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역사상 최연소 집정관이 되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 곁에서 오래도록 성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원로원에 일정한 기반을 가졌지만, 무엇보다 카이사르와의 결속이 그를 로마 정치 전면에 세웠다.
카이사르가 독재관으로 집정할 때, 레피두스는 부 독재관 격인 로마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수도 로마 외곽에 주둔한 수비대 병력을 직접 지휘했다. 암살 직전까지 그는 이렇듯 카이사르의 군사적 후원자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다. 그렇기에 카이사르 죽음 직후, 안토니우스가 암살자들을 사면하면서 그 대표 격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 군사 권력을 쥐고 있던 레피두스도 함께했다. 암살자들의 사면이 그만큼 공고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속주 통치의 후계 배분을 계획해 두었고, 레피두스에게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남프랑스)와 히스파니아(에스파니아) 속주가 배정되었다. 이 지역은 지중해 서부와 알프스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암살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이 임명은 뒤집히지 않았고, 오히려 안토니우스가 주도한 속주 재배치 법안을 통해 법률적 확정을 거두게 되었다.
그렇게 레피두스는 이미 카이사르가 정한 계승 구도를 따라 서방 속주의 총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암살 직후 잠시 로마 정국을 중재하기도 했지만, 그는 곧 로마를 떠나 자신에게 주어진 속주로 향했다. 그의 진짜 관심사는 원로원의 논쟁으로 혼란스러운 회의장이 아니라, 알프스 너머 서방의 병력과 보급로였다.
기원전 43년 초, 레피두스는 나르보넨시스의 총독으로서 서방 전력을 장악했다. 그곳은 히스파니아와 알프스 북쪽, 그리고 이탈리아 북서부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그는 그 위치에서 로마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벌어질 격돌을 지켜보았다. 레피두스는 처음부터 그 전쟁에 섣불리 개입해 자기 전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 히스파니아와 나르보넨시스 병력의 보존.
둘째, 로마 정국이 정리될 때 중재자로 등장할 입지 확보.
셋째, 승패의 윤곽이 잡히는 순간 가세해 대가를 얻는 것이었다.
그는 대규모 병력 이동은 자제하면서도, 알프스의 길목은 비워두지 않았다. 로마와 안토니우스 양쪽에 연락선을 유지하며 공개 선언을 피했다. “질서 유지와 내전 방지”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승자의 편에 뒤늦게 올라탈 준비였다. 그는 알프스와 론강의 교통로에 감시망을 강화해, 혹시 안토니우스가 패배해 휘하 군단과 함께 서쪽으로 퇴각하더라도 차단과 수용, 어느 쪽이든 전환할 수 있도록 대비한 것이다.
레피두스는 이렇게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였다. 그는 병력과 보급로를 온전히 보존하며, 양측을 저울질하는 보류 전략을 유지했다. 이 신중한 태도는 정치적 역량이 미약한 그가 훗날 역사의 한 자리를 확보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기원전 43년 2월 말, 마침내 안토니우스가 무티나 성을 포위하자,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성안에 고립되었다. ‘압박’과 ‘협박’으로 시작된 이 포위 전술은 곧 군영을 사방에 구축하며 장기전도 불사하겠다는 양상으로 이어갔다. 안토니우스는 한 달 이상 그렇게 무티나 성안에 갇힌 데키무스를 묶어두었다. 성벽 너머 굶주림과 불안이 쌓여갔고, 성 밖엔 안토니우스 군영이 단단하게 뿌리내렸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오래가지 못했다. 4월 초, 마침내 원로원 군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집정관, 히르티우스와 판사,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병력이었다. 그들의 출현은 무티나 포위를 단숨에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를 포위한 채, 원로원 군의 접근을 차단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7개 군단 전후인 약 3만 명 규모의 병력을 거느렸으며, 그중 절반 가까이가 카이사르 휘하에서 내전을 겪어온 베테랑 군단들이었다. 그는 병력 일부를 여전히 무티나 포위에 남겨두고, 주력부대를 10km 남쪽 포루미 갈로룸 평원에 집결시켜 원로원 군을 맞았다.
