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 로마 군벌의 한 축이 되다
혼돈이 휘몰아친 암살 직후, 안토니우스는 집정관의 권위를 유일한 방패이자 마지막 보루로 삼았다. 그러나 암살자들과의 화해 결의로 그들을 직접 처벌할 수 없었고, 카이사르라는 후광도 더는 살아 있지 않았다. 이때 군사력이 절실했던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남쪽 갈리아)였다. 포강 이남 북이탈리아 지역의 이 속주는 로마 본토와 직접 맞닿았고, 카이사르가 정복 전쟁을 통해 굳혀놓은 군단들이 주둔하는 요충지였다. 이미 암살자 중 하나인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총독으로 부임한 자리였으나, 안토니우스는 집정관의 권위를 내세워 이를 빼앗기로 결심한다.
기원전 44년 8월 초순, 원로원은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올린 ‘속주 총독 교체 법안’을 심의했다.
카이사르는 본래 안토니우스를 집정관 임기 이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지명했다. 물론 마케도니아는 부유한 동방 방면이긴 했지만,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지역은 아니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도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는 안토니우스에겐 당장 키살피나가 필요했다. 키살피나는 알프스를 병목처럼 틀어쥔 요지이자, 로마 본토를 호령할 수 있는 전초기지였다. 그런 만큼 키살피나를 장악한다는 것은 로마 그 자체를 압박할 수 있는 군사적 지렛대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암살 이후의 로마는 여전히 방향을 잃은 도시였다. 군중의 소요와 원로원의 불안, 그리고 카이사르 추종 세력의 동요가 교차하는 가운데, 원로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앞으로 로마의 권력 균형을 결정짓는 무대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회의장의 집정관 자리에서 걸어 나와 발언대에 선 안토니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을 향해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카시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추천합니다.”
그동안 공화파는 암살자 대표 격인 그들의 안위를 위해 안토니우스가 원하는 거의 모두를 양보해왔다. 그래도 그들의 생존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특히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생존이야말로 로마 공화정의 불빛을 지키는 길이라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안토니우스가 그들의 출로를 보장해준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과 안도의 기류가 회의장을 교차했다.
안토니우스가 시선을 빙 둘러 원로원 의원들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마케도니아 총독 자리는 집정관 임기 이후 내가 부임하기로 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국가 비상사태에 이른 지금, 게르마니아와 갈리아의 준동을 막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서 직접 국경을 지켜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갈리아 키살피나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미 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속주였기에, 안토니우스의 발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급선회였다. 회의장은 더 크게 술렁였고, 의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그 속주를 차지하는 순간, 안토니우스는 로마 북부에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게 된다. 사실상 이탈리아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위치였다.
안토니우스는 곧바로 한 수를 더 던졌다.
“동료 집정관 돌라벨라는 임기가 끝나는 대로 시리아 총독으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에게 원로원은 6년간의 속주 통치권을 부여해야 합니다.”
로마는 집정관이나 법무관, 호민관 같은 모든 주요 공직의 임기를 1년으로 하는 나라였다. 속주 총독의 경우, 외국과의 전쟁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역시 임기는 1년뿐이었다. 그렇기에 안토니우스는 국경 방어라는 명분으로 권력의 장기 독점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의장에 분노와 공포가 동시에 퍼지며, 공화파 의원들이 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당장 로마에서 살려내려면, 이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키케로의 표현에 의하면 “독배지만 마실 수밖에 없는 잔”이었다.
그날, 원로원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법안은 통과되었고, 안토니우스는 마침내 향후 6년간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화해의 타협으로 위장한 안토니우스의 교활한 책략은 그렇게 성공했다.
이어서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총독지인 마케도니아의 파르티아 원정군은 본국으로 귀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국가의 환란 속에 파르티아 원정은 일단 보류하겠다는 이유였다. 결국 브루투스는 군대 없는 총독으로 남아 명목뿐인 권위에 의지할 판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의 계획에 의하면 카시우스도 그 해 말까지만 시리아 총독이 되는 것이다. 돌라벨라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는 대로 시리아 총독직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정 역시 후일 돌라벨라와 카시우스의 충돌을 예고하게 된다.
