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이 취향이 도시의 속살로 직행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백 가지쯤 되는데, 1번부터 100번까지가 모두 '눈'이다. 눈에 대한 나의 마음이 그렇게 온전하고 순전하다. 눈이 왜 좋냐면 희어서, 깨끗해서, 고요해서, 녹아서, 사라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난 횟수를 차곡차곡 세어가듯이, 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센다. 첫눈, 두 번째 눈, 세 번째 눈...... 열한 번째까지 셀 수 있었던 해는 못내 아름다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서름한 빛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 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 보다가 문득 이런 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을 발견한 듯 벅차다.
나는 홀린 듯 집을 나선다.
눈이 더 쌓였을 것 같은 길을 부러 골라, 머리카락과 뺨과 발목이 젖도록 걷고 또 걷는다. 나를 불러낸 것은 어떤 빛나는 얼굴이었지만, 걷는 것은 오롯이 나다. 곁에서 걸음을 맞추어 걷던 얼굴이 지금의 설경 위에 거듭 나타나도록, 나는 기억의 환등기를 비출 뿐이다. 그러니 이 산책은 멈추고 싶지 않아 멈춰지지 않고, 나는 기쁘면서도 자꾸 울상이 되고 만다.
숲 어구에 닿을 때까지 인적은 없고, 세상은 점점 더 창백해진다. 내 입술 안에서는 그와 나눴던 말들이 고스란히 되풀이되지만,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그 말들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데시벨보다 낮은 소리가 사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은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 밤이 동시에 있다.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아무 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거대해서 오히려 하찮아진다. 그런데 그 마음을 페소아는 다르게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
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텅 비워진 공간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슬퍼하던 시인은, 그 공간으로 시간을 데려오기도 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내가 잃은 것도 내 안에 존재한다는 초월적인 시간에 바쳐진 마음은 이제 우주보다 더 커진다. 그렇게 커진 마음은 더는 허무하지 않다. 수만 년 전에 죽은 별처럼, 마음속에 촘촘히 들어와 빛나는 것이 있어서이다.
숲 안쪽 어디에서 큰 짐승의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을 부르는 것인지 그저 나처럼 눈이 내려 기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방해가 될까 봐 나는 거기에서 걸음을 돌린다.
아끼는 영화에, 단짝인 두 소년이 밤에 만나 유성우를 기다리는 장면이 있다. 한참 만에 창밖으로 별이 끝없이 떨어졌고, 둘은 번갈아 감탄하며 지켜봤다. 그런데 나중에 한 소년이 다른 소년을 잃고 추모사를 읽는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 보이는 척하며 웃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어깨에 온통 눈을 쓴 채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 말을 가져다 허공에 건넨다.
'혼자 걸었지만 같이 걷는 척 웃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환등기를 끈다.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 눈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p14_시와 산책_한정원
존 외삼촌은 파충류에 대한 관심이 굉장했으며 집 뒤쪽 숲에 사는 개구리, 거북, 뱀을 무척 좋아했다. 존은 열 살 때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 습지의 악어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방송을 보았다. 자신의 소명을 찾은 것 같았다. 어른이 되면 악어를 연구하고 구조하는 것을 업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그는 결국 악어 보전을 전문으로 하는 파충류 학자가 되었다.
악어는 지구상에서 7000만 년 넘게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진화사는 2억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악어는 지반 운동과 빙기에 적응했다. 6600만 년 전 (과학자들 말마따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여 공룡을 비롯하여 전체 생물권의 4분의 3 가까이가 멸종한 다섯 번째 대멸종에서도 살아남았다.
존이 파충류학 박사 과정을 끝냈을 즈음에 현생 악어 23종 대부분이 긴박한 멸종 위기종 목록에 올랐거나 오르기 직전이었다. 그의 논문 주제는 어릴 적에 키우던 안경카이만악어였다. 그는 이후 전 세계 악어를 보호하는 방대한 활동 계획에 참여했다.
........악어는 7000만 년간 빙기와 유성우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동물이다. 악어 개체수를 100만 년 단위로 나눈 x축에 표시하면 그래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약 100만 년마다 자연적 원인으로 특정 종이 사멸하기도 했지만, 20세가 들어서는 많은 동물 종과 마찬가지로 수직 하락세를 보였다. 인간은 악어의 서식지를 침범했다. 우리는 악어가죽 부츠와 악어가죽 가방을 탐낸다. 우리는 '가장 못생긴' 사촌인 악어에 대해 무지하고 적대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단 한 사람이 운석 폭풍에 맞먹는 폭탄을 발명할 수 있는 시대고, 한 가지 패션이 유행하는 것만으로 동식물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시대다.......