이에 맞선 원로원 군은 8개 군단인 약 4만 명이었다. 두 집정관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데려온 정예 군단이 있었고,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군단과 두 개의 신생 군단, 그리고 베테랑 군단을 합쳐 4개 군단이 합류했다. 그들은 이미 수적 우세와 카이사르 후계자의 명분으로 사기는 높았다.
기원전 43년 4월 14일 새벽녘, 양군은 전열을 정비했다. 안토니우스는 노련한 군단들을 전면에 세우고 기병을 좌우익에 배치했다. 원로원 측은 히르티우스가 이끄는 중앙에 정예 군단을 두고, 옥타비아누스 병력은 좌익을 맡았다. 19살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전장의 실전 경험은 부족했으나, 카이사르 이름으로 군단을 지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안토니우스가 초반 우세를 장악했다. 그의 베테랑 군단이 거칠게 돌파하며 판사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판사는 직접 기병대를 몰아 반격하면서 혼전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피 튀기는 전투 중, 판사가 치명상을 입는다. 집정관이 쓰러져 한때 원로원 군에 큰 충격을 안겼으나, 당장 병사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전의가 무섭게 되살아났다. 결국 수적 우세를 앞세운 원로원 군이 점차 전황을 뒤집었다. 히르티우스가 중앙에서 밀어붙이며 안토니우스의 전선을 흔들자, 그는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 퇴각 나팔을 불었다. 안토니우스 군이 질서정연하게 물러났고, 이렇게 전투는 원로원 군의 전술적 승리로 돌아갔다.
안토니우스는 포루미 갈로룸 평원에서 퇴각했지만, 병력 대부분을 보존했고, 무티나 포위를 완전히 풀지도 않았다. 반대로 승리를 거둔 원로원 군은 집정관인 판사가 며칠 후 결국 숨을 거두면서 큰 대가를 치렀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집정관도, 원로원의 정식 지휘관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 카이사르 이름 아래 집결한 군단을 실제로 전장에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판사의 전사는 치명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공백 속에 원로원과 남은 집정관 히르티우스에게 더욱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의 군단은 신예와 베테랑의 혼성 군단이었어도, 철저하게 전열을 유지하며 싸웠고, 전투 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 점은 원로원 내 공화파 의원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남겼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를 필요한 동맹이면서, 동시에 잠재적 위협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전투 소식이 알려지자, 로마 시민들에겐 “카이사르의 아들이 싸우고 있다”는 인식으로 퍼져갔다. 승리의 영광이 집정관들에게 돌아가던 시절이었어도, 카이사르 후계자에 대한 상징은 그토록 크고 막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옥타비아누스 군단 내부의 결속이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과 베테랑이 힘을 합쳐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를 치르며 ‘젊은 카이사르 이름 아래 싸운 경험’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전쟁의 승패를 넘어, 옥타비아누스의 권위를 굳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를 카이사르의 어린 후계자가 아니라, 실제 전장을 지휘한 진정한 ‘카이사르’로 병사들이 받아들이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포루미 갈로룸의 승전 소식에 원로원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티나가 함락될 위험에서 벗어났고, 안토니우스의 진격을 저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뒤에 따라온 판사의 전사 소식으로 반감되었다. 두 집정관 중 한 명이 사라진다는 것은 공화정 지도부의 균열을 의미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이 전쟁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공유하게 된다.
키케로는 이 소식을 누구보다 복잡한 심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필리피카이’ 연설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를 공화정의 방패로 칭송해 왔다. 그렇기에 이번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군단을 이끌고 싸웠다는 사실은 그의 기대를 확인시켜 주는 기회였다. 키케로는 원로원 회의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용맹을 강조하며, 그를 로마의 구원자로 추켜세우는 수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판사의 죽음은 키케로에게 좋지 않은 징조의 서막이었다. 공화정의 합법적 집정관이 무너진 자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필요 이상 커질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겉으로는 칭송하면서도, 젊은 후계자가 언젠가는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면서, 그는 내심 옥타비아누스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포루미 갈로룸 전투에서 판사가 전사하자, 원로원 군은 지휘체계를 새롭게 수립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공식적 권위가 약했기에, 유일하게 남은 집정관 히르티우스가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잡았다. 그는 원로원의 명령뿐 아니라, 군 내부 사기를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히르티우스의 최우선 목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구원이었다. 무티나는 여전히 포위망 안에 버텼지만, 식량은 고갈되어 갔다. 만약 무티나가 함락된다면 원로원 전체가 안토니우스 앞에 무릎 꿇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히르티우스는 포루미 갈로룸의 승세에 이어, 곧바로 무티나 성을 돌파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전체 병력을 재정비했다. 판사의 군단을 흡수하고, 옥타비아누스의 군단과 함께 다시 전선을 구축했다. 수적으로는 여전히 우세했지만, 안토니우스 군 역시 크게 무너지지 않고 재편된 상태였다. 히르티우스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안토니우스의 세력 회복에 도움을 줄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는 결정적인 일전을 서둘렀다.
