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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5

로마의 제2차 삼두정권과 제국 분할

by 우광환

5, 공화국의 종언을 향한 행군

한편, 카이사르 암살자 대표 격 중 하나인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가 물러간 뒤에도 원로원 결의에 따라 법적으로는 여전히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에게 아무런 병력도, 보급선도, 정치적 후원도 없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병력은 전투 후에 흩어진 잔여 병사뿐이었고, 그마저 대부분 옥타비아누스에게 이탈해버린 상황이었다. 원로원은 형식적으로 그의 지휘권을 인정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병사들의 충성을 얻은 이상 그 명령서는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공화파의 영향력이 끝나가고 있음을 예감했다. 그래도 그는 북이탈리아 성채 도시들을 순회하며 새로운 병력을 모집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 도시가 그의 입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가 남쪽에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서쪽에서 세력을 재편하는 동안, 그는 갈 곳 없는 총독이 되었다. 당대 역사가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안은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나, 그 명령을 집행할 손이 없었다.”

그에겐 마지막 희망이 절실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서 군대를 재건하고 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는 북쪽에서 버티고 있으니, 그대들이 동쪽에서 힘을 모아달라.”

그러나 마케도니아 방면의 정세도 불안해서 서신은 도중에 차단되었다.

8월 무렵, 데키무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를 나와 북쪽의 알프스를 넘어 마케도니아로 갈 것을 결심했다. 만약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두 사람과 합류할 수 있다면 공화파의 재결집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마침내 그는 변장한 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북쪽으로 떠났다. 알프스의 길은 험하고, 각 도시엔 이미 안토니우스의 연락망이 깔려 있었다. 그가 라가이도눔(오늘날 리옹 근처)에 도착했을 때, 현지 총독에게 결국 체포된다. 그를 체포한 가이우스 카르디오 총독은 레피두스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 일을 역사가 아피안은 또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친구라 믿었던 사람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곧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졌다.”

결국 데키무스는 안토니우스의 명령으로 비엔나 근처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카이사르 암살자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적인 처형을 당한 인물이었다. 그때 안토니우스는 “이제야 카이사르 원수를 갚았다”라며 기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로마 원로원에 의한 공화파의 군사적 생명선이 완전히 끊어진 사건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된 직후, 그가 가장 먼저 요구한 것도 카이사르 암살자들에 대한 단죄였다. 그들은 예전에 ‘카이사르에 대한 적대행위 금지’라는 법안을 통과시킨 뒤, 그 법을 스스로 어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법적 절차를 통해 그들을 ‘공적 범죄자’로 규정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원로원에서 거의 논의 없이 통과되었다. 그 순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법으로 완성하면서 사적인 복수를 공적인 정의로 바꾸었다. 그 결과 동방의 총독으로 나가 있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도 더 이상 정치적 반대자가 아니라 법적인 반역자로 신분이 전락하게 된다. 이 조치는 원로원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렸다. 키케로를 중심으로 한 공화파 의원들은 더 이상 발언하지 못했다. 그들의 침묵은 체념이 아니라 공포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수도로마시가지

그 무렵, 북이탈리아 상황도 빠르게 변했다.

무티나 전투 이후 후퇴했던 안토니우스는 재빨리 레피두스와 합류했다. 그들은 대규모 병력을 재편한 뒤 갈리아 남부에 주둔했다. 두 사람은 서방의 군사력을 장악한 채, 로마와의 협상 조건을 조율하는 중이었다.

옥타비아누스도 이즈음, 원로원의 지원만으로는 권력이 유지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공화정의 언어는 그를 보호하지 못했고, 군사력은 여전히 북서쪽에 집중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안토니우스와 화해를 모색하기로 결정한다.

9월 초, 비밀리에 사절을 보내 서로 간의 원한을 정리하고, 공동의 적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먼저 제거하자는 제안을 전달했다. 옥타비아누스의 화해 제의가 전해지자,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빠르게 회동을 추진했다. 그들은 북이탈리아와 남부 갈리아의 경계, 즉 보노니아(오늘날의 볼로냐) 인근에서의 협상을 제안했다.

한편 로마의 원로원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공화정의 마지막 주체였던 키케로도 이 무렵 로마 외곽의 별장으로 물러나 버렸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결정을 ‘배신’이라 기록했지만, 정세의 흐름은 그를 역사의 뒤편으로 밀어냈다.

