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1

제1장 카이사르 암살 =거인의 죽음과 그의 초라한 후계자

by 우광환


들어가며

한 시대를 가르는 눈-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한 이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사후 후계자로 지목된 사실이 알려진 열여덟 살 나이에 갑자기 로마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 인물입니다. 연소했던 그는 당연히 군대를 거느린 적도 없고, 공직 경험도 없고, 원로원 내 기반도 없었습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불안정했던 그의 초기 위치 탓에 정치적 실패 가능성 또한 높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카이사르 암살 직후의 혼란, 원로원과 군벌의 다층적 대립, 여론과 군사 지원 체계의 미세한 흐름을 읽어내면서 스스로의 정치적 위치를 한 걸음씩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정치적 구조를 먼저 살피고, 권력의 방향을 좌우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능력은 그의 이른 시기부터 드러났습니다. 그는 로마가 변화해야 할 방향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낸 인물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통찰을 실현할 수 있는 냉정한 의지와 계략까지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결정은 당시 많은 이에게 의문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행동을 통해 그 판단의 정밀함이 드러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보다 제도를 중시했고, 연설보다 인사와 조직을 우선시했으며, 사적인 감정보다 구조의 안정성을 먼저 고려했습니다. 이런 원칙이 쌓이며 로마의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어냈습니다. 정치적 혼란을 헤치고 안정을 구축하는 능력, 주변 인물들의 재능을 기관처럼 조율하는 재질, 자신의 이미지와 권위를 조정하는 세심함 등은 그를 로마사의 독보적인 정치가로 기억하게 합니다.

천재적 통치자였던 카이사르에게서 먼 친족 옥타비아누스로 이어진 정치적 계승은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승계 사건’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계승이 이루어진 시점은 지나치게 이른 나이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혼돈의 한가운데서도 능력을 증명해냈고, 결국 역사적 성취와 개인적 완성을 동시에 이루어냈습니다.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공화정의 종말에서 제정의 개막까지- 이 작품의 구성과 범위

본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젊은 후계자가 로마의 최고 통치자로 부상하여 제정이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연대기적 역사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나는 공화정의 시대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정으로 이행되어가는 과정과 함께, 서술의 중심에는 옥타비아누스라는 한 개인이 법과 군대, 여론과 재정 사이에서 새로운 권력 구축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면서 전투와 협상, 항만과 도로, 곡물 가격과 병참 체계, 퇴역군인들의 정착지와 지방 행정, 의례의 배치 등 다양한 층위를 조망하며, 제정 형성의 구조적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인물의 성향이나 행위의 동기를 직접 해석함은 물론, 인물 각자가 내리는 결정과 그 결과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됩니다. 그 안에서 옥타비아누스, 아그리파, 마에케나스, 그리고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섹스투스 등 로마라는 제국 동방과 서방의 핵심 인물들이 이끈 정치력과 무력의 흐름을 비교 분석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이야기는 기원전 44년의 카이사르 암살에서 출발하여 무티나 전투, 필리피 전투, 브린디시움 협약, 미세눔 협정, 타렌툼 협상, 섹스투스와의 해전, 파르티아 전선과 아르메니아 원정, 안토니우스의 동방 구상, 악티움 전쟁과 알렉산드리아 함락, 그리고 프린키파투스(원수정)에 이어 제정 확립으로 이어집니다. 이 글은 한 인물에 대한 영웅적 서사를 넘어, 법, 군사, 재정, 여론, 도시 인프라의 변화로 고대 로마 시대의 제정이 형성되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한 내용입니다.

이 책을 통해 로마 공화정이 어떻게 쇠퇴했는지, 젊은 후계자가 혼란의 틈을 어떻게 읽어냈는지, 여론과 경제 지표가 권력의 흐름을 어떤 속도로 바꾸었는지, 프린키파투스가 어떤 제도적 기반 위에서 등장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장이 충돌한 전장의 서사와 함께 행정의 조심스러운 조치와 민중의 소리 없는 평가가 권력의 방향을 움직인 기록까지, 로마의 변화를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청년은 법과 군의 틈새에서 어떤 절차를 통해 정국을 장악했는가,’ ‘경제, 인프라, 보급 체계는 어떻게 권력의 향방을 바꾸었는가,’ ‘안토니우스의 동방 전략은 왜 실패했는가,’ ‘제정의 원형은 어떤 형태로 구축되었는가,’와 같은 핵심 질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로마사와 고대사에 관심을 둔 독자는 물론, 역사적 변화의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도 충분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사건과 판단의 결을 해석하기 위한 노력- 이 작품의 서술 구도

