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전쟁의 잔재를 정리하다
필리피 전투 이후, 안토니우스는 휘하 군단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남부로 이동했다. 전쟁은 끝났어도 그가 마주한 현실은 전쟁의 연장이었다. 동방 각 속주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패망 이후에도 혼란스러웠다. 특히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에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잔여 병력과 반(反)삼두정 세력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 잔존 세력의 소탕을 명분으로 기원전 41년 초부터 동방 속주의 재편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안토니우스는 서슴지 않고 전쟁 승리자이자 삼두정의 최고 통치자로 행동했다. 그의 행정 명령은 원로원의 결의가 아니라, ‘안토니우스의 권위’ 그 자체에서 나왔다. 안토니우스는 먼저 시리아 총독직을 재조정했다. 이 지역은 카시우스가 통치하던 곳으로, 파르티아와의 국경을 맞댄 전략 요충지였다. 그는 측근인 가이우스 소시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파르티아 국경에 4개 군단을 주둔시켰다. 그다음 소아시아 속주로 이동하여 브루투스, 카시우스 측과 협력했던 도시들인 에페소스와 스미르나, 페르가몬 등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다. 이 재정은 군단의 급여와 전비 보상금으로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로마로 송금되어 옥타비아누스의 재정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그는 각 도시의 자치권을 재검토하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사들을 현지 행정관으로 세웠다. 이 시기 동방 속주의 통치 체계는 사실상 ‘안토니우스의 개인 총독령’으로 바뀌었다.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본토를 안정시키기 위해 일부 도시에 로마식 식민지 지위를 부여하면서 테살로니카와 파트라이를 군사 거점으로 삼고, 해상 보급선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헬레니즘 세계의 지도자로 자신을 포장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안토니우스를 ‘신의 친구, 자유의 수호자’라 부르기도 했다. 이는 그가 로마식 통제보다는 헬레니즘식 관용과 문화적인 접근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안토니우스의 동방 통치는 옥타비아누스의 이탈리아 내정과 대조된다. 전자는 카리스마와 개인적 권위에 의존했고, 후자는 제도와 행정개혁에 기반했다.
이 시기 삼두정의 균형은 겉으론 유지되었지만, 사실상 양자의 권력 분립과 대립 구조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필리피 전투 이후에도 레피두스는 여전히 공식 문서에 ‘삼두’ 중 한 명으로 명기되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그는 애초부터 카이사르 후계자 그룹에서 정치적 중재자의 위치에 있었다. 카이사르 생전엔 충실한 참모였고, 암살 이후엔 안토니우스의 동맹자였다. 그러나 그에겐 카이사르의 이름도, 독자적 군단 기반도, 카리스마도 없었다. 그의 자산은 직책뿐이었다.
기원전 42년 암피폴리스 협의에서 결정된 대로,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통치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년 후의 브린디시움 협정을 통해 자신의 통치 지역을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 빼앗기고 아프리카 속주를 담당하게 된다. 그곳은 풍요로운 곡창지대였지만, 로마 정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사실상 ‘유배지’였다. 레피두스는 이후 명목상 아프리카 총독으로 군단을 거느렸지만, 명령권은 제한적이었다. 그가 로마와의 정치적 거리를 좁히려 시도할 때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영향권을 견제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칙령과 법령 서두에 등장했지만, 점점 서명만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실제로 기원전 41년 이후의 법령 가운데 레피두스의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하는 사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외교적으로 존중하면서도 실제로는 철저히 견제된 동맹자로 다루었다. 거기에 더해 안토니우스는 그를 정중하게 무시했다. 레피두스가 이탈리아나 동방문제에 의견을 낼 때마다 그는 “그곳은 귀하의 관할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로 선을 그었다. 레피두스는 세 개 군단을 거느렸지만, 그 병력은 대부분 늙은 참전병들로 구성되었다. 보급은 불안정했고, 로마 본토로부터의 군수 지원도 끊겼다. 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더 많은 권한을 달라고 요청해도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인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삼두의 균형추’가 아니라, ‘필요할 때만 호출되는 서류상의 동반자’였다.
