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시민들이 모르게 한 정치 천재이자 희대의 사기꾼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라는 날은 유럽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날이다.
로마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가치를 뛰어넘을 사람은 2천 년 후인 아직도 유럽에서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이날, 이 경천동지할 소식이 전해지면서 로마시민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젊은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14명의 암살자는 로마 공화정을 바로 세우려던 계획이 순조로울 수 없음을 깨닫고는 허둥댄다.
카이사르는 국토를 두 배나 확장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타도하려던 반대파를 내전을 치르면서까지 굴복시키고도 결국에는 모두 포용한 사람이었다. 불과 한 세대 전, 마리우스와 술라의 정치적 충돌을 통해 수천 명의 정적을 죽고 죽이던 시절이 로마시민들 기억엔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정적을 향한 분노의 피바람을 원치 않았다. 그의 높은 관용 정신은 신의 경지라 할 만했다. 실제로 훗날, 로마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신격화한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때까지 로마 역사상 신으로 격상된 인물은 700년 전에 살았던 건국의 아버지 로물루스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로마인들의 놀라움과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죽은 다음 날, 불과 6개월 전에 써서 여 제사장에게 맡겨 놓았던 유언장이 공개된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여 제사장에게 맡기면서, 이 유럽 역사상 가장 특별한 문서가 겨우 반년 후에 개봉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확실하게 후계자를 밝혀놓았다. 그런데 누가 봐도 그 인물이 전혀 뜻밖의 이름이었다. 카이사르에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난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 외에 적법한 로마인 아들이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겨우 18살밖에 안 되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아이를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유언장에 적어놓은 것을 그 당시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로마 시민들이 카이사르 누이의 외손자라는 아이를 알 턱이 없던 것이다. 로마의 대표적 귀족인 카이사르 가문과 달리 옥타비아누스 가문은 귀족도 아니었다. 물론 카이사르의 계획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55세의 이 건장한 사나이는 아비를 일찍 여읜 옥타비아누스를 차차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교육할 생각이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언장이 공개되자,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당황한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된 옥타비아누스와, 명실공히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3.15 당시 로마에 머물고 있던 야심 가득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바로 그들이다.
겨우 소년티를 벗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는 어머니의 외삼촌이다. 다시 말해 촌수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카이사르에겐 옥타비아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랄 수 있는 외조카도 있었다. 하지만 유언장엔 그에게 재산 일부를 나누어 주라는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는 건강이 좋지 않아 걸핏하면 앓아눕는 아이였다. 실제로 나중에 긴박한 전쟁 와중에도 복통으로 고생하는 횟수가 적지 않을 정도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배앓이 병을 면밀하게 검토한 역사가들은, 그의 병을 만성적 대장 증후군으로 진단한다. 오늘날 같으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지만, 당시에는 회복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견뎌야 하는 병이었다.
어쨌거나 옥타비아누스는 천하의 영웅인 종조부가 자신 같은 나약한 먼 친척 아이를 후계자로 지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젊은 군단장이었다. 더구나 그는, 카이사르의 높은 명성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원로원의 탄핵 움직임이 보이자, 재빨리 수도 로마로 돌아와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호민관만이 원로원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기에, 그는 그 권한을 이용해 카이사르를 향한 탄핵 시도를 가로막았다. 그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원로원파의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치를 때, 그는 군단의 중추인 기병대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자나 깨나 카이사르를 추종해온 이 38살 남자를, 독재관 역시 공동 집정관에 앉힐 정도로 아끼던 사람이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안토니우스의 실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유명한 날, 마침 로마에 머물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역시 유언장 내용을 즉시 알게 되었다. 거기에 적힌 카이사르의 본심에 이 부유한 여왕은 실망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다. 유언장엔 그녀는 물론,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해서조차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잔뜩 화가 난 이 도도한 여왕은 카이사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애도고 뭐고, 이내 자기의 화려한 선단을 출항시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실망감을 삭히며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3.15가 있던 그해, 카이사르와 함께 공동 집정관이었다. 카이사르가 사라진 지금, 서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광대해진 로마 세계의 유일한 권력자가 된 것이다. 더욱이 후계자로 지목된 그 ‘어린아이’는 카이사르 명령으로 지난해부터 멀리 떨어진 그리스에 머물고 있다. 안토니우스가 거리낌 없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힐 만한 상황이었다.