10월 초, 옥타비아누스는 드디어 로마를 떠났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북부 방면의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직접 만나기 위한 정치적 행군이었다.

침착하게 출발한 옥타비아누스의 행군은 사실상 공화국의 종언을 향한 행군이었다. 그가 향하는 보노니아 평야에는 안토니우스의 군단, 레피두스의 군단, 그리고 자신의 군단이 모여들 터였다.

이윽고 옥타비아누스는 11개 군단으로 증강된 병사들을 이끌고, 보노니아 평야에 도착했다. 그곳 주위로 먼저 도착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진영이 서 있었다. 양측은 오랜 내전으로 서로를 불신했지만, 이제는 세 사람 모두에게 협력을 강요당하는 정세였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 패전 이후 명예를 회복해야 했고, 레피두스는 양측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아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둘의 병력 없이는 동방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압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강에 놓인 임시 목재 다리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이 회담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회담 중 각자의 병사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양쪽 둑에서 대치했다. 그 협상은 사실상 ‘로마 제국(諸國)의 분할 협정’이었고, 결국 그들은 합의하기에 이른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레피두스가 보노니아 목재 다리 위에서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 사람은 5년간 로마 국가의 모든 권한을 공유한다.

둘째, 원로원은 그들의 결정을 거부할 수 없다.

세째,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 정치적 동맹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전 남편 클로디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 클로디아와 약혼하기로 합의했다. 이 약혼은 아직 결혼 경험이 없던 19세 청년 옥타비아누스에게 삼두정 체제를 혈연으로 결속하고, 상대 진영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전형적인 정략 동맹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2년 뒤 옥타비아누스가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자, 풀비아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무력을 동원해 옥타비아누스를 압박했고, 그 분노는 결국 기원전 41~40년의 페루시아 전쟁으로 폭발한다.

이즈음 동방에서는 또 다른 암살자 대표 격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공화국 재건을 위해 분주했다.

카이사르 암살 주역이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로마에서 정치적 입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안토니우스의 ‘속주 교체 법안’에 의해 각각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총독직을 배정받았으나, 그들의 권한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결국 로마 정세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그들은 사실상 ‘망명 총독’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그들은 낙심만 할 것이 아니라, 동방 속주를 공화정의 마지막 보루로 삼겠다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

시리아에 도착한 카시우스는 단기간에 군사적 기반을 확보해두었다. 기원전 43년 초,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 임기가 끝난 돌라벨라가 아시아 속주 총독이었던 또 다른 암살 공모자 트레보니우스를 격파하고는 새로운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해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돌라벨라를 단칼에 물리칠 정도로 그의 무력은 충분했다. 이 승리로 카시우스는 시리아 전역과 12개 군단을 장악한다.

브루투스도 마케도니아에서 비슷한 전략을 취했다.

그 역시 기원전 43년, 일리리아 총독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체포해 투옥하고, 그의 병력을 흡수했다. 이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삼두정의 하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다. 삼두정이 체결되면서 암살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자, 브루투스의 명령으로 그는 결국 감옥에서 처형당한다. 브루투스는 계속해서 트라키아와 아시아 속주의 병력을 흡수하며 약 8개 군단 규모의 군세를 갖추게 된다. 이로써 기원전 43년 말 기준으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모두 20개 군단, 약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이 외에도 각 속주에서 징발한 경보병, 궁수, 기병을 포함하면 총 병력은 17만 내외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동방 속주인 시리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등에서 징집된 로마 시민군 및 현지 병참 보조병이었다.

이들은 동방의 재정력, 특히 아시아 속주의 막대한 세금을 활용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두 사람은 아시아 속주와 그리스 도시들에 ‘전시 공채’를 강제로 부과하기도 했다. 이때 일부 도시는 금과 은을 바치기 위해 신전 제물을 녹여야 했을 정도였다.

그 일을 두고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브루투스는 정직했으나 냉정했고, 카시우스는 냉정했으나 탐욕스러웠다.”

그들의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었지만, 이후 동방 도시들이 로마 제정에 불신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시우스는 실무적 지휘와 병참을 담당했고, 브루투스는 정치적 지도자이자 도덕적 구심점의 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의 협력은 겉으로는 원만했으나, 내심 지도권을 둘러싼 긴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양측 모두 공화정 재건을 위해 개인적 감정보다는 공동 명분을 앞세웠다.

