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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7

로마 제국 양대 권력의 필요 조건

by 우광환

7 로마 제국 양대 권력의 필요조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양봉쇄와 미세눔 협정 (기원전 39년)

기원전 40년의 브린디시움 조약은 마치 또 한 번의 내전을 끝낸 듯 보였다. 피로 물들 뻔했던 땅이 정적을 되찾으면서 로마 정치 세계도 숨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육지의 경계에서 멈추었다. 지중해의 파도는 전쟁의 흔들림을 품고 제국의 운명을 또 다른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로마로 향하던 곡물 선들이 시칠리아 해협을 넘지 못한 채 항로를 멈추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로마의 텅 빈 창고 앞에서 터져 나온 민중의 분노가 포룸을 가득 채웠다.

“전쟁은 끝났는데,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굶주리는가!”

그것이 로마가 맞이한 ‘평화 첫해’의 민낯이었다.

육지에서 끝난 싸움이 바다로 옮겨가면서 제국의 생명줄을 움켜쥔 새로운 적이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왔다. 그 치명적인 해상 위기의 주인공은 공화정 마지막 망명군을 이끌고 있던 마그누스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였다.

애초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에서 아버지를 잃은 그는 형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공화파 잔당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피신해 군사를 모았다. 그러던 기원전 45년 3월, 이들을 완전 소탕하기 위해 출동한 카이사르에게 문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형 그나이우스가 처형되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는 몇 척 남은 함선과 패잔병을 이끌고 히스파니아 남부의 카르테이아로 숨어드는 데 성공한다. 그는 디오 카시우스의 말처럼 그렇게 “패잔병의 장수이자, 포기하지 않은 마지막 폼페이우스”로 남았다.

운명은 그에게 새로운 무대를 내주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로마의 권력자들이 육지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을 벌일 때, 섹스투스는 아무도 다투지 않는 바다에 눈을 돌렸다. 그는 패잔병과 해적을 결집해 히스파니아 남부에서 마우레타니아 연안을 거쳐 지중해 서부로 차츰 세력을 넓혀 갔다.

기원전 43년 삼두정이 결성되면서 숙청령이 내려지자, 로마에서 도피한 수많은 귀족과 기사, 원로원 의원들이 그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섹스투스의 세력은 일개 패잔군 집단에서 공화파의 마지막 망명정부로 성격이 바뀐다. 그리고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패망한 뒤 그 잔여 병력마저 그에게 흘러들면서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러자 그는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로마로 향하는 곡물선을 차단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로마의 ‘평화’는 바다에서 흔들렸다.

당시 이탈리아 농업 생산력으로는 거대하게 성장한 도시들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수도 로마 인구만 80만~100만 명에 달해서 식량 자급 충당이 불가능했다. 이탈리아의 부족한 곡물 대부분은 지중해 전역에서 수입되었다. 나일강 델타의 이집트, 북아프리카의 비옥한 평야, 그리고 시칠리아와 사르데니아가 대표적인 공급지였다.

기원전 2세기 말, 당시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으로 시작한 ‘보조금 곡물 배급 정책’은 이후 시민 생존과 정치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장치로 발전했다. 그리고 기원전 58년, 클로디우스 법을 통해 이 제도는 무상 배급으로 전환되며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이때부터 국가가 관리하는 명부에 등록된 수십만의 도시 빈민층은 무상으로 곡물을 제공받았다. 배급이 끊기면 곧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은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제 곡물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연료였다.

이 곡물 수송선들이 통과하는 메시나 해협이 바로 섹스투스가 장악한 요충지였다. 처음 그는 시칠리아 항구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수송선을 나포하거나 침몰시켜왔다. 그러다 결국 항로 자체를 봉쇄해 로마의 식량 공급을 틀어막기에 이른다. 섹스투스는 이때, 자신을 ‘마그누스의 후계자’라 칭하며 해상 봉쇄를 정치적 무기로 삼았다. 삼두정의 권력자들이 육지를 가지려 혈안이 되었을 때, 그는 조용히 바다를 장악해 로마 전체를 압박할 힘을 쥐게 된 것이다.


LO6A35JITBGWZICS4UGLLPDVOU.png 메시나 해협


그 무렵 옥타비아누스의 가장 큰 약점이 해군력이었다.