이날의 회의 결과엔 현재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가 있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도 큰 문제였다. 카이사르를 찌른 칼을 들고도 합법적으로 총독직을 지명받은 그에겐 두 개 군단이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한 수가 곧 그의 목줄을 조여왔다. 원로원 회의에 부쳐진 속주 교체 법안은 키살피나를 안토니우스의 손에 넘기고 자신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무장 해제당할 운명에 직면한 것이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그 순간 자신의 현재 위치를 뼈저리게 자각했을 것이다. 병사들의 충성은 의심스러웠고, 인근 속주의 총독들마저 카이사르파 인물들에게 분배된 현실이었다. 그는 단지 지도 위에 그어진 한 줄, ‘총독직’이라는 명분만을 의지해 버틸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명분마저 원로원의 도장 하나로 흔들거렸다. 안토니우스가 속주 교체를 성공시키는 순간, 키살피나는 피난처가 아니라 포위망 속의 성벽이 될 터였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입장은 그래서 치명적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그는 끝까지 항전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결국 이 타협으로 시골 별장에 숨어지내던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속주 총독 자격으로 당당하게 ‘도망’ 갈 길이 열렸다. 그들에게 이탈리아는 안전하지 않았다. 로마는 아직도 민중의 분노로 들끓었고, 군단들은 여전히 카이사르파 장군들이 장악한 실정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각자의 속주로 향하면서 그나마 한시름 놓았을 것이다. 마케도니아와 시리아는 로마에서 먼 속주지만, 최소한 군사와 재정을 기대할 수 있는 발판은 얼마든지 있는 땅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죽음의 위험을 벗어나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돌라벨라가 이듬해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카시우스는 이미 그를 물리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아시아의 부국인 시리아 총독으로 있는 몇 개월 사이, 카시우스는 재빨리 병력과 재정을 긁어모아 돌라벨라를 압도해버렸다. 돌라벨라는 라오디케이아 인근에서 해전을 시도했으나 패배하여 더 이상 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전승과, 부하에게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어느 쪽이든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렇게 돌라벨라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정국의 폭풍 속에 안토니우스의 계산, 원로원의 절충, 그리고 자신의 야망에 휘둘리다가 짧고 격렬한 궤적만 남긴다. 그는 카이사르파도, 공화파도 끝내 되지 못한 채, 두 진영 모두에게 소모된 하나의 조각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다. 키케로의 사위면서도 카이사르가 기원전 42년 집정관으로 내정했던 그였지만, 36년의 짧은 삶을 그렇게 마친다.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에 제출한 속주 교체 법안이 실제로 언제 상정되고 통과되었는지는 사가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역사가들에 따라 이날을 기원전 44년 6월 1일로 지목하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의 편지에서도 이 무렵부터 안토니우스의 속주 야망을 경계하는 어조가 뚜렷해지긴 한다. 그러나 키케로가 8월 초순에 남긴 서신엔, 그때가 되어야 안토니우스의 속주 교체가 본격화된 듯한 뉘앙스가 읽힌다. 이를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법안은 6월에 발의되었지만, 실제로 효력을 갖춘 것은 8월 초였다고 해석한다.
어쨌든 이 법안이 통과될 때, 원로원의 반응은 무기력했다. 겉치레에 불과한 논의 속에 이미 결정은 내려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법안 통과는 합의라기보다 암살자와 그 추종자들의 굴복에 가까운 일이었다.
암살 이후 시골 별장에 은둔하고 있던 키케로도 이 모든 소식을 들었다. 이 절충이 평화를 보장하는 겉보기와 달리 오히려 분열의 징후라는 것을 그는 꿰뚫어 보았다. 암살자들이 사면을 얻었지만,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키살피나에서 고립되었고,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 속주로 밀려나며 로마의 권력 중심에서 멀어졌다. 반면, 안토니우스가 키살피나와 나르보넨시스(남프랑스)를 탐내며 이탈리아와 갈리아를 틀어쥘 야망을 드러내도 원로원은 강요된 동의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키케로 시각에서 볼 때 로마는 또다시 독재자 손에 떨어질 위험징후가 농후했다. 카이사르의 죽음이 공화정을 되살리기는커녕,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주군으로 떠오를 판이었다. 이 무렵 키케로는 정치의 허망함을 절감하면서도, 이젠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자각이 든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문제는 ‘무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이때,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키케로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겸손과 동시에 냉철한 결의를 보았다. 이 열여덟 살 청년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공손히 손을 내밀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키케로는 이 청년을 새로운 희망의 카드로 여겼다. 안토니우스에 맞설 만한 정당성을 지닌 인물, 그리고 아직 원로원의 손길로 길들일 수 있는 인물이지 않은가. 그는 점점 옥타비아누스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을 굳힌다.
