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후계자의 귀국--- 새로운 천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 소식이 전해진 그리스 아폴로니아의 파르티아 원정군 부대는 당장 발칵 뒤집혔다. 그 혼란 속에서도 원정군 지휘관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부대를 떠나지 말라고 설득한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죽음 소식과 카이사르를 계승할 후계자가 옥타비아누스라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로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카이사르의 젊은 후계자’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책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군을 편성할 당시, 지휘관들 역시 직접 선발되었다. 그들에게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자신의 명예를 규정하는 상징이었다. 그 이름을 계승한 인물에게 바치는 충성심은 쉽게 흔들릴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뒤이어 옥타비아누스 어머니 아티아와 양부인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부부가 급히 써 보낸 편지가 아폴로니아에 도착했다. 집정관을 지낸 노련한 정치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양부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사랑하는 아내의 유일한 아들에 대한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래도록 정계에 몸담아온 필리푸스는, 겉으로 보기엔 법에 따라 평화롭게 굴러가듯 보이는 로마 정치판이, 실은 살벌한 음모와 위선적인 내면을 숨기고 있음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더더욱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런 모든 모순에서 벗어나 음습한 로마 정치 세계 현실을 양지로 끌어내 개혁하려 힘썼다. 그런 카이사르에게 로마 원로원에서는 ‘조국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더 나아가 내전을 거치면서도 반대파를 전면적으로 포용한 카이사르에게 앞으로 신체와 권위를 해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맺었다. 그토록 로마 역사상 최고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던 카이사르도 대낮에 원로원 의사당에서, 그것도 14명이나 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하는 판국이었다. 오랜 세월 로마 정계의 명암을 체험하며 살아온 필리푸스는, 그런 세계 한가운데로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를 들여보내는 결정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아티아 역시 유언장이 공개된 뒤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신중한 결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내용은 전해오지 않지만, 우리는 두 부부의 당부를 다음과 같이 상상할 수 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종조부 유언이 너를 어떤 세계로 불러들일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 세계는 네가 어렸을 때 뛰어놀던 소박한 전원 세계와는 거리가 멀단다.
소년 시절, 가정교사와 유모가 돌봐주던 가족 세계도 아니고, 청년 시절의 유유자적하던 책과 철학의 세계도 아니다.
카이사르가 너를 히스파니아의 문다 전투와 파르티아 원정군에 동행시켰을 때조차, 그곳은 아직 단순한 군사적 경험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네 앞에 놓인 것은 로마의 정치 세계란다.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하며 가치보다 특권을 존중하고, 원칙이 이기심에 굴복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아들아,
네가 만약 카이사르를 계승한다면 그분을 살해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분의 기억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미움까지 함께 받게 되고, 그것은 곧 독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너는 그의 후계자 자리를 사양해야만 한다.
그런다 해도 네 종조부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는 것은 물론,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네 결정을 모두가 존중해줄 것이다.
운명은 결국 카이사르마저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다오.
두 부부의 이 당시 행동을 보면, 필리푸스가 아무리 노련한 정치가라 해도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카이사르가 어째서 그 조그만 소년을 주목했는지 헤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필리푸스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후 로마 정계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인물 역시 필리푸스처럼 판단을 그르친다. 그들은 모두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했고, 카이사르의 안목을 뒤늦게야 이해하기에 이른다.
카이사르가 선택한 인물답게, 옥타비아누스는 어머니와 양부의 우려를 담아 보낸 편지를 읽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이미 유언을 따르기로 결심한 뒤였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결의나 정치적 승인에 의해 양자가 된 것이 아니라, 유언을 수락하는 순간 법적으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다. 이후 벌어진 승인 논쟁은, 이미 성립한 법적 지위를 둘러싼 정치적 다툼에 가까웠다.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친구 세 사람만을 동행한 채 로마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더 놀라운 것은, 아폴로니아에 주둔한 군단병들과 장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카이사르 유언장에 의하면 로마 시민에게 각각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하고, 그 집행인은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라야 했다. 그리고 수도 로마를 가로지르는 테베레강 서안의 카이사르 정원도 시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에 걸맞도록 시민들과 함께 추모 행사를 열어야 한다는 생각도 잊지 않았다. 혈혈단신 18살 이 ‘어린아이’가 과연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된 이 ‘어린아이’는 냉철했다. “내게 이름을 물려주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그분의 원수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옥타비아누스의 머릿속은 꽉 들어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폴로니아의 주둔군을 이용하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아직 어떤 공적 지휘권도 없는 그가 군사를 이끄는 행위는 공화정의 법질서 안에서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이 대담한 결정은 이후 카이사르 휘하에서 오래 복무했던 고참병과 제대군인들 사이에서도 이 젊은 후계자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사르가 어째서 이 젊은이를 후계자로 지목했는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세 친구는 불안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의 막사로 찾아와 밤새도록 토론을 벌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주기를 간청했다. 특히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설득하기 위해 진을 뺐다.
