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사고로 얼룩진 이리시입니다.
저는 지방 출신입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규모가 있다든지, 이름만 대면 많은 사람이 알아주는 그런 도시가 아니라 간신히 읍(邑)보다는 조금 큰 소도시 출신이올시다. 그러다 보니 서울이나 여타 대도시의 문화나 문명과는 많이 동떨어진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누구나 그랬을 같기는 한데, 행여 누구 하나 큰 도시 특히 서울에서 전학이라도 오면 그날 그 아이의 주변에는 제법 많은 친구가 몰려들었습니다. 궁금한 것이래야 뻔하지만 친해 보려 애쓰는 이면에는 부럼 반, 시기심 반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약간의 갈증을 풀 수 있는 그런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런 내 고향이 유명해진 사건이 1977년에 발생합니다. 다름 아닌 이리역 폭발 사고입니다. 사건의 내용은 대략 들어서 아실 터, 기껏해야 10만을 간신히 넘겼던 전라북도의 조그만 소도시가 일약 유명세를 날리게 되었습니다. 기왕이면 좋은 일로 그리됐으면 좋았겠지만 하필이면 많은 이의 희생을 딛고 그리됐습니다.
당시 제가 중3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도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아파트도 들어서고 부서진 건물도 복구하며 신축하는 과정에서 인구가 점점 늘어나더니 어느 시점에서 30만을 훌쩍 넘기는 중(中) 도시로 성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였습니다. 태생적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인 데다 산업시설이라야 라면, 과자공장 정도에 대형 닭고기 회사 정도만이 자리하고 있어서 도시의 성장동력을 유지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타 관광도시처럼 유적이나 풍경이 빼어난 곳도 아니기 때문에 산업기반 외의 동력도 좋은 편이 아닙니다. 말이 좋아서 백제의 고도(古都)라고 하긴 하는데, 경주라든지 부여, 공주같이 규모가 남다르다거나 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세울 만한 것이라곤 터만 남아 있는 미륵사지 뿐입니다.
이제 익산은 점점 인구가 감소하고 있답니다. 하긴 저부터도 고향에 살지 않습니다. 만약 계속 남아 있다 하더라도 아이의 교육 내지는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대도시로 옮겼을 게 분명합니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왜 고향을 등지느냐? 누구냐.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책임감을 강요하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게 대형화되고, 현대화라고 이름한 발전의 이면에는 이처럼 쇠퇴하기도 하고 심하게 표현하자면 몰락하기도 하는 우리네 삶의 단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람직한지도 모르겠고, 더 나아가 책임소재 여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여러 방면으로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는 없을 듯합니다.
지금 고향을 지키고 있으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고향에 가까이라도 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우리 부부도 나이가 들어 생산활동에서 멀어질 나이가 되면 과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생각하고 상상해도 선뜻 그러리라 확답하지 못합니다. 형편이 그러합니다.
오붓하게 자연을 즐길 정도로 산수가 수려한 것이 아니요 그저 논이 더 많은 동네, 그렇다고 문화의 혜택이 풍족한 곳도 아니기에 도시의 편리함을 양껏 누릴 수 있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나의 추억팔이일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이 사시던 집, 어릴 적 친구 몇몇이 사는 곳, 아니면 내 청춘의 한 날을 보내던 공간, 아마 그 이상의 걸 충족시키기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역부족일 것입니다.
首丘初心, 望雲之情, 家書萬金 등 운치가 있고 정감이 있는 말은 이제 문자로만 남을 박제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