포루미 갈로룸 전투가 끝난 일주일 후인 기원전 43년 4월 21일, 결국 그는 무티나 성을 향해 진격을 개시한다. 이번엔 평원에서의 성 포위를 깨뜨리고 데키무스를 직접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성안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으며, 성 밖에서 공격하는 원로원 군에게는 전세를 결정지을 일전이었다.
원로원 군은 중앙을 히르티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정예 군단이 맡았다. 옥타비아누스 군단이 좌익을, 또 다른 히르티우스 군단이 우익을, 그리고 전체 원로원군 양 측면엔 기병이 도열했다. 여전히 베테랑 군단이 중핵인 안토니우스 군은 무티나 성을 압박하는 포위망 가운데 원로원 군을 맞아야 했다.
그날, 무티나 평원은 새벽안개로 덮여 있었다. 병사들의 거친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퍼졌고, 방패에 맺힌 물방울이 떨릴 때마다 긴장한 손끝이 따라 흔들렸다. 집정관 히르티우스는 중앙의 군단을 이끌고 선두로 나섰다. 그가 앞장서 전열을 이끌자, 병사들의 피가 뜨겁게 솟구쳤다.
곧바로 나팔이 울리면서 수천 개의 투창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가볍고 날렵한 투창이 적진의 방패에 깊숙이 박히면 창날이 휘며 방패를 무겁게 만든다. 일부 병사들은 방패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히르티우스 군단이 밀고 들어갔다. 넓게 굽은 방패가 앞을 가리며 그 뒤로 번개처럼 검들이 솟구쳤다. 안토니우스의 노련한 병사들은 오랜 전투 감각으로 방패를 겹겹이 세워 벽을 만들고, 틈마다 창을 내밀며 반격했다. 로마군의 주 무기인 히스파니아 검이 갑옷의 이음새를 파고들면 쓰러진 병사들은 손에 쥔 단검으로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히르티우스도 보병들의 혼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쇠사슬 갑옷은 피와 진흙으로 얼룩졌고, 손에 쥔 검이 새벽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는 성문 쪽으로 돌진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기를 쓰고 막아대는 안토니우스의 기병대가 측면으로 돌진해 장창을 내질렀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공기 소리와 함께 수많은 군사가 쓰러졌다. 그래도 히르티우스는 검을 휘두르며 성문을 향해 점점 나아갔다.
유혈의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윽고 성문이 가까워지자, 무티나 성안의 군사들이 성벽 위에서 함성을 질러댔다. 그 함성에 새롭게 힘이 솟아난 히르티우스가 검을 휘두르던 그때, 안토니우스 군의 반격이 쇄도했다. 뒤엉킨 전열과 피의 난투극 속에서 결국 앞장서 돌진하던 히르티우스가 안토니우스 군의 창끝에 관통당하고 만다.
옥타비아누스의 좌익 전선도 불안정했다. 맞은편엔 안토니우스의 경험 많은 베테랑 군단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의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일부 열이 흔들렸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얼른 말에서 뛰어내려 직접 군단기를 치켜세우며 전열을 다잡았다. 상대인 베테랑 군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공격해 들어오는 전장이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순간 ‘함께 싸우는 지휘관’이라는 모습이 병사들의 가슴을 크게 울리는 계기가 된다. 두려움에 떨던 신병들마저 ‘젊은 카이사르’가 결코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로 함께 전열을 지켜냈다.