그는 당장 행동에 나선다. 카이사르 저택에 있던 금고를 자기 집으로 옮겨놓는 것으로 그의 행동은 시작된다. 금고 안엔 카이사르가 아시아의 대국인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비축해 둔 1억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돈이 들어있었다.
파르티아는 9년 전 로마의 대군을 무참히 패배시키고, 당시 포로로 잡힌 1만 명이 넘는 로마 시민들이 아직도 노예 상태로 남아 있는 나라였다. 그런 로마의 유일한 맞수를 상대로 설욕전을 벼르던 카이사르가 2~3년을 예상한 전쟁자금이었으니, 그 규모가 이해될 것이다. 카이사르는 내전 기간 군단병들의 연봉을 두 배로 올려주었다. 그래도 600세스테르티우스를 넘지 않는 시절이었다. 카이사르의 실제 후계자이며, 가문과 이름까지 물려받은 열여덟 살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에서 40킬로 떨어진 시골 벨리트라이(오늘날의 이탈리아 벨레트리)에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이사르의 누이인 율리아의 딸 아티아를 어머니로 둔 그의 정식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은 훗날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키케로 같은 카이사르 반대파들이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 또는 옥타비우스 집안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로 부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훗날 역사가들 역시 이를 따르게 되었고, 그렇게 그의 이름은 실제 이름인 옥타비우스가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중상층 엘리트 가문인 기사 계급의 후손이었다. 그래도 그는 거의 귀족들만 차지하는 이른바 ‘명예로운 경력’을 밟게 되는데, 법무관이라는 직위에 가문 최초로 당선되어 활동한다. 행정 고위직인 법무관이나 집정관의 임기가 끝나면 속주 총독으로 나가게 되는 로마 법에 따라,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을 거쳐 원로원 의원을 지냈지만, 40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죽는다. 만약 그가 단명하지 않았다면 ‘명예로운 경력’의 종착지이자 로마 최고 권력인 집정관 출마까지도 가능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네 살 때였다.
그가 죽자 로마의 대부분 젊은 과부들이 그러듯,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곧 재혼한다. 그런데 로마 상류층 사회에서는 여자가 재혼할 때 전남편 자식들은 데려가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와 여섯 살 위인 누나 옥타비아는 외할머니 율리아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그 당시 율리아는 나이 들어 과부가 된 뒤에 어머니가 생존해 있던 친정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율리아의 어머니는 남동생인 카이사르가 모시고 있었기에,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어릴 때부터 카이사르 집안에서 살게 된다.
그 집안은 카이사르 모친 아우렐리아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율리우스 가문의 심장이었다. 또한 그 딸인 율리아는 그 곁에서 또 하나의 기둥처럼 자리를 지켰다.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그렇게 로마 귀족 할머니들의 강인한 기질 속에서 자란다. 아우렐리아는 아들 카이사르를 정치적 폭풍 속에서 지켜낸 여인이었고, 율리아는 가문을 이어가는 묵직한 버팀목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아버지의 그늘은 일찍 사라졌어도, 외가의 기품과 권위의 영향은 더욱 짙어졌다. 옥타비우스 가문의 피를 타고났으되, 그의 성장 무대는 율리우스 가문이었다. 그 품 안에서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장차 로마의 운명을 짊어지고, 카이사르의 이름을 이어받을 사내로 길러지게 된다.