본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생애라는 렌즈로 들여다본 로마 공화정의 붕괴와 제정의 성립을 통해 당대의 사건들을 ‘해석’의 중심에 두는 관점으로 서술했습니다. 그가 남긴 행적은 로마 공화정의 말기가 겪은 정치적 단층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기에, 본서에서는 그 단층을 움직인 압력과 조건을 하나씩 추적하면서 그의 행적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살폈습니다. 각 장면은 그 장면이 형성되기까지의 공간적 조건과 심리적 무게를 함께 드러내어 독자가 인물의 당시 위치를 더 현실적으로 파악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전투의 함성과 원로원 회의장의 정적이 각기 다른 형태로 그의 판단에 작용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본서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복원하려는 시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한 인물의 결정을 압박하거나 확신을 심어준 실제 맥락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갖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행보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는 그의 권력 감각을 가늠하는 잣대로 자리 잡습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출발점에서 권력의 중심으로 향했지만, 각기 다른 입장으로 로마의 변화를 마주했습니다. 이 글은 그 차이를 대립 구도로 부각시키는 대신, 서로 다른 기질과 정치적 감각이 어떻게 다른 결과를 낳았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썼습니다. 안토니우스가 동방에서 경험한 풍요와 긴장은 그의 정치적 행보에 지속적인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여러 제약과 동시에 활용 가능한 기회를 마주하게 됩니다. 본문은 이런 현실을 분리하여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판단은 개인적 성향의 발현과 함께 공화정 말기 로마 정치가 처한 제도적 압력과 현실적 제약을 반영한 결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본서는 고대 사료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서로 다른 기록을 교차 검토하며 각 사료가 어떤 관점과 한계를 지니는지를 비교 분석했습니다. 아피아노스, 디오 카시우스, 플루타르코스, 수에토니우스, 요세푸스 등 주요 고대 사료들은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서술합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특정 인물의 동기와 평가에 대한 해석을 비교 가능한 범위로 제한해 제시했습니다. 이와 함께 다수의 근현대 연구서를 참조하여 고대 기록의 서술 의도와 해석의 편차를 재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했습니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라는 한 개인을 조명하는 것과 함께 로마 정치가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초기로 옮겨가는 과정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문제의식의 결과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훌륭한 역사적 주석이기에, 본서는 생애 속 사건을 해체하는 일과 그 사건을 다시 제자리에 배치하는 일을 반복하며 그 시대를 분석해봤습니다. 이 방법론은 독자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로마라는 공동체가 어떤 경로를 거쳐 새로운 체제로 이동했는지 차분하게 체감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된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목 차

제1장 카이사르 암살-거인의 죽음과 그의 초라한 후계자 (기원전 44년)

1. 암살의 여파-공화정 수호자들과 시민의 반응

2. 거인의 가정에서-옥타비아누스의 성장 과정

3. 아폴로니아 원정군 합류-평생 친구들을 얻다


제2장 후계자의 귀국-새로운 천하 (기원전 44년)

1. 불안한 귀국길-카이사르의 유산

2. 암살 직후의 수도 로마 상황-안토니우스의 도약

3. 카이사르 군단과 후계자-전우들의 충성심

4. 키케로와의 조우-날카로운 계산법


제3장 로마의 청년 군벌-필리피카이 연설과 합법적 군권 (기원전 43년)

1. 안토니우스의 야망-속주 재배치 구상

2. 키케로의 필리피카이 연설-내전의 전운

3. 내전의 문턱-군단과 군권


제4장 혼돈의 공화국-최연소 집정관의 탄생 (기원전 43년)

1. 무티나 전쟁-야망과 야망의 대결

2. 옥타비아누스와 원로원-불어난 군단

3. 19세 집정관의 탄생-법의 논리와 군단의 논리


제5장 공화국의 종언을 향한 행군-새로운 지배자의 길 (기원전 43-42년)

1.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최후와 삼두정 결의-공화국의 붕괴

2. 공화국 재건 3인 위원회(삼두정)의 결성-키케로의 최후

3. 제국 동방의 상황-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4. 동방 원정-공화정 수호자들의 말로 (기원전 42년 초)

5. 전후 협의와 권력 분할-필리피 이후의 상황 (기원전 42년 겨울,)


제6장 제국의 균열-안토니우스의 동방 체류(기원전 41–40년)

1. 전쟁의 잔재를 정리하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2. 페루시아 전쟁-삼두정의 첫 균열

3. 브린디시움 협정-육지의 평화, 바다의 갈등


제7장 양대 권력의 서로 다른 계획-권력의 필요 조건 (기원전 39-37년)

1. 미세눔 협정-바다의 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등장 (기원전 39년)

2. 미세눔 협정 이후― 캄파니아 연안의 충돌과 서방 속주의 정비(기원전 38년)

3. 안토니우스의 동방 귀환과 파르티아 원정계획-동방의 꿈과 유프라테스의 경계

4. 옥타비아누스의 진정한 반려자-제국의 기틀을 함께 세운 여인

5. 타렌툼 협정- 권력의 시간을 재조정하다 (기원전 37년)


제8장 서방의 바닷바람과 동방의 모래바람-패배와 승리의 두 얼굴 (기원전 36-34년)

1. 타렌툼 이후 ― 바다를 다시 장악하다

2. 나울로쿠스 해전-아그리파의 승리와 레피두스의 실각 (기원전 36년)

3.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 동방의 야망과 모래 위의 패배 (기원전 36년)

4. 섹스투스의 도주와 최후 ― 바다의 신이 사라지다 (기원전 36년-35년)

5. 옥타비아누스의 귀환과 새로운 체계 ― 로마의 권력 정비

6. 전선의 후퇴와 명예의 추락-동방의 지배자에서 로마의 불안 요소로

7. 아르메니아 침공과 알렉산드리아의 개선식-안토니우스가 선택한 명예 회복의 길 (기원전 34년)


제9장 권력 균형의 변동-일리리아 전역(戰役)과 알렉산드리아 분봉, 그리고 원로원의 분열(기원전 35~32년)

1. 일리리쿰과 달마티아 전역(戰役) – 북동 변경을 정리하다 (기원전 35~33년)

