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빼앗긴 한 남자. 그는 또 무슨 시련을 겪는가, 그것을 어떻게 헤쳐 가는가, 결국 무엇을 이룩해내는가. 동서양과 고금을 통틀어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이 모티프에 따라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월을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야기의 원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 서사시들의 목록에 덧붙일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족장 세르멕』은 막 철기가 보급되던 시절, 인류가 아직 미명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를 배경으로 삼는다. 미비한 규약과 제도는 필연적으로 전쟁, 압제, 음모, 배신, 살생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힘의 세상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지혜를 짜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야만과 문명이 충돌하는 세계에서 어느 작고 평화로운 부족의 족장이었던 ‘세르멕’이 시련을 딛고 살아남아 새로운 세상을 일궈내는 과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상 · 하권 688쪽의 방대한 분량 속에서 우리는 잘 짜인 이야기가 주는 흥미진진함과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서평
시원의 기억을 일깨우는 호쾌하고 장렬한 이야기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둔덕 하나 찾을 수 없는, 밤이면 얼어붙은 바람에 풀 끝이 누렇게 시들고 아침이면 태양빛이 지평선의 끝에서 끝까지 일순간에 휘달리는, 어쩌면 우리가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지 모를, DNA 속에 남아 있는 시원(始原)의 풍경. 그곳에서 우리는 말을 내달리고 피를 뒤집어쓰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을 것이고, 움막 안에서 손을 맞잡고 여럿이 머리를 맞대 규례와 제도를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족장 세르멕』은 드넓은 초원과 황량한 사막, 험준한 고원을 배경으로 야만과 문명이 혼재한 어두운 시절을 살아간 뜨거운 인간군상을 그린 환상문학이다. 이 작품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가상의 시공간 위에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달음박질친다. 시원의 공간에서 부끄러움도 스스러움도 없이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다 스러져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 욕망의 날줄들 사이를 ‘세르멕’이라는 씨줄이 오가며 거대한 하나의 천으로 이야기를 자아낸다.
인류의 발전사, ‘야만’과 ‘문명’의 대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규약과 제도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앞서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족장 세르멕』의 무대는 이러한 것들이 세워지기 전, ‘그래야만 하는 것’이 없고 ‘내가 곧 정의’가 되는 무법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은 모든 것이 긍정되는 압도적인 자유로움의 공간이기도 하고, 정도가 없는 살육과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다시 자신이 겪었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기 위해 애쓰는 세르멕의 모습은 야만을 극복하고 문명을 일구려 애써온 ‘인류’의 이야기로 치환되어 깊은 감동을 준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인류를 실어 나른 두 개의 바람, 본능과 이성으로 환원되는 ‘야만’과 ‘문명’에 대하여 한번쯤 깊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초원엔 수없이 바람이 불어온다.
슬픔의 탄식과 희망의 함성을 담고 바람은 먼 미래에까지 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 바람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서슴없이."
● 줄거리
상권 · 초원을 흔드는 바람
“말을 달려라, 시위를 당겨라! 내일의 태양은 너의 것이다!”
달족의 족장 세르멕은 다른 부족의 침입으로 인해 성읍과 부족민 전부를 빼앗기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아이를 밴 채 성읍에 남은 아내와, 아비의 얼굴도 모르고 자랄 자식을 뒤로한 채 세르멕은 황야를 지나 서쪽에 있다는 대국 ‘융국’으로 향한다. 그러던 중 융국의 대상(隊商) 행렬을 만나 뜻밖에 상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하권 · 불 속의 끓는 불
“그것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
오랜 시간 반목해온 융국과 스카루국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줄, 융국 공주와 스카루국 왕자의 세기의 결혼이 성사된다. 세르멕은 기회를 맞아 교역 접선을 위해 스카루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뜻밖의 변고로 세르멕은 첩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융국 안에서도 내란이 일어난다. 근래 강성해진 또 하나의 대국 ‘키안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절체절명의 순간, 감옥 안에서 세르멕은 세상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기술을 가진 한 인물을 만나는데…….