카이사르 사후 혼란 속에서 사실상 해체되어버린 로마 해군의 숙련된 선원과 장교들을 섹스투스는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육지에서 군단을 거느렸지만, 바다를 지배할 수단은 거의 없었다. 반면 섹스투스는 시칠리아의 항만과 숙련된 선원, 그리고 기동력 높은 선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민중의 불만은 차츰 원로원을 넘어 옥타비아누스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해상전력이 취약한 이 시점에서 섹스투스와 결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기 전에 한 가지 정략적인 수를 던졌다. 그것이 바로 스크리보니아와의 결혼이었다. 스크리보니아는 공화정 말기 행정, 재정 분야에서 부상한 신귀족 가문의 여인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섹스투스의 장인이자 해상 세력의 핵심 인물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누이동생이었다. 이 결혼은 명백히 섹스투스 진영과의 유화 제스처였으며, 동시에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정치적 신호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통해 섹스투스와의 교섭 통로를 열고 해상 봉쇄의 완화를 유도할 발판을 마련했다.

결국 기원전 39년 6월경,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통해 협상을 제안한다.

회담이 열린 미세눔은 나폴리만 서쪽 끝 바이아이와 쿠마이 사이에 자리한 해안 곶으로, 지금의 바쿠올리 지역에 해당한다.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3인 위원이라고 하지만, 이미 실권을 잃은 레피두스는 빠지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만이 바다 한가운데 정박한 중립 선박 위에 섹스투스와 마주 앉았다. 이 회담에서 섹스투스에게 시칠리아와 사르데니아의 통치권 인정과 ‘추방자’ 사면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로마 정부는 곡물 수송 재개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때의 ‘추방자’들은 단순한 범법자가 아니라, 숙청 명단에 오른 귀족과 기사, 그리고 몰수당한 재산을 되찾을 길 없는 옛 로마 시민들이었다. 기원전 43년에 있었던 삼두정의 대숙청 정책 이후, 그들은 고향을 잃고 버려진 항구와 섬으로 흩어졌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키케로의 친구였고, 어떤 이는 브루투스의 병사였으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름뿐이었다. 이때 섹스투스는 그들 모두를 받아들였다. 이 일을 두고 아피안은 “그의 함선엔 귀족들이 노를 잡았다”고 썼을 정도였다.

그들이 로마로 돌아가 재산과 신분을 되찾을 유일한 희망은 섹스투스의 승리였다. 그렇기에 미세눔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그들은 곧 귀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약속된 사면은 번번이 미뤄졌다. 숙청된 이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일은 참전용사들의 토지 이해와 충돌했고, 삼두정 내부의 불신도 여전했기에, 처음부터 이루지 못할 약속이었다. 이때 안토니우스 역시 동방문제를 핑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대로 섹스투스에게 ‘추방자’들은 무시할 수 없는 존립 기반이었다.

그때 결정적 변곡점이 찾아온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협상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루어졌던 스크리보니아와의 정략결혼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원전 39년 말, 딸 율리아가 태어난 직후 옥타비아누스가 이혼을 선언한다. 정치적으로는 협상 파기의 신호였지만, 이 이혼사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스크리보니아는 기품있고 당당한 여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십 년 이상 연상이었던 그녀에게 옥타비아누스는 감정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냉랭했던 것 같다. 어차피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라 애정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성격 차이와 개인적 거리감이 겹쳐 둘의 결혼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결혼의 파기는 곧 협정의 파기였고, 외교의 문이 닫히자 다시 전쟁의 문턱으로 향했다.