2. 알렉산드리아의 분봉식 ― 사건의 구조와 실제 내용 (기원전 34년)

3. 형식상 ‘삼두정’, 실제로는 폭풍전야 (기원전 33년)

4. 아그리파의 로마 재정비- 옥타비아누스 체제의 귀착점 (기원전 33년)

5. 안토니우스파 집정관의 전면 등장- 원로원의 분열 (기원전 32년)

6. 안토니우스의 유언장 공개-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 선포 (기원전 32년)


제10장 악티움으로 가는 길 – 전쟁 체제 속의 두 권력 (기원전 32~31년)

1. 전쟁 선포의 여파 – 두 진영의 최종 정렬

2. 이탈리아와 서방의 동원 – 옥타비아누스의 ‘전시 체제’ 구축

3. 동방 진영의 결집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동맹

4. 전쟁 준비의 비대칭 – 군단과 함대 운용 구도의 차이

5. 그리스 서부로의 이동 – 악티움 이전의 해상과 육상 작전

6. 동맹의 이탈과 내부 동요 – 동방의 균열이 드러나는 시점

7. 악티움 전날의 두 진영 – 정치와 심리의 최종 대비


제11장 악티움 해전-제국의 분기점을 낳은 그 하루 (기원전 31년 9월 전후)

1. 대치의 마지막 며칠 – 폭풍과 소모가 만든 결단

2. 9월 2일 ― 출구가 열리던 아침

3. 바다 위의 계산 ― 전열이 무너지는 방식

4. 이탈의 결심 ― 세 사람의 다른 생각

5. 바다에서 육지로 번지는 붕괴-해체된 함대와 남겨진 군단

6. 군단의 항복-동맹의 이완


제12장 – 알렉산드리아 함락- 단일 중심의 확정 (기원전 31~29년)

1. 전쟁이 멈춘 자리 ― 동방 결속의 붕괴와 군단의 방향

2. 승리의 고정 ― 군단과 본국의 정리

3. 알렉산드리아 ― 상실 이후의 재구성

4.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 항구의 배신과 묘실의 종결

5. 삼중 개선식-승리자의 귀환과 닫히는 야누스의 문


제13장 – 아우구스투스- 공화정 복귀라는 거대한 기만 (기원전 28~23년)

1. 보이지 않는 손 ― 원로원의 정화 (기원전 28년)

2. 아우구스투스 – 정권 복귀 선언과 거절의 수사학 뒤에 남은 신성한 권위(기원전 27년)

3. 속주의 분할과 지배 ― 군단과 세입의 보이지 않는 독점 (기원전 27~24년)

4. 제2차 정착 ― 황제 체제의 완성과 새로운 시대의 정오 (기원전 23년)


제1장 카이사르 암살

거인의 죽음과 그의 초라한 후계자 (기원전 44년)


1. 암살의 여파-공화정 수호자들과 시민의 반응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라는 날은 로마사의 한 획을 그은 날이다. 로마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소식이 전해지면서 로마 시민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카이사르는 서유럽을 정복한 영웅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타도하려던 반대파를 내전을 치르면서까지 굴복시키고도 결국에는 모두 포용한 사람이었다. 불과 한 세대 전, 마리우스와 술라의 정치적 대립을 통해 수천 명 정적을 피의 숙청으로 몰아넣었던 공포감이 로마 시민들 기억엔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정적을 향한 분노의 피바람을 원치 않았다. 그의 높은 관용 정신은 로마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원로원이 그의 신격화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사실은, 그 인상이 얼마나 강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까지 로마 역사상 신으로 격상된 인물은 700년 전에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밖에 없었다. 이렇듯 그가 구축해온 안정의 이미지가 컸던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이 남긴 충격 역시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만큼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가치는 특출났다.

시민들의 뜻밖의 반응에 젊은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14명의 암살자는 로마 공화정을 바로 세우려던 계획이 순조로울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죽은 다음 날, 불과 6개월 전에 써서 베스타 신전에 맡겨 놓았던 유언장이 공개된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자신의 후계자를 지목해 두었다. 그러나 유언장에 적힌 이름은 로마 사회가 예상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카이사르에게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그는 로마 시민이 아니기에 적법한 상속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의 성년 남성이 후계자로 지명된 것도 아니었다.

유언장엔 당시 18살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을 명시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두 누이 중 작은 누이의 외손자로서, 로마 시민 다수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인물이었다. 카이사르 가문의 오랜 세월 쌓아온 정치적 위상과 달리, 옥타비아누스 가문은 원로 귀족층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로마 귀족 가문의 전통이 살아있는 자기 이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까지 물려주었다.

사실 카이사르의 이 결정이 즉흥적이었을 가능성은 작다. 당시 55세의 건장했던 카이사르는 부친을 일찍 잃은 옥타비아누스를 장차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준비시키려 했던 정황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행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암살로 유언장이 예상보다 일찍 공개되면서, 이 결정은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현실이 되었다.

