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윗도리, 검정 팬츠

해태는 어디 가고 기아가 그 자리에.

by 김욱곤
해태타이거스는 지금 없지만 내 맘에는 남아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초, 격동을 파도를 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시절, 사회 전반에 생각지도 못한 변화들이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의도조차도 순수하지 못했던 통행금지의 해제가 그랬고 그로 인한 심야 영화의 번성, 나이트클럽의 호황, 그리고 미성년자 관람 금지 급의 영화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군사정권이 시도한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책으로 소위 3S라 하여 Screen, Sex, Sports 관련 정책을 이용했기에 생겨난 일입니다. 대중의 관심을 우회시키려는 정치인의 속셈은 한동안 먹히는 듯했습니다.


스포츠는 70년대 고교나 실업팀에 한정되던 게 점차 프로스포츠로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합니다. 자금조달이 쉽고 마케팅 효과를 노리는 대기업을 상대로 반강제적으로 추진한 결과 야구, 축구, 씨름 등의 종목이 시작하고 이후 배구나 농구 등 대중적인 종목을 활용했습니다. 이후 국민은 지역을 연고로 하는 야구나 축구팀에 하나둘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첫해인 1982년 시작된 프로야구는 서울의 MBC 청룡, 인천 경기 강원 (명목상) 이북 5도의 삼미 슈퍼스타즈, 대전 충청의 OB 베어스, 광주 호남의 해태 타이거즈, 대구 경북의 삼성 라이온즈, 부산 경남의 롯데 자이언츠 총 6팀이 리그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많은 팀이 새로 생기기도 하고 구단주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서 지금껏 남아있는 팀은 삼성 라이온즈, OB(지금은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정도입니다. 처음부터 지역연고제를 기반으로 시작한 덕분에 프로야구의 인기는 단기간 내에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이 치솟는 효과를 보게 됩니다.


저는 분위기에 휩쓸려 처음부터 해대 타이거즈를 응원했습니다. 굳이 분위기 핑계를 대는 까닭은 사실 친구들과의 소통에 더 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동질감을 누리기 위함인데 이게 묘한 힘이 있는 게 그렇게 시작한 응원이 타이거즈가 져도, 순위가 낮아도 그냥 저절로 타이거즈의 팬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하지만 팬으로서 제 응원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내내 극성팬은 되지 못하고 더구나 현장 응원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다른 분들은 일부러 응원을 핑계 삼아 경기장에 놀러 가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방편으로 이용한다는데 저는 애초부터 그 정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경기장 응원석에 나타난다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딱 한 번 경기장의 관중석에 한 번 앉아 본 기억은 있습니다. 전공의 1년 차이던 1989년인가? 1년에 몇 번 없던 타이거즈의 전주 홈경기(평소에는 광주구장)에 의국원들과 가본 적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날도 미리 ticket을 끊어놓았기에 간 것이지, 미리 물었다면 가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마침 결과도 4:0으로 졌지만 아쉽게도 상대 팀이 어느 팀이었는지 기억조차 없습니다. 마음에 간절함이 없으면 이렇듯 결과가 뻔합니다.




친구들과의 대화 단절을 피하려고 최소한 전날 경기의 결과 정도는 알아가던 알량한 관심마저도 이제는 물 건너간 지 오래입니다. 제가 관심이 있던 구단마저도 타이거즈라는 이름만 남았을 뿐 해태에서 기아로 넘어간 지 오래입니다. 빨간 윗도리에 검은 팬츠로 당당하던 유니폼도 바뀐 이후로는 “누가 타이거즈야?” 물어야 알 정도로 제 관심은 이제 바닥입니다.


나이가 들어 제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마음에 온기(溫氣)를 품게 해 줄 따스한 취미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의 시선으로 따지면 이렇게 펜을 놀리고 노트에 적으며 다시 정성스럽게 워드로 저장하는 일이겠지만 그 이외에 뭐가 더 있어? 물으면 이 또한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아내랑 같이 즐길 수 있는 그 무엇이 생긴다면 우선 그것부터 덥석 물 용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마음은 늘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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