● 차례
상권 · 초원을 흔드는 바람
작가의 말
제1부 초원의 영웅
제2부 분열의 씨앗
제3부 대국의 기둥
하권 · 불 속의 끓는 불
제4부 숨겨진 계획
제5부 새로운 문명
제6부 권력의 조건
● 본문 속으로
“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소. 힘을 꺾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뭐죠?”
_<상권> 15~16쪽.
“그것이 달족을 괴롭힌 대가가 될 것입니다. 힘을 사용하면 증오가 남지만, 지혜를 쓰면 진정한 승리가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_<상권> 58쪽.
이제 죽음 앞에 선 그는 자신의 값없는 생명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은 용납될 수 없다는 절망에 휩싸이면서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것은 단순히 목숨의 위협 앞에 오는 두려움과는 달랐다. 죽음을 앞둔 모든 인간이 그렇듯 그 역시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_<상권> 145쪽.
예하의 안목으로 볼 때 파이한은 특별한 인간상이었다. 그는 무인이지만 무인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를 보고 느끼려는 욕망이 강했다. … 파이한이 가진 욕망은 이질적이고 어쩌면 위험한 열망일 수 있다는 걸 예하의 깊은 눈은 모르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예하는 상인이었다. 어쨌든 천하의 파이한이라도 거래 상대가 된다면 피하지 않는 것이다.
_<상권> 202쪽.
예하가 찾고 있는 사람이란 무엇보다 세상의 고난을 알고 이를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자라야 했다. 또한 그 고난과 더불어 생명의 불꽃이 선명하게 타들어갈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예하는 인간에게 고난이 없다면 어떤 발전도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이란 그렇게 커져간다는 것을 예하는 잘 알았다.
_<상권> 228쪽.
파이한은 그런 자들을 보며 내심 조소를 참지 못했다. 전쟁과 평화 사이를 잇는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시대 자체가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_<상권> 275쪽.
세르멕은 검을 다시 벽에 걸고 장의자에 길게 걸터앉아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동토가 되어버린 달땅에서 아비도 한번 보지 못한 채 외롭게 자라날 아이, 돌아올 기약도 없는 자기 사내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나날을 보낼 메이, 달족의 몰락 속에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한숨지을 어머니.
세르멕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려 주먹을 깨물었다.
_<상권> 300~301쪽.
융국과 스카루국은 오랜 반목의 역사를 가져왔다. 양국의 백성들은 서로 감정의 골이 깊었다. 남자들 치고 전쟁에 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드물었고, 아들과 남편을 잃은 여자들과 아비와 형을 잃은 아이들은 원한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_<하권> 8쪽.
“대왕마마, 어차피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침공을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유리합니다. 군사를 일으킬 것을 윤허해주십시오.”
_<하권> 37쪽.
“다행히도 그 사람은 거기에 대한 명분만은 갖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명분이 없는 권력이란 힘이 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길지 못한 법입니다. 그 사람에게 끝까지 명분을 갖지 못하게 한다면 거기에 태자마마의 살길이 있을 것입니다.”
_<하권> 66쪽.
무수한 별들이 하늘에 흩뿌려져 있었다. 무심하게도 동쪽 하늘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평화로운 하늘이었다.
_<하권> 129~130쪽.
“나는 당신의 기술로 사람을 더 많이 죽일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살리고 싶은 거요. 아시겠소? … 당신은 그 기술을 스기요메 장군에게 주어서 겨우 전쟁을 위한 무기에나 쓰이길 원하시오? 당신의 기술이 더 넓고 뜻있게 쓰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내겐 있소.”
_<하권> 144~145쪽.
“나는 당신을 출전시키려 하오. … 직접 맞서 싸우라는 의미요. 그러한 운명이 당신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더는 부정하지 마시오.”
_<하권> 204쪽.
“부왕께서 내게 한 말이 있네. 왕의 재목이 되지 못하는 자를 옥좌에 앉히는 것은 칼로 백성을 후려치는 짓에 다름 아니라고 말일세.”
_<하권> 300쪽.
얼굴도 보지 못한 아들이 저 멀리 희미했다. 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았다. 사랑과 기쁨, 아련한 그리움, 시련 속에서도 피어나는 세상의 밝고 맑고 따뜻한 이야기들이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삶은 이것으로 끝이다. … 모든 것이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