우익에서는 히르티우스의 장군들이 기병을 이끌고 측면 돌파를 시도했지만, 안토니우스 역시 기병을 맞붙이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기병대의 충돌은 먼지와 피를 일으키며 전장을 뒤흔들긴 했어도, 서로가 결정적 우세로 이끌지는 못했다. 전투의 승세는 중앙의 성문 돌파와 좌익의 버티기에 의해 좌우되었다.
쓰러진 히르티우스를 확인한 순간, 안토니우스는 승기를 잡을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가 베테랑 군단을 몰아 중앙을 무너뜨리려 시도할 때, 벌써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좌익 병력이 몰려왔다. 그들이 무섭게 돌격하면서, 안토니우스 군은 양쪽에서 협공받는 처지가 되었다. 베테랑들이 힘겹게 버티며 저항했어도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결국 패색이 짙어가자 안토니우스는 무질서한 붕괴를 막기 위해 기병을 동원해 방어선을 세우고,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의 침착한 지휘는 혼돈 속에서도 군단을 지켜냈지만, 일 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게 되면서 무티나 포위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 병력은 성벽 위에서 함성으로만 응원했을 뿐, 끝내 성 밖으로 나와 출전하지 못한 가운데, 이 무티나 전투는 안토니우스가 두 집정관을 죽이면서도 결국 원로원 군에 패배한 전투로 막을 내렸다.
전투가 끝난 무티나 성 앞엔 불타오른 수레바퀴가 진흙 속에 묻혔고, 멀리 군마 울음이 저녁 안개에 스며 흩어졌다.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운반되었다. 투구가 벗겨진 채, 그들의 얼굴은 잠든 사람처럼 고요했고, 갑옷엔 피와 흙이 뒤엉겼다. 병사들은 말없이 그 주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승리했어도 누구 하나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가 다가가 시신 앞에 섰다. 젖은 진흙이 히르티우스 군화에 들러붙었고, 검집에는 아직도 전투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비린내와 연기, 그리고 사라진 함성만이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로마의 집정관이었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낮게 말했다. 그것은 장엄한 선언도, 슬픔의 탄식도 아닌, 지금부터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스스로 확인하는 말이었다.
그가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피로에 젖은 얼굴들, 무너진 대열 사이로 스러진 동료들의 그림자. 그러나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모든 눈은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 안엔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군단도 함께였다. 그 시선들엔 새로운 미래의 방향이 담겨 있었다. 히르티우스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 깃발 아래 한 병사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행동에 따라 곧 다른 병사들도 검을 높이 들었다.
“로마를 위하여! 카이사르를 위하여!”
어디선가 터져 나온 외침이 들판에 메아리쳤다. 이어서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로마를 위하여! 카이사르를 위하여!”
수만 자루의 검이 하늘을 향해 번뜩였다. 무티나의 군단들은 이제 더 이상 원로원의 군대가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주검이 널린 들판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히르티우스가 향하던 성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무티나 성안의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성벽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성문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구원군을 카이사르 아들이 이끌게 된 현실이 그의 손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그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가로 놓인 불신은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승리보다 높은 벽이었다.
무티나 평원이 금빛으로 물드는 일몰 시각이 다가왔다.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열을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상병을 옮기고, 전사자를 묻고, 보급품을 점검하라는 짧은 지시였다. 말끝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에겐 아직도 소년의 흔적이 남았으나, 그 명령의 어조만큼은 어느 장군보다 확고했다. 집정관 시신이 막사 중앙으로 옮겨지고, 횃불이 하나둘 타올랐다. 그 불빛이 옥타비아누스의 철제갑옷을 비추었다. 그 표면엔 젊은 승리자의 얼굴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의 서막이 비쳤다.
훗날 사람들은 그날을 로마의 운명이 바뀐 순간으로 기억하게 된다.
무티나 전투 소식은 봄비에 젖은 길을 따라 로마에 도착했다. 전령이 땀에 젖은 채 포룸으로 말을 몰아와 외쳤다.
“안토니우스가 패했다! 원로원 군이 승리했다!”
전령의 외침에 시민들이 환호했다.
“로마가 이겼다!”
“공화정이 살아 있다!”
