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잔상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건 과학적으로 정의된 시간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심정적으로, 동시에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 난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제는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뉜다. 과거, 현재, 미래. 과거는 지나간 사건들이 응집된 시간이다. 미래는 아직 내게 닿지 않은, 곧 내 육체를 뚫고 지나갈 미지의 시간이다. 과거와 미래는 그렇게 정의-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시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금은 과거가 된다. 피부로, 눈으로, 코로, 귀로, 입으로 당장 느낀 한 시점을 얘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즉시 과거다. 현재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실 현상(現狀)이 아닌 잔상(殘像)이다. 현재를 현재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애매한 ‘현재’에 대해 우린 잔상의 앞(과거)와 뒤(미래)를 정해 하나의 구간으로 규정함으로써 논쟁의 여지를 줄인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건 과거와 미래이며, 그중에 ‘실존’하는 것은 과거뿐이다. 현재란 없다.
그래서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의심해보는 것이다. 우린 과거만을 추억하면 후회와 미련이 되고, 미래만을 기대하면 지금의 나에 대한 학대가 된다는 생각에 현재를 즐기라는 말을 위안처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앞서 말한 내 생각에 맞춰서, 난 다르게 말해본다. 우린 언제나 추억하고 있는 것이라고. 현재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 끊임없이 나를 통과한 시간들을 그 즉시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추억해보려는 발버둥이라고.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현재라고 불리는 특정 구간의 시간을 추억해서 마침내 ‘찬란했다’고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즉시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의 잔상에는 기분 좋은 상태와 더불어 고통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한 시대가 ‘행복하기만 했다’고 말하려면 그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여야 하거나, 애초에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할 정도로 나중의 한 세대가 되어야 한다.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메달을 많이 딴 시기에 살고, 자국의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자국 영화감독이 해외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다니고 있어도 대한민국의 현시대가 마냥 행복하고 찬란한 시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배가 침몰하거나, 유명 번화가에서 참사가 일어나는 모습을 목격했고 역대 가장 심한 시민 간 갈등의 현장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잔상들과 함께 고통스럽고 참담한 잔상도 함께 경험 중이다. 그러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관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현대에 대한 낙관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린 언제나 지난날들, 특히 시대의 고통의 잔상이 사라진 과거를 끊임없이 추억하고 갈망하게 된다. 일본은 2000년대 초중반,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여러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어른제국의 역습’ 등이 그렇다. 미국은 황금시대, 재즈 시대를 추억한다. 그러니까, 현재의 고통스러운 잔상 때문에 머나먼 과거를 추억하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디 앨런은 이런 류의 비관론을 예술에 적용하여 영화로 풀어냈다. 순수 예술이 힘을 잃어가고, 현학과 허영이 판치는 시대에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이 전성기를 이루던 1920년대를 갈망하는 길 펜더에 공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길 펜더가 1920년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시대적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황금기였다고 결론지어진 시대이니 당연히 그 시대를 추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를 사는 아드리아나도 길 펜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대를 혐오하며 ‘벨 에포크’를 동경한다. 그녀는 황금기라 불리는 시대의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 시대에서 벗어나 제 생각에 가장 찬란했던 시대라고 인식되는 과거를 추억하고 갈망하고 동경하는 것이다.
영화도, 나도, 길과 아드리아나의 현세에 대한 비관적 태도와 과거 황금기로의 회피를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창작과 비평은 도덕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행해지지 않는다. 그저 자기 세계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들의 소박한 작업일 뿐이며, 따라서 이 글은 우디 앨런과 내가 느끼는 비관론과 과거에 대한 갈망이 거의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고 고백하는 중인 것이다. 이쯤에서 묻는다. 당신이 동경하는 시대는 언제인가? 당신의 시대는 온전히 찬란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