“원정군 사령관 말을 따르십시오. 카이사르 후계자가 군단의 호위 없이 로마로 들어가는 것은 맹수 혓바닥 위로 뛰어드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천하의 카이사르도 속절없이 당했습니다. 그들이 카이사르 후계자는 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세 친구가 밤새도록 설득했지만, 끝내 옥타비아누스의 결심을 바꾸지 못한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는 세친구, 즉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 그리고 살비디에누스와 함께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캄캄한 로마로 불안한 귀국길에 오른다.
그리스에서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항구는 이탈리아 지도의 장화 굽 부분 중간쯤에 있는 브린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이다. 로마로 연결된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인 그 도시는, 아시아로 향하는 이탈리아의 관문이었다. 그렇기에 브린디시움은 파르티아 원정군의 집결지기도 했다. 당시 마케도니아의 아폴로니아로 먼저 이동한 군단을 제외한 8개 군단이 그곳에 집결해 있었다.
이 시기 로마군 1개 군단의 정원이 대략 4,800명에서 6,000명 정도였으니까, 그동안의 여러 전투를 통한 결원을 고려하면 대략 3~4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마케도니아로 먼저 떠난 6개 군단을 합쳐도 수십만 대병을 보유한 아시아의 대국 파르티아를 침공할 군사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일 수 있는 병력 규모였다. 그러나 그리스 문명을 이어받은 국가답게 로마는 전쟁을 병력의 숫자에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군 지휘부의 조직력과 전술, 병사 개개인의 숙련도는 전쟁 수행 능력의 핵심 요소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군사 규모를 적군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카이사르도 갈리아 정복 전쟁 때, 수십만의 적군을 상대하면서도 겨우 3, 4만의 병력만을 꾸준히 거느려서 서유럽을 정복했다.
여담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을 하는 11년 동안, 약 3만 5천 병력을 유지했다. 광대한 아시아 대륙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병참선이 길어져 그 이상의 군사력을 이끌기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정도 군사력으로도 수십만 대군, 심지어 코끼리 떼까지 동원한 적군과 전투를 치렀어도 단 한 차례 결정적인 패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소아시아와 이집트, 그리고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정벌했다. 그러나 오랜 원정에 피로가 쌓인 군사들의 그 유명한 ‘집단항명’ 사건 때문에 인더스강 너머 갠지스를 바라보는 비아스강에서 회군했을 뿐이었다.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서 가장 먼저 계승 발전시킨 것 중 하나가 전투 기법이었다. 그렇기에 그리스의 힘은 쇠퇴해도 문화적 측면은 여전히 넘볼 수 없었지만, 전투력만큼은 그리스를 뛰어넘었다. 그러니 브린디시움에 집결한 로마 병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더구나 그 중엔 갈리아 원정 시절부터 카이사르 휘하에 있던 역전의 고참 군단도 여럿이었기에 가공할 무력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8일에 이 브린디시움에 집결한 병사들을 이끌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아폴로니아 원정군 주둔지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3일 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이후 브린디시움에 집결한 병사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수도 로마의 불안한 정국을 예의 주시하는 중이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로마는 혼란이 지속되었다.
수도 로마 시민 대부분인 카이사르 지지자들과 그와 함께 종군했던 베테라누스(veteranus, 오랜 군 복무를 마친 사람, 또는 노련하다, 라는 의미. 베테랑의 어원. 이 글에서도 이후엔 베테랑이라고 표기함)들이 연일 암살자들을 성토했다. 그러자 암살자들은 공개적으로 시내에 머무르기 어려웠다. 공화주의 원로원파의 상징적 인물인 키케로 역시 나폴리 인근의 푸테올리 별장으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캄파니아 지역 해안가인 푸테올리는 경치가 수려해서 로마 재력가들이 별장을 짓기 좋은 곳이었다. 옥타비아누스 어머니 아티아와 그 남편인 필리푸스도 수도 로마가 어수선한 이 시기에 키케로 별장 근처에 있는 그들 별장으로 옮겨 와 세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가 혼란 속에서도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분주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실제 후계자를 자처하며 확고한 정치적,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미망인 칼푸르니아를 통해 금고를 손에 넣는 한편, 카이사르의 문서 담당 비서관이었던 가이우스 파비리우스를 포섭했다. 그리하여 파비리우스가 관리하던 카이사르의 법령 초안이나 정책구상 같은 각종 문서가 그의 손에 들어간다.