기원전 41년 중반, 안토니우스는 아시아 속주를 돌며 정복지마다 연회를 열고, 각 도시의 귀족과 예술가들을 초대했다. 그는 자신을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그리스의 해방자’로 묘사했으며, 이 시기부터 그는 점점 로마의 장군이라기보다 헬레니즘의 군주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 시기에 주창한 슬로건은 ‘로마의 질서 아래 그리스의 영광을 회복하라.’였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였지만, 그의 정치적 방향을 요약한다. 그는 로마의 군사력을 이용해 동방을 통제하되, 그 통치를 헬레니즘적 가치로 정당화했다.
안토니우스는 또한 정치적 충성심과 조공 체계를 다시 세워야 할 목적으로 속주 총독들과 속왕(屬王)들을 소환했다. 그들에게 그는 조공 납입과 충성 선서, 그리고 로마에 대한 확실한 복종을 요구했다. 그 회합 명단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이름도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도 필리피 전투 직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군선과 곡물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가장 끝자리에 두었다. 이집트의 막대한 부는 다른 어느 속주에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더구나 거기엔 그가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기에 이집트를 다른 속주와 함께 다룰 수는 없었다. 다른 속주들의 문제를 모두 처리한 그는, 기원전 41년 8월에야 클레오파트라에게 킬리키아의 타르수스로 출두하라는 ‘명령서’를 보낸다.
이윽고 그해 10월, 타르수스의 하늘은 금빛으로 번들거렸다. 시드나스 강(오늘날의 튀르키예 베르단 강)을 따라 한 떼의 화려한 선단이 천천히 밀려왔다. 보랏빛 돛이 강바람에 펄럭이는 거대한 기함이 뒷줄의 수많은 선단을 이끌었다. 배 위엔 향유 연기가 피어오르며 피리와 키타라 소리가 물결 위를 덮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실로 짠 옷을 걸치고, 미세한 미소를 띤 채 기함의 갑판에 설치된 옥좌에 앉아 있었다. 완벽한 비너스 여신으로 분장한 그녀를 보기 위해 타르수스 시민들이 신전을 향하듯 항구로 몰려나왔다. 주위 병사들과 함께 안토니우스 역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전장을 지휘하던 그의 감각이 향유와 음악, 그리고 여왕의 자태에 삼켜지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포로를 잡은 그였지만, 그날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포로가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의 말처럼, “그는 로마의 장군이 아니라, 신의 강림 앞에 선 인간이었다.”
그날 밤, 시드나스 강 위에 달빛과 등불이 뒤섞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끝내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안토니우스의 만찬 초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가 자신에게 올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거대한 기함은 또 다른 왕궁이었다. 향유 연기 피어오르는 보랏빛 돛 아래 금빛 램프가 수면에 반사되어 별처럼 흔들렸다. 붉은 카펫으로 덮인 갑판 위에 은제 식기와 금 접시가 줄지어 놓였다. 거기에 로마 식탁에서 보기 어려운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석류즙으로 윤기를 낸 잉어구이, 꿀과 향신료로 간을 한 양고기, 대추야자와 무화과를 섞은 파이, 그리고 황금 접시에 담긴 메추라기 요리. 잔마다 향유 섞은 와인에서 장미 냄새가 피어올랐다. 음식 나르는 시녀들의 비단 치마 끝이 등불을 스치며 물결처럼 흔들렸다. 안토니우스가 잔을 들자, 피리와 하프 선율이 흐르면서 아름다운 시녀들이 매혹적인 춤을 추었다. 그들의 발목에 작은 방울이 달려 있어 걸음마다 맑은소리가 섞였다.