미세눔 협정 이후―일리리쿰의 반란과 나폴리 해전(기원전 38년)

미세눔 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제국 내에 전쟁 기운이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잠시 고요했지만, 육지의 북쪽 변방에서 또 다른 전운이 피어올랐다. 그곳은 일리리쿰(오늘날의 달마티아 해안과 크로아티아 일대)으로, 카이사르 이래 로마의 통제력이 가장 취약한 곳이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중앙 권력이 흔들리자, 그 지역 부족들이 조공을 거부하고 로마군 주둔지를 습격한 것이다. 그들은 로마의 조세 징수관과 병참대를 공격하고, 몇몇 요새를 포위해버렸다. 그 지역에서 강력하기로 이름난 파넌티니아인과 델마티아인, 그리고 내륙의 브레우키 부족이 중심이 되어 로마 관리를 살해하고, 항구도시까지 장악했다. 그들은 이제 로마가 자신들의 땅에 간섭할 힘이 없다고 외쳐댔다. 중대한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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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듣고 옥타비아누스는 즉시 아그리파를 파견했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내전 동안 행정과 군사에서 모두 능력을 증명해내고도 장군의 영예인 개선식을 거부했던 그를 옥타비아누스는 깊이 신뢰했다. 그는 당시 살바디에누스의 처형으로 공석이 된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의 총독으로 부임해 크고 작은 분쟁을 조정하는 중이었다.

급히 일리리쿰으로 달려간 아그리파는 처음부터 정면 공격 대신 보급로 차단과 항구 점령을 단행했다. 그런 다음 해안선을 따라 군단을 분산 배치하고, 주요 도시의 곡물 저장소를 확보하면서 포위망을 조여들어 갔다. 그렇게 몇 달간 이어진 전투 끝에 겨울이 다가올 무렵 마침내 주요 부족들의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아그리파의 행동이 더욱 빛난 것은 그 이후였다. 그는 반란의 주모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항복 조건으로 일정 조공을 재개하도록 설득했다. 값없는 피를 불러 복수를 사지 않고, 관용을 베풂으로써 진정한 복종을 끌어낸 것이다. 이렇게 북방의 불안을 잠재웠지만, 제국의 남쪽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다운로드.png 아그리파


기원전 38년 초,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 함대를 이끌고 캄파니아 해안으로 진격해 나폴리와 푸조올리의 항만을 단숨에 봉쇄해버렸다. 미세눔 협정이 무력화되자 이번엔 바다의 곡물 수송로보다 이탈리아를 직접 겨눈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아직 정비되지 않았고, 부족한 선원들마저 항해에 서툴렀다. 반면 섹스투스의 함대는 오랜 해적과 역전의 해군들로 이루어진 바다의 전사들이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인 아그리파는 여전히 북방 원정의 후속 정비를 마치지 못한 채 아직도 일리리쿰에 머물러 있었다.


img.jpg 고대 로마의 군선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함대에 오른다.

그리하여 나폴리와 푸조올리 앞바다에서 충돌이 벌어졌지만, 옥타비아누스 함대는 전투 초반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섹스투스의 기동선들이 노련하게 곡선을 그리며 돌진하니 옥타비아누스의 무거운 갤리선들은 미처 방향을 바꿀 수 없었다. 곧이어 거센 남서풍까지 불어 닥쳐 순식간에 흩어진 함선들이 해안에 좌초되거나 섹스투스의 함대에 포위되어 불타버렸다. 처절했던 그날을 가리켜 아피안은 “바다가 로마의 깃발보다 불길로 더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했다. 그 혼란 속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상처 입은 몸으로 간신히 육지로 헤엄쳐 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실패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값비싼 교훈이었다.

다행히도 섹스투스는 더 이상 전쟁을 결심하지 못한 채 견제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바로 그 ‘공백기’가 옥타비아누스에겐 전력을 정비할 유일한 기회였다. 그는 이때부터 해군 재건의 전권을 아그리파에게 맡기고 장기적인 대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해군의 전권을 쥔 아그리파는 기원전 38년 겨울 무렵, 루크리누스 호와 아베르누스 호를 잇는 운하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여름, 두 호수를 활용한 새로운 군항 ‘포르투스 율리우스’를 완공한다. 이 항구는 오늘날 나폴리만 서쪽인 지금의 포추올리 인근에 자리하는 지역이었다. 화산 분화로 함몰된 두 호수는 고대인들이 ‘지하 세계의 입구’라 부를 정도로 수심이 깊어서, 함선의 집결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적격지였다. 아그리파는 그 신화적 장소를 군항으로 바꾸면서 함선을 건조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독려했다. 그는 이 시기 ‘하르팍스’라는 신형 무기도 고안해 해전의 양상을 바꾸었다. 하르팍스는 쇠사슬에 연결된 갈고리를 공성기로 발사해 적선의 돛대와 노를 끊고 배를 나포하는 장치였다. 그렇게 아그리파는 섹스투스와의 결전을 차곡차곡 준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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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의 동방 귀환과 파르티아 원정계획

