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은 세월을 덮고

해미읍성의 노을

by 이우형
해미읍성 일몰-140315.JPG 해미읍성 안에서 맞는 일몰은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한 느낌이다. 정문인 진남문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과 동헌 앞 느티나무 사이로 지는 해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성곽은 도시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성(城)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숱하게 많은 성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는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산성(山城)을 지역마다 축조해 전란에 대비했다. 중부 이남에 남아 있는 산성터만 1,200개가 넘는다고 하니, 어느 고장이든 산성 몇 개쯤은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중국의 성이 대부분 평지에 지어진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성은 산성이거나 평지와 산이 이어지는 평산성(平山城)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평지성(平地城)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 때부터 주요 지방 도시에 건축되기 시작한 읍성(邑城)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해안지역에 있는 마을 대부분에는 읍성이 존재했다고 한다. 사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최대 104개의 읍성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읍성은 조선말까지 원형을 유지한 채 이어져 왔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1910년 내려진 일제의 ‘읍성철거령’이 그 원인이다. 하지만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읍성들이 남아 있다. 마을주민들이 옛 모습을 간직하며 사는 순천의 낙안읍성이 대표적이다.

반면 해미읍성은 성곽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읍성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해미읍성 내에 민가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성곽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1970년대 들어 민가와 시설들을 모두 철거한 탓이다.

해미읍성을 찾은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계기는 그랬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아주 오래전 가 본 순천 낙안읍성의 기억 탓이기도 했다. 성곽 안에 옹기종기 지어진 민가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었었다.

해미읍성도 그런 기대를 안고 찾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내 깨졌다. 성곽의 보존 상태는 좋았지만, 내부는 넓은 공원의 분위기였다. 옥사, 동헌 정도의 건물, 그리고 전시용으로 남아 있는 몇 채의 민가는 썰렁한 느낌을 풍겼다.

과거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충청병마절도사가 근무하던 군사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열 달 정도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해미읍성은 천주교와도 관계가 깊다. 많은 천주교인이 잡혀 와, 이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했던 장소다. 옥사 앞 회화나무에는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14년 8월 해미순교성지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폐회 미사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집전하기도 했다.

해미읍성 안에서 맞는 일몰은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한 느낌이다. 정문인 진남문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과 동헌 앞 느티나무 사이로 지는 해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해미읍성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나무가 있다. 옥사 앞 회화나무와 동헌 앞 느티나무가 그 주인공들이다. 가끔 이 두 나무를 비교하는 글을 읽을 때가 있다. 1,000여 명이나 되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진 박해를 함께 겪었던 회화나무와 지배계층, 관리들의 풍요와 영화를 함께 누린 느티나무의 삶이 비교된다는 그런 의미의 글이다.

나무의 삶에서 인간들의 희로애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저 지난 세월 인간들의 욕심이 빚은 갈등과 증오를 잊지 말자는 사람들의 의인화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나무에 빗댄 의인화를 떠나, 이념이나 신념의 결과로 생겨나는 증오와 그로 인한 비극은 늘 곱씹어 봐야 할 문제이기는 하다. 세계사에, 우리 역사에, 그리고 과거부터 지금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로 인한 비극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념과 신념도 사람보다 먼저일 수는 없다.

해미읍성의 시간은 무수한 세월을 덮고 아름답고 조용한 모습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의 한 자락을 나누었던 회화나무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되어 서산시의 관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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