그 결과, 유언장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세 사람의 이해관계에 휘말리게 된다. 후계자로 지목된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 생전 권력 운영의 핵심에 서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이 격변의 시기에 로마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였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이후 이들 각자에게 전혀 다른 양상으로 영향을 끼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겨우 소년티를 벗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는 어머니의 외삼촌이었다. 다시 말해 촌수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카이사르에겐 옥타비아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랄 수 있는 큰 누이의 아들, 즉 성년으로 성장한 외조카도 둘이나 있었다. 더구나 옥타비아누스는 건강이 좋지 않아 걸핏하면 앓아눕는 ‘아이’였다. 실제로 훗날 긴박한 전쟁 와중에도 건강 이상으로 고생하는 횟수가 적지 않을 정도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천하의 영웅인 종조부가 자신 같은 나약한 먼 친척 아이를 후계자로 지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젊은 군인이었다. 그는 카이사르와 함께했던 갈리아 원정 당시, 카이사르의 높은 명성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원로원의 탄핵 움직임이 보이자 재빨리 수도 로마로 돌아와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호민관만이 원로원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기에, 그는 그 권한을 이용해 카이사르를 향한 탄핵 시도를 가로막았다. 그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원로원 공화파의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치를 때, 그는 군단의 중추인 기병대장으로 활약하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토록 카이사르를 추종해온 이 38살 남자를, 독재관 역시 공동 집정관에 앉힐 정도로 아끼던 사람이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안토니우스의 실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유명한 날, 마침 로마에 머물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역시 카이사르의 유언장 내용을 접했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명시한 유언장은 여왕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겼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료들을 종합하면,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나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한 언급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오래 머물지 않고 로마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실망감을 삭히며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카이사르와 함께 그해의 공동 집정관이었다. 카이사르가 사라진 지금,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광대해진 제국에 즉각적인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은 그뿐이었다.

더구나 유언장에 후계자로 지목된 그 ‘어린아이’는 카이사르 명령으로 지난해부터 멀리 떨어진 마케도니아에 머물고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힐 만한 상황이었다.

그는 당장 행동에 나선다. 카이사르 저택에 있던 금고를 자기 집으로 옮겨놓는 것으로 그의 행동은 시작되었다. 금고 안엔 카이사르가 아시아의 대국인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비축해 둔 1억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돈이 들어있었다.

파르티아는 9년 전 로마의 대군을 무참히 패배시키고, 당시 포로로 잡힌 1만 명이 넘는 군단병들이 아직도 노예 상태로 남아 있는 나라였다. 그런 로마의 유일한 맞수를 상대로 설욕전을 벼르던 카이사르가 2~3년을 예상한 전쟁자금이었다. 카이사르가 내전 기간 군단병들의 연봉을 두 배로 올려주었어도 600세스테르티우스를 넘지 않는 시절이었으니, 1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조건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열여덟 살 옥타비아누스보다 안토니우스가 훨씬 유리한 정치적 출발선에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2. 거인의 가정에서-옥타비아누스의 성장 과정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에서 40킬로 떨어진 시골 벨리트라이(오늘날의 이탈리아 벨레트리)에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이사르의 작은 누이인 율리아 미노르의 딸 아티아를 어머니로 둔 그의 정식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였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이탈리아 남부 투리이 일대에서 반란을 진압한 일을 기념해 아들에게는 ‘투리누스’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주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라는 호칭은, 로마의 양자 관습에 따라 양자 이전 가문의 이름을 반영한 로마식 명명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로마 시민들에게 이름은 가문의 지위와 정통성을 가늠하는 도구였다. 유언장에 의해 한 ‘소년’이 카이사르의 이름을 계승하자, 카이사르 반대파들은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어려웠다. 대신 그들은 이름 사용 방법을 조정하는 쪽을 택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키케로였다. 그는 연설과 서신에서 의도적으로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피하면서 ‘대단치 않은 옥타비우스 가문 사람’이라는 의미인 ‘옥타비아누스’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지닌 상징성과 기억을 차단하고, 아직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 호칭은 곧 그의 정치적 위상을 드러내는 잣대가 되었다. ‘카이사르’라고 부르는 순간, 그를 유언의 계승자로 인정하는 셈이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라고 부르는 순간, 그는 아직 시험 단계에 있는 소년으로 남게 된다. 같은 인물을 두고도,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거리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유언장의 효력까지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을 둘러싼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서의 날카로움이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그가 권력의 중심에 접근할수록 점점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생전에 스스로를 ‘옥타비아누스’라고 칭한 적이 없었던 인물을, 후대가 그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 점은 공화정 말기 로마의 정치적 명명 관행이 남긴 역설을 보여준다. 이 호칭은 당대 인물들을 구분하기 위한 후대의 편의적 명명으로 반복 사용되며 굳어졌다. 그렇기에 본서에서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정식 부여받기 전까지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카이사르’보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귀족은 아니지만, 중상층 엘리트 가문인 기사 계급이었다. 그래도 그는 거의 귀족들만 차지하는 법무관에 가문 최초로 당선되어 활동했다. 행정 고위직인 법무관이나 집정관의 임기가 끝나면 속주 총독으로 나가게 되는 로마 정계의 관습에 따라, 그는 마케도니아 속주의 총독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당시 행정과 군사, 양면에서 나쁘지 않은 평판을 얻은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정치 경력이 한창 확장되던 시점에 사망한다. 만약 그가 단명하지 않았다면 로마 최고 권력인 집정관 출마까지도 가능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죽을 당시 그의 아들 옥타비아누스는 네 살이었다.