52세였던 카이사르와 만났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스물한 살 젊은 여왕이었다. 당시 그녀의 미소는 불안한 권좌를 지키는 방패였으며, 사랑은 정치의 언어로 삼아야 했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28세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갖춘 여왕으로 변모했다. 그녀는 42세의 ‘무장’인 안토니우스 앞에, 통치의 냉혹한 세계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여왕으로 마주했다. 향유와 미소 뒤에 숨긴 감정은 그저 권력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유혹의 기술을 넘어, 권력의 연극을 완성할 줄 아는 여왕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향로를 옆에 두고, 금실로 짠 옷자락을 우아하게 여미며 말했다.
“로마의 장군이여, 아시다시피 나는 카이사르의 친구였습니다. 그의 뜻을 이어 로마의 친구로 남았습니다.”
부드러운 그녀의 어조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우리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아니라, 신들의 나라입니다. 그대가 만약 나를 심문하고 싶다면, 여기는 재판정이 아니라 신전이라 생각하십시오.”
안토니우스는 대답 대신 타는 입술을 적시려 와인을 마셨다. 입술에 닿은 금잔은 무겁고 차가웠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로마의 권력자가 아니라, 그녀가 다스리는 세계의 손님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시녀들이 다시 춤추고, 클레오파트라가 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로마는 칼로 다스리지만, 왕국은 은총으로 유지됩니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은총을 배웠고, 그 은총을 당신에게 전하려 합니다.”
그녀의 말은 정치적 수사이기보다 여신이 베푸는 축복의 선언이었다. 그 밤의 향기와 음악 속에서 안토니우스는 서서히 그녀의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날, 향유 냄새 물든 배 위에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운명이 새로운 물결로 흘러가리라 예감한다.
안토니우스는 그해 늦가을, 클레오파트라의 초청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향유와 등불이 피어오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은 어둠 속에서 하나의 별무리처럼 지중해를 건넜다. 그 길은 로마의 권력자가 한 왕국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의식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알렉산드리아는 환희로 들끓었다. 왕궁의 회랑에 등불이 켜지고, 금속 거울과 수정판마다 불빛이 반사되어 바다처럼 반짝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위해 연회와 사냥, 경연과 행진을 끊임없이 베풀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겨울, 그들은 밤낮으로 놀았고, 여왕은 그를 ‘디오니소스의 화신’이라 불렀다”고 기록했다. 안토니우스도 자신이 통치자라기보다 하나의 신화 속 인물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그들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공동체’라 불리는 모임을 만들어 날마다 새로운 놀이를 창조했다. 가난한 어부로 변장해 시장으로 나가거나, 밤마다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 식탁을 차렸다. 그러나 그 놀이 뒤에는 치밀한 연극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으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으면서, 안토니우스를 점점 그녀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이집트 궁정의 의례와 종교, 그리고 신화의 상징을 배웠다. 그럴수록 자신을 디오니소스의 풍요와 힘, 그리고 황홀의 신으로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밤은 로마와 달랐다.
별빛과 모래 냄새 뒤섞인 향유와 음악 속에서 안토니우스의 이성은 서서히 무뎌졌다. 그는 점차 동방의 왕처럼 행동하면서, 황금 가면을 쓰고, 왕좌 옆에서 재판을 내리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신에게 제물을 올렸다.
그때부터 그를 향한 로마의 시선은 변했다. ‘로마의 장군’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겨울의 끝 무렵, 클레오파트라가 쌍둥이를 임신하자, 사람들은 그 둘을 ‘태양’과 ‘달’이라 부를 정도였다. 왕과 여왕의 연극은 신화로 완성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향락의 도시가 봄을 맞을 무렵, 이탈리아에서 전혀 다른 소식이 도착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아우인 루키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내전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 소식은 향유 냄새 속에서도 선명했다. 그제야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겨울 동안 로마의 현실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알렉산드리아를 떠날 결심을 한다. 그가 떠나는 날, 클레오파트라는 침묵으로 그를 배웅했다. 그렇지만 그 눈빛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여자의 평온함이 있었다. 그 겨울, 안토니우스는 사랑과 권력이 같은 무게로 존재할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일강물에는 향유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 여왕이 남긴 흔적이자, 로마의 장군이 빠져나오지 못할 향기의 사슬이었다.
