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이 떠난 자리에 남은 편안함

덕평휴게소의 겨울밤

by 이우형
해가 짧은 겨울 초저녁의 덕평 자연 휴게소를 15mm 광각렌즈로 촬영해봤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재미있는 사진이 됐다.


“여기도 들렀다 가요.”

“바로 앞 휴게소도 들렀잖아.”

“고속도로 가면서 길목에 있는 휴게소는 모두 들러 봐야 예의죠.”

“그렇게 일일이 들러 뭐할 건데?”

“그냥 어떤 가 구경이나 하는 거죠. 앞 휴게소와 뭐가 다른 지도 보고…….”

“그러셔. 뭐 시간 여유도 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90년대 중반쯤 지방으로 출장 가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직원 중에 유독 휴게소 나들이를 즐기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 출장을 가면 바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휴게소를 모두 들렀다 가곤 했다.

당시 지방을 얼마나 많이 다녔냐 하면, 한 달 평균 꼬박 5,000km를 찍었었다. 회사차로 출장을 다니다가, 첫 차를 구매했는데 1년 뒤 총 주행거리가 6만 km였다. 거의 길 위의 인생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고속도로 휴게소는 무척이나 익숙하고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1990년대의 휴게소는 어딜 가나 비슷했다. 지역에 따라 판매되는 주요 생산물이 바뀌는 정도만 차이가 났다. 식사도 대부분이 자율배식 형태였다. 물론, 이 자율배식 반찬도 휴게소마다 맛있는 것들이 있었고, 꽤나 괜찮은 음식을 파는 곳도 더러 있었다.

요즘 휴게소는 도로공사에서 직접 운영하지 않고, 임대를 한 곳이 많다. 입점 업체들도 도심의 푸드 코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판기 커피가 아닌 브랜드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유명한 맛집의 분위기를 느끼며 식사도 할 수 있다. 또 쉬면서 쇼핑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러한 휴게소의 변화를 가장 격하게 느꼈던 곳이 바로 ‘덕평 자연 휴게소’였다. 일하던 영역이 전국에서 경기도로 줄어들면서, 자주 가게 된 이천과 여주 방문 후에는 꼭 들리는 휴게소가 됐다.

덕평 자연 휴게소가 문 연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여주를 갔다 오는 길에 간판 속 ‘자연’이라는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궁금한 생각에 들어갔는데, 이건 휴게소가 아니라 자그마한 쇼핑타운과 다르지 않았다. 공사가 덜 끝났지만 넓은 정원이 있고, 크고 깨끗한 화장실에, 각종 의류를 파는 매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영동고속도로를 탈 때면 꼭 방문하게 되는 단골 휴게소가 됐다. 처음에는 상행선에서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후 하행선에서도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가고 올 때 모두 들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상행선이 생긴 것은 2007년이었고, 하행선은 2009년에 완공됐다. 상하행선 모두 같은 휴게소를 이용한다. 이곳에는 애견인들을 위한 공간이 있고, 다수의 스포츠 브랜드가 입점해 있으며, 다양한 음식점도 들어서 있다. 여기서 팔리는 소고기국밥은 2014년 37만 그릇, 2016년 60만 그릇이 팔려 전국 휴게소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메뉴로 등극했다.

무엇보다 휴게소가 목적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곳이 덕평 자연 휴게소다. 일반적으로 휴게소는 목적지로 가는 도중 들리는 일방통행 길이지만, 덕평 자연 휴게소는 휴게소 안에 회차로가 있다. 휴게소에서 볼일만 보고 되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덕평 자연 휴게소 이후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들은 점차 비슷한 모양으로 변해갔다. 가끔은 옛날 휴게소의 느낌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지방 출장이 뜸해진 지금 생활공간과 친숙한 느낌을 주는 요즘 휴게소의 분위기가 그리 싫지만도 않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휴게소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많이 무뎌졌다. 고속도로의 수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목적지로 가는 시간도 짧아졌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진주를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를 거쳐 국도 수준의 구마고속도로를 타야 했다. 그리고 마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갈아타야 진주에 갈 수 있었다. 편도로 무려 6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금은 통영 대전 고속도로를 타면 대략 4시간 안팎이면 도착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 무인카메라가 많아진 것이 함정이기는 하지만.

빨라진 고속도로에 휴게소마저 비슷해지다 보니, 요즘은 휴게소가 말 그대로 잠시 쉬어가는 곳이 됐다. 덕평 자연 휴게소도 자주 가다 보니 예전의 감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어디를 가나 친숙한 분위기라 설렘 대신 편안함이 자리 잡았다고나 할까.

그래도 가끔 휴게소가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멋질 때도 있다. 어느 겨울 저녁 덕평 자연 휴게소의 뒷 정원은 빈 테이블과 가게의 불빛만 남아 검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도심의 어디 인양. 웬일로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가 얼마나 고맙던지. 그저 눈으로, 입으로 즐기던 휴게소를 마음으로 즐긴 짧은 겨울 저녁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박제된 시간 너머 삶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