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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YB Oct 05. 2023

이상의 이상, 그 이상의 시

오감도 시 리뷰


이상의 오감도는 워낙 유명하고 교과서에도 등재되어 있어 이미 한참이나 전에 알았고 보았었지만 그 뜻이 와닿았던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날아다니는 새가 아래를 조망하는 광경을 가정하여 새의 시선에서 보일만큼 넓은 범위의 지형과 건물, 거리를 자세하게 그린 그림을 조감도라고 한다. 오감도는 새 '조'자 대신 까마귀 '오'자를 넣어 표현한 단어이다. 간단히 풀이하자면 '까마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그러고 보니 연작으로 이루어진 시인 오감도는, 각 시마다 추상화를 셀 때쓰는 단위인 '호(Composition)'가 붙어있다. 또한, 이상의 미발표된 편지에서도 자신이 지은 시의 개수를 헤아릴 때 이천점, 이십 점과 같이 '점'이라는 그림을 셀 때 쓰는 단위를 사용한다.


왜 시를 그림처럼 표현했을까? 오감도라는 시는 낭송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바라봐야 하는 그림에 가까운 형태이기 때문이다. 의례 시인들이 낙엽 하나, 꽃 한 송이에 주목하여 섬세한 표현으로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밀한 시선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에 반해 이상은 오히려 사물로부터 멀어져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단순화, 추상화한다. 추상화는 특정 대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중점에 두고 있지 않다. 추상화의 한 부분, 한 부분이 무엇을 그린건지 정답을 맞히기 위해 추상화를 감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단순화, 추상화된 그림으로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그의 관점으로, 그림을 바라보듯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이 <오감도>라는 시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라고 하면 보통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표현하거나, 시조를 읊거나, 낭독하는 등, 시에서는 그 시가 가진 운율과 시간성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상의 시는 읽을 수조차 없는 작품이 다수 있다. 시를 운율이 강조된, 시간에 종속된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공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지향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봤다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어쩌면 그는 건축학도의 시선에서 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담으로 이상은 어릴 때부터 그림의 특출 난 재능이 있었으며 화가의 꿈을 꿨었다고 한다. 어쩌면 엘리트 건축학도, 폐결핵 환자로 살았던 이상이 간직했던 화가에 대한, 그림에 대한 열망이 시를 통해 표출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감도는 연재 당시에도 "파격적이고 난해하다", "이건 시에 대한 모독", "미친 것 아니냐"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결국 수많은 안티들의 반대에 밀려 연재를 중단하고 말았다. 연재 중단에 대해 이상이 작성한 미발표 소감문에서 그는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남들보다 수십 년씩이나 뒤처져있어도 마음 놓고 있을 작정이냐, 내 시가 난해한 것은 나의 표현부족도 있겠지만, 너희들이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있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헤이러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생각 좀 해보라고 어렵게 시를 지었는데 왜들 그렇게 생각하기 싫어 어렵다고 난리들이냐는 것이다. "시 몇 점 찌끄리고 나 시인이요 하는 패거리들과 난 격이 다르다. 2000점의 시에서 30점 고르는데도 땀을 흘렸다."며 자신의 시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확실히 그는 우리의 의식 수준을 극단적인 방향을 제시하여 끌어주는 유일무이한 시인임이 분명하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오감도에서 가장 유명한 시 제1호에 대한 해석중 가장 공감되는 것과 나의 생각을 더해서 이 시를 풀어보고자 한다.


오감도(烏瞰圖) ㅡ 시 제1호

_ 이상 시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


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 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 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 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 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 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오감도 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누구나 난해함을 넘어 두려움, 무서운 감정이 든다고 말한다. 흔히 두려움이란 감정은 잘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기는 감정이라고들 하는데 아마 그의 시가 자주 보던 느낌의 시가 아니라 더욱 두렵고 낯선 마음이 든 것이라 예측된다. 이 시에서는 운율과 리듬감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창작자의 의도도 다분하게 들어있을 것이다.

불길함을 상징하는 까마귀, 막다를 골목, 13이라는 숫자, 연이어 반복해서 나오는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는 표현, 이 모든 것이 긴장되고 무서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클루지를 발동시키는 장치이다.