이어서 그는 공모자들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자 3월 17일 원로원 소집을 발표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틀 후인 이날, 텔루스 신전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는 유례없는 협상장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암살 주도자들은 자신들을 ‘자유의 수호자’라 주장했지만, 원로원 의원 다수는 민중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동조’를 망설였다. 안토니우스는 이 틈을 이용해 카이사르의 행정 행위에 대한 전면 승인을 요구했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서 내놓은 결정과 조처를 모두 유효로 인정하게 한 것이다. 그는 또한 “카이사르의 하던 일과, 하려던 일까지도 모두 유효하다”는 결의와 함께, 암살자들과 그 공모자들에게는 사면을 부여하는 절충안을 통과시켰다. 그런 이후 카이사르가 계획한 앞으로의 정국 상황을 적은 문서를 공개했다. 거기엔 향후 로마를 이끌 고위 행정관 지명자와 각 속주의 총독 명단이 들어 있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43년의 집정관으로는 카이사르의 충직한 부하 아이울루스 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에트로니아누스가 예정되었고, 전략적 요충지의 속주 총독에는 카이사르파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집정관 임기가 끝나는 안토니우스, 시리아는 파르티아 원정으로 떠날 카이사르 대신 보궐 집정관으로 내정된 돌라벨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지금의 남프랑스)에는 카이사르의 충복인 레피두스가 각각 임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문서엔 뜻밖의 이름도 있었다. 카이사르 암살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지명된 것이다. 그것은 곧 안토니우스와의 충돌을 예고하는 불길한 전조였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명목 아래, 이 모순된 인사를 승인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로마의 권력 구조는 불안정한 균형 위에 놓인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가장 충직한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젊은 장교로서 원정에서 성실한 지휘와 실무 능력을 보여준 그는 장군의 꾸준한 신임을 받았다. 그 총애는 실제 권력으로 이어져 카이사르는 암살 전에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직을 그에게 맡겼다. 로마 본국인 이탈리아와 북방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알프스 남쪽은 보통 원로원에서 검증된 정치인에게 돌아가는 자리였다. 그런 만큼 통상 여러 군단이 상주하지만, 필요하다면 군단 수를 더 늘릴 수도 있는 속주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군사 경력밖에 없던 젊은 그를 그 자리에 앉힐 정도로 깊이 신뢰했다. 심지어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그 대안 중 하나로 삼으려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카이사르는 그를 가문의 일원처럼 믿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3월, 그는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 더 나아가 암살 당일, 회의에 나가기 망설이는 카이사르를 설득해 회의장으로 안내한 인물도 바로 그였다.
카이사르 장례식 직후, 분노한 민중이 로마를 뒤흔들자, 그는 곧장 자신에게 배정된 속주 갈리아 키살피나로 물러났다. 한때 후계자 지위까지 보장받았던 자가 이제는 쫓기듯 속주로 달아나게 된 것이다.
텔루스 신전 회의가 있던 그날 밤, 안토니우스는 놀랍게도 현직 법무관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즉 암살자 대표들을 초청해 화해의 만찬을 가졌다. 더구나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그 자리엔 수도 로마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군단 사령관 레피두스도 함께했다.
명문 귀족 출신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가 독재관으로 정국을 장악하던 시기, 부관이자 기병대장으로 곁을 지킨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63년에 최고 제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직책은 종신직이었다. 로마의 최고 제사장직은 종교 의례와 국가 일정, 공적 행위의 가능 여부를 관장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카이사르 암살로 공석이 된 그 자리가 얼마 뒤 로마 외곽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정치적 합의와 합법적 선출을 거쳐 이 레피두스에게 돌아간다. 그는 종신직인 그 직책의 위상을 통해 훗날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을 이루는 인물이기도 하다.
암살 직후 파비리우스를 통해 안토니우스의 손에 들어간 카이사르의 문서들은 본래 집정관의 업무와 행정 참고용 기록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것을 곧장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자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바꾸어 놓는다. 원로원이 “카이사르가 하던 일과 하려던 일은 모두 유효하다”는 결의를 통과시킨 이상, 문서의 기록은 곧 법의 근거가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틈을 파고들어 백지 수표처럼 문서를 주물렀다. 당장 속주 임명권이 그의 손에서 새로 쓰였다. 더구나 퇴역군인의 토지 분배 계획에 대한 기록을 끌어내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약속까지 덧붙였다. 이는 추가 보상을 보장받게 된 군단병들의 충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자신에게 필요한 특정 인물들에게는 세금 면제와 행정직을 보장해주었다. 모든 청탁은 ‘카이사르의 뜻’이라는 장막으로 포장되면서, 사람들은 기꺼이 그 장막 뒤에 줄을 섰다. 심지어 동상 건립과 축제, 신전 봉헌 같은 각종 명예에 관한 내용까지 남발되었다.
그리하여 카이사르의 문서는 본래의 성격을 잃었고, 원로원은 이 변화를 지켜보면서도 거부하지 못한 채 휩쓸려 갔다. 결국 그는 레피두스와 손잡고 수도 로마 외곽의 병력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3월 20일,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다.
안토니우스는 연단에 올라가 카이사르의 피 묻은 옷을 흔들며 연설했다. “이 상처가 자유의 상처란 말인가?”라는 그의 외침은 군중을 격노시켰다. 분노한 시민들은 화장장의 불길을 들고 원로원 건물을 위협하다가 끝내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공화정을 바로 세우려던 암살자들의 정치적 명분이 민중의 분노 앞에 한순간 무너지면서, 암살 이후 잠시나마 공존을 가장했던 균형은 마침내 깨져버렸다. 이때부터 그들은 각자 시골 별장으로 몸을 숨기며, 로마 정치의 중심에서 사실상 이탈하게 된다.