그 무렵 카이사르는 그동안 꾸준히 계획했던 일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중이었다. 갈리아 총독으로서 게르만족의 준동을 막기 위해 서유럽 정복에 여념이 없던 것이다. 카이사르가 서유럽을 평정하고 게르만족을 라인강 동쪽으로 몰아낸 뒤, 그 전설에 휩싸인 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고착시키기까지는 장장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는 전쟁이 없는 겨울철에도 총독 관저가 있는 갈리아 속주에 머물렀다. 그렇기에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당대의 영웅 할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그의 소식은 그저 풍문으로만 접하며, 어떻게 생기셨을까, 막연하게 상상만 하던 시절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13살 되던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가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넌다. 이 사건은 이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라는 의미의 관용구가 될 정도로 유럽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로마법엔 외국에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는 병사들은 본국인 이탈리아 국경 밖에서 군대를 해산한 뒤 개인적으로 입국해야 했다. 그 법을 무시하면 중죄인 내란 행위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 법을 따를 수 없었다. 그가 만약 군대를 해산하고 개인 자격으로 수도 로마로 들어가면, 갈리아 전쟁 동안 정치적 입지가 커진 자신을 타도하려는 원로원파의 먹잇감이 될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갈리아와 로마 국경선인 루비콘강 앞에서 그는 지난 8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군사들에게 연설하면서 외쳤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하면서도 원로원파의 군사들을 이끄는 폼페이우스에게 끊임없이 회담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내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카이사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정을 한다. 휘하 군단병들에게 거취 선택권을 준 것이다. 자신을 따를 사람은 남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폼페이우스 편으로 가든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때, 자신의 후임으로 원로원파에 의해 갈리아 총독으로 내정된 에노발부스를 포함해 여러 명의 장군과 장교들이 폼페이우스를 선택했다. 카이사르는 놀랍게도 그들에게 섭섭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치열한 내전을 치를 것을 알면서도 격려까지 해주며 모든 개인장비를 갖추어 보내주었다. 원로원파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대정치가 키케로는 그 일로 이 역사 기획자를 고집하는 최대 정적의 관용 정신에 감사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의 관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중무장 보병 4만7천과 기병 7천기의 폼페이우스군과 중무장 보병 2만2천에 기병 1천기의 카이사르군이 그리스의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기어이 정면으로 격돌한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히스파니아(스페인) 반란(세르토리우스 전쟁, 기원전 76~71년)을 평정하고, 해적을 섬멸하며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던 인물이었다. 이어서 그는 로마를 한때 뒤흔들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기원전 71년)을 진압했다. 그는 이후에도 동방 원정을 통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를 정복해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라 불렸다. 그의 일생은 약관의 시절부터 오히려 카이사르를 뛰어넘을 정도로 찬란한 영광의 삶이었다. 공화정 말기의 로마에서 그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였으며, 원로원의 수호자였다.
이날 맞선 두 장군은 한때 크라수스와 더불어 로마를 함께 통치하던 삼두(三頭)의 동지기도 했으나, 이제는 제국의 운명을 걸고 서로의 목을 겨누었다. 역사가들이 “파르살로스 회전”이라 이름 붙인 이 전투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칸나이 회전”,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설욕한 “자마 회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상대로 승리한 “이수스 회전”과 함께, 역사의 분수령이 된 고대의 4대 회전으로 꼽힌다.
이 대회전이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면서 폼페이우스군 대부분 병력이 포로가 되었다. 같은 로마인끼리의 전쟁이기에 서로 치열하게 싸우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폼페이우스군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카이사르의 엄명 때문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카이사르는 포로들 앞에서 격정적으로 연설했다.