놀랍게도 학생들이 이전에 읽은 단어들이 그들의 걸어가는 속도에 영향을 미쳤다. 모든 학생이 저마다 볼 일이 있고 갈 곳이 있었을텐데, 유독 '은퇴한', '플로리다' 같은 단어를 정돈했던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천천히 걸었다.

실험 결과 '교수', '지적인' 같은 단어를 미리 접했던 사람들은 '축구장', '난동꾼', '어리석은'같이 덜 고상한 표현을 접했던 사람들보다 지적인 과제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렇게 볼 때 농구선수들이 상대팀에게 퍼붓는 온갖 험담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른다.
-클루지


오감도가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무섭게 여기는 요소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무섭거나 불길하거나 공포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이 시에 나오는 아이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 시가 까마귀의 시선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풍경임을 감안할 때에,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진짜 '아이'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멀리서 내려다보면 아무리 큰 어른도 아이처럼 작아보이기 마련이다. 이 시에서는 오직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만 모여있다. 과연 누가 무서운 아이고 누가 무서워하는 아이일까? 명확한 정답은 내릴 수 없지만 이 시에서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동시에 서로 무서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무섭다는 말이 그 주체인 아이를 서술하기도 하고 대상화하기도 한다. 누가 무서운 아이고 누가 무서워하는 아이일까? 이에 대한 답은 모든 아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왜 질주하고 있으며, 왜 무서워하고 있을까? 13인의 아이들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고 거기서 보이는 막다른 골목이 이 시를 보는 우리로 하여금 급박함을 느끼게 한다. 끝이 보이는 막다른 길을 향해 질주를 하는 모습은 서로를 경쟁하고 의식하며 마구 내달리는 것으로도 보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쫓고 쫓기는 광경으로도 보이고, 두려운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피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칼라하리 사막에 무리 지어 사는 스프링 벅이라는 사슴이 있다. 수만 마리 떼를 지어 사는 스프링 벅은 많은 무리 속에서 들판의 풀을 뜯어먹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한다. 좁은 환경에서 처음엔 맨 뒤의 몇 마리 스프링 벅이 앞에 있는 몇 마리를 밀게 된다. 그러면 그 앞에 있는 스프링 벅이 또 그 앞에 있는 몇 마리를 밀게 된다. 맨 뒤부터 시작되어 도미노처럼 서로 밀어대는 스프링 벅은 뒤에서부터 서로를 밀치면서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무리가 다 함께 무한질주하게 된다. 마구 달리다가 설령 눈앞에 절벽이 있더라도 달릴 수밖에 없다. 멈추면 뒤에 달려오는 다른 스프링 벅들에 의해 깔려 죽고, 이대로 계속 달려도 결국 절벽에 떨어져 죽는 진퇴양난의 상황인 것이다.


처음 달린 것은 공포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린다는 사실 그 자체가 공포가 되어버렸다. 초원 위의 스프링 벅처럼 아이들은 그렇게 공포 속에서 내달리게 된다.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본 까마귀가 보는 세상, 그것이 오감도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면서도 막다른 골목이 나올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채찍질하며 달리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립하고, 갈등을 만들어내며, 질시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불안감, 공포감 때문에 우리는 도로로 질주하고 있다. 마치 죄수의 딜레마처럼 서로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비극을 초래하는 결말로 달려가는 열차에 적대감과 경쟁의식, 공포라는 장작을 마구 밀어 넣는다. 이대로 멈추면 밟혀 죽어버릴 것만 같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무시무시한 혼돈 속에서 질주하고 있다. 너무 빠르다고 말하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이 상황에 대해 내려다보고 있는 까마귀는 생각한다. 달리는 곳이 막다른 골목이 아닌 뚫린 골목이라도 괜찮다. 즉, 끝이 없어도 괜찮다. 어딘가에 다다르지 않아도 좋다. 그들을 막는 막다른 골목이 없는 곳에서, 그 끝없는 도로에서 자유롭게 달려도 좋다.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천천히 달려도 괜찮다. 아니, 달리지 않아도 좋다.


또 한 가지, 까마귀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해 쓰고 싶다. 흔히 까마귀는 불행, 죽음을 상징한다. 시를 집필할 당시에 치료법이 나와있지 않은 결핵이라는 병을 앓으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로 죽음과 가까이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이상. 아마도 까마귀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상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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