카이사르 장례 이후, 포룸 한복판은 여전히 격앙된 민심으로 술렁였다. 이 와중에 선동가 아마티우스라는 사람이 제단을 세우며 군중을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가 ‘사회 안정’의 이름으로 그를 처형하자, 군중이 일시적으로 동요했지만, 공개적인 저항은 멈추었다.
뒤이어 그는 독재관직 자체를 폐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카이사르의 전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카이사르가 남겨놓은 서류와 미완의 조치들을 줄줄이 집행했다. 시민권 부여, 토지 분배, 면세 특권, 심지어 고위직 임명까지 이어졌으니, 명분은 죽은 카이사르의 이름이었지만, 실제 열매는 안토니우스의 손에 쌓여갔다.
그리고 그는 카이사르가 보궐 집정관으로 임명했던 돌라벨라를 실제 동료 집정관으로 앉힌다. 물론 그가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계획에 순응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카이사르는 독재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으로 수년간 집정관직을 미리 내정해 두었다. 그 중 돌라벨라는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면서 공석이 될 집정관 ‘보궐’로 정해져 있던 사람이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애매한 궤적을 지닌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한때 카이사르와 맞서기도 했으나, 결국은 독재관의 곁으로 돌아와 그 신임을 얻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변덕스러운 기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신할 집정관으로 이름을 올려 두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죽자 돌라벨라의 위치는 모호해졌다. 그는 카이사르 진영과도 연결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공화파 원로원과도 관계를 맺었다. 역설적으로 어느 한쪽에 온전히 속하지 않은 입지는, 그를 정치적 회색지대 인물로 만들었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움직였다. 그는 암살 직후의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돌라벨라를 동료 집정관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에는 여러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첫째, 합법성이었다. 카이사르가 이미 내정한 인물이었으니, 돌라벨라를 집정관에 앉히는 것은 곧 ‘카이사르의 유산을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둘째, 균형자 카드였다. 돌라벨라는 철저한 카이사르파도, 완고한 공화파도 아니었다. 중도의 정치인과 손을 잡음으로써,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와 원로원 사이에서 일정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타협의 계산이었다. 원로원은 암살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카이사르의 조치를 유효로 한다는 절충안에 이미 찬성했다. 안토니우스는 그 타협의 장에 돌라벨라를 내세운 셈이었다.
장례 후 민중이 세운 포룸의 제단도 문제였다. 선동의 온상으로 변해버린 그곳을 안토니우스는 돌라벨라와 협력해 철거시켜 버렸다. 이는 겉으로는 민중을 달래는 조치였으나, 실제로는 거리의 정치 공간을 제도권 아래에 두려는 의미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오는 약 두 달 가까운 이 기간에, 안토니우스는 혼돈 속에서 권력을 움켜쥐었다. 그는 타협으로 출발했으나, 곧 민중을 제압하고, 법률을 조정하며, 군단과 베테랑이라는 실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이 시점에서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지명된 후계자는 로마의 권력 구도에서 사실상 배제된 존재였다.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수도 로마에 대한 정보를 알 길이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리스에서 아드리아해를 건너야 하는 그와 세친구는 우선 파르티아 원정군이 집결해 있는 브린디시움을 피하고자 계획했다. 거기에 암살자들, 또는 원로원 공화파의 어떤 독소가 스며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남쪽 40km 지점의 루피아이(오늘날의 레체 근처)에 상륙한다. 역사가들은 그날을 기원전 44년 4월 초순으로 기록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보름이 조금 넘은 뒤였으니, 당시 교통편을 고려하면 그나마 빠른 움직임이었다.
브린디시움의 남쪽에 자리한 고대의 루피아이는 항구라기보다 포구에 가까운 작은 어촌으로서, 로마로 향하는 길목이 아니었다. 그 일대에서 곧장 로마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은 브린디시움에서 시작 되는 아피아 가도였다. 그렇기에 브린디시움을 피하려면 오히려 더 북쪽 항구를 택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들이 루피아이에 상륙한 것은, 급하게 귀국 일정을 잡으면서 구한 선박이 하필 그 작은 포구의 어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와 친구들이 아폴로니아로 갈 때도 비린내 지독한 어선을 이용한 것으로 나온다.
앞뒤 없이 무작정 상륙한 지점이 브린디시움의 남쪽 포구라는 걸 알게 된 옥타비아누스와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도보로 하루 걸리는 브린디시움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길을 나서기 전에 먼저 로마인 남성 정장인 토가를 벗고, 노예들이나 빈민, 또는 어린 소년들이나 입는 튜니카 복장으로 변장했다. 그것도 아주 남루한 옷이었다. 부잣집 도령들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수종 노예들을 먼저 귀국시켰기에 일행은 단출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브린디시움 성문 앞에 다다른 그들에게 병사가 다가왔다. 마침 보초를 서던 그 병사는 문다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였다. 물론 이 순간을 자세히 기록한 사료는 없다. 다만 카이사르 생전의 마지막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가, 그 전쟁에 처음 동행했던 젊은이를 알아보았다고 상상하는 일은 그리 무리하지 않다.