이 무렵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을 집행하며 ‘신의 아들’이라는 후계자 이미지를 퍼뜨리는 중이지만, 공식적인 권한은 없었다. 그렇다 해서 그는 안토니우스의 움직임을 방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젊은 후계자는 누구보다 예리하게 사태를 주시했다. 눈앞에 벌어지는 원로원의 절충과 암살자들의 흩어짐,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야망까지 그는 놓치지 않았다. 더구나 안토니우스가 키살피나를 차지한다면, 곧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충돌할 것이 분명했고, 이는 내전의 불씨가 된다. 아직 열여덟 나이에 불과했지만, 그의 시선은 차갑고 단단했다.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반안토니우스 세력과 손잡을 길을 모색한다. 그것은 권력의 흐름을 읽어내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천하의 카이사르가 어린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이유를 이제 독자들도 깨닫게 되는 문턱에 선 것이다.
암살 이후 은둔하며 입을 닫고 있던 키케로가 드디어 수도로 올라온다. 이즈음 이 역사적인 웅변가는 연설이 칼보다 예리하다는 걸 증명할 사명감에 휩싸인 게 틀림없다.
그는 원로원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연설을 힘차게 토해낸다. 기원전 44년 9월 2일이었다. ‘안토니우스 탄핵’을 주장하는 그의 연설은 이듬해 봄까지 모두 같은 주제로 14차례 이어진다. 이것이 후세사람들에게 ‘필리피카이’라 불리는 명연설이었다.
필리피카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한 사람은 본래 아테네의 전설적인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였다. 그가 마케도니아 왕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를 규탄하며 남긴 연설 제목을 역사가들이 키케로의 연설에 붙여준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연설 내용엔 같은 레토릭이 있기 때문이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도 오랜 후진국이었던 마케도니아를 부흥시켜 그리스 전토를 통일한 인물이었다.
필리피카이 연설 초기에 키케로는 온건한 비판으로 시작했지만, 곧 안토니우스를 향한 노골적 공격으로 발전한다. 그는 “안토니우스는 우리 모두를 노예로 만들려 한다.”라고 선언하면서, “로마는 독재자의 유산을 따르지 말고, 공화정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또 다른 날의 연설에서는 “나는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란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의 연설은 원로원 의원과 시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사용한 말은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오랜 공화정에 대한 신념을 불러일으키는 호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사가들은 어째서 이 연설에 300년 전의 데모스테네스 연설 제목을 갖다 붙였는지, 그 내용 연결의 논리를 보면 독자들도 이해가 빠를 것이다.
1. 적의 성격 규정이 동일: 외부의 제왕(필리포스) vs 내부에서 제왕화하는 정치가(안토니우스). 두 사람 모두 “자유 공동체의 파괴자”로 규정한다.
2. 정체(政體)를 지키는 전쟁으로 재정의: 데모스테네스는 대마케도니아 전선을 “아테네의 자유 방어”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을 “공화정의 자유 방어”로 틀 짓는다.
3. 행동 촉구형 레토릭: 두 사람 모두 말로 끝내지 않고, 구체적 군사 동원 프로그램을 내건다.
데모스테네스: 동맹과 해군력 강화, 재정에 대한 문제 같은 실무안.
키케로: 원로원 결의 주도, 집정관 병력 지원, 현재 키살피나 총독인 데키무스 브루투스 지지 등.
4. 도덕적 비난과 제도 논증의 결합: 국가 도덕(명예, 선조의 규범)과 제도적 정당성(법, 관습, 결의)을 함께 내세운다. 키케로의 제2필리피카(필리피카이의 단수형,)는 데모스테네스의 신랄함을 연상시키는 정치적 인신공격의 정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래는 데모스테네스의 연설과 거기에 대응하는 키케로의 연설 내용이다.
1. 데모스테네스, 제1필리피카 (BC 351년경)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가 점점 더 강대해지는 동안에도 앉아만 있습니다. 그는 전쟁하고 있는데, 아테네는 평화를 지키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방관은 곧 파멸을 불러올 것입니다.”
대응: 키케로, 제1필리피카 (BC 44년 9월 2일)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어받아 이미 사실상의 군주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도 평화가 있다고 믿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면, 그에게 권력을 허락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굴종일 뿐입니다.”
