를 판타지의 형태로 꾸며 내었을까? 그는 단지 허풍쟁이였던 것일까? 블룸이 있지도 않았던 사건을 스스로 지어내어 부풀렸던 것이라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판타지물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블룸의 장례식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블룸은 분명 자기 이야기에 출현한 인물들을 실제로 만났다. 사실에 기반하여 약간의 허구성을 첨가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블룸이 어째서 구태여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부풀려 왔는지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블룸은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는 자신의 무난하고 평범한 병실에서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처럼 보인다. 마녀의 오른 눈을 통해 어떻게 죽는지를 보았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함께 마녀의 눈을 보았던 친구들은 자기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편, 블룸은 오히려 좋아한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자신이 맞이할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인 상태에서 삶을 온몸으로 즐기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화는 블룸의 이야기를 회상할 때, 공간적으로 ‘더 넓은 세계’로 이주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 시점은 블룸이 찬송가를 부르다 급격하게 몸이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이때 블룸이 있는 공간은 동네의 작은 교회, 그 안에서도 좁은 간격으로 배열된 의자다. 교회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신의 명령에 따라서 삶을 배우는 닫힌 공간이다. 블룸의 몸이 커지는 속도를 교회는 따라잡을 수 없다. 방치된 블룸이 작은 교회의 사이즈에 맞는 존재로 제한되거나, 열린 세계로 탈출하거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결국 그는 교회에서 나와 침대에서 3년을 지내며 자신의 성장 속도에 천천히 적응한다. 백과사전을 읽으며. 교리, 혹은 진리, 지식이 성경 안에 제한되어 있던 블룸은 백과사전을 통해 더 넓은 세계를 간접 경험한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금붕어는) 작은 그릇에 놓으면 계속 작은 상태지만, 더 많은 공간을 주면 두 배, 서너 배로도 자”란다는 것.


거인병이 “자신이 더 큰 공간을 지향하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블룸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존재가 된다. 마을 주민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하는 거인과 저 큰 마을로, 미지의 숲과 유령마을로, 서커스단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로. 그는 마치 유목민처럼 삶이라는 거대한 초원 위에서 탈주선을 그리며 이리저리 떠도는 자가 된다. 블룸은 그 과정에서 맞이한 사람들, 사건들을 자신의 이야기 안에 맥락화하여 판타지 형식으로 승화시킨다. 윌은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나 믿을 법한 것이라며 블룸을 나무란다. 하지만 자신의 생애 전체를 판타지 이야기를 통해 유희한다는 점에서, 블룸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놀이로서 삶을 긍정하는’ 어린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우리는 왜 삶의 기억을 ‘이야기’로 만드는가? 잔상일 뿐인 기억의 이미지들을 모아 사건으로, 사건을 이야기로, 끝내 그 속의 나를 회상하고 간직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가? 블룸은 판타지를 선택했고, 부풀려진 이야기들로 자기 삶의 기억을 유희하며 살아냈다.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를 가지고 삶을 놀이할 수 있을까? 그건, 우리 각자의 몫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미드나잇 인 파리'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