그러나 뒤 이어 집정관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의 외침에 환호가 가라앉으면서 시민들이 얼어붙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 낮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남았지?”
그 질문은 골목과 시장, 원로원 회의장까지 퍼져나갔다.
그날 원로원이 긴급히 소집되었다. 키케로는 전투의 세부를 낭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손이 떨리면서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는 공화정 이름으로 싸운 이들을 찬양하며, 전장의 중심에 있던 젊은 옥타비아누스 이름을 거듭 언급했다.
“그는 아직 청년이지만, 신의 섭리가 그를 우리에게 보냈습니다.”
그의 말에 일부 의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어떤 이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포룸의 거리에는 이미 소문이 퍼졌다.
“카이사르 아들이 안토니우스를 꺾었다.”
그날, 수도 로마 공기는 승리의 열기와 불길한 예감이 뒤섞인 냄새로 가득했다. 로마 거리에 히르티우스와 판사를 애도하며 초상화가 걸렸다. 그 옆엔 옥타비아누스의 초상화도 함께 걸렸다. 노인들은 그를 카이사르의 유산이라 불렀고, 젊은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의 얼굴과 이름이 시장의 벽, 그리고 병사들의 노래 속으로 흩어져갔다.
그래도 로마 원로원은 공화정의 전통적인 절차를 무시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원로원은 결국 군단의 지휘권을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부여하고,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명령의 문장은 짧았지만, 그 속에 원로원의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이 젊은 장군을 칭송하면서도, 동시에 통제하려 했다.
“그가 공화정의 방패로 남을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그것이 키케로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선의 현실이 그의 기대와는 달랐다.
옥타비아누스에게 들려오는 것은 원로원의 명령이 아니라,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의 불만이었다.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읽었다.
그는 로마 사절을 무시한 채, 병력을 철수시켰다. 무티나에서 30km 지점인 포강 남쪽의 넓은 들판이었다. 아직 연기와 탄 냄새가 남아 있던 그곳에서 그는 병사들 앞에 연설했다.
“전투는 끝났지만,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로원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그 선언은 병사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불어넣게 된다.
고립되었던 무티나 성에서 간신히 해방된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자기를 구해낸 군단들에게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그가 포 평야의 군영으로 사절을 보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싸늘하게 맞았다. 그런 뒤 젊은 장군은 마치 별 중요치 않은 서류를 대하듯 데키무스의 서한을 한 손으로 펼쳤다.
“로마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그대의 군단은 즉시 내 지휘 아래 들어와야 한다. 공화국의 존립을 위해 싸운 그대에게 명한다.”
곁을 지키던 군단의 제1백부장인 살비디우스가 분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모욕입니다. 그들은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로마의 이름조차 지킬 수 없었음을 잊은 겁니다.”
모든 군단병을 대신한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어도 옥타비아누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편지를 구겨 던져버리고 막사 밖의 포 평야를 바라보았다. 전투의 불길이 지나간 자리, 아직도 그을음이 남아 있는 들판 위로 저녁 햇살이 길게 비쳤다. 그가 데키무스의 사절에게 말했다.
“우리는 데키무스의 병사가 아니다. 명령은 더 이상 로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시작된다고 그에게 전하라.”
손가락으로 자기 탁자를 가리키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데키무스가 잔여 병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진영에서 탈영병이 속출했다. 병사들이 노골적으로 말했다.
“카이사르 아들이 남쪽에 있다. 그가 진짜 우리 지휘관이다.”
데키무스는 필사적으로 로마에 편지를 보냈다.
“그는 내 명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젊은 자가 카이사르 이름으로 군을 지휘하면서 공화국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원로원 회의장은 분열되어 있었다.
키케로는 여전히 그를 “공화정의 도구로 남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그의 군사적 독립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를 달래면서 명예 표창, 공식 감사 결의, 그리고 “로마로 돌아와 축하를 받으라”는 제의까지 던졌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무렵 포 평야에 주둔한 군영에서는 급료가 밀린 병사들의 불만이 폭증했다. 그들이 요구한 급료를 예산이 부족하다며 원로원에서 지불을 유예했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연단에서 그들에게 외쳤다.