“내전이 끝나게 된 지금, 우리의 모든 적대관계는 이제 의미가 없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방식대로 로마를 위해 싸웠을 뿐이다. 너희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그런 뒤 그는 포로들에게 자신의 군단으로 들어오든가, 고향으로 돌아가든가, 또다시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내전이 종식된 이후 원로원파 사람들을 포용하면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반대파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원로원파의 수장인 키케로만큼은 죽여서 포로 로마노 광장에 그 목을 효수해야 한다는 안토니우스의 주장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키케로와 예전의 친구로 돌아가 당대의 문학을 주도했던 두 사람답게 다시 문학 토론을 벌이곤 했다. 다만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도주했다가 자신의 옛 부하에게 살해당했고,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몇몇 원로원파 사람들이 전사했거나 자살했을 뿐이다. 그동안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에게 물자와 병력을 보내주었던 아시아 속국들에도 문책하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원로원은 내전의 회오리 속에서도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높은 관용 정신을 보여준 그에게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종신독재관 취임을 가결하며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어서 그들은 전쟁에 승리한 장군들이 개선식 때만 쓰게 되어있는 월계관을 평소에도 쓰도록 허락했고, 카이사르에 대한 적대행위를 금지하겠다는 서약까지 하게 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그들과 굳건한 융합을 믿었던지, 그동안 자신을 경호해왔던 게르마니아와 히스파니아 호위대를 보란 듯이 해산해버렸다. 하지만 이 일은 나중에 그를 쉽게 암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사실 로마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 ‘오만한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내고 왕정을 폐지한 기원전 509년 이래 모범적인 공화정 국가였다.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국가의 재정과 외교, 행정을 지도하며 국정을 이끌었지만, 최고 권력은 원로원이 아니라 시민에게 있었다.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가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해 최고 권력을 분산시켰고, 이 집정관들은 임기 1년 동안 국가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집정관의 연임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며, 이는 한 사람의 독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장치였다.
또한 민회 가운데서도 평민만이 참여할 수 있는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들은 귀족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한 평민들의 대리인이었다. 그들에게는 법안이나 행정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이 부여되어, 귀족 권력의 전횡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원로원, 민회, 평민회의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체제가 바로 로마 공화국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로마에서 ‘독재관’이란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만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던 관직이었으며, 법으로 정한 임기도 6개월뿐이었다. 물론 법을 중시하는 로마 역사에 법을 무시하는 특별한 일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30여 년 전, 자신의 힘을 앞세워 독재관에 오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수천 명의 정적들을 죽여가며 로마 체제를 개혁했다. 역사가들로부터 공화정 로마 최고의 독재자라는 악평을 듣는 그 역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난 2년 후엔, 독재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정계를 은퇴해버렸다.
이런 나라에서 한 개인에게 절대권력을 종신토록 보장한다는 것은 공화정 로마 역사에 없던 일이었다. 그만큼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카이사르의 특별성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따지고 보면 고대의 공화정은 도시국가였을 때 활발한 기능을 발휘하는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이젠 로마 본국이 이탈리아반도 전체로 확장되었고, 서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모두 속국이 된 현실이었다. 지중해가 로마의 내해로 불리는 지금, 그 광대한 지역에 사는 로마 시민들이 1년에 한 번씩 수도 로마에서 벌어지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수도 로마 시민만이 참여하는 선거 행위로는 진정한 공화정이라는 의미가 퇴색된 것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공화주의자들인 원로원파를 내전을 치르면서까지 설득했다. 이제 그의 역사 기획에 찬성하지 않던 반대파들 역시 머리를 끄덕이게 된 것이다.
독재관에 오르자 카이사르는 그동안 쌓였던 로마의 병폐를 없애기 위해 정력적으로 국가를 개조해나갔다.
정치개혁, 통화개혁, 로마시민 자격에 대한 완화 조치, 금융개혁, 농지개혁, 행정개혁, 해방 노예의 등용 문제, 사법개혁, 복지 대책과 실업문제, 그리고 치안 대책과 교통 대책, 지나친 사치를 금지하는 등의 사회개혁, 속주에 대한 통치 문제, 식민정책, 상하수도 재개발, 심지어 계절에 맞지 않던 로마 달력도 개정해 그 유명한 율리우스력(曆)을 제정했다. 이 율리우스력은 서기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개정해서 오늘날까지 거의 전 세계가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력이 나오기까지, 1,627년 동안 유럽과 지중해 세계에서 사용하게 된다.
