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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칼럼 May 24. 2016

한 편 한 곡 – 1. '동성애'

같은 사랑.

 ‘한 편 한 곡 시리즈’는 주제를 정하여 1주일마다 좋은 영화 한 편과 좋은 노래 한 편씩을 소개하는 방향으로 연재할 예정이었으나, 날을 잡고 올리는 게 부담스러워서 최소 1달에 한 편 이상은 게시하는 방향으로 연재할 예정인 ‘문화 소개 콘텐츠’입니다. (근데 한 달에 한 편 올리기도 못 지킬 것 같네요.)


 기성세대들이 이따금씩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가 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 말대로 지금의 생활환경이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모습이었듯이 지금의 우리나라는 5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나라 이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이루어진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슈는 ‘동성애’와 관련한 논란들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지만, 동성 간의 사랑은 예부터 금기시되오며 마치 죄악으로 간주되어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성향을 밝히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 풍조를 낳았다. ‘동성애 합법화’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걸 보면, ‘동성애’에 대한 국제적 시선은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보통 동성 간의 성교에 대한 불쾌감이나 종교적 이념이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말 본질적인 문제는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편견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남녀가 한 쌍을 이루어 나누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동성 간에 나누는 사랑 또한 진심을 담아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교리만을 내세우거나 불쾌감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반대를 부르짖는 사람들, 혹은 아직까지도 ‘동성애’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동성애’에 관한 기존의 고정관념들을 깨뜨리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작품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한 편,

<번지점프를 하다 (2001)>

 지금은 고인이 되어버리신 故이은주 씨와 이병헌 씨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20대의 풋풋한 사랑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또한 젊은 시절 이병헌 씨의 모습과, 지금은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게만 느껴지는 故이은주 씨의 사랑스러움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매력이다. 개봉 당시에는 '동성애'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에 대한 논란으로 꽤나 말이 많았는데, 지금 와서는 우습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꽤나 심각했다.

 사실 지금에서야 동성애 성향 형성에는 환경적 요인이 가장 큰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인 2000년대 초반의 한국에는 그런 개념이 거의 전무했다. 때문에 동성애와 같은 성향들은 정신병 취급을 받으며 형성 요인에 대해 연구하기보다는 ‘인류발전 저해’, ‘성병 발생 요인’ 등 매도를 위한 명분 찾기에 급급했는데, 이렇게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동성애’라는 문제적 소재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해석을 시도한 감독의 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동성애를 동양의 윤회사상 관점에서 해석한 점이 매우 독특하고 신선한데,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심한 동양에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이 놀랄만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작품은 운명적 소재로서 같은 맥락의 ‘인연’의 개념을 다루고 있는데, ‘인우’(이병헌 분)가 죽어버린 ‘태희’(이은주 분)를 억지로 잊고 꾸린 가정생활이 결국에는 망가지고, 평범한 남자로서 살아온 ‘현빈’(여현수 분)이 영문 모를 ‘인우’의 사랑에 조금씩 끌리듯, 감독은 ‘인연’이라는, 미신처럼 느껴지면서도 살다 보면 종종 느끼게 되는 일종의 ‘신비’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동성애자들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구하는 듯 보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불교계의 ‘타생지연’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주위에 소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전생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소중한 이들을 ‘종교적 교리’나 ‘사람들의 시선’ 따위에 잃고 싶지 않듯, 동성애자들 또한 자신들의 소중한 ‘인연’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시선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존재들 인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 이들은, 우리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남들의 시선 따위에 흔들려 떠나보낸 인연이 없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한 곡,

<Same Love - Macklemore & Ryan Lewis>

 앨범 <THE HEIST>를 통해 2013년을 들썩이게 한 ‘Macklemore & Ryan Lewis’는 <Can’t Hold Us>, <Thrift Shop>와 같이 경쾌하면서 빠른 비트에 재치 있는 가사를 통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랜 기간 랭크되며, 대중적인 인지도와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그룹이다.

 앨범 <THE HEIST>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작품은 저 두 곡이 대표적이나, 저 두 곡의 인기가 식어 갈 때 즈음, 동성애 차별에 대한 직설적인 가사와 감성적인 피아노 반주의 조화를 통해 음악성을 지니면서도, 자신들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한 <Same Love>가 뒤늦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Macklemore & Ryan Lewis’에 대해서는 앞서 얘기한 ‘대표적인 두 곡밖에 들어본 적이 없다’하는 독자들이 만약 저 노래를 듣는다면 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바뀔지도 모른다. 경쾌하고 자신감 넘치던 두 곡들과 달리, 잔잔하면서도 조용히 꽂는 비판들이 인상적인 <Same Love>는 같은 그룹의 노래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진지한 색깔을 띤다.


 ‘we paraphrase a book written 3,500 years ago’

 (우린 3500년 전에 쓰인 책이나 해석하고 있어)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Not cryin'on Sundays)’

 (사랑은 인내와 상냥함이야(일요일마다 우는 게 아니야))


와 같은 가사들을 통해서는 종교적 교리를 명분으로 동성애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Damn right I support it.'

 (젠장 그래, 난 동성애를 지지해)

 'We press play, Don't press pause.'

 (우리는 재생을 누르지, 멈춤은 누르지 않아.)

 'Progress, march on!'

 (전진해, 계속 나아가!)


와 같은 가사들을 통해서는 동성애에 대한 자신들의 단호한 의지를 내비친다.

 또한 노래를 이루는 3개의 Verse 내내 차별에 대한 비판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 곡이 단순한 위선의 노래가 아닌, 이 노래를 통해 현실에서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의지가 담긴 노래임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실제 동성애자인 싱어송 라이터 ‘Mary Lambert’에게 이 곡의 피처링을 부탁한 점만 보더라도 이 곡이 결코 가벼운 노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감성적인 멜로디와 감각적인 비판을 통해 진정한 평등과 사랑을 노래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음악이라는 장르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라는 주관적인 가치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끝으로, 이 글에서 소개한 작품들을 감상하고도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이들에게 무조건적인 평등을 강요할 필요도 없음을 말하고 싶다. 애초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또한 보편적인 모습에 대한 강요에서 생겨났기에, 다른 생각이나 가치관 등을 굳이 강요해가며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해’다. 교리나 명분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나와 타인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보편적인 모습을 강요당하는 한국 사회에서 다수의 차별이나 다수를 하나로 모으는 명분은 그 과정 속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겠지만, 다수에 휩쓸리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이성에 기대어 판단하기를 노력하다 보면, 정말 차별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이해'다. '강요'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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