2. 데모스테네스, 올린토스 제1연설 (BC 349년경)
“행동을 미루면 그 순간이 곧 필리포스의 승리입니다. 그는 밤낮 가리지 않고 기회를 잡으려 듭니다. 우리만 게으를 뿐입니다.”
대응: 키케로, 제3필리피카 (BC 44년 12월)
“행동하지 않는 순간, 안토니우스가 우리 모두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는 한시도 멈추지 않는데, 원로원은 지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는 곧 그에게 승리를 내주는 것입니다.”
3. 데모스테네스, 제3필리피카 (BC 341년경)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응: 키케로, 제7필리피카 (BC 43년 2월)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라, 자유를 버린 채 침묵으로 굴종하는 것입니다.”
이때,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력을 모으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는 캄파니아와 루카니아, 아풀리아, 브린디시움 일대의 참전용사 정착지들을 돌며, 카이사르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 받았다. 그리고 브린디시움으로 다시 들어가 아직도 갈피를 못잡고 있는 원정군 부대들을 설득했다. 그들의 눈에 로마에서 달려온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에서 입국할 당시의 그가 아니었다. 이제 그의 눈빛엔 선명한 사명감과 젊은 패기의 불꽃이 서렸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에게 퇴역병과 원정군은 곧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동지였다. 병사들은 로마의 운명에 대한 그의 연설에서 확고한 지도자의 기운을 감지한다. 그는 오직 카이사르 후계자라는 정통성과 공화정을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그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리하여 갈리아 병사로 이루어진 제5군단과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제6군단이라는 철기 군단이 그에게 응하면서 옥타비아누스의 군세는 빠르게 불어난다. 기원전 44년 겨울이 올 무렵, 그는 수만 명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사실상 정치적 군벌의 반열에 오른다.
키케로 입장에서도 안토니우스에 맞서기 위해 원로원의 결의만으론 부족했다. 그에겐 실제 무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애송이가 그 무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키케로에게 당장 신이 내려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계속 이어지는 필리피카이 연설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를 극렬히 찬양하며 그를 공화정의 편으로 포장한다.
“그 젊은이는 로마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키케로의 연설은 의원들에게 설득력 강한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아직 정치적으로 미숙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과 군사력을 지닌 인물로서 안토니우스에게 대항할 유일한 카드였다.
이렇게 기원전 44년 말 즈음엔 키케로와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서로 다른 무기가 들려진다. 키케로는 열정적 웅변으로 원로원과 시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옥타비아누스는 휘하 군단으로 민중과 베테랑의 지지를 묶어냈다. 둘은 서로 경계하면서도 상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두 진영 사이의 이해관계에 놓인 결합은 서서히 굳어져 갔다.
안토니우스는 두 진영의 결합을 보며 자신이 점점 고립되어 감을 느꼈다.
기원전 44년 가을, 키케로가 불을 토하듯 날카로운 연설을 거듭하자, 원로원은 공화정 수호라는 깃발 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가 끌어모은 군단의 세력 확장이 가시화되면서 원로원 다수는 그를 대안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안토니우스에게 그것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정치적 포위망이며,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키살피나 속주를 지키고 있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여전히 합법 총독으로 인정받는 이상, 자신이 확보한 권력은 언제든 원로원 결의로 무너질 수 있음을 그는 잘 알았다.
카이사르 암살 직후 안토니우스가 직접 보유했던 병력은 수도 경비와 근위병 성격의 병력 약 1~2개 군단 규모(8천~1만 명) 정도였다. 이 정도로는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동시에 맞서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무엇보다 즉각적인 군사력 확대가 절실했다.
안토니우스가 눈을 돌린 곳도 역시 브린디시움이었다. 카이사르가 준비했던 파르티아 원정은 암살로 중단되었지만, 이곳에 집결 중인 병력은 여전히 로마 정치에 쓸 만한 전력이었다.