이 시기 동방은 실질적으로 ‘제2의 공화국’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원로원 명의로 병사에게 급료를 지급하면서, 로마 공화정 깃발 아래에서 싸운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기원전 43년 말, 로마의 삼두정이 암살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재규정하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자, 동서 로마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분리되었다. 이 대립은 불가피하게 군사적 충돌로 향하게 된다.

삼두정 협약이 성립된 직후, 로마 정국은 급속히 공포정치로 전환되었다. 세 사람은 당시 카이사르파인 호민관 푸블리우스 티티우스를 포섭했다. 그를 통해 ‘공화국 재건 3인 위원회법’을 발의하도록 손을 썼고, 결국 이 ‘티티우스법’이 원로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회에서 당당하게 통과되었다.

사실 로마의 헌정에서 법은 민회가 제정했지만, 그 내용과 실행을 움직이는 실제 힘은 언제나 ‘원로원의 결의’에 있었다. 원로원은 법안을 사전 심의하고, 그 시행을 위한 재정과 행정권을 통제함으로써 사실상 모든 입법의 방향을 결정해왔다. 따라서 원로원이 반대하는 법이 통과된다는 것은, 곧 로마의 헌법적 균형이 무너졌다는 의미였다. ‘티티우스법’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 무장한 군단을 배경으로 민회에서 강행 통과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시민의 의지가 법으로 제정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세 사람의 군사력이 법 위에 군림한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로마의 법은 더 이상 공공의 토론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법은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무력의 결과로 내려지면서, 결의 또한 공포의 수단으로 변해갔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에 제정된 이 법의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를 ‘공화국 재건 3인 위원’으로 임명한다.

둘째, 이들은 5년 동안 모든 행정, 입법, 사법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셋째, 원로원 동의 없이도 법안을 제정하고, 속주 총독 임명을 비롯한 인사권을 독점할 수 있다.

로마의 운명은 이제 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은 곧 “법으로 인정된 독재자들”이었다. 제1차 삼두정을 열었던 과거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에 이어 제2차 삼두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더구나 제1차 삼두정이 군벌들의 단순한 정치 연합이었다면, 17년 뒤의 제2차 삼두정은 법률로 승인된 정식 국가 통치 체제였다. 이어서 삼두정은 재정 확보와 정적 제거를 목적으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 명단에는 원로원 의원 약 300명과 기사 계급 2,000명 이상이 포함되었다. 생전의 카이사르가 정적 살상을 그토록 피하려 했던 일이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숙청의 주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 암살자 세력과 연계된 공화파 인사를 제거함으로써, 동방 원정 전에 후방의 정치적 불안을 없애려는 의도,

둘째,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군대 유지와 향후 원정 자금으로 충당하기 위한 재정적 목적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숙청을 주도했으며, 레피두스는 행정 집행을 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초기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나, 곧 정치적 필요를 인정하고 이에 동조했다. 그 과정에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이름이 명단에 포함되었다.

키케로는 기원전 44년 가을부터 일련의 필리피카이 연설을 통해 공화정 복귀를 주장하며 안토니우스를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전승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아버지’라고까지 부르며 조언을 구했던 정치적 스승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으나, 그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분노를 끝내 막지 못했다고 전한다.

로마 곳곳에 별장을 소유했던 키케로는 당시 이탈리아 남부 해안마을인 가이타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좁혀오는 정치적 불안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가 여차하면 외국으로 도피하기 좋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원전 43년 12월, 소리 없이 다가온 안토니우스의 추격대에 끝내 붙잡히고 만다. 그는 붙잡힌 그 자리에서 처형당할 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목을 내밀었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따라 그의 머리와 오른손을 로마로 가져와 포룸의 연단에 전시했다. 그곳은 과거 그가 줄곧 연설하던 장소였다. 안토니우스는 연설문 필리피카이를 쓴 그의 오른손마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함께 전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공화정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으로 이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숙청을 ‘필요한 정치적 조치’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후 이 숙청으로 확보된 자금과 권력 기반은 삼두정의 동방 원정, 즉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토벌전을 위한 군사적 토대가 되었다.