비록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병사는 잠시 그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옥타비우스 도련님 아닙니까?”
그의 친절한 태도에 옥타비아누스가 부정하지 않자 병사의 태도는 달라졌다. 병사는 다리를 모아 세우면서 절도있게 오른팔을 번쩍 들어 로마식 경례를 했다. 이윽고 그 보초가 병사들이 모여 있는 성벽 안쪽에 대고 외쳤다.
“이봐! 여기 카이사르 후계자가 오셨어! 젊은 카이사르가 왔다고!”
그의 말을 듣고 병사들이 성문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환호했다. 그것은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대한 반사적 반응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일행은 마침내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들의 환호 속에 성안으로 들어갔다.
브린디시움에는 암살 이후 불안 속에서 애를 태우던 카이사르의 군단병들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던 퇴역군인 일부도 후속 소식을 듣기 위해 들어와 있었다. 그들에게 옥타비아누스는 함께 싸웠던 장군의 이름을 잇는 젊은 존재였다.
당시 로마의 병역제도는 의무제에서 지원제로 바뀌어 가던 시기였다.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의 병역은 모든 시민의 의무였어도, 일정 재산이 있는 시민들만 군대에 복무했다. 개인 군사 장비를 각자의 비용으로 충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래전부터 무산 계층은 병역을 면제해주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무렵이 되자,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면서, 전쟁은 원정화, 장기화로 변했다. 결국 토지를 소유한 농민 병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농토를 잃고 몰락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러다 보니 탈영병이 속출했고, 그것은 복합적으로 로마의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107년,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국가에서 군사 장비를 지급하고 무산 계층에게 군 복무를 개방하는 법령이 발효되었다. 이때부터 로마 군대는 가난한 시민의 생계 수단으로 바뀌어 간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인 카이사르가 활동할 즈음엔, 시민의 병역 의무는 여전히 법적 효력을 가졌지만, 현실에서는 직업군인 제도가 정착했다.
원래 이들의 처음 복무기간은 16년이었다. 하지만 이후 장군들의 필요에 따라 20년까지 늘어났으며, 급료 외에도 만기 전역하는 장병들에겐 정착할 토지와 더불어 ‘정착금’이라는 퇴직금까지 지급했다. 이 베테랑들이 정복지 각처에도 많은 수가 정착해 식민도시를 일구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 이들이 개척한 식민도시들이 로마식 인프라를 갖추어 상업, 행정 중심지가 되면서, 라틴어와 로마법이 퍼져 나가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또한 그 도시들은 로마 가도로 연결되었는데,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아래는 당시 식민도시로 출발해 훗날 대도시로 성장한 서유럽 각국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이탈리아: 밀라노, 토리노, 볼로냐, 베로나, 파르마, 모데나, 파두아
이탈리아에도 식민도시가 있다는 게 의아할 수 있지만, 이 도시들은 모두 이탈리아 북부, 즉 로마 본국의 국경이었던 루비콘 강 이북의 도시들이며, 당시엔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 알프스 이쪽(남쪽)의 갈리아) 속주였다.
프랑스: 리옹, 파리, 아를, 니메
스페인: 발렌시아, 메리다, 사라고사, 바르셀로나
독일: 쾰른, 트리어
영국: 런던, 요크, 콜체스터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전쟁 당시 당장의 필요에 의해 개인 비용으로 새로운 군단을 편성하기도 했다. 로마 원로원에서 군단 편성 비준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심지어 갈리아 주민으로만 채운 군단을 따로 창설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근속기간이 25년으로 늘어나는 것 빼고는, 만기 전역 시엔 로마 시민권과 함께 같은 대우를 받았다. 요즘 시대로는 매우 긴 근무 기간이라 볼 수 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직업군인이었다. 당시 사회 빈민층이 당당하고도 명예로운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방법 중 하나가 군대 입대라는 직업 세계였고, 속주인들 입장에서는 로마 시민권까지 획득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갑자기 죽자 아직 정착금과 토지를 불하받지 못한 퇴역군인들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많은 수가 원정군 집결지인 브린디시움에 몰려와 있던 것이다.
브린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맞이한 각 군단엔 저마다 특징이 있었다.
제5군단 (Alaudae, ‘종달새 군단’)
창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중에 창설, 주로 갈리아인 출신 병사들로 구성.
특징: 로마 시민권이 없는 속주인들을 받아들인 최초의 군단 중 하나. 그래서 충성심은 카이사르 개인에게 강하게 묶여 있었다.
병사들의 정서: 로마 사회에서는 아직 이방인 취급을 받았기에, 카이사르를 대신할 후계자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원했다. 옥타비아누스가 나타나자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서슴지 않고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제6군단 (Ferrata, ‘철기 군단’)
창설: 갈리아 전쟁 때부터 활약한 카이사르의 대표적 정예 군단.
특징: 파르살로스, 타프수스, 문다 등 내전의 모든 주요 전투에 참전. 이름 그대로 강철 같은 충성심으로 유명했다.