브린디시움 협정으로 내전의 불길을 일시적으로 잠재웠을 무렵, 안토니우스의 시선은 다시 동쪽을 향했다. 이탈리아, 곧 서방은 더 이상 그에게 힘의 원천이 아니었다. 거기엔 지루한 타협과 끝없는 논쟁만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이 닿는 곳은 금과 향료, 부와 왕권이 잠든 동방의 땅이었다. 그 길은 동시에 한 여인을 향한 길이기도 했다.

타르수스에서 처음 마주한 이래 1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클레오파트라와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편지와 사절이 오갔고, 재정과 함대가 로마 장군의 이름으로 이집트를 떠나 움직였다. 냉철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시작된 결합은 어느새 전략적 계산을 넘어, 서로의 결핍을 알아본 ‘공모’로 깊어져 갔다.

기원전 40년 말 무렵, 안토니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발을 디뎠다. 향료 연기와 황금빛 깃발이 휘날리던 그날의 항구엔 수천의 병사가 항만에 나와 이집트식 행렬을 이루었다. 클레오파트라도 검은 머리 위에 태양 형상의 금장을 얹은 채 제왕의 길을 걷는 그를 직접 맞이했다. 황금빛 햇살이 내려앉은 왕궁의 정원으로 들어가자, 그곳으로 그를 이끈 여왕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이 재회는 로마의 권력자와 이집트 여왕의 운명이 이제부터 하나의 궤도를 그리며 맞물려 들어가는 시작점이었다.

이 시기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머문 것은 몇 달이었지만, 자기 삶의 궤적을 돌이킬 수 없이 바꾸어 놓았다. 사실상 로마의 양대 지배자로 지중해 세계에서 명성을 얻은 그는 왕국의 주빈(主賓)으로 머물렀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이집트식 권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화려한 궁정에서 회의를 주재할 때, 왕좌 뒤편엔 파피루스 문서들과 금박으로 장식된 신들의 상형문자가 늘어섰다. 그는 의례로 이루어지는 모든 정치가 향과 음악 속에 움직이는 그 체계에 매혹되었다. 그에게는 로마 원로원의 토론에 물든 정치보다 이집트의 의식이 더 완벽해 보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궁전 안에 ‘디오니소스 모임’을 결성해 정치와 제의, 향연이 결합된 새로운 권력의 형식을 실험했다. 향연이 곧 권위의 표지였던 이집트식 통치에서 여왕의 권력은 신성한 의식의 일부로 자리했다. 로마 공화정이 합의로 통치되듯, 이곳은 향과 술, 그리고 신들에 바치는 제의가 여왕의 권위로 확립되었다.

공화국의 절도가 아닌, 왕국의 허영에 물든 그의 웃음이 곧잘 왕궁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로마 시민에서 동방의 군주로 변해가는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주변엔 언제나 이집트의 장군과 학자, 그리고 사제들이 함께했다. 그들은 안토니우스를 일컬어 ‘디오니소스’, 즉 신과 인간을 잇는 존재라며 칭송했다. 그 이름을 유쾌하게 받아들인 안토니우스는 연회에서 왕의 관을 쓰고 황금 잔을 들었다. 이처럼 로마의 권력자이기보다 동방의 통치자이기를 원하는 그를 클레오파트라는 처음부터 주목했다. 이 아름답지만, 권력 기술에 능통한 여왕은 그에게 함선과 자금을 지원하는 일이 이집트의 독립, 그리고 자기 아들 카이사리온의 왕권 강화를 다지기 위한 포석임을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었다. 차가운 그녀의 계산과 달리 그의 감정은 그만큼 뜨거웠다. 정치적 관계로 맺어졌지만, 이젠 감정이 그 정치의 틀을 지배했다. 날이 갈수록 알렉산드리아의 밤은 향과 노랫소리로 가득찼다. 로마보다 부드러운 알렉산드리아 불빛에 마음이 녹은 그는, 왕과 신이 공존하는 새로운 로마를 꿈꾸게 된다.



