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68, 남자친구 말고 나한테 하는 말
코로나로 여행은커녕 동네 카페를 가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요즘, 드레스 투어 때문에 휴가를 냈다.
회사에서는 요즘 같은 시기에 휴가 써서 뭐하느냐고 했지만, 그저 허허 웃으면서 조용히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코로나 때문에 드레스 투어 인원이 제한되어서, 엄마와 남자친구와 나 셋이서만 갔다. 우리 셋 다 호불호가 강하지 않아서 무조건 다 예쁘다고만 할 것 같았기에, 미리 거듭 적절한 리액션과 피드백을 부탁했다.
(1) 초반에는 무조건 예쁘다고 환호하는 리액션 (제일 중요)
(2) 드레스 라인과 재질, 전체적인 느낌 확인하면서 그림 그리기
(3) 마지막으로 만족도, 드레스 상태, 나에게 어울리는 정도를 점수로 표시하기
이 세 가지 모두 꼭 지켜야 한다고 드레스 투어 전날에도, 샵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드레스를 입으러 피팅룸에 들어가기 전에도 거듭 부탁했다.
그 덕분인지 처음 드레스를 입고 커튼이 열렸을 때, 엄마와 남자친구는 (조금 부끄러울 정도로) 열렬히 환호해줬다.
"와~~!!!!!"
엄마는 마치 유치원 재롱잔치에 나온 딸을 보는 것처럼, 아니면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 선수로 나온 딸을 보는 것처럼, 박수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리액션을 너무 여러 번 강조하고 부탁했던 걸까 싶어서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내 딸인데 너무 예쁘다~" 말해주니 고맙고 든든하고 기분이 좋았다.
남자친구도 마스크 너머로 "오~" 하는 입모양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어주고 열심히 그림 그려주는 모습에, 정말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즐겁고 행복했다. 피팅을 도와주시는 샵 직원 분들도 (진심인지 영업 멘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입는 족족 드레스가 다 잘 어울려서 고르기 어렵겠다며 끊임없이 칭찬을 해주셨다.
처음에는 나에게 쏟아지는 칭찬들이 마냥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는데, 점점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나도 나 자신이 예뻐 보였다. 조금만 더 팔뚝 살을 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는 했지만, 평소 나랑 안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 스타일들마저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뿌듯하고 자신감도 생겼다.
드레스 라인, 소재, 넥 라인, 비즈인지 레이스인지에 상관없이 입는 족족 다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분명 드레스 자체가 예쁘고 샵에서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골라주신 덕분이겠지만, 평소 스스로 자신 없었던 스타일들까지 소화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굉장히 설레는 느낌이었다.
드레스 투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면서 어떤 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야기하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근데 나 오늘 되게 예쁘지 않았어?"
사실 돌아보면 엄마도 남자친구도 평소에도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해줬었는데, 들을 때마다 "에이, 난 아냐~"라는 생각이 있었다.
집에서 운동할 때마다 자세도 좋아지고 몸의 균형도 잡히는 것 같다고, 데이트를 할 때마다 예쁘다고, 그렇게 수도 없이 칭찬을 들었는데, 내가 나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다.
내가 세운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아서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칭찬해주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도 거의 못 들은 척했다.
사실 이건 단지 외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자세, 직장에서의 역량, 좋은 관계, 똑똑함 등 여러 부분에서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분명한 사명이 있어서 모든 순간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하고,
단순히 돈뿐만이 아니라 남을 돕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일을 해야 하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넉넉하게 품을 수 있고,
끊임없는 배움으로 속에 내공이 꽉 찬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삶이 무기력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직장에서 번듯한 역할을 못한 것 같을 때, 내 인맥이 좁다고 느껴질 때, 어느 것 하나 전공분야 없이 멍청한 것처럼 느껴질 때, 나 자신이 위축되고 부끄럽고 싫었다.
특히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자꾸만 남자친구에게서 보일 때에는 아주 옹졸한 마음으로 남자친구와 나를 비교하며, 나 자신이 뒤쳐지는 것처럼 느껴져 나를 탓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 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며, 그동안 칭찬해주지 않았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 자신에게 끝없이 완벽주의를 강요했고, 그렇기에 자신감도 부족하고 나를 계속 채찍질하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다니 참 대단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그저 무식하고 우직하게 엉덩이 싸움을 했을 뿐 똑똑한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평소 가고 싶어 하던 좋은 직장에 들어가다니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면,
'지금 막상 직장에서 하는 일은 잡일이고 그렇게 멋지지도 않아'라며 투덜거렸다.
나는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사람이기에, 전문성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똑똑함도 없고 의욕도 없는 사람이라고 나를 깎아내렸다.
내가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던 것, 아주 최고는 아닐지라도 보통의 남들보다 충분히 잘하고 있는 부분은 아예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칭찬도 인정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또 한편으로는 '평소 두려워서 안 입던 오프숄더도 막상 입어보니 나에게 참 섹시하고 예쁘구나' 생각이 들자, 평소 내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상적인 모습이 이미 나에게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멍청함이 들통날까 봐, "좋은 대학 나왔다더니 별거 없네"라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서 시도조차 못했을 뿐이지, 막상 해보면 뭐든 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을 이어나가서 금융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것도, 그 지식들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직장에서 아직 해보지 못한 새로운 직무를 맡는 것도,
내 생각과 마음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도,
내가 아직 제대로 안 해봐서 그렇지 해보면 역시나 잘할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앞으로는 드레스 입었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나 스스로를 칭찬하고 인정해주고 싶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고,
좋은 모습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아름답고,
두렵고 어려울 것 같은 것들도 막상 부딪혔을 때 그것을 잘 해낼 충분한 능력이 있다.
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나의 가치에 대한 인정과 칭찬, 발전과 성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조금 더 성숙하고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