옥타비우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곧 재혼한다. 그런데 로마 상류층 사회에서는 여자가 재혼할 때 전남편 자식들을 데려가지 않고 친정에 맡겨 교육하는 일이 거의 관례에 가까웠다. 옥타비아누스와 여섯 살 위인 누나 옥타비아 역시 이 관례에 따라 외할머니 율리아 미노르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의 외조부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는 법무관을 지낸 인물로, 그 경력만으로도 원로원 의원 신분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역사에 특별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그는, 공화정 제도 안에서 일정한 선을 넘지 않은 중견 관료에 가까웠던 것 같다. 역사가들은 그가 옥타비아누스가 태어나기 전이나 직후에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율리아 미노르는 딸인 아티아가 재혼할 당시 어머니가 생존해 있던 친정으로 돌아와 살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두 누이 중 맏누이 율리아 마이오르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지만, 작은 누이인 율리아 미노르, 즉 옥타비아누스의 외조모에게는 아들이 없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잠시 로마인들의 여성 이름 관습을 짚을 필요가 있다.

로마에서는 딸에게 개인 이름을 붙이기보다, 가문 이름을 여성형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율리우스 가문의 딸은 율리아, 안토니우스 가문의 딸은 안토니아, 옥타비우스 가문의 딸은 옥타비아라 불리는 식이다. 같은 가문에서 자매가 태어나면, 출생 순서에 따라 마이오르(큰), 미노르(작은), 테르티아(셋째), 콰르타(넷째), 퀸타(다섯째)와 같은 여성형 서수(序數)를 이름 뒤에 덧붙여 구분했다.

율리아 미노르의 친정은 곧 동생 카이사르의 집이기에, 결과적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어릴 때부터 카이사르 집안에서 살게 된다.

그 집안은 카이사르 모친인 아우렐리아가 지키고 있던 율리우스 가문의 중심이었다. 오랜 세월 가문의 위신과 일상을 관리해 온 그녀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집안을 흔들림 없이 유지했고, 그 곁에서 딸 율리아 역시 가문의 관계망을 떠받치는 사람이었다.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그렇게 로마 귀족 할머니들의 기품과 권위, 그리고 절제된 강인한 기질 속에서 자란다. 이 보호와 영향의 환경에서 그는 서서히 카이사르의 이름과 무게에 익숙해지며, 장차 그 이름을 이어받아 로마의 운명을 짊어질 사내로 길러진다.


키케로


그가 성장하던 무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서 게르만족의 압박을 차단하기 위해 서유럽 전역에 대한 정복 전쟁을 지속하던 기간이었다. 갈리아를 평정하고 게르만 세력을 라인강 동쪽으로 밀어낸 뒤, 그 강을 로마의 사실상 국경으로 고착시키기까지 약 8년의 기간이 필요했다.

이 기간에 카이사르는 전쟁이 멈추는 겨울에도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총독 관저가 위치한 갈리아 속주에 머물며 군단과 행정 조직을 통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로마에서는 그의 명성이 전설처럼 회자 되었지만, 집안 일상은 그의 부재 속에 별도의 시간으로 흘러갔다.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는 전장에서 전해지는 소문과 이야기로만 대하는 존재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열세 살 되던 기원전 49년 1월 11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넜다. 이 사건은 이후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남을 만큼, 로마사의 흐름을 근본에서 바꾸는 계기였다.

로마법에 따르면, 속주에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던 총독이나 장군은 국경 밖에서 군대를 해산한 뒤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다. 이를 어기면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가 되었지만, 카이사르는 그 법을 따를 수 없었다. 그가 만약 군대를 해산하고 수도 로마로 들어가면, 갈리아 전쟁 동안 정치적 입지가 커진 자신을 타도하려는 원로원파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후대의 사료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널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쳤다는 말을 전하지만, 이 표현이 실제로 현장에서 외쳐졌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이 도하가 곧 내전의 시작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 본국인 이탈리아로 진입한 뒤에도, 원로원파의 군사적 중심에 서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반복적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로마는 피할 수 없는 내전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차기 갈리아 총독으로 내정되어 있던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를 비롯한 휘하의 장군과 장교들이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들을 배신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의 이탈을 막으려 들지 않았고, 공개적인 보복도 가하지 않았다. 원로원파의 핵심 인물이며 카이사르의 최대 정적이었던 키케로마저 이후 서신에서, 그의 관용적 태도에 감복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적을 정도였다.

그의 관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중무장 보병 4만7천과 기병 7천기의 폼페이우스군과 중무장 보병 2만2천에 기병 1천기의 카이사르군이 그리스의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히스파니아(스페인) 반란(세르토리우스 전쟁, 기원전 76~71년)을 평정하고, 해적을 섬멸하며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동방 원정을 통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를 정복해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라 불렸다. 그의 일생은 약관의 시절부터 오히려 카이사르를 뛰어넘을 정도로 찬란한 영예의 삶이었다. 공화정 말기의 로마에서 그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였으며, 원로원의 수호자였다.

이날 맞선 두 장군은 한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더불어 로마를 함께 통치하던 삼두(三頭)의 동지기도 했으나, 이제는 제국의 운명을 걸고 서로의 목을 겨누었다. 역사가들이 ‘파르살로스 회전’이라 이름 붙인 이 전투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칸나이 회전’,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설욕한 ‘자마 회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상대로 승리한 ‘이수스 회전’과 함께, 고대사에서 역사의 분수령으로 꼽히는 회전으로 나란히 언급된다.