기원전 44년 12월, 안토니우스는 브린디시움으로 달려가 이 병사들을 회유했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단순했다. 자신은 카이사르의 충직한 동료이자 전우이며, 카이사르의 복수를 완수할 자격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속주 재배치 법안을 통해 더 넓은 권한과 금전적 보상을 약속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브린디시움에서 확보한 병력은 약 6개 군단 가운데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의 역사가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안은 “안토니우스가 브린디시움에 있던 병력 중 절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라고 기록했지만, 거의 동시대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원정군 ‘일부’가 안토니우스를 따랐으나, 나머지는 여전히 주저했다”라고 전하기 때문이다. 현대 학계에서는 2~3개 군단, 약 8천~1만 5천 명이 안토니우스 편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브린디시움에서 확보한 군세에 더해 그는 추가 병력을 징발했다. 아직도 그의 손엔 카이사르의 전쟁자금 1억세스테르티우스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새로 징발 충원한 인원이 4~5개 군단이었으며, 동방 및 다른 속주에서도 일부 병력을 끌어모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그의 전력 규모는 약 7개 군단에 달했고, 실제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숫자는 3만 명 내외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옥타비아누스가 가진 전력보다 우세한 규모였다.
기원전 43년 1월, 안토니우스는 브린디시움에서 병력을 끌어모은 뒤, 드디어 아피아 가도를 따라 북상했다. 이 도로는 브린디시움에서 로마까지 곧게 뻗은, 로마의 첫 번째이자 상징적인 군용도로였다. 그는 수도 로마 근교를 스쳐 올라갔지만, 직접 도시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정치적 충돌을 피하고, 군사적 행동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공화파 세력의 중심지로 남아 있던 갈리아 키살피나를 향할 차례였다. 이때 그가 택한 길은 플라미니아 가도였다. 로마 북쪽의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 움브리아의 협곡과 아펜니노산맥의 고갯길을 지나 아리미눔(현재의 리미니)으로 이어지는 도로였다. 플라미니아 가도는 북부 전선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통로였다. 속도는 곧 기습이었고, 이는 브루투스와 원로원이 대비할 시간을 빼앗는 수단이었다.
아리미눔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여기부터는 아이밀리아 가도가 이어진다. 이 도로는 포 평야 남쪽을 가로지르는 대동맥으로, 볼로냐를 지나 모데나와 레지오, 그리고 피아첸차에 이르는 길이다. 비옥한 들판인 포 평야의 곡창지대는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는 자원이었고, 아이밀리아 가도는 군세와 보급을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3년 2월, 마침내 무티나(오늘날의 모데나) 성곽 앞에 도달했다. 그곳은 아이밀리아 가도 한가운데 박힌 쐐기였고, 갈리아 키살피나 지배의 열쇠를 쥔 도시였다. 그곳의 총독직을 사수하려 단단히 마음먹은 데키무스 브루투스도 성벽 안에서 결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음을 그는 잘 알았다.
안토니우스가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종단해 그 먼 거리를 행군한 일은 도로망 위에서 전개된 하나의 정치적 연극이었다. 아피아 가도는 남부 참전용사들의 충성을 흡수하는 무대, 플라미니아 가도는 로마를 우회하며 신속히 북부로 진입하는 경로, 아이밀리아 가도는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결정짓는 최종 승부의 길이었다.
새해가 다가온 지금,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집정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계산은 분명했다. 정치적으로는 원로원과 키케로가 공화정의 명분으로 결집하기 전에, 무력으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병사들을 자기편으로 묶어 스스로가 유일한 후계자임을 입증해야 했다.
로마는 새해와 함께 새로운 공직자들이 임기를 시작한다. 그에 따라 기원전 43년의 집정관으로 내정되었던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의 정식 임기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카이사르가 지명했던 인물들이지만, 키케로의 설득으로 원로원 다수는 그들을 공화정 회복의 도구로 삼고자 결의한다. 이때 원로원은 군단을 거느린 옥타비아누스의 현실적 지위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게 된다.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점거하려는 지금,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도와 결국 전쟁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케로는 원로원 연설에서 “우리는 젊은 후계자의 힘 없이는 로마를 지킬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마침내 원로원은 키케로의 설득과 현실적 필요에 그의 무력을 인정했고, 군권 부여를 위한 법적 논의를 공식화했다. 옥타비아누스를 데키무스 브루투스 구원군의 일원으로 편입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로원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정식 군사 지휘자로 끌어올리자는 안이 통과 되고, 그 지위로는 전직 법무관급 군권을 부여하기로 의결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생애 처음 독립적으로 군대를 지휘할 법적 권한을 얻게 된다. 그는 또한 원로원에 편입되어 전직 법무관과 동등한 의전적 지위와 발언권을 보장받았다. 다시 말해 원로원 의원급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명분과 무력을 동시에 갖춘 합법적인 ‘정치가이자 로마 군단의 통솔자’로 변모했다. 공직 경력이 전혀 없는 열아홉 청년에게 국가로부터 이런 지위를 부여받는 것은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 군단의 급료와 보급, 그리고 병력 충원까지도 이제 국가 재정과 물자 체계로 연결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때 결정된 군단의 지휘체계는 다음과 같다.