페루시아 전쟁, 삼두정의 첫 균열
필리피 전투 이후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자 수만 명의 참전병이 귀환했고, 그들에게 약속된 토지와 보상이 아직 지급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숙청자들의 몰수 토지를 분배하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몰수 대상에는 공화파 잔당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과 소규모 지주들의 땅도 포함되었다. 그 조치는 곧 이탈리아 전역의 불만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태를 단순한 행정 문제가 아닌, 국가 통합의 시험대로 인식했다.
그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군단을 재배치하고, 반대파 도시들에 식량 배급을 제한했으며, 토지 몰수 명단을 재조정하면서도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인기보다 통제 회복이었다. 이는 젊은 지도자가 처음으로 로마 내정 전반을 장악하는 과정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정책에 반발한 세력이 등장했다.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와 그의 아우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안토니우스의 이름으로’ 이탈리아의 불만 세력을 규합한 것이다. 여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보노니아에서 맺어진 옥타비아누스의 약혼은 겉으로 보면 완벽한 화해의 징표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다리 위에서 굳게 맞잡은 손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로디아와의 약혼을 파기한 것이다. 그는 “실제로 아내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냉정한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 결정에는 더 깊은 계산이 있었다. 삼두정 체제가 이미 굳어진 이상 그는 더 유리한 정치 연합을 위해 자신의 결혼 카드를 새롭게 써야만 했다. 그러나 클로디아의 어머니인 풀비아, 즉 안토니우스의 아내는 이 모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풀비아는 로마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
그녀는 평민 가문 출신이었지만, 세 번의 결혼을 통해 공화정 말기의 핵심 권력망 속으로 들어갔다. 첫 남편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급진적 호민관으로, 키케로 추방 사건의 주역이었다. 그는 거리의 폭력으로 정치를 움직였고, 풀비아는 그 곁에서 대중의 힘을 배웠다. 카이사르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두 번째 남편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는 내전에서 전사했다. 급기야 그녀는 세 번째 남편인 안토니우스를 통해서 마침내 로마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녀는 남편의 야망을 관리하고, 그의 권력을 확대하며, 적과 동맹을 구분하는 전략가였다. 그런 그녀에게 옥타비아누스의 약혼 파기는 개인적 모욕일 뿐만 아니라, 안토니우스 가문 전체에 대한 정치적 모욕이었다.
풀비아는 분노로 움직였다. 남편이 동방에서 병력을 재정비하며 세력을 다지는 동안,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정치, 군사적 압박을 가할 조직을 구성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토지 재분배 정책의 불공정”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퇴역 군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안토니우스 진영의 지지자들이 소외되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선 진짜 이유는 약혼 파기에 대한 복수라는 것을 로마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결국 기원전 41년 말,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중앙 이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군대는 에트루리아 일대를 장악했고, 풀비아는 로마 귀부인들의 재산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보급선을 유지했다. 전쟁은 곧 ‘삼두정의 첫 내전’으로 번졌지만, 이에 맞선 옥타비아누스는 단호했다. 그는 퇴역 군인들의 충성을 결집해 반란군을 포위했고, 41년 말부터 40년 초까지 치열한 공방 끝에 페루시아(오늘날의 페루자)를 포위, 함락시켰다. 그래도 옥타비아누스는 두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풀비아의 정치적 권력은 치명타를 입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풀비아의 행동 뒤에 정치 이상의 동기가 숨어 있었다고 기록한다. 남편이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있는 현실을 참지 못한 그녀는, 로마 내 정세를 의도적으로 흔들어 그를 서둘러 귀환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풀비아는 결국 동방으로 도망친 끝에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인 시키온에서 곧 병사했다. 그녀의 무모한 정치적 모험은 안토니우스파를 약화시키고,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결과만을 남겼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전쟁을 통해 로마 본토의 유일한 통제권자로 자리 잡았다. 그의 권위는 군사력뿐 아니라 행정과 재정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이탈리아 내에서 더 이상 그의 명령을 거부할 세력은 없었다. 이 강력한 통치는 동시에 냉정했다. 그는 도시의 지도층을 철저히 교체하고, 몰수 정책을 재확인시켰다. 정치적 통제는 회복되었으나, 민중의 마음속에 공포와 복종이 뒤섞인 침묵이 자리했다. 이 시점의 옥타비아누스는 더 이상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불리는 젊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체계와 안정의 이름으로 내전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자, 즉 로마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한 실질적 지도자였다.