이 대회전이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면서 폼페이우스군 대부분 병력이 포로가 되었다. 같은 로마인끼리의 전쟁이기에 서로 치열하게 싸우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폼페이우스군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카이사르의 엄명 때문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카이사르는 포로들 앞에서 격정적으로 연설했다.

“내전이 끝나게 된 지금, 우리의 모든 적대관계는 이제 의미가 없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방식대로 로마를 위해 싸웠을 뿐이다.”

그런 뒤 그는 포로들에게 자신의 군단으로 들어오든가, 고향으로 돌아가든가,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그의 관용은 전장에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내전의 승리로 로마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에도 그는 원로원파 인사들을 대거 사면하며 정치 무대에 복귀시켰다. 한때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들에게도 그는 체계적인 보복이나 숙청을 가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키케로였다. 정치적 견해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었어도 카이사르는 그를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키케로 역시 사면을 받아 로마로 돌아온 이후 서신을 통해 카이사르의 관용 정신에 공개적으로 감사했다.

다만 폼페이우스는 패전 뒤 이집트로 도주했다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권력자들의 판단에 따라 살해되었다. 또한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끝까지 저항을 이어간 일부 원로원파 인사들도 전사하거나 자결을 택했다. 이는 카이사르의 명령이나 의도와는 무관한 사건이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에게 물자와 병력을 지원했던 동방 속주들에 대해서도 보복을 자제하고, 기존의 행정 체계를 유지하며, 질서의 복원을 위해 노력했다. 이 일관된 태도는 내전 이후의 로마를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이기도 했다.

원로원은 내전 뒤 국가의 안정을 위해 힘쓴 카이사르에게 전례 없는 영예를 차례로 부여했다. 그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종신 독재관에 선출되었고,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 역시 이 시기에 부여되었다. 이에 더해 원로원은 개선식의 상징이던 월계관과 자주색 복장, 그리고 황금의자를 평소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동시에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신체를 침해하는 행위를 법적, 종교적 범죄로 규정하고, 그를 보호하는 결의와 음모 금지 결의를 잇달아 통과시켰다. 이로써 그는 장군이나 집정관의 권력을 넘어 국가 자체의 상징으로 격상되었다. 내전을 끝낸 승자의 권력이 이제 제도적 승인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결정들로 카이사르와 원로원 사이에 일정한 협력과 융합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낳으면서, 그는 자신을 경호해왔던 게르마니아와 히스파니아 호위대를 해산해버렸다. 카이사르 역시 원로원의 정치적 의사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제도적 권위에 대한 신뢰가 개인적 안전을 대신할 수 있다는 판단은, 훗날 그를 암살할 수 있는 토대를 스스로 열어주는 결과가 되었다.


로마 원로원, 가운데 앉은 사람이 집정관


로마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 오만한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내고 왕정을 폐지한 기원전 509년 이래 장기간 공화정 체제를 유지한 국가였다.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국가의 재정과 외교, 행정을 지도하며 국정을 이끌었지만, 집정관을 비롯한 여러 행정관 선출과 법적 정당성은 민회를 통해 시민에게서 나왔다.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가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해 최고 권력을 분산시켰고, 이 집정관들은 임기 1년 동안 국가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집정관의 연임을 막을 법 규정은 없었으나, 대개 10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재선되는 관행이 제도처럼 기능했다. 또한 민회 가운데서도 평민만이 참여할 수 있는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들은, 귀족 원로원이나 집정관의 조치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마련된 제도적 장치였다. 호민관에게는 귀족 권력의 전횡을 막기 위해 법안이나 행정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신체 불가침성이 보장되었다. 이는 그 거부권이 물리적 위협 없이 행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이처럼 원로원의 주도권과 민회의 승인, 그리고 호민관의 거부권이 맞물려 작동하는 구조는 로마 공화정의 특징이었다.

그렇기에 로마에서 ‘독재관’이란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만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던 관직이었으며, 법으로 정한 임기도 6개월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 정치가 언제나 법과 관행에 의해서만 지탱된 것은 아니었다.

30여 년 전, 무력을 앞세워 독재관에 오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수천 명의 정적들을 죽여가며 로마 체제를 개혁했다. 역사가들로부터 공화정 로마 최고의 독재자라는 악평을 듣는 그 역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난 2년 후엔, 독재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정계를 은퇴해버렸다. 이런 나라에서 한 개인에게 절대권력을 종신토록 보장한다는 것은 공화정 로마 역사에 없던 일이었다. 그만큼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카이사르의 특별성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따지고 보면 고대의 공화정은 도시국가 규모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반도를 넘어, 서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는 ‘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지중해가 로마의 내해로 불리게 된 이 당시, 각지에 흩어진 로마 시민들이 해마다 수도 로마에 모여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는 기존 방식은 현실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공화정의 제도는 존속했지만, 그것이 전제하던 참여의 조건은 더 이상 충족되지 못했다.

이런 구조적 변화를 카이사르는 명확히 인식했다. 그는 내전과 이후의 포용 정책을 거치며, 기존 공화정만으로는 확장된 로마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점차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원로원 엘리트는 새로운 통치방식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나, 다른 이들은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독재관에 오른 뒤 카이사르는 누적된 로마의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국가를 개조해 나갔다. 정치, 재정, 금융, 농지, 행정, 사법, 도시 정책은 물론, 시민권 확대와 속주 통치, 사회 기강 정비에 이르기까지 개혁의 범위는 전례가 없었다. 그는 계절과 어긋나 있던 달력마저 개정해 율리우스력을 제정했다. 이 율리우스력은 1582년 그레고리력으로 개정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서구 세계의 기준이 되었다.