그의 개혁은 끝이 없었다.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도 예전의 정적과 측근, 노예나 해방 노예 등 다양했다.
로마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카이사르지만 예전의 정적과 그동안 변함없던 측근들의 의미조차 모호해졌다. 그는 누구라도 공평하게 대했고, 과거의 정적들에게도 국가를 위해 자기 재능을 살릴 기회까지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주며 아첨하려 드는 최측근이자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에게 ‘나는 왕이 아니다. 그저 카이사르일 뿐이다.’라고 호통쳤을 정도로 그는 정치적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골수 공화주의자들이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수도 로마의 광장 포로 로마노의 ‘공식 기록’을 새기는 기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기게 했다.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왕의 권위를 받도록 요청했지만, 카이사르는 거절했다.’
이 사건을 통해 왕을 능가하는 절대권력을 가진 카이사르의 이성도, 로마가 왕정이나 제정(帝政)으로 나가기엔 아직 망설였던 흔적임을 후세사람들은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카이사르마저도 망설였던 정치체제는 결국 그의 후계자가 평생에 걸쳐 이룩해낸다.
이 시절, 청년으로 성장한 옥타비아누스는 꿈에 그리던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영웅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나날이었다. 로마인들이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 꿈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옥타비아누스는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서유럽 정복 전쟁으로 바쁘던 시기에도 자기 집에 살게 된 종손자 안부를 물으면서, 누이인 율리아와 아내인 칼푸르니아에게 그에 대한 교육 지침을 꼬박꼬박 챙기는 편지를 보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와 더불어 당대의 으뜸가는 문장가였다. 그가 남긴 저서인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가 지금 읽어도 훌륭한 문장이라는 평판을 들을 정도다. 당시 로마 최고의 문예 비평가이기도 했던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문장에 대해 이렇게 비평했다.
‘카이사르의 문장은 입에서 나오든 글로 쓰든 관계없이 품격이 높고 광채를 발하며, 화려하고 웅장하고 고귀하며,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특징이 있다.’
잘 정제된 문장의 편지를 읽으면서, 옥타비아누스 역시 자신의 교육에 관심을 두는 ‘영웅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하다.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와 소년으로 성장한 옥타비아누스를 그 예리한 눈으로 처음 봤을 때, 이 어린아이가 자신의 후계자감이라는 것을 당장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어리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서 명석함 가운데 과묵한 인내심, 그리고 사고의 중심이 견고하다는 것을 카이사르는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카이사르 자신도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있는 또 하나의 능력만은 이 신기하도록 끌리는 종손에겐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군사적 재능이었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망설임 없이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가 군사적 재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이 평화의 기틀을 닦아주면 된다. 앞으로 남은 시간도 충분하다는 것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카이사르의 염원이었을 뿐, 신의 계획은 아니었다. 신은 옥타비아누스를 가파른 계곡으로 밀어버린 후, 그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겸손과 인내심을 시험해볼 참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카이사르가 죽기 전, 아그리파라는 청년을 자기에게 붙여준 일이었다. 옥타비아누스와 동갑내기인 그에게 탁월한 군사적 재능이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후 카이사르의 예리한 판단은 빗나가지 않는다. 아그리파는 죽을 때까지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재능을 보완하며 정치적으로도 성장한다.
카이사르에겐 숙원이 있었다. 파르티아 원정이었다.
9년 전,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시아의 강국이자 사사건건 로마에 반기를 드는 파르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드넓은 사막에 갇혀 고통스러운 전투를 치르다가 완패했다. 그 전쟁에서 사령관인 크라수스도 전사하면서 군단기마저 빼앗겼다. 로마 최고의 재산가인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오랜 정치적 동지일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거금을 선뜻 내어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로마인들은 군단기를 빼앗기는 것을 전쟁에 패한 것보다 더 치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파르티아엔 당시 포로로 잡힌 로마 군단병들이 아직도 노예로 연명하고 있었다. 군단병과 군단의 깃발이 로마인의 영혼이라는 사실은 지중해 세계의 불문율일 정도로 로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카이사르는 내전을 끝내고 정권을 잡자마자 빼앗긴 군단기와 포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파르티아 원정계획을 세웠다.