페루시아 반란이 끝났어도 옥타비아누스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의 패배로 내전이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안토니우스파’ 잔여 세력을 경계했다. 그 핵심은 갈리아 트란살피나 총독 쿤티우스 칼레누스였다.
카이사르 시절부터 안토니우스의 측근이었던 그는 제2차 삼두정 이후에는 서방의 11개 군단을 지휘하며 사실상 갈리아, 히스파니아 방면의 세력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40년 초, 칼레누스가 갑자기 병사한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그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군단장들에게 사절을 보내 “삼두 중 정당한 후계자의 명령”임을 내세워 복종을 요구했다. 당시 군단병들은 페루시아 내전의 혼란으로 지휘 체계가 흔들릴 때여서 카이사르의 ‘정통성’을 내세운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주저 없이 따랐다. 그 결과, 칼레누스가 거느리던 11개 군단이 거의 저항 없이 그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넘어 서방 전역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일리리쿰에 걸친 실질적 군사 주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는 아폴로니아부터 함께 했던 친구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를 칼레누스 후임 총독으로 임명해 방어선을 맡기고, 급히 로마로 귀환했다. 페루시아 전쟁 이후 이탈리아 내 참전용사들의 불만과 토지 몰수의 위기에 빠진 도시 귀족층의 반감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내전 중 붕괴한 행정 체계를 복구하고, 몰수된 토지를 재분배하며, 새로운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 분주했다. 그러나 그 위에 동방에서 돌아오는 안토니우스와의 더 큰 갈등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무렵 이집트에 머물던 안토니우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아내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가 페루시아에서 패했고, 그가 부재중인 사이 로마와 갈리아에 자리 잡고 있던 자신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그의 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도 내전의 혼란을 피해 시칠리아로 피신해 있었다. 그 섬을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당시 지중해의 해상로를 점유해나가던 시기였다.
섹스투스는 안토니우스가 그리스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어머니를 예우하여 아테네로 돌려보낸다. 이 전부터 섹스투스는 로마와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안토니우스와의 접촉을 의식적으로 모색하던 중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토니우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제휴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이에 더해, 시리아 방면에서 해상세력을 이끌고 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도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는다. 이를 두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안토니우스가, 아헤노발부스와 섹스투스라는 두 해상 세력과의 느슨한 연합, 즉 ‘사실상의 삼자동맹적 제휴 기반을 확보했다.’라고 말하지만, 훗날 일어나는 일을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해준 섹스투스에게 잠시 호의를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옥타비아누스는 경악했다. 서로를 의심하던 두 삼두는 전쟁 직전의 대치 상태로 치달았다.
그러나 피로한 병사들과 불안한 민심 속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전면전을 벌이기가 어려웠다. 이때 아폴로니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귀국할 때부터 그의 곁을 지켜온 가이우스 마에케나스가 중재자로 나서게 된다.
사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기나긴 정치적 여정에서 그저 ‘조언자’라는 단어로는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다.