개혁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동원한 인물들은 과거의 정적과 측근, 기사 계급과 해방노예를 가리지 않았다.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도 그는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배치했다.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현직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쳤을 때, 카이사르는 이를 공개적으로 거절하면서 그 사실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이런 태도는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한 손에 쥔 카이사르조차 로마의 체제 전환에 따르는 정치적 부담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이 미완의 체제 전환은, 그의 후계자가 훗날 긴 기간에 걸쳐 완성한다.

이 시기, 청년으로 성장하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의 정점에 선 카이사르의 보호와 관심 속에서 지냈다. 로마인들이 존경과 찬사를 보내던 인물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그 존재가 지닌 무게를 체감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서유럽 전쟁으로 바쁜 와중에도, 집 안에 머무는 종손자의 안부를 챙기며, 누이 율리아와 아내 칼푸르니아에게 교육과 생활 지침에 대한 편지를 꾸준히 보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는 지금까지도 절제된 문체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당시 최고의 문예 비평가이기도 했던 키케로 역시 카이사르의 문장을 두고, 이성과 품격이 결합 된 문체라고 평한 바 있다. 이런 종조부의 편지를 접하며, 옥타비아누스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와 성장한 그를 가까이에서 관찰했을 때, 그는 이 소년이 단순한 친족 이상의 인물이라는 판단에 이른다. 옥타비아누스에게서 보인 것은 과묵함 속의 집중력과 감정을 절제하는 인내심, 그리고 판단의 중심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성향이었다.

다만 그는 아직 군사적 경험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이 점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결정적 결함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정치와 제도의 틀을 먼저 정비한다면, 후계자가 직접 군사적 재능을 증명할 필요는 줄어들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남긴 중요한 조치 중 하나가 옥타비아누스의 곁에 또래의 청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붙여준 것이었다. 아그리파에게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알아본 카이사르의 판단은 훗날 반복해서 입증된다. 아그리파는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부족한 군사적 능력을 보완하며, 생애 전반에 걸쳐 가장 신뢰받는 동반자로 자리 잡는다.

카이사르에겐 파르티아 원정이라는 숙원이 있었다.

9년 전, 자신과 함께 삼두의 일원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시아의 강국인 파르티아를 침공했지만, 드넓은 사막에 갇혀 고통스러운 전투를 치르다가 완패했다. 그 전쟁에서 사령관인 크라수스도 전사하면서 군단기마저 빼앗겼다. 로마 최고의 재산가인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오랜 정치적 동지일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거금을 선뜻 내어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로마인들은 군단기를 빼앗기는 것을 전쟁에 패한 것보다 더 치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파르티아엔 당시 포로로 잡힌 로마 군단병들이 아직도 노예처럼 연명하고 있었다. 로마 시민인 군단병 포로와 군단의 깃발이 적지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지속적인 로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카이사르는 내전을 끝내고 정권을 잡자마자 이 문제를 더는 미룰 수 없어 파르티아 원정계획을 세웠다.

카이사르는 원정군을 편성하면서 1차로 소집된 6개 군단을 마케도니아 해안의 아폴로니아에 집결시켰다. 옥타비아누스도 그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부탁하자, 카이사르는 쾌히 승낙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불과 몇 달 전에도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이 히스파니아인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킨 ‘문다전투’에 카이사르의 허락으로 종군한 적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작성한 직후, 옥타비아누스를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 아폴로니아로 보내 원정군에 합류하도록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아폴로니아 원정군 기지에서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을 듣게 된다.



다운로드.png 아그리파


3. 아폴로니아 원정군 합류-평생 친구들을 얻다

옥타비아누스는 훗날, 그리스 아폴로니아에서 생활했던 6개월이 유난히 평온하고 충만했던 시절이라고 술회한다. 그는 로마에서 그리스로 건너갈 때, 아그리파 외에도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또 다른 두 친구와도 동행했다.

당시 무력으로 지중해 세계를 석권한 로마지만, 문화적 소양은 그리스를 따르지 못했다. 귀족이나 기사 계급, 심지어 해방 노예라 할지라도 로마에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그리스로 유학시켰다. 이후 유학에서 돌아온 그들 앞엔 상당한 사회적 대우와 존경심이 뒤따랐다. 자녀를 그리스에 유학 보낼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조차 지식이 많은 그리스 노예나 해방 노예에게 자녀들의 과외를 맡기는 것은 필수 교육과정이었다. 당시 로마는 호메로스를 그리스어로 암송할 수 없다면 교양인 살롱엔 얼씬도 못 하는 사회였다.

그런 문화 선진국에 옥타비아누스와 세 친구가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이유로 그리스에 왔든, 자신들의 소양을 넓힐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병영에서 군사훈련을 통해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물론, 아테네의 철학자 아테노도로스 칼리노스의 지도를 받으며 철학 공부에도 매진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 가운데 문화적 자질이 두드러진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가 동료들의 공부를 도왔을 것이다.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이 귀족 집안 도령은, 아그리파와는 달리 군사나 공직의 전면에 나서기보다 평생 비공식적인 조언자이자 조정자로서 옥타비아누스를 보좌하게 된다.