“히르티우스도, 판사도, 그리고 원로원도 여러분의 노고를 무시했다. 그러나 나는 잊지 않았다. 여러분이 카이사르 군단이고, 그의 유언장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로마엔 여러분에게 줄 급료가 없지만, 국가 대신 내가 카이사르 이름으로 급료를 지급하겠다.”
순간, 진영은 폭발하듯 환호로 뒤덮였다. 지금까지 불평하던 병사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투구를 들어올렸다.
“임페라토르! 임페라토르!”
병사들의 함성이 들판을 넘어 메아리쳤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 대신 묘한 긴장과 결의가 서렸다. 곁에 서 있던 백부장이 물었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옥타비아누스가 눈을 들었다. 그의 차분한 시선은 이미 한 방향으로 굳어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부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로마로 가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날 밤, 포 평야의 군영에 불빛이 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강가를 따라 이어진 그 불빛이 남쪽 하늘을 비추었다. 그것은 승리의 불꽃이면서 동시에 공화정의 종말로 인도하는 불빛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의 주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옥타비아누스가 이끌고 있던 병력은 전사한 집정관들의 병력까지 합쳐 모두 8개 군단이었다. 그 군단들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2군단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기(기원전 48년경)에 창설. 옥타비아누스의 핵심 정예 중 하나. 카이사르 베테랑들이 많았음.
제4군단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원정 시 창설. 원래 안토니우스 휘하였으나, 무티나 이후 옥타비아누스에게 이탈.
제5군단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갈리아계 병사들로 창설. 최초의 비(非)로마 시민군단. 베테랑 다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충성심 확고.
제6군단 (철갑군단) 카이사르가 시리아 원정 중 재편. 안토니우스군 일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이탈해 편입.
제13군단 카이사르가 루비콘 도하 시 사용한 상징적 군단. 옥타비아누스의 개인적 상징 군이기도 함. 전사자 거의 없음. 종신 옥타비아누스의 주력 군단으로 존속.
제14군단 카이사르 말년, 혹은 안토니우스 초기에 재편. 무티나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흡수.
제19군단 카이사르 원정군 잔여 병력으로 편성. (정확한 창설 시기 불명) 옥타비아누스 예비군으로 참여. 정원에서 많이 부족한 군단이었음.
제28군단 카이사르 말기(기원전 49년경) 창설. 옥타비아누스 군 후방 방어 담당. 주로 북이탈리아 출신 병사들임.
요약 해석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 8개 군단은 모두 카이사르 계열의 후속 군단, 즉 “카이사르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병사 구성상 베테랑 비율이 높고, 원로원파의 총독인 데키무스 지휘를 거부할 만큼 카이사르파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이 병력 기반이 있었기에, 그는 단 19세의 나이로 원로원을 협박하고 로마로 진입할 수 있었다.
무티나 전투가 끝난 뒤 두 달이 지난 7월 초, 옥타비아누스는 여전히 포 계곡 남쪽 평야에 머물렀다. 원로원은 그에게 여러 차례 귀환과 복속을 명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군단은 원로원보다 장군 개인에게 충성할 만큼, 병사들의 불만이 정치적 압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시기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 불리며 실질적 지휘권을 확립했다.
사실 임페라토르라는 명칭은 본래 원로원이 부여하는 ‘사령관’이라는 칭호였으나, 로마 시민이자 휘하 군단병들이 자발적으로 추대한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독재관’이나 ‘원수(元首)’에 버금가는 칭호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전사 이후 자신의 공식적인 위치가 공화정의 체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원로원과의 관계를 명확히 재정의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먼저 포 평야의 본영에서 400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백부장 대표단을 로마로 파견한다. 이는 옥타비아누스 자신과 군단 전체의 의지를 전달하는 행위였다.
그가 제시한 놀라운 내용은 네 가지였다.
첫째, 집정관 공석을 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할 것.
둘째,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결의를 철회할 것.
셋째,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즉시 처벌할 것.
넷째, 국가가 약속한 무티나 전쟁 참전병들의 밀린 급료와 토지를 지급할 것.
이 요구는 공화정의 법적 근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정치적 현실의 선언문이기도 했다. 이것은 원로원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는 장군이 아니라, 자신의 군단을 대표하는 ‘무장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었다.