카이사르는 원정군을 편성하면서 1차로 소집된 3개 군단을 파르티아에서 가까운 그리스 마케도니아 해안의 아폴로니아에 집결시켰다. 옥타비아누스도 그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부탁하자 ‘영웅 할아버지’는 쾌히 승낙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불과 몇 달 전에도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이 히스파니아인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킨 ‘문다전투’에 카이사르의 허락으로 종군한 적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작성한 직후, 이 볼수록 가슴 뛰는 아이를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 아폴로니아로 보내 원정군에 합류하도록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아폴로니아 원정군 기지에서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을 듣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훗날, 그리스 아폴로니아에서 생활했던 6개월이 인생에서 최고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술회한다. 그는 로마에서 그리스로 건너갈 때, 아그리파 외에도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또 다른 두 친구와도 동행했다.
당시 무력으로 지중해 세계를 석권한 로마지만, 문화적 소양은 그리스를 따르지 못했다. 귀족이나 기사 계급, 심지어 해방 노예라 할지라도 로마에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그리스로 유학시켰다. 이후 유학에서 돌아온 그들 앞엔 상당한 사회적 대우와 존경심이 뒤따랐다. 자녀를 그리스에 유학 보낼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조차 지식이 많은 그리스 노예나 해방 노예에게 자녀들의 과외를 맡기는 것은 필수 교육과정이었다. 당시 로마는 호메로스를 그리스어로 암송할 수 없다면 교양인 살롱엔 얼씬도 못 하는 사회였다.
말로만 듣던 그런 문화 선진국에 옥타비아누스와 세 친구가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이유로 그리스에 왔든, 자신들의 소양을 넓힐 천금 같은 기회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병영에서 군사훈련을 통해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물론, 아테네의 철학자 아테노도로스 칼리노스의 지도를 받으며 철학 공부에도 매진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 가운데 문학적 자질이 가장 높은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가 동료들의 공부를 도왔다. 이미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이 귀족 집안 도령은, 아그리파와는 달리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평생 음지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돕게 된다.
이 사람은 문화적 소양은 깊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명성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열심히 시를 썼어도 빼어난 문인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한다. 그 대신 로마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을 초대해 호사스러운 연회를 벌이는 일이 평생 끊이지 않았다. 그 연회엔 로마 제일의 권력자로 부상한 옥타비아누스도 자주 참석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살롱에 드나드는 가난한 문인들을 후원하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다.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가 그의 튼튼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대표적 인물들이다. 오늘날 기업, 또는 부유한 사람들이 문화인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 벌이는 사업을 ‘메세나 운동’이라 칭한 것도, ‘마에케나스’라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 된 사실은 유명하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여성적인 면이었다.
