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라운드 공이 울림과 동시에 상대 일본 선수의 왼손 어퍼컷에 턱을 맞아 앞으로 고꾸라진다.
"원, 투, 쓰리...”심판이 세는 10초의 카운트. 심판은 내가 다시 일어나자. 경기를 재기할 수 있는지, 내 두 팔을 들어보며 동공의 상태를 살핀다. 심판은 경기 속행이 불가하다 판단하고 TKO를 선언했다. 수많은 별이 뜨고 지는 도쿄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밝게 빛나던 나의 꿈은 지고 말았다. 복싱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패배는 이번만이 아니었기에 평소처럼 의연하게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패배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복싱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사실 이 경기는 나의 복싱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은퇴 경기였기 때문이다. 일본 시합을 준비하던 보름 전 나는 나의 스승이자 매니저인 관장님에게 선수 생활을 은퇴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에게는 패배보다 선수 생활을 은퇴하라는 권유는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국제 시합은 이미 양측 선수들의 계약이 이뤄진 상태라, 한쪽이 시합을 포기하면 계약 위반으로 위약금을 물어줄 뿐 아니라, 해당 체육관과의 비즈니스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더욱이 시합을 무를 수 없었다. 코치 생활과 병행하며 시합 계약 체중에 맞춰 8kg을 빼야 했는데, 이미 나에게 마음이 돌아선 매니저와는 함께 훈련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체중감량과 시합을 준비해야 했다. 은퇴 경기를 준비하는 순간순간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가 나를 응원해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복싱하는 것에 반대가 심해서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친구들에게도 내 은퇴 경기라는 소식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만, 언제나 묵묵히 혼자 해왔던 일이기에 나를 응원하는 이가 없어도 담담히 훈련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굶은 상태로 회원분들의 운동을 가르칠 때면 입이 바짝 말라 말하기도 어려왔고, 핑 돌면서 어지럼증도 함께 왔다. 기운이 없어 멍해져서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간 적도 있었다. 체중도 잘 빠지지 않아, 패딩 안에 패딩을 여러 겹 껴입고 달리기를 뛰는데, 달리는 중간에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에 엎어져 입을 대고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갈증도 심했다. 달리는 내내 생각했다. 은퇴를 권유받은 시합인데, 내가 왜 이 시합을 해야 하지? 라고.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울면서 시합을 준비하는 날이 많았고, 너무도 외롭고 힘든 사투였다. 온전히 나를 믿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 자신만이라도 나를 믿어줘야 했는데, 잠정적 은퇴에 스스로를 믿고 응원해 줄 수 없었다. 이미 무너진 마음으로 준비한 시합이 당연히 이길리가 없었다.
더 이상 선수로써 살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이 나를 짓눌렀고, 이미 정해놓은 시나리오처럼 그대로 내 패배는 현실로 이뤄졌다.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복싱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복싱 밖에 모르며 살아온 나에게 복싱은 없어서는 안 되는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물고기가 물 없이 살 수 없듯. 나도 복싱 없이 살 수 없었다.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묵묵히 훈련 해오며 정진하던 나의 선수 생활이 계속될 줄만 알았다… 선수 생활은 결국 멈춰야만 했다. 꿈속에서 계속 행복할 줄만 알았던 순간이 그 희망이 나에게 절망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희망도 무서워할 줄 알면서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성취하지 못 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라라." - 앤 설리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