명목상으로 삼두정의 권력 분할은 균등한 것으로 보였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및 동방을,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나르보넨시스를,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의 통치권을 맡기로 세 사람이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 균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만이 로마 시민의 절대적 지지를 보유한 인물이고, 현직 집정관 신분으로 군사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그의 이름으로만 모든 명령이 합법으로 기록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삼두 협정은 카이사르 암살 이후 이어진 내전의 한 시대를 끝내고, 또 다른 형태의 내전을 예비한 약속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세 사람 모두 공화국의 몰락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질서의 회복’이라 불렀다.

대규모 공화파 숙청 이후 로마는 완전한 삼두정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남은 공화파 세력이 동방 속주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특히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삼두정의 정통성에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목표는 동방 속주의 장악과 공화파 세력의 완전한 제거였다.

기원전 42년 초, 삼두정은 동방 원정을 공식 결정했다. 로마에 남은 레피두스는 서방 속주를 관리하며 내정을 담당했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원정군 최고 지휘를 맡았다. 두 사람은 대체로 역할을 분담했다. 안토니우스는 작전의 실질적 지휘권을, 옥타비아누스는 병참과 행정, 그리고 정치적 명분 관리의 책임을 졌다.

원정군은 총 19개 군단인 정규병 약 9만 명, 그리고 보조병, 기병, 공병 등을 포함한 총병력 약 14만~15만 명으로 편성되었다. 보급품과 군자금은 원로원 숙청을 통해 몰수한 자산에서 조달되었고, 각 속주의 재정담당자들은 이 자금을 군단별로 분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항해 중 잦은 열병에 시달렸고, 전선 지휘 대신 행정 조정에 집중했다고 적고 있다. 그렇기에 안토니우스가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군의 주력은 자연히 그의 영향 아래 놓였다.

기원전 42년 여름, 두 장군은 남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브린디시움에 도착했다. 이곳은 아피아 가도의 종착점이자, 로마에서 동방으로 향하는 전략적 관문이었다.

수송선 수백 척이 정박한 항구에서 병참부대가 각 군단 병력의 승선을 감독했다. 당시 사가들에 따르면 약 10만 명이 두 차례에 걸쳐 출항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아드리아해를 건너 에피루스 해안의 디라키움(오늘날의 알바니아 항구도시인 두러스)에 상륙한다. 그곳에서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동진해 마케도니아 평야로 진군했다. 군단의 행군은 엄격히 통제되어 하루 평균 15~20km 이상 이동하기 어려웠다. 병력과 물자, 수많은 동물과 수레가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과거 카이사르가 내전을 위해 지나갔던 길이기도 했다.

삼두정의 목표는 명확했다.

첫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주력군 격파.

둘째, 시리아, 마케도니아, 아시아 속주의 재점령.

셋째,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으로 한 정치적 정당성 확보.

안토니우스는 단기 결전을 원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장기전 대비를 주장했으나, 결국 결정권은 작전 지휘권을 책임진 안토니우스에게 있었다. 그는 “속도를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판단 아래,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곧장 마케도니아 북부인 필리피를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로마의 내전은 공화정의 마지막 대결로 옮겨가게 된다.

로마 군단

삼두정 군이 디라키움을 통과해 마케도니아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은 이내 동방 속주 총독들에게 전해졌다.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고, 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12개 군단을 이끌고 서진 중이었다. 두 사람은 마케도니아 북부의 필리피 평야 인근에서 회합했다. 이 회합은 공화파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적, 철학적 결의의 순간이었다.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도덕적 명분을 내세웠고, 카시우스는 현실적 승리를 위한 철저한 전술을 강조했다. 그들 관계는 여전히 긴장 속의 협력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브루투스가 카시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카이사르를 쓰러뜨렸다면, 이제는 그의 유산을 무너뜨릴 때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공화국의 적을 필리피 평야로 맞아들여 기필코 승리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였다.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브루투스: 약 8개 군단, 정규병 4만 명

카시우스: 약 12개 군단, 정규병 6만 명

합계: 약 20개 군단, 정규병 10만 명,

거기에 보조병과 기병, 속주 지원군까지 포함하면 총 14만 명 규모.

보급은 트라키아와 아시아의 부유한 도시인 스미르나, 에페소스, 페르가몬에서 확보했다. 두 사람은 병력의 분배를 논의한 뒤, 브루투스가 북쪽 진영을, 카시우스가 남쪽 진영을 맡기로 결정했다.