에트루리아계 명문 귀족 출신으로, 로마 귀족 사회의 오래된 혈통과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던 그는 귀족 사회 내부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원로원파와 중간 귀족층을 상대로 한 섬세한 외교술을 지닌 사람이었다. 정계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복잡한 귀족 네트워크와 정당, 파벌의 미묘한 역학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의 장점은 과시하지 않는 신중함과 침묵 속의 설득이었다. 그는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상대가 듣고 싶은 언어와 시점을 읽어내며 ‘한발 늦은 말, 그러나 한발 앞선 판단’으로 협상을 움직였다.
브린디시움에서 마에케나스는 사전 외교 채널을 통해 안토니우스 진영의 의도를 파악하고,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절충안을 조심스럽게 짜냈다. 한쪽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손잡은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와의 개인적 친분을 활용해 협상의 분위기를 완화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강경한 입장을 외교 언어로 완화시켜 전달했다. 그의 외교술은 전쟁의 문턱에서 협상의 문을 열어젖히는 조용한 힘이었다.
마에케나스의 능력은 무엇보다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고 설득하는 방식에 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동맹으로 대해야 할 인물”이라 표현했고,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승리한 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러한 언어의 뉘앙스 조절은 날카로운 정치적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마에케나스의 노력으로 협상의 문턱이 낮추어지자 서로 대치하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마침내 브린디시움에서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 직후 암피폴리스 회합에서 제국의 분할을 구두로 합의한 바 있었다. 이탈리아는 옥타비아누스가, 동방은 안토니우스가, 그리고 레피두스는 기존의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를 맡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풀비아의 반란과 페루시아 내전은 이 구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옥타비아누스는 더 이상 동맹자와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고, 안토니우스 역시 동방의 패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이처럼 팽팽한 이해관계 속에서 협상이 결렬되었다면 전면전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내전의 재개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병력의 피로와 민심의 불안을 무시할 수 없었고, 안토니우스 역시 아직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협상이 불가피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마그누스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존재였다. 그가 시칠리아를 거점으로 해상 교통로를 차단해 곡물 수송을 방해했다. 그가 로마를 압박해오는 이 문제는 삼두정 내부의 긴장에 기름을 부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를 의심하며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지만, 섹스투스의 야심을 방치한 채 내전에 돌입하는 것은 모두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 현실의 벽이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브린디시움에서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동방은 안토니우스의 손에 남았고, 이탈리아와 갈리아, 히스파니아, 그리고 레피두스의 속주였던 지역까지 포함한 모든 서방은 옥타비아누스가 맡기로 했다. 이로써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의 통치권을 잃고 아프리카 일부 속주에 국한되면서, 실질적으로 삼두정의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이 브린디시움 조약은 제국의 분할을 공식적으로 법제화한 문서였다. 겉으로는 동맹의 회복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로마 세계를 두 권력자가 나누어 지배하는 냉정한 정치적 타협이었다.
내전의 공포를 가까스로 잠재운 조약이 체결된 날, 브린디시움의 들판엔 병사들의 함성과 축배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불신은 그대로 남았다.
그 불신의 틈을 메우기 위해 선택된 수단이 또 하나의 정치적 결합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화해의 상징으로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결혼을 주선하기로 결심한다.
옥타비아는 미덕과 절제로 이름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치와 음모로 얼룩진 시대에 드물게, 지성과 품위, 그리고 도덕적 안정의 상징으로 존경받는 여인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그녀를 ‘공화정의 마지막 미덕’이라 불렀고, 정치가들은 그녀의 존재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통치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안토니우스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풀비아의 죽음으로 비어 있던 그의 가정은 옥타비아를 통해 로마의 규범과 연결되는 통로기도 했다.