.......악어는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자연으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으며, 영양소와 원료를 순환시키고 서식처를 보호한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어 개체 수 과잉과 질병을 예방한다. 가뭄을 대비하여 강과 늪에 구멍을 파는데, 이 구멍은 다른 동식물에게도 도움이 된다. 155
_p155 시간과 물에 대하여_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달에 두세 번은 주말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이코드라마를 한다. 토요일 하루 프로그램도 있지만 일박이일로 진행하기도 한다. 대상은 일반인이다.
우리 모두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과거의 트라우마, 현재의 스트레스, 미래의 걱정과 불안, 가족 갈등, 자녀 관계 등 크고 작은 문제를 갖고 살아간다. 이런 문제는 정신과 진료를 할 정도도 아니고, 상담으로 한두 번에 해결될 것도 아니지만 우리 삶을 괴롭게 한다. 이런 문제를 주제로 심리극을 한다. 치료받기에 애매한 심리적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나는 주말마다 재능 기부 형식의 찾아가는 심리극 서비스를 하고 있다.
사이코드라마는 심리적 수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오래된, 심각한 문제가 단 두세 시간 만에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도 있고 후유증도 있다. 함부로 할 수 없으니 30년을 공부하고 실력을 키웠다. 나는 거의 주말마다 심리적 수술을 하러 각지를 돌아다닌다.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어떤 스토리를 만날지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세 시간 동안 온몸과 온 마음과 온 정신으로, 나의 지식, 경험, 지혜를 모두 쏟아붓는다. 마치 심장 수술하는 의사가 그 시간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붓듯이.
주말에 네댓 명의 주인공과 만나 뒹굴고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그뿐인가. 힘든 삶을 살아내는 주인공의 삶까지 흡수하니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그래도 좋다고 돌아다닌다.
나는 오늘도 홀로, 심리극을 하러 어디론가 떠난다. 마음속에 잘 드는 치유의 칼을 품고, 단칼에 해결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칼에 나와 주인공의 삶을 걸고 떠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칼잡이 정신과 의사다.
_p181_명랑한 정신과_윤우상
이 사랑은 일대일 관계의 주고받음으로 완결되는 종류가 아니다. 애초에 관계 방향이 일대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와 나눈 사랑을 나는 타자와도 나눈다. 타자 또한 나와 나눈 사랑을 두고 그럴 것이다. 그 타자는 최애이기도 하고 다른 팬이기도 하며 덕질과 무관한 내 곁의 누군가이기도 하다. 가로수이기도 하고 길고양이이기도 하며 달이기도 하다.
수박이기도 하고 검정 무지 티셔츠이기도 하고 오후 세 시 십오 분이기도 하다. 최애로 인해 사랑이라고 여기는 감각에서 비롯된 정서와 심상이 다시 나로 인해 나의 바깥에게 사랑으로 발생하는 현상. 내가 사랑의 매개체가 되는 기적. 모양도 방향도 없지만 존재하는 애정. 언제든 뛰어들어 헤엄치고, 푹 젖고, 깊게 가라앉았다 부유할 수 있다.
어느 순간, 이런 게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사랑의 형태였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사회가 허락한 사랑으로부터 자꾸만 튕겨져 나오던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한 명의 애인으로는 그만큼 또는 그런 종류의 사랑에 도무지 도달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 설명을 듣고 머릿속에 당신에게 이러한 사랑이 되어주는 존재가 떠올랐다면,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에게 최애가 당신에게 그 존재다.
p65_애정 재단_유보
무엇보다도, 벽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알파마 지구에서 내가 한 일은 없었다. 다만 헤맸다. 끊임없이 헤맸다. 온갖 벽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찍고 돌아서면 뒷벽이 말을 걸었다. 오른쪽으로 틀면 왼쪽 벽이 말을 걸었다. 방금 지나갔던 그 벽이 이번에는 햇살을 머금고 말을 걸었다. 어젯밤에 분명 찍었던 벽이 오늘 아침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집 앞 슈퍼에 갈 때에도 카메라를 들고 갔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필름 카메라였지만 언제 또 보물이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 줄 모르니까. 그때 카메라가 없으면 정말로 큰 일이니까. 나는 알파마 지구에서 벽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만면에 미소가 돌았다.
남들은 그런 사소한 취향 따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나의 이 취향이 도시의 속살로 직행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어떤 취향은 능력이다.
_p172_ 모든 요일의 기록_ 김민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