필리피 평야는 남쪽으로 파가이오 산맥, 북쪽으로 마케도니아 평원이 펼쳐진 천연의 방어 지형이다. 게다가 서쪽으로는 습지와 하천이 이어져, 대규모 병력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이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쌍진영을 구축했다. 두 진영을 약 1.5km 간격으로 나란히 세우고, 그 사이에는 참호와 목책, 보루, 보급소가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두 진영 남쪽으로 뻗어 있는 에그나티아 가도가 전장의 중심선이 될 터였다.

그들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병력이 동쪽에서 접근할 경우를 대비해 보급선을 서쪽인 트라키아로 연결했다. 배후에는 해상 보급로를 위해 네아폴리스(오늘날의 카발라) 항구를 확보했다. 즉, 육상과 해상 모두를 이용한 다층적 방어망이었다.

카시우스는 신중했다.

그는 “적이 먼 길을 와서 피로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두정 군은 수송에 의존하는 대규모 집단이었고, 장기전으로 가면 필리피 평야의 방어가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반면 브루투스는 결전을 원했다. 병사들의 사기와 동맹 속주들의 신뢰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또한, 삼두정이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이상,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이 희미해질 것을 우려했다. 결국 두 사람은 방어 진형을 유지하되, 적이 접근하면 결전을 피하지 않는다는 절충안을 택했다.


로마군 중무장 보병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필리피 서쪽 평야에 진영을 구축한 지 몇 주가 지나자, 동쪽에서 삼두정 군의 선봉이 도착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의 쌍 진영 맞은편에 동서로 긴 두 개의 진영을 세웠다. 이로써 양 세력의 전투장은 필리피 평야의 습지와 도로가 교차하는 중앙부로 결정됐다.

동쪽 끝의 평야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이, 서쪽에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진영이 마주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에그나티아 가도에는 양군의 정찰대가 오가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삼두정 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진영은 지형과 방어시설에서 확실한 이점을 점했다. 이 대치는 공화정의 마지막 전쟁이자, 로마가 어떤 체제로 나아갈지를 결정짓는 전야였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진영은 높은 지대에 구축된 방어선을 의지하며 식량과 물자를 충분히 확보했다. 반면 삼두정 군은 동쪽 습지대에 위치해 병참이 불리했다. 그렇기에 안토니우스는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곧 진흙 지대와 배수로 사이에 참호를 파서 방어선을 연장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야간과 새벽을 이용해 은밀히 측면 통로를 개척했다. 그는 결국 습지대를 따라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진영의 남쪽 측면을 돌아 들어가는 우회 공격 통로를 확보했다. 이 공사는 3주 가까이 이어졌지만, 브루투스 측의 정찰대는 그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공사를 숨기기 위해 안토니우스가 가벼운 공방전을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주도권은 안토니우스 쪽으로 기울었다.

기원전 42년 10월 초, 안토니우스가 새벽녘을 이용해 카시우스 진영 남쪽 참호를 기습했다. 그는 직접 군단을 이끌고 습지를 가로질러 카시우스 진영의 우익을 돌파했다. 급습을 받은 카시우스 진영은 당장 혼란에 빠지고, 그 와중에 지휘체계가 무너지면서 부대가 패퇴해버렸다. 그러나 그 시각 북쪽에서는 브루투스가 반대 방향으로 옥타비아누스 진영을 기습했다. 그의 병력은 빠르게 옥타비아누스 진영을 돌파해 포로를 사로잡으면서 진영 내부까지 진입했다. 마침 옥타비아누스는 그 전날 병으로 진영을 떠나있었기에 천우신조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전선은 양쪽 모두 무너지고, 승리와 패배를 쌍방이 동시에 경험하는 혼전이 되었다. 그런데 이 혼란한 전황 중에 남쪽의 카시우스가 브루투스 측의 승리를 알지 못했다. 그는 브루투스 진영마저 함락된 것으로 판단하고,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찌른다. 브루투스는 북쪽 전선에서 승리한 뒤, 이 소식을 듣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는 전장을 수습하고 병사들을 정비한 후, 카시우스의 장례를 비밀리에 치렀다. 그런 뒤 그는 필리피 서쪽 평야로 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퇴했다.


필리피 전투도


제1차 필리피 전투는 명목상으로는 양측 모두 절반의 승리였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삼두정 측의 우세로 귀결되었다. 브루투스 군이 일시적 전과를 올렸지만, 카시우스의 진영 붕괴와 자결로 공화파의 지휘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양군의 피해는 다음과 같이 추산된다.