두 사람 결혼의 상징성은 컸다. 옥타비아는 로마 시민들에게 ‘고결의 얼굴’이었으며 그녀의 미덕은 곧 로마의 안정을 의미했다. 이 결혼을 통해 로마 시민들은 삼두 간의 갈등이 끝났다는 정치적 환상을 얻는다. 원로원은 결혼을 공식 승인했고, 카이사르의 계승자들이 다시 하나로 뭉쳤다는 이유로 민중은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잠정적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옥타비아의 설득으로 로마가 잠시 내전에서 벗어났다고 전하지만, 후대의 역사가는 이 장면을 두고 “로마는 한 여인의 덕으로 잠시 평화를 얻었으나, 남자들의 욕망은 곧 그 덕을 삼켜버렸다”고 평했다.
결혼 후 옥타비아는 남편을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 아테네에서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안토니아 마이오르와 안토니아 미노르라는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 특히 차녀 안토니아 미노르는 기원전 36년 아테네에서 태어나 훗날 제국 황실의 혈통을 잇는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토니우스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브린디시움 협정이 체결된 직후, 옥타비아누스의 진영 안에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균열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의 곁에서 고난의 세월을 함께 걸어온 한 사람에게 비롯되었다.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는 젊은 후계자의 곁에서 늘 그림자처럼 동행했던 친구이자 전우였다. 그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의 초창기와 함께 기억된다. 아폴로니아에서 함께 군사훈련과 그리스 학문을 익히던 그는,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혼란 속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정치와 전쟁의 길에 나설 때, 망설임 없이 그 곁을 지켰다. 무티나 전쟁 때부터 군단을 지휘했던 그는, 전후 혼란 속에서도 참전용사 정착과 토지 분배라는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현장에서 해결했다. 그는 이렇게 정치와 군사를 아우를 수 있는 실무형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의 경력은 곧 지위로 이어졌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몰락시킨 필리피 전투 이후 서방 방면의 안정을 꾀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그 책임을 살비디에누스에게 맡겼다. 그는 히스파니아 방면에서 반란을 제압하고, 안토니우스파의 지배 영역이었던 갈리아 주둔 군단을 확보했으며, 병참선을 재정비하여 옥타비아누스 서방 전력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가 지휘하던 군단은 히스파니에서 작전 중이던 군단과 갈리아, 일리리쿰의 주둔군을 포함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의 서방 지배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그의 권력 기반 그 자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장차 집정관 후보로 고려할 만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기원전 40년, 페루시아 전쟁 이후 이탈리아의 민심이 요동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상 봉쇄로 로마가 기근과 불안에 휩싸이면서, 옥타비아누스의 권력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때 자신이 쥔 병력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살비디에누스는, 그 힘이 자기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친다. 결국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비밀서신을 보내 통솔하는 군대를 이끌고 그의 진영으로 합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봉합되어 가는 로마의 평화라는 물결에 스스로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살비디에누스의 서신을 그대로 옥타비아누스에게 전달했다.
그동안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온 친구의 배신이 드러나는 순간, 젊은 통치자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옥타비아누스는 곧바로 상의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살비디에누스를 로마로 소환해 체포했다. 그러고는 원로원에 직접 기소했다. 그다지 길지 않았던 재판의 판결은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반역자의 이름으로 결국 처형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냉혹한 권력의 본질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피로 맺은 우정도 권력의 셈법으로 한순간 무너졌고, 인간적 충성도 정치 논리 앞에 무의미해졌다. 살비디에누스의 몰락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통치란 안정의 구축이며, 권력은 믿음이 아니라 통제 위에서만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사람의 충성에 기대던 통치 방법에서 벗어나 체제와 원칙 위에 권력을 세우게 된다. 충성은 마음이 아니라 제도로 관리되었고, 우정은 더 이상 방패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살비디에누스의 이름은 배신자의 기록으로 남았다. 동시에 그의 이름은 한 젊은 정치인이 권력의 본질을 깨닫고 ‘군주’로 변모하는 ‘전환점의 상징’으로 역사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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