1. 최고 지휘는 두 집정관에게 있다.
2. 옥타비아누스는 독립적 군권을 가지되, 집정관의 작전 지휘에 협력한다.
그들의 임무는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구원하고, 갈리아 키살피나의 합법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공화정 군사 연합의 공식 결성이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어디까지나 안토니우스라는 공동의 적에 맞선 임시적 결합이었다.
겨울이 풀리자 전쟁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원로원은 일단 안토니우스에게 데키무스 포위를 풀라는 사절단을 보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로마는 비상 동원을 선포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신병 모집에 들어갔다.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원로원의 승인 아래 집정관들과 함께 북부로 진군했다. 지금부터 그의 군세는 개인의 충성 집단이 아니라 공화국의 깃발 아래 편입된 합법적인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원로원 시선엔 여전히 이중성이 깔렸다. 당장은 그가 필요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은 경계했다.
그래도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말부터 43년 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속도로 정치적, 군사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로마는 또다시 무티나 전쟁이라는 치열한 내전의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 테베레강변의 작은 언덕 위에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피로 얼룩진 다툼 끝에, 승리한 로물루스 이름을 따서 그 도시는 ‘로마’가 되었다. 초기 로마는 에트루리아인과 라틴족, 사비니인이 결합한 부족 연합체에 불과했으나, 군사적 결속과 종교적 전통을 기초로 점차 세력을 넓혀 갔다.
그러다가 기원전 509년, 7대에 걸친 왕정 시대를 끝내고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귀족 집단인 원로원이 권력을 장악하고, 매년 두 집정관이 선출되어 권력을 나누는 체제가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귀족만의 지배체제여서, 평민과의 갈등은 끊임없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기마다 타협과 저항이 이어지며, 로마는 내적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그런 정치적 발전과정이 이어지면서 로마는 먼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합했고, 곧이어 북아프리카의 강국이자 한니발의 나라인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 패권까지 거머쥐었다. 로마는 이후 그리스, 마케도니아, 소아시아, 그리고 히스파니아(에스파니아)에 이어 서유럽 전체로 세력을 확장해서, 지중해는 로마의 완벽한 내해가 된다.
그러나 영토의 확대는 곧 새로운 갈등을 불러왔다. 오랜 전쟁에서 돌아온 농민 병사들은 황폐해진 농지로 인해 몰락했고, 반대로 원로원 귀족과 기사 계급은 그 농지를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런 와중에 기원전 2세기 말, 개혁의 대명사인 그라쿠스 형제가 심혈을 기울인 토지 개혁 시도가 귀족들의 저항으로 좌절되면서, 로마 사회의 균열은 더욱 깊어 간다. 그런 가운데 마리우스와 술라가 대립하며, 로마는 최초로 대규모 내전을 겪었다. 결국 승리자인 술라가 독재관이 되어 일시적 개혁을 이끌었지만, 그가 남긴 것은 더욱 깊어진 정치적 불신과 폭력의 전례뿐이었다.
기원전 1세기 중엽,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그리고 카이사르가 제1차 삼두정으로 권력을 나누었으나, 균형은 오래 가지 못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전쟁에서 전사하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충돌하자 또다시 대규모 내전이 벌어졌고, 승리자인 카이사르의 시대가 열렸지만, 곧 암살당하며 또 다른 혼란을 남긴 것이다. 카이사르 암살자들이 주창한 공화국의 이상은 현실을 지탱하지 못했다. 로마는 이미 군사적 충성과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체제로 변해버렸고, 권력의 공백은 새로운 내전을 예고했다.
로마 역사는 건국의 전설로 시작해, 왕정과 공화정, 그리고 지중해 패권에 이어 내전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로마가 성장하면서 쌓아온 부의 불균형, 정치적 갈등, 군사력 의존이 낳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리고 이 연속선상에 무티나에서 벌어질 또 다른 내전과 함께, 옥타비아누스는 이 특별한 시대의 더욱 가파른 격랑을 온몸으로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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