이 사람은 문화적 소양은 깊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명성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시를 쓰긴 했어도 문학사에 중심적인 작가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로마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을 초대해 호사스러운 연회를 벌이는 일이 평생 끊이지 않았다. 그 연회엔 로마 제일의 권력자로 부상한 옥타비아누스도 자주 참석한다. 그는 자신의 살롱에 드나드는 가난한 문인들을 후원하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다.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가 그의 튼튼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오늘날 기업, 또는 부유한 사람들이 문화인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 벌이는 사업을 ‘메세나 운동’이라 칭한 것도, ‘마에케나스’라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사치와 자유로운 성적 규범이었다.

모든 면에서 삶 자체가 초호화판인 그는, 자기 집에서 거의 매일 열리는 연회에 값비싼 비단옷과 각종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는가 하면, 거리를 거닐 때도 그런 행색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지식인 사이에 ‘검소의 미덕’이라는 생활방식이 은근하게 퍼져나갔지만, 이 사람은 오히려 사치의 정점을 생활의 미덕으로 여겼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로마의 명사들 앞에서 자신을 수행하는 남자 노예에게 사랑의 노래를 당당하게 바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런 태도는 동시대인들에게도 특이하게 보였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다. 정치 인생 대부분이 노심초사의 연속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는 정반대의 삶이었다. 그런데도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런 독특한 친구가 중요한 조언자이자 조력자로 남는다. 그는 마에케나스의 말이라면 거의 수용하는 믿음을 거두지 않을 정도로 평생 변함없이 친밀한 사이를 유지한다. 독자들은 이후의 전개를 통해 그 이유를 점차 확인하게 될 것이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로마와 주변 지도

옥타비아누스가 마케도니아의 아폴로니아로 떠날 때 함께 한 세친구, 즉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 그리고 또 다른 한 친구가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라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마에케나스와는 달리 아그리파처럼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 아그리파와 함께 반란군과의 전쟁을 주도하면서 상당한 공을 세운다. 또한 젊은 나이에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전선에서 여러 군단을 지휘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중요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옥타비아누스를 배반할 음모를 꾸미면서,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와는 다른 운명을 맞는다. 사실을 알게 된 옥타비아누스가 상의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를 불러들여 체포한 뒤, 결국 참수형에 처한다.

아폴로니아에 있을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을 전해준 것은 공적인 보고 체계였다고 보기 어렵다. 스웨토니우스나 아피아노스, 그리고 디오 카시우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고대 역사가들도 로마 소식이 아폴로니아에 전해진 내용은 밝혔지만, 그 경로를 기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대에는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가 사적으로 소식을 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으며, 실제 전달자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가신이나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자기 삶에 상징적 존재였던 종조부가 비명에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면서, 암살자 일당 중에 그가 평소 아끼던 젊은이들이 여럿이나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중 친족관계의 두 사람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대표적이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젊은이였다.

아버지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었을 때,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여덟 살에 불과했다. 그 뒤로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로마의 다른 젊은 미망인들처럼 재혼의 길을 택하지 않고 가문의 재산과 인맥을 직접 관리하며 귀족 사회의 중심에 남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훗날 로마 정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한 남자와 깊은 사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평생 정략결혼과 이혼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도 이 세르빌리아와는 결혼하지 않고 내연의 관계를 지속해 이어갔다. 워낙 호방한 성격인 그는 세르빌리아와의 관계를 숨기지도 않아서, 두 사람 관계는 당대의 유명한 가십거리였다.

브루투스가 성장하는 동안 카이사르는 그를 일관되게 호의적인 태도로 대했다. 브루투스는 여느 귀족 청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이후 학문적 교양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다.

그렇게 장성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국가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 카이사르가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로원파의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전투를 치른다. 골수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삼촌 小카토의 영향 때문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엄격한 공화주의와 도덕적 완고함으로 상징되는 그 인물은, 대 정치가로 이름을 남긴 증조부 大카토와 구분 짓기 위해 역사가들이 소카토로 분류하는 인물이다.

내전이 끝났을 때,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삼촌과 달리 저항을 포기하고 카이사르의 관용에 기대었다. 카이사르 역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로 브루투스의 신변을 보장한 채 로마 사회로 복귀하도록 허용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그에게 법무관에 오를 수 있도록 정치적 후원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권력자로서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초기부터 젊은 장교로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거부할 경우를 대비해 데키무스를 대안적 계승 후보 중 하나로 염두에 둘 만큼 그를 신뢰했다.

그런 인물들이 카이사르 암살의 핵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인생과 로마 역사를 바꾸게 되는 중요한 문서, 즉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읽게 된다. 유언장을 작성한 날은 기원전 45년 9월 15일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날로부터 정확히 여섯 달 전에 작성한 유언장의 원문은 전해오지 않지만, 주요 조항들은 여러 고대 사료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복원할 수 있다.

1.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옥타비우스에게 남긴다.

2.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카이사르의 외조카들)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3. 제1상속인 옥타비우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상속 절차의 대안적 계승자 중 하나로 지목한다.

4. 옥타비우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 집행 책임자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에게 아이가 생겼을 경우,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그 아이의 후견인으로 지명한다.

5. 옥타비우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며, 이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계승한다.

6.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일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 나누어주고, 테베레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조치의 집행 책임은 옥타비우스에게 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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