병사들의 정서: 노련한 베테랑들이 다수. 카이사르의 유산이 보장되길 바라며, 젊은 후계자의 등장에 신중하지만 호의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제10군단 (Equestris, ‘기병 군단’)
창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초기부터 이끈 최정예 부대.
특징: 갈리아와 내전에서 늘 선봉을 맡아 카이사르의 충성심과 용맹을 상징하는 군단이었다. 다만, 내전 후 일부 해산되었고, 남은 병력이 원정에 편입되었다.
병사들의 정서: 카이사르와 함께한 추억이 가장 강렬했던 부대. 옥타비아누스를 보며 “작고 병약하다”는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정서를 가졌을 것이다.
제13군단 (Gemina, ‘쌍둥이 군단’)
창설: 원래는 기원전 57년경, 갈리아 원정에 참여.
특징: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널 때 이끌었던 군단으로, 상징성이 매우 컸다. “루비콘을 건넌 순간”을 함께한 병사들의 전통이 이어졌다.
병사들의 정서: 상징적 의미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인정하는 데 큰 자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신생 군단들 (제28, 제29, 제30군단)
창설: 카이사르가 내전 말기, 문다전투(기원전 45년) 즈음에 창설.
특징: 경험은 부족하지만, 최근 내전의 승리를 함께했기에 사기가 높았고, 아직 아프리카와 문다 등의 전투에서 받기로 했던 전리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의 정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가 약속을 지킬지 불확실했기에,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은 “새로운 주군”을 찾는 결정적 계기였을 것이다.
기타, 동방 주둔군 (제3, 제12군단 등)
배경: 원래는 시리아, 동방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이 파르티아 원정군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실제 상황: 브린디시움에는 도착 전이거나 이동 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원정군 계획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병사들의 정서: 동방에서 오랜 기간 복무했던 병사로서, 파르티아 전쟁이 곧 자신들의 임무라 받아들였을 것이다.
당시 브린디시움에 있던 베테랑 군단병들은 카이사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냉정히 평가하면서도 결국 받아들였고, 신생 군단병들은 보상을 위해 훨씬 적극적으로 젊은 후계자를 따랐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가 브린디시움에 들어섰을 때,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군단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한다.
이처럼 저마다 사정이 제각각인 군단병과 퇴역병 앞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뜻밖에도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겨우 18살 홍안의 나이지만, 이미 아폴로니아 장군들의 청을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절한 그였다. 그만큼 그는 처음부터 법을 중시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중시한 그 법은 자신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 모두가 지켜야 하는 것이며, 다른 의미로 본다면 모두가 그 법의 혜택을 또한 받아야 한다.
대중 앞에 처음으로 자신을 카이사르라고 주장한 옥타비아누스의 이 한마디가, 퇴역 병들은 물론 현역 병사들의 미래까지 보장하게 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을 부풀린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누군지도 몰랐던 이 젊은 청년에게 열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불안에 떨며 입성한 브린디시움에서 생각지도 못한 군단병들의 환대를 받게 되자, 카이사르라는 이름의 참모습을 직시하게 되었다. 이 장면은 훗날 크게 과장되어 전해지기도 했지만, 카이사르의 이름이 여전히 군단에 살아 있었음은 명확했다. 그렇기에 그 이름을 계승한 젊은 후계자 역시 로마에 들어서기 전부터 병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정치적 계산보다 앞선 것은 함께 싸웠던 기억과 충성심이었다.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어떤 무기가 될지를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브린디시움의 분위기는 사료에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종합하면 현장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브린디시움 항은 아직도 카이사르의 유산을 지닌 항구였다. 원정 준비로 모여들었던 군선들은 닻을 내린 채 해안에 늘어섰다. 그곳으로 내려오는 옥타비아누스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장교들이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온 민간인 복장의 수십 명 사내들도 일제히 늘어섰다. 한눈에 봐도 베테랑들이었다. 장교가 군선 중 작은 쾌속 수송선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가 준비한 배가 저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브린디시움 근처에 정착한 퇴역병들인데, 카이사르님의 호위를 자처했습니다. 지금부터 이 사람들이 안전하게 모실 겁니다.”
그들이 퇴역병이라는 말에 옥타비아누스가 다가가자, 모두 절도 있는 자세로 턱을 치켜들었다.
“고맙네. 그럼, 신세를 지겠네.”
애초에 군단병의 호위를 마다했던 그였지만, 이번엔 순순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자발적으로 나선 그들의 신분은 이제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적인 문제가 사라진 것이다.
이윽고 전투의 긴장을 안고 있는 듯한 군선 위로 옥타비아누스와 세 친구가 올라갔다. 불안 속에 브린디시움으로 왔던 네 사람은 이제 당당한 위엄을 갖추고 갑판의 바람을 맞았다. 그 모습 뒤로 호위병을 자처한 베테랑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그리고 잠깐 사이 돛이 부풀면서 배가 서쪽을 향해 움직였다.
봄이었지만, 푸테올리 바닷바람은 차가웠을 것이다.