브루투스, 카시우스 군: 약 8천~1만 명 전사, 대략 그만큼의 탈영.

삼두정 군: 약 1만 명 전사

전투 후 삼두정 군은 서쪽으로 전진해 필리피 일대를 장악했고, 브루투스는 남은 병력을 재편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내부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제1차 전투 이후 필리피 평야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카시우스가 자결한 뒤, 브루투스는 잔존 병력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는 남은 군단을 재편해 약 8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지만,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상실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지휘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서 내부의 균형도 깨졌다. 더구나 삼두정 군은 전투 후 필리피 동쪽 평야를 완전히 점령하고 보급로를 확보했다. 브루투스가 카시우스 군단을 자신의 지휘 아래 편입시키면서 "카시우스의 죽음은 명예로운 선택이었다"며 사기를 북돋았으나, 지휘관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다. 특히 시리아 출신 부대와 용병대 일부는 장기전에 피로감을 드러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필리피 동쪽 평야에 전열을 정비했다. 그는 여전히 병사들 사기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자, 결전을 통해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는다.

아직도 병석에 있는 옥타비아누스는 전투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이름을 내세워 “카이사르의 원수를 단죄하라”는 구호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윽고 기원전 42년 10월 23일 새벽, 안토니우스가 필리피 평야의 중앙지대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엔 우회 기습이 아니라 정면 돌파전이었다. 양군은 약 1km 폭의 평야를 사이에 두고 일제히 충돌했다. 브루투스는 초반에 전선을 유지했으나, 곧 좌익 일부 부대가 이탈하면서 진형이 무너졌다. 그때, 우익에 선 안토니우스의 주력군이 측면을 포위하며 브루투스 진영의 참호선을 돌파했다. 그러자 전투는 급속히 삼두정 쪽으로 기울었다. 브루투스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돌파를 시도했지만, 보급선이 이미 차단된 뒤였다. 정오 무렵에 그의 본진이 포위당하고, 남은 병력이 흩어지면서 저항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그러자 브루투스는 더 이상 병사들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몇 명의 호위대를 이끌어 언덕 쪽으로 퇴각했다. 전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나는 공화정을 위해 싸웠다. 이제 신들이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가슴에 단검을 찔렀다. 그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전투 후 그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허락했다. 자기 동생을 죽인 장본인이었음에도,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직접 그의 시신 위에 망토까지 덮어주었다고 한다.

브루투스의 자결로 공화파의 저항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남은 병사들은 항복하거나 각지로 흩어졌고, 삼두정은 결국 동방 전체의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전후 협의와 권력 분할(기원전 42년 겨울)

필리피 이후의 상황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사라진 뒤,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이 필리피 평야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침내 동방 주요 도시들의 지배자는 승리한 삼두정이었다. 이 무렵 안토니우스의 명성은 옥타비아누스를 앞질렀다. 필리피 전투의 두 차례 교전 모두에서 주도권을 쥔 그였다. 그렇기에 병사들의 충성과 전과의 영예가 자연스럽게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부여하는 상징적 권위만큼은 여전히 견고했다. 그 권위는 개인의 무력보다 더 큰 정치적 자산이었다. 레피두스는 필리피 전투 동안 로마에 남아 행정과 병참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 역할은 실질적 영향력을 상실한 형식적 지위에 불과했다. 그의 이름이 삼두의 일원으로 명기되긴 했지만, 권력의 무게는 두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필리피 전투가 끝난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통치 기반을 세워야 했다. 결국 ‘삼두’의 적은 사라졌지만, 그 빈자리는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었다.

동방의 속주는 여전히 공화파 지휘관들의 통제 아래 놓였고, 총독과 군단 사령관은 자신을 새로운 주권자의 대리인이라 주장하는 형편이었다. 그 사이 로마의 명령 체계는 끊기고, 세금과 보급 통로도 마비되었다. 전체적으로 행정은 존재했지만,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정권의 구조 자체를 다시 짜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했다. 군단 주둔지, 병참로, 세수의 흐름, 참전병의 보상까지 모든 것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한쪽이 재정이나 병력의 주도권을 독점하면 다른 한쪽은 곧 정치적 종속으로 밀려날 수 있었다. 따라서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양자 간의 확실한 협의가 필요했다.