20191114503751.jpg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상상도

그러나 그가 꾸었던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페루시아 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방에서 들려온 급보가 그를 현실로 불러냈다. 로마의 지배자가 왕국의 ‘특별 귀빈’으로 군림하는 동안, 제국의 동쪽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봄 무렵,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가 왕자 파코로스와 로마계 망명귀족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앞세워 대대적인 서방 공세를 개시했다. 유프라테스를 건너 시리아 속주로 침공해온 그들이 현지 총독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를 안티오키아 인근에서 포로로 잡아 처형해버렸다. 이후 로마의 동방 전초기지였던 도시들이 점령당하거나 두려움에 떨며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오직 티루스(오늘날 레바논의 타이르)만이 끝까지 항전하여 공화국의 깃발을 지킨 정도였다. 티루스는 페니키아 해상 제국의 옛 중심지이자 지중해 동부를 잇는 전략 거점이었기에 안토니우스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파르티아의 왕자 파코로스는 파죽지세로 계속 남하하여 유대 문제에도 개입했다. 그는 하스모네안 왕가의 안티고노스(유대식 이름, 마타티아후)왕자를 옹립하고, 로마가 지지하던 대제사장 하이르카누스 2세(유대식 이름, 요하난)와 그의 형제 파사엘을 축출했다. 하이르카누스는 포로로 잡혀 귀를 잘리는 치욕을 당해 다시는 대제사장직을 맡을 수 없게 되었고, 파사엘은 자결했다.

하스모네안 왕조는 본래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한 마카베오 혁명에서 비롯된 가문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들어 로마의 종속 왕국으로 전락한 뒤에도 왕위와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혈족 간의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하이르카누스 2세와 그의 조카 안티고노스가 경쟁할 때, 파르티아의 개입은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 위기 속에서 하이르카누스의 친족인 헤로데가 탈출해 로마로 건너가는 데 성공한다. 그는 결국 이듬해인 기원전 40년, 로마 원로원에서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하스모네안 왕조의 종말과 로마의 직접 개입이 낳은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의미했다.

gFPyD_utHt2qevD9DDuoUP_AwopzKoAvSVTuO1fvgIBhSHpuozGXyFCs2phY626Dh6Cn903Fo_O-bs4o8YjuSw.jpg 고대 파르티아와 주변국

이 일련의 사태는 파르티아의 침공이 로마의 동방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 궁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꿈의 세월을 보내던 안토니우스에게 이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전선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먼저 동방 속주를 재정비하고 각 속국 왕의 충성을 확인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이 준비가 끝난 뒤인 기원전 39년경, 그는 부하인 가이우스 벤티디우스를 동방으로 파견해 전선을 맡겼다.

벤티디우스는 그해 킬리키아와 아마누스 산맥 일대에서 연승을 거두며 로마계 망명귀족인 라비에누스를 붙잡아 처형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이듬해인 기원전 38년에 파코로스가 다시 침공하자, 시리아 키르레스티카의 긴다루스 전투에서 마침내 그를 전사시켰다. 벤티디우스의 눈부신 활약으로 결국 파르티아가 공세를 멈추면서 동방의 국경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격변은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는 왕과 ‘황제’의 경계가 사라진 새로운 권력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파르티아 기병이 제국의 국경을 무너뜨리는 순간, 로마 공화정의 차가운 현실 앞에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했다. 다시 로마의 방패를 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 것이다.

또한 벤티디우스의 승리는 안토니우스 개인에게도 복합적인 의미로 작용했다. 그의 이름으로 싸운 장군이 파르티아 왕자를 죽이고 국경을 안정시킨 일은, 로마 시민에게 다시 한번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방패’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 승리의 무대에 정작 주인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큰 역설이었다. 부하의 승리가 그의 이름을 드높였지만, 그만큼 그 자신은 그림자 속에 서 있는 듯한 불안에 휩싸였다. 영광이 남의 손에 이루어지는 상황이 무력감을 주면서, 자기 손으로 진정한 승리자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기에 안토니우스는 그 영광을 직접 만들어내야만 했다.