푸테올리의 필리푸스 별장이 있는 캄파니아 지역엔 마침 카이사르가 마련한 대규모 퇴역병 정착지가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별장에 도착할 즈음엔 그 지방의 퇴역병들이 모여들어 옥타비아누스를 기다렸다. 그들 역시 ‘젊은 카이사르가 돌아왔다’라는 소식에 기꺼이 앞장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피로와 상처를 안고도 여전히 무력의 냄새를 풍기는 그 눈빛 속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를 둘러싼 거대한 긴장의 소용돌이가 자신을 중심으로 서서히 회전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아들을 반갑게 맞은 것도 잠시, 그 뒤에 늘어선 호위병들과 밖에 웅성거리는 베테랑무리를 바라본 아티아와 양부 필리푸스는 아들의 의도를 알게 된다. 그가 끝내 부모의 간청을 물리치고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고자 결정했음을 말이다. 피곤과 긴장이 겹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필리푸스는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의 양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십여 년 전인 기원전 56년에 집정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공화정 말기 로마 정치의 중심부를 경험한 원로로써 권력 균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빛엔 애정과 우려가 동시에 어렸다.
“네가 지금 카이사르의 이름을 계승한다 해도 로마는 단순히 이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로마는 현직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움켜쥔 실정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원로원 다수는 여전히 눈치를 보며 카이사르 후계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녀린 청년 홀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계승한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로마 정치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아이에게는 누군가 현명한 조언자가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인물이 키케로였다.
당시 키케로는 공화정의 수호자이자,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언변가로 명성이 높았다. 카틸리나 음모 사건을 분쇄한 그의 경력은 아직도 원로원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법률가이자 정치가로서 공화정 귀족층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물론 그는 카이사르의 독재에 맞섰던 만큼 안토니우스를 경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원로원 다수는 안토니우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키케로만은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잠재적 구심점이었다.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그 사실을 강조했을 것이다. “키케로를 만나 조언을 구해라, 원로원 다수에게 네 존재를 알리려면, 로마의 명망가와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이다.
마침 키케로도 같은 푸테올리의 멀지 않은 별장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절묘한 기회였다. 필리푸스의 조언은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상속자에서 로마의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 첫걸음을 의미했다. 그가 키케로와 손잡을 수 있다면, 원로원 안팎에서 안토니우스를 견제할 힘의 축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와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티아는 그날의 충격과 두려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는지, 로마의 혼란이 지속되는 몇 달 뒤에 세상을 떠난다.
옥타비아누스는 양부 필리푸스의 조언에 따라 어머니 별장 인근의 화려한 별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로마 정계의 원로, 법률가이며 웅변의 대가, 그리고 로마 공화정의 정신적 지도자로 불리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머물고 있었다. 겨우 열여덟의 청년에게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인 기원전 63년의 집정관을 직접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긴장이었을 것이다.
그가 집정관이던 그해에, 권력이 내리막길이었던 원로원 의원 카틸리나가 빚에 허덕이는 시민들과 퇴역 군단병, 그리고 일부 몰락한 귀족을 선동했다. 그들과 함께 그는 로마 정부 지도부를 암살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잡으려던 로마 초유의 음모를 벌였다. 그때 집정관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끝내 진압하면서 공화국 로마를 구한 인물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 앞에서 몸을 낮추고는 ‘아버지’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 이 행동은 보호와 가르침을 청하는 아들에 가까운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굳은 결의가 배어 있는 옥타비아누스와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로마 정국의 불안을 놓고 서로의 생각을 확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유언의 집행과 민중의 기대라는 막중한 책임을 강조했다. 그 순간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의 전횡을 떠올렸다. 집정관의 권세를 틈타 국고와 병력을 움켜쥔 그를 견제하지 못한다면 공화정은 다시 무너진다. 이 젊은이는 아직 경험이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동반자로 보였다. 그는 권력을 욕심내기보다는 후원자를 필요로 하는 처지였고, 키케로는 충분히 그 자리를 채워줄 수 있었다. 그날의 만남에서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무렵 로마 정치권에도 그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퍼져 있었다.
푸테올리에 머문 며칠 사이, 옥타비아누스의 지위는 급격히 변했다. 처음 루피아이에 상륙했을 때, 그는 단지 병약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푸테올리를 떠날 즈음에는 가족의 지지를 끌어냈고, 키케로와의 만남으로 원로 정치권과 연결고리를 만들었으며, 카이사르 옛 병사들의 변함없는 충성 확인으로 정치적, 군사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5월 초, 그는 적지 않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로마로 향했다.
수도 로마의 격앙된 민심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는 개선장군처럼 수도로 입성하지 않았다. 군단을 앞세우지도 않았고, 포룸에서 연설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로마 시민에게 그는 아직 이름만 알려진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원로원과 집정관의 주변부에서 그의 존재가 분명하게 의식되고 있음은 숨길 수 없었다.
