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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Jan 25. 2020

1월, 용기가 태어나는 곳

타인의 심장 <헝거>

“내가 이제껏 겪은 일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내 몸에 남겨져 있다.”


성공에 대한, 거창한, 기대에 부응하는, 선망 받는 이야기의 정반대편에 이 이야기들은 있습니다. 그것은 발을 헛디딘, 무시되기 십상인, 수치로 묻어두었던, 예기치 못한 시커먼 구멍으로 독자를 던져 놓는 이야기들입니다. 흑인 여성으로, 성폭력 생존자로, 게다가 ‘거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섬뜩한 가시들로 몸을 그으며 가는 일인지를, 흉터 속으로 독자의 손을 쑤욱 끌어넣어 알게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불편함을 견뎌보겠다는 각오가 있더라도, 마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어떤 부분이 영영 죽어버렸다거나, “여전히 이 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고 털어놓는 누군가의 천진할 정도의 솔직함에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법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고, 충분히 강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극복해야만 할 것, 극복한 뒤에야 과거완료형으로 말할 만한 것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 어떤가, 흉터들 위에 화장품을 덧바르고 당당한 척 하는 대신, 흉터들에 남겨진 이야기의 파편들로, 갈기갈기 찢긴 듯한 삶을 이어보느라 멈추고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만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어내며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용기를 주었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된 이유일 것입니다. 어쩌면 언어 자체가 상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야기란 나 역시 당신처럼 살아남고자 한다는 용기를 나누려는 의지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그 용기의 기원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담아내어, 결국 언어라는 매개를 넘어 몸과 몸이, 멀리 있는 삶과 삶이 맞닿게 한다는 것을 이 책은 가르쳐줍니다.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이 순간에도 나는 간절히 바란다. 나에게 결단력과 의지력이라는 자질이 있어서 당신에게 승리의 이야기를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실은 지금도 계속 그러한 결단력과 의지력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이 몸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내 몸이 견뎌온 그 모든 것, 내 몸이 되어온 것 이상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그 다짐이라는 녀석은 나를 그리 멀리 데리고 가지 못한다. 

이 책을 쓰는 건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나의 가장 추하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헐벗은 부분을 드러내겠다는 말이다. 나에겐 이런 진실이 있다고 털어놓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내) 몸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내 몸과 같은 몸의 이야기들은 무시되거나 묵살되거나 조롱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몸과 같은 몸을 보고 쉽게 단정해버린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몸이 되었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들은 모른다. 나의 이야기는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말해야만 하고 더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다.(22~23)


이 책은 내 몸에 관한 고백이다. 내 몸은 망가졌다. 나도 망가졌다. 그 전으로 어떻게 다시 되돌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 안의 일부는 죽었다. 내 안의 일부는 침묵했고 수년 동안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내 안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나는 그 빈 공간을 메우기로 작정했고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내 주변에 방패막을 만들기 위해 내가 사용한 도구는 음식이었다. 나는 먹고 먹고 또 먹으며 나 자신을 크게 만들고자, 내 몸을 안전하게 만들고자 했다. 과거의 나는 묻어버렸다. 그 소녀는 온갖 종류의 말썽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녀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노력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작게 웅크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모멸감에 몸부림치면서 그 자리에 있었고, 어쩌면 나는 어린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때 반드시 들어야만 했던 그 모든 이야기를 지금이라도 해주려고 말이다.(39~40)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폭력이건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폭력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신에게 폭력을 행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 곁에 남을 수도 있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완전히 낯선 이에게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 당신은 너무나 끔찍한 방식으로도, 너무나 친밀한 방식으로도 폭력을 당하고 해를 입게 될 수 있다. 

굳이 내 이야기를 공유하려는 이유는 폭력의 역사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 개인의 폭력의 역사를 말하기는 주저했으나 그 역사는 지금의 나라는 인간, 내가 쓰는 글의 내용, 내가 글 쓰는 방식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가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내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나를 사랑하도록 허락했는지를 알려준다. 폭력의 역사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58~59)


나는 나를 싫어한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내가 나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내 생각에 적어도 내가 이것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몸을 싫어한다고.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사람들이 내 몸을 훑어보고 내 몸을 대하고 내 몸에 말을 보태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싫다. 내 몸을 내 사이즈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중략)

나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다. 내 외모를 바꾸고는 싶다. 기운이 좀 있는 날에는, 투쟁심을 발휘하여 세상이 나의 외모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짜 문제는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운이 없는 날에는, 내 인격, 즉 나라는 사람의 본질과 내 몸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 잊어버린다. 이 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173~174)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11월부터 멈포드의 서재는 동네 서점 '니은서점'@book_shop_nieun과 함께 엽니다. 3개월간 진행하는 시즌 1의 주제는 '타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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