동방의 왕국들이 로마의 힘을 시험하고, 파르티아가 언제든 다시 기병을 몰아올 수 있는 한, 로마의 패권은 완성되지 않는다. 더구나 크라수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궤멸당한 지 15년이 넘었어도 로마는 아직 동쪽에서의 치욕을 씻지 못했다.

그렇기에 파르티아를 격파하고 크라수스의 패배를 설욕하는 일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완성하지 못한 동방 정복의 대업을 잇는 과업이었다.

파르티아 원정은 제국의 동쪽 경계를 확장하는 문제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재정 지원을 기반으로 삼아 ‘로마와 이집트 결합체’라는 새로운 패권 구상을 실현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벤티디우스의 승리는 카르헤의 기억을 지우기 위한 첫 걸음일 뿐이었다. 파르티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은 안토니우스에게 명예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생존과도 직결된 과제였다. 그것은 폼페이우스가 멈춰 세운 동방 정복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었고, 카이사르가 완성하지 못한 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를 다시 그리는 일이었다.


img.png 고대 이집트의 군선

그러나 이 거대한 원정을 위해서는 단지 의지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무엇보다 전쟁 수행의 기초를 다지는 데 집중했다. 우선 동방 속주의 행정을 재정비하여 병참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길리키아, 시리아, 유대와 같은 전략 거점을 다시 통합하고, 각 속국 왕국의 충성을 확보했다. 아르메니아, 메디아, 소포르네, 카파도키아의 왕들에게 사절을 보내 원조와 협력을 약속받는 한편,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병참 자금과 곡물, 전쟁 물자를 지원받기로 약조했다. 이 시기에 로마의 병참망은 티레와 안티오키아, 다마스쿠스를 거쳐 유프라테스 전선까지 뻗어나갔고, 각 속주 행정관들은 원정군을 위한 도로를 건설하고, 말 사육장과 야전 진지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맡았다.

군사력의 재편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는 동방 속주에서 병력을 차출해 정예 군단을 편성하면서, 일부는 파르티아 전선에 익숙한 시리아 주둔 병력으로 채웠다. 각 군단에는 공성 장비와 이동식 투석기가 지급되는 한편, 파르티아 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기병대도 별도로 보강되었다. 사실 그는 원정군의 규모를 약 16개 군단, 즉 7만 명이 넘는 중무장 보병과 1만 명에 달하는 기병을 계획했다. 이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군을 능가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그는 동방 속주를 통해 차출한 병력에서 부족한 부분을 본국 이탈리아에서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남은 것은 원정의 시간과 전선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파르티아는 사막과 초원이 이어진 광활한 평야지대를 배경으로 하는 기동전의 제국이었다. 최대한의 속도가 무기인 그들의 기병을 상대하려면, 보급과 행군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치밀한 병참 계획이 필수였다. 안토니우스는 유프라테스를 따라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아르메니아를 우군으로 확보한 뒤, 메소포타미아 중심부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파르티아를 정면에서 치는 대신, 북방으로 돌아서 들어가는 우회 침공이었다.

그의 전략엔 군사적 승리를 넘어선 의도가 숨어 있었다. 파르티아를 굴복시킨다면 그는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업을 완수한 영웅이 될 것이며, 로마의 권력 기반도 바뀔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와의 동맹 또한 이 원정을 통해 정치적 실체를 얻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왕국의 후계자를 키우는 여왕과, 파르티아를 무릎 꿇린 정복자, 그것은 로마와 이집트가 결합한 새로운 천하의 상징이 될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의 진정한 반려자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의 결혼을 끝장내면서 섹스투스와의 관계가 험악해질 무렵, 로마사에 선명한 획을 긋게 되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리비아 드루실라라는 여자였다.

