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바덴의 기억
겨울 초입에 들어선 독일의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2009년 11월 3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라이부르크로 가는 길이었다. 을씨년스런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안내를 맡은 현지 가이드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속도계가 200km를 넘나들었다. 속도 무제한이라는 아우토반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다. 우리가 탄 차는 조금 낡았지만 앞 보닛에 벤츠 특유의 삼각별 모양이 선명했다. 모든 조건이 과속하기에 딱 좋았다. 그래도 그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음을 졸이며 몇 마디 던지긴 했지만,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고 있는 주변의 검은 숲을 보며 달리는 기분이 그리 싫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점심이나 먹자면 멈춘 곳이 바덴바덴이었다.
독일의 유명한 온천도시인 바덴바덴은 이름 그 자체가 온천을 의미한다고. 인구 5만이 조금 넘는 이 도시는 3세기 로마의 요새로 건설된 뒤 파괴와 재건 과정을 거쳐 19세기 유럽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도시의 역사가 1,700년이나 되어 오래된 유적들이 적지 않지만, 도시 자체는 잘 꾸며진 유럽의 여느 소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가량 앞둔 시기였지만, 거리는 이미 성탄절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바덴바덴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거리로 나가보았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도시의 길들도 벽돌 크기의 돌들로 촘촘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약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날씨도 쌀쌀해 천천히 도시를 음미하며 걷기는 부담스러웠다. 상가가 늘어선 큰 도로 뒤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 주택가로 들어갔다. 우리네 옛 동네 마냥 좁은 골목길에 간간히 눈에 띄는 작은 간판들이 걸려 있었다. 외국이라 더 예쁘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예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좁은 골목길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길에서 큰 도로로 나가는 모퉁이에서 서점의 작은 창을 만났다. 대리석 계단을 기대고 있는 노란 벽과 노란 백열등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은, 서점의 책장과 어우러져 비 내리는 차가운 날씨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낙서하듯 붉은 선으로 그린 하트는 이 따뜻한 풍경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서로 다른 세상처럼 보일 수도 있는 서점안과 밖이 커다란 하트 하나로 서로 묶여 있는 듯 보였다.
머문 시간은 불과 두 시간 남짓.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바덴바덴의 기억은 강렬하다. 그것은 아마도 이 한 장의 사진 때문일지도 모른다. 계획에도 없었고 지나가리라 생각지도 않았던 도시에서의 두 시간. 내게는 그런 도시가 또 하나 있다. 광저우다.
광저우는 칭다오에서 호찌민으로 가는 길에 들러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도시였다. 그 도시에서의 하루는 기상악화로 비행기를 놓치면서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광저우에서의 하루는 바덴바덴에서의 두 시간만큼이나 멋진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는 계획에서 벗어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바심을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살다보니 그렇게 계획에서 벗어나 우연찮게 찾아오는 기회들이 훨씬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추억되고는 한다. 그러니 뭐 어떤가? 오늘 물 좀 먹었지만, 그로 인해 더 괜찮은 내일이 찾아올지. 별로 멋지지도 않고 마음까지 상한 오늘, 사진 한 장으로 위안 받으며 그렇게 스쳐가듯 만날 내일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