로마에 도착한 직후 옥타비아누스는 도시의 군중이 카이사르의 이름에 여전히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실제 권력으로 다루는 사람은 현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안토니우스에게서 카이사르가 남긴 금고, 즉 1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을 되찾아야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를 맞이하며 차가운 태도로 응대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에게 권리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유언으로 지목된 상속인임을 강조하며, 시민들에게 약속된 돈의 분배를 이행하기 위해 금고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것이 사적 유산이 아니라 국가의 공금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한 걸음 물러서는 듯 보였으나, 내면의 결의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협조가 없더라도 시민들에게 카이사르가 약속한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반드시 지급하겠다고 다짐했다. 설령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라도 그 뜻을 이루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끝내 대꾸하지 않았다.
차갑게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우는 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금고는 움직이지 않았고, 안토니우스 저택의 대문은 차갑게 닫혔다. 그러나 이 냉담한 거절은 오히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계에 발을 딛는 첫걸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사건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에 그치지 않았다. 원로원 내부에서는 이미 안토니우스의 전횡에 대한 불신이 자라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집을 나선 옥타비아누스는 난감했다. 금고를 돌려받을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생각 끝에 카이사르의 지인들을 찾아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가이우스 마티우스였다.
마티우스는 로마의 재력가이자 카이사르의 오랜 벗이었고, 동시에 키케로와도 막역하게 친분을 나눈 인물이었다. 카이사르가 살아 있을 때는 만찬과 사적인 모임을 주도하며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던 사람이었으나, 정계에는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카이사르 유언을 지키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의지에 그는 마음을 움직였다.
“젊은 카이사르여, 나는 정치에 나서는 사람은 아니오. 하지만 카이사르께서 남긴 뜻을 젊은 그대가 이어가려 한다면, 나 또한 내 손길의 보탬을 거절할 수 없소.”
그는 자신의 자금과 함께 인맥을 동원해 모은 거액을 마련해 주었다. 다른 지인들도 마티우스를 따라 호응했다. 아직 로마 정계에 기반이 약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들의 지원은 절실한 생명줄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들어오자마자 카이사르의 유산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넘어온 상속을 거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유언장에 명시된 대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를 분배했다.
이것은 암살 직후 불안과 분노가 가라앉지 않던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약속을 이행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행동이었다. 그저 무명의 청년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유업을 이어받은 후계자로서 수도 로마의 광장에 서게 된 것이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젊은 후계자의 손에서 은화를 받아 쥘 때, 그들의 눈빛은 달라졌다. 이제 로마 시민들은 “옥타비우스라는 아이가 대체 누구야?”라고 묻지 않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이 ‘사건’은 카이사르 유산을 지켜낸 자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라는 소문이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 광경은 원로원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금고를 움켜쥐었지만, 시민들에게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사재를 털고 지인들의 도움을 끌어모아 카이사르의 유언을 실현했다.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던 그가 원로원 의원들의 눈에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재물을 가졌지만, 그 재물로 민심을 낳지 못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재물을 잃었으나, 그 대신 신뢰와 정통성을 얻었다.
그해 여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준비했던 축제를 추모 경기로 바꾸어 열었다. 원형경기장과 광장이 인파로 가득 차고, 하루 종일 카이사르의 이름이 노래와 환호 속에 울려 퍼졌다. 그때, 하늘에 밝은 혜성이 나타나 7일 동안 지평선을 가로질러 빛났다. 이 혜성 사건은 당대 역사가들 대부분의 기록에 나오는데, 대낮에도 혜성이 선명히 보였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지구 근처를 지나는 핼리 혜성은 아니었다. 현대천문학자들은 핼리 혜성이 기원전 87년과 기원후 12년에 지구 근처를 통과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원전 44년 로마에 보인 혜성은 핼리 혜성과는 무관한 비정기 혜성, 다시 말해 단발성으로 나타났다가 소멸한 혜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신기한 자연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카이사르 영혼이 신들의 자리에 오른 증거라 여겼다. 이 혜성 사건은 민중의 신앙과 감정을 크게 흔들었다. 광장은 환호로 뒤흔들렸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결국 이 혜성 사건은 1년 반 뒤, 마침내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권위를 얻었고, 율리우스 신전이 세워지며 주화에는 별이 새겨진다. 그 사건은 원로원과 민중의 시선을 안토니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로 돌려놓는 기폭제가 되면서, 뜻하지 않게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정통성을 굳히는 무기가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금고와 군단을 움켜쥐었어도, 명분과 신뢰의 무게는 이제 젊은 후계자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안토니우스에게 그 광경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암살자를 규탄하며 민중을 사로잡았던 그였다. 그러나 금고와 군단을 장악한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명분과 상징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지켜봐야 했다.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로마 시민들이 혜성 아래에서 옥타비아누스를 향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그 존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문서를 조작한다는 의혹 속에 원로원의 신뢰를 잃던 중이었다.
이 상황을 가장 예리하게 바라본 인물은 키케로였다. 그는 공화정의 이상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으나, 암살자들의 칼날을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았다. 카이사르의 장기 집권을 반대했던 그가 볼 때, 지금 로마에서 더 위험한 존재는 안토니우스였다. 추모 경기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보인 절제된 태도, 유언을 실천으로 옮긴 결단, 그리고 혜성 아래에서 형성된 민심은, 키케로에게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