로마에 도착한 백부장 사절단은 옥타비아누스의 서한을 낭독했다. 그러나 원로원 다수는 그것을 공식 협상 제안이 아니라 무력시위로 해석했다. 키케로를 비롯한 일부 의원만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을 뿐이었다. 대부분 원로원 의원은 여전히 법적 형식과 로마의 관례 속에 머물러 있었다. 키케로는 어떻게든 옥타비아누스를 공화정의 도구로 남기려 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미성년자에게 집정관직을 부여하는 것은 국가의 치욕이라며 결의를 거부했다.
사절단은 일주일 만에 포 평야로 돌아와 그 결정이 사실상 협상 결렬임을 전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아무런 공식 성명을 내지 않았다. 7월 초의 사절단이 돌아왔을 때, 이미 옥타비아누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원로원의 거부는 더 이상 대화의 여지가 없음을 의미했다. 이제 옥타비아누스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군단의 이동 준비를 명령했다. 그는 더 이상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지 않고, 대신 행군을 통한 의사표시를 택했다.
이때부터 로마는 법적 권위를 가진 원로원과 무장한 권위를 가진 옥타비아누스라는, 사실상 두 권력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균형은 그가 로마로 향하는 순간 무너진다.
그는 포 평야의 여덟 개 군단을 정비하고, 남쪽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행군 속도는 의도적으로 느렸다. 도시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정치적 행군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는 수도 로마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평야 지대에 진을 쳤다. 그곳은 군사적 압박과 정치적 협상 모두가 가능한 위치였다. 성벽 위에서도 라티움 평야 둔덕에 진을 편 옥타비아누스 군단의 깃발이 보일 정도였다. 그는 병사들에게 엄격하게 명령했다.
“도시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로마를 지키러 온 사람들이다.”
당장 수도 로마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한다.
시민들은 포룸에 모여 “젊은 카이사르가 왔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말은 환호와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왔다. 일부는 그를 구원자로 보았고, 일부는 또 다른 독재자의 귀환으로 여겼다. 원로원도 연일 회의를 열었지만, 결의는 그에게 번번이 무시당했다. 무장한 청년에게 법률의 권위는 통하지 않았다. 키케로도 더 이상 연설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그동안 시민의 가슴을 울렸던 공화정의 언어가 군화 발자국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8월 초순, 옥타비아누스의 사절이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전한 것은 단 한 문장이었다.
“젊은 장군은 로마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 ‘권리’가 의미하는 것은 집정관직이었다.
원로원은 겉으로는 법적 절차를 고수했지만, 실제로는 공포 속에 협상을 모색했다. 그들은 그에게 군단의 해산을 조건으로 ‘특별한 명예’와 ‘정치적 보상’을 제안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결국 원로원은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19세의 젊은 장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우스’에게 정식으로 로마의 집정관 출마를 허락한 것이다.
공화정 로마의 집정관 자격 연령은 기원전 180년에 제정된 빌리우스 법에 따라 42세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이는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한 개인이 소유한 병력의 힘은 법보다 강했다.
마침내 기원전 43년 8월 19일, 이어진 선거에서 민회의 압도적 지지로 그는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날의 선거 결과를 ‘만장일치’라고 주장하는 사가도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로마 공화정 역사상 최연소 집정관이지만, 이 나이에 선거를 통해 국가 최고 통치자에 오른 인물은 2,000년 후인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는 도시로 들어올 때 군대를 이끌고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모두 진영에 남겨두고, 단지 수십 명의 호위대와 함께 조용히 입성했다. 그의 침착함은 공포보다 더 큰 설득력이었다. 거리에서 그를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 속에는 어느새 복종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 로마의 권력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원로원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모든 결정권은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넘어갔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안토니우스와의 화해를 명분 삼아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곧이어, 카이사르의 부독재관이었으며, 지금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남프랑스)의 총독으로 나가 있는 레피두스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권력 구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공화정의 문은 닫히지 않았으나, 그 경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기울어 버린 것이다.
그날 로마의 회의 기록에는 한 문장이 남았다.
“그는 집정관이 되었으나, 누구도 그를 통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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