이미 유부녀였던 19세의 이 여자는 네 살배기 첫째 아들 티베리우스에 이어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혼인을 결심한다. 그녀의 남편은 공화파 출신 귀족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고, 그녀 자신은 로마의 가장 오래된 귀족 혈통 가운데 하나인 리비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었다.



ruToSn5EmTbdoj9sKIG-N2PhK7Uf6a-JDWLV8qCE4Ku0wetoxGKX0uRIEy9JZryaN66xraoQfSsEhFfbI4XOTg.jpg 리비아 드루실라


겉으로 보면 옥타비아누스의 이 선택은 명백히 정치적이었다.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점에서 그에게는 로마 귀족 사회의 전통과 명예를 끌어안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약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혼인이 성사된다면 곧 공화정의 핵심 귀족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절호의 기회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에겐 계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감정의 결이 존재했다. 그는 리비아에게서 명문 가문 후손 이상의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고대 사가들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는 그녀를 “지혜롭고 침착하며, 스스로를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존경받는 여성”이라 기록했고, 플루타르코스도 그녀를 “군주에게 어울리는 품격과 통찰력을 지닌 여인”이라 묘사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리비아를 ‘정치적 파트너’가 아닌 ‘국가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동반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그녀는 뛰어난 가문 출신이라는 외형적 조건을 넘어, 교양과 절제, 그리고 말보다 시선 하나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품격을 지닌 여인이었다.

냉철하고 계산적인 24살의 젊은 권력자조차 그런 매력 앞에서는 흔들렸던 것 같다.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를 처음 보았을 때 “즉시 그녀를 원했다”라고 적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은 과장이 아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직접 그녀의 남편인 네로를 설득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 개인을 양보’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임신한 여인을 두고 이루어진 이혼과 재혼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도 파격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 결혼을 사적인 결합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로마 제국 체제의 정치적, 사회적 기초를 세우는 계획까지 내다본 듯하다.

그 결합은 곧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즉 신흥 권력과 전통 귀족이라는 두 거대한 혈통을 하나로 묶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내전 시기 내내 카이사르와 맞섰던 대표적인 공화파 가문이면서, ‘공화정의 이상’을 상징하는 정치적 세력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결혼을 통해 전통 귀족의 권위와 함께 적대 세력의 상징적 중심까지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은 곧 내전으로 갈라졌던 카이사르의 후계 세력과 공화파 귀족 세력이 한 지붕 아래 화해하고 공존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두 번의 혼사가 모두 권력의 계산 속에 사라졌지만, 리비아 드루실라는 옥타비아누스의 평생 반려자가 된다.

이 결혼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저택은 로마 정치의 새로운 축으로 변모한다. 민중과 참전용사만이 아닌, 전통 귀족과 원로원 엘리트까지 아우르는 지지 기반이 그를 떠받치게 된 것이다. 그의 권력은 카이사르 후계자라는 명분을 넘어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 기반 위에서, 그는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동방에서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병력이 필요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무너뜨리기 위한 해군력이 절실했다. 이 양쪽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협상이 두 사람에겐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었다.


타렌툼 협정- 제국의 시간을 다시 움직인 정치적 계약 (기원전 37년)

기원전 37년 봄, 두 젊은 권력자는 결국 다시 마주 앉았다. 한쪽은 동방에서 대원정을 준비하는 야심가였고, 다른 한쪽은 서방의 바다를 장악해 제국을 바로 세우려는 창건자의 얼굴이었다. 그들의 향하는 시선이 다른 것처럼, 서로를 향한 신뢰 또한 깊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동맹자”라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적수”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장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로마 제국의 운명 자체가 이 협상에 걸려 있었다.


SE-4396c690-2654-4577-be0c-fba53b8125f7.png 타렌툼, 오늘날의 타란토


회담 장소로 선택된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은 상징적인 곳이었다. 이오니아해와 아드리아해가 만나는 남이탈리아의 관문이며, 지중해로 향하는 전략적 병참로의 시작점이었다.

항구는 이미 양측의 함선과 병력으로 가득 찼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의 병사들을, 옥타비아누스 측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집결한 군단과 장교들을 배치했다. 전선의 긴장이 그대로 옮겨온 듯 회담의 공기 또한 무겁고 차가웠다.

협상의 주인공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곁에는 이 협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세 인물이 있었다.

첫째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이자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옥타비아였다. 그녀는 로마 내전의 상처 위에 세워진 가문 동맹의 상징이자, 전략적 계약의 방향성을 인식시켜줄 보이지 않는 표상이었다.