모든 면에서 삶 자체가 호화판인 그는, 자기 집에서 거의 매일 열리는 연회에 값비싼 비단옷과 각종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는가 하면, 거리를 거닐 때도 그런 행색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지식인 사이에 ‘검소의 미덕’이라는 생활방식이 은근하게 퍼져나갔지만, 이 사람은 오히려 사치의 정점을 생활의 미덕으로 여겼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로마의 명사들 앞에서도 자신을 수행하는 남자 노예에게 사랑의 노래를 당당하게 바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정치 인생 대부분이 노심초사의 연속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는 정반대의 삶이었다. 그런데도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런 몰상식하리만치 독특한 친구가 중요한 조언자이자 조력자로 남게 된다. 그에 더해 그는 마에케나스의 말이라면 거의 무조건 수용하는 믿음을 거두지 않을 정도로 평생 변함없이 친밀한 사이를 유지한다. 이제 독자들은 그 이유를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옥타비아누스가 마케도니아의 아폴로니아로 떠날 때 함께 한 세친구, 즉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 그리고 또 다른 한 친구가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라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마에케나스와는 달리 아그리파처럼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후에 아그리파와 함께 반란군과의 전쟁을 주도하면서 상당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겨우 20대 나이에 4개 군단을 거느리는 에스파냐 총독을 지내면서,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곤경에 빠졌을 때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옥타비아누스를 배반할 음모를 꾸미면서,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와는 전혀 다른 운명을 맞는다. 사실을 알게 된 옥타비아누스가 상의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를 불러들여 체포한 뒤, 결국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로니아에 있을 당시, 로마 시민에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을 전해준 것은 공적 경로가 아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 아내인 칼푸르니아의 분부로 옥타비아누스도 어릴 때부터 따랐던 늙은 노예가 소식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스웨토니우스나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안, 그리고 디오 카시우스 같은, 거의 당대 역사가들도 로마 소식이 아폴로니아에 전해진 내용은 밝혔지만, 소식을 들고 온 사람이 ‘누구’라고는 기록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옥타비아누스는 우러러보던 ‘영웅 할아버지’가 갑자기 비명에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면서, 암살자 일당 중에 카이사르가 평소 아끼던 젊은이들이 여럿이나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그중 성이 같은 두 사람,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대표적이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젊은이였다.
아버지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었을 때,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8살이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로마의 다른 젊은 미망인들처럼 재혼하지 않고, 이미 이 전부터 눈이 맞았던 유부남과 본격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 남자가 바로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평생 정략결혼과 이혼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도 연인인 세르빌리아와는 결혼하지 않고 내연의 관계를 죽을 때까지 이어갔다. 워낙 호방한 성격인 카이사르는 세르빌리아와의 관계를 숨기지도 않아서, 두 사람 관계는 당대의 유명한 가십거리였다.
카이사르는 사랑하는 여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교육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도와주었다. 덕분에 그 아들은 그리스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그렇게 장성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국가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 카이사르가 아닌 원로원파의 폼페이우스 편에 서게 된다. 골수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삼촌 小카토(로마의 대 정치가였던 증조부 카토와 구분 짓기 위해 역사가들은 이 사람을 소카토, 증조부는 대카토라고 부른다.)의 영향 때문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내전이 끝났을 때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삼촌과 함께 도주했다. 그러나 끝까지 따라가 그를 사로잡은 카이사르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전전긍긍 기다리던 어머니 세르빌리아에게 얌전히 데려다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전에 승리해 정권을 잡게 된 카이사르는 공직 경험이 전혀 없는 그를 모두가 부러워하는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키살피나(이쪽 갈리아, 알프스 남쪽) 속주 총독으로 보내주었다. 원래 로마법에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을 지내야 속주 총독의 자격이 부여된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가졌어도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던 카이사르가 연인의 아들에게만큼은 ‘낙하산 발령’이라는 특혜를 준 것이다. 게다가 임기가 끝난 이후 그가 로마로 돌아왔을 때, 역시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법무관에 당선되어 활동하는 중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으면서 그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쳤다는 바로 그 브루투스다.
그리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초기부터 젊은 장교로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그의 특출한 능력을 꿰뚫어 본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제1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만약 상속을 거부하면 제2상속자로 지목할 정도로 아끼는 사람이었다. 카이사르가 칼에 찔리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친 것이 사실은 이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런 그들이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라니, 옥타비아누스의 놀라움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어서 자신의 인생과 유럽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게 되는 중요한 문서, 즉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읽게 된다. 유언장을 작성한 날은 기원전 45년 9월 15일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날로부터 정확히 여섯 달 전에 작성한 유언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다.
2.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카이사르의 조카와 또 다른 외종손)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3. 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상속권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돌아간다.
4.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 집행 책임자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에게 아이가 생겼을 경우,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그 아이의 후견인으로 지명한다.
5. 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6.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일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일을 실행할 책임자는 제1상속인으로 한다.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