결국 두 사람은 전장을 수습한 뒤, 기원전 42년 11월 무렵, 회합을 가졌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확실한 고대 기록은 없다. 그렇기에 일부 학자들은 그 회합이 마케도니아의 암피폴리스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필리피 평야에서 불과 하루거리인 이 요충지에서 두 사람은 제국의 재편이라는, 카이사르 이래 가장 중대한 결정을 논의하게 된다.

당시 로마 제국(諸國)의 영역은 세 개의 거대한 축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방: 마케도니아,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서방: 이탈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남방: 북아프리카 속주들 — 누미디아, 아프리카 프록온술라리스

안토니우스는 이 협의에서 동방의 통치권을 요구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잔여 세력을 정리하고, 카이사르가 이루지 못한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이는 제국의 동쪽을 무대로 삼아 동방 전략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쟁을 통해 명성과 자원을 독점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전쟁 너머 부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옥타비아누스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리스와 시리아, 소아시아를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은 로마 세계의 재정 구조 전체를 움직이는 동맥이었다. 특히 이집트는 나일강의 비옥한 곡창과 정교한 세제 덕분에, 그 하나만으로도 이탈리아 본토의 국고를 능가하는 세수를 거두어들였다. 그 나라의 곡물과 금, 향료, 세리움(비단)의 흐름은 로마 군단보다 더 확실한 힘을 제공하는 자원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공화정의 관리를 넘어 그 부를 손에 쥔 헬레니즘식 군주의 꿈을 꾸었다. 카이사르가 유럽에서 전쟁으로 세운 기반을 그는 동방의 행정과 부로 완성하려 했다. 그의 구상에는 명분도 시민의 여론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금과 군단, 그리고 절대적 지위뿐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계산은 정치적 맹점을 안고 있었다. 로마의 권력은 금전이 아니라 지지 기반, 즉 원로원과 시민, 그리고 병사들의 충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동방의 부는 크지만, 그 부를 다스리는 자는 언제나 로마의 민심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를 통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독립은 곧 고립이었다. 카이사르 후계자답게 그 점을 정확히 간파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기존의 이탈리아 통치를 고수했다. 당장 참전용사들의 토지 분배를 통한 안정적인 정착 추진이 시급했고, 원로원과 민회의 지지를 다지기 위해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제국의 부가 동방에서 흘러온다 해도, 권력의 정통성은 여전히 이탈리아에서 솟아난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처럼 꿰뚫고 있었다.

이렇게 그는 부의 중심을 내주되 권력의 근원을 움켜쥐었다. 로마의 주력 군단은 대부분 이탈리에서 충원되고, 시민 여론은 이탈리아에서 형성되며, 원로원의 영향력이 뿌리내린 곳 또한 모두 그 땅이다. 그는 굳이 지배구조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다만 그 구조 속에서 권력의 방향만을 자신에게 돌려놓았다. 그렇지만 삼두정은 여전히 균형이 필요했다. 레피두스는 본래의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통치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레피두스는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이름에 불과했다.

이 협의는 표면상으로는 삼두정의 재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로마 권력의 분리선을 확정한 합의였다. 안토니우스는 부의 세계를 선택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의 거점을 남겨두었다. 그날 암피폴리스에서 체결된 이 둘만의 합의는 로마가 앞으로 걸어갈 두 길, 즉 동방의 황제적 야심과 서방의 제도적 통치라는 그 갈라진 궤도를 예고한다.

두 사람은 협의 끝에 다음의 원칙에도 합의했다.

첫째, 각자의 관할 구역 내에서 독립적 통치권을 행사한다.

둘째, 군단의 이동과 병력 차출은 상대 지역에 간섭하지 않는다.

셋째, 내전 재발을 막기 위해 상호 비방과 정치 선전을 금지한다.

이 협정으로 삼두정은 형식상 균형을 되찾았다. 안토니우스는 전쟁의 실질적 승리자로서 재정의 주도권을 원했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지지와 법적 정통성을 원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삼두정의 해체를 예고하는 징후가 뚜렷했다. 레피두스는 의사 결정에서 배제되었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서로 다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로마의 권력은 명확히 두 축으로 분리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부와 문화의 세계로, 옥타비아누스는 제도와 민심의 세계로 향했다. 이 균열은 점차 구조적으로 굳어지면서 결국 10년 후의 악티움 해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대립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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