본래 옥타비아는 미덕과 절제로 이름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치와 음모로 얼룩진 시대에는 드물게, 지성과 품위, 그리고 도덕적 안정의 상징으로 존경받는 여인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그녀를 ‘공화정의 마지막 미덕’이라 불렀고, 정치가들은 그녀의 존재를 통해 남매간인 옥타비아누스와 남편인 안토니우스의 통치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할 정도였다. .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한 이성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그녀는 양측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녀는 두 진영을 오가며 설득과 중재를 반복했고, 때로는 양쪽이 감정적으로 폭발하기 전에 한발 먼저 움직여 회담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했다. 그녀는 전쟁의 언어 대신 가문과 도덕, 신뢰라는 언어를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결국 그녀는 내전의 재발을 두려워하는 로마 사회 전체의 열망을 투영한 정치적 장치로 기능했다.

둘째는 옥타비아누스가 깊이 신뢰하는 외교관 가이우스 마에케나스였다. 그는 협상 전부터 안토니우스 측 인사들과 비공식적인 교섭을 이어가며 조건을 사전에 조율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요구는 외교적 언어로 다듬어 전달했다. 불필요한 자극을 줄 언어들을 골라내는 마에케나스의 손끝에서 협상의 문장이 만들어졌다. 회담이 처음부터 파국으로 치닫지 않은 것은 그의 섬세한 분위기 관리 덕분이었다.

셋째는 군사 실무를 총괄하던 마르쿠스 아그리파였다. 그는 이미 포르투스 율리우스 군항 건설을 완료하고 신형 장비 하르팍스를 개발해놓은 상태였다. 더구나 신규 해군 훈련 체계까지 구축하여 “로마가 다시 바다를 지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이 덕분에 옥타비아누스의 발언은 실행 가능한 현실적 제안이라는 신뢰성을 담게 되었다.

그래도 협상장의 공기는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동맹을 재확인하는 회담이었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속내를 철저히 계산하는 거래의 자리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완전히 안정시키기 전에는 병력 지원이 어렵다”고 못박았고,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를 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군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응수했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날이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오래도록 함께할 동맹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동료애’ 또는 ‘우정’ 같은 건 있을 리 만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처음 대면했던 순간부터 어긋난 사이였다. 다만 이 순간만큼은 상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서로가 인정할 뿐이었다.

물밑에서 신뢰를 조율했던 마에케나스와 아그리파가 실질적 실행력을 확보함으로써 협상의 조건은 현실성을 얻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의 한마디 한마디 발언은 그들의 준비 위에서 무게를 얻었다.

결국 타렌툼의 회합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뿐만 아니라, 한 체제 전체가 손을 내밀어 제국의 다음 단계를 함께 설계한 자리였다.

협상은 며칠간 이어지며 때로는 결렬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이 협상은 로마의 운명을 움직이기 위한 냉정한 계약이면서 거대한 전략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계산 위에서, 로마는 곧 서쪽에서 섹스투스와 맞붙고, 동쪽에서 파르티아와 충돌하게 될 운명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17679_23918_4246.png '마에케나스'의 저택에서 함께 토론을 벌이는 당시 문학인 호레이스, 버질, 바리우스


가장 먼저 합의된 것은 삼두정 체제 자체의 연장이었다. 기원전 43년에 시작된 제2차 삼두정의 5년 임기가 기원전 38년에 이미 끝났기에, 이 협상에서 다시 5년 연장이 합의되었다.

권력이 끝나면 모든 것이 멈춘다. 징병도, 세금도, 토지 재분배도 불가능해지고, 원로원의 권한이 되살아나면 거대한 전쟁 계획은 모두 정치적 논쟁 속에 묶여버린다. 따라서 양측은 협상의 첫머리에 삼두정의 비상 권력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합의한다.

이것은 전쟁을 수행할 ‘국가 기계’에 다시 기름을 붓고, 다가올 5년을 전쟁의 시간으로 설정한 결정이었다. 이후의 모든 합의는 이 정치적 시계가 다시 작동한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졌다.

협상의 핵심은 ‘맞교환’이었다.

서로 다른 전쟁을 앞둔 두 사람은 그 전쟁에 필요한 자원이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맞설 해군 함선이 절실했다. 반면에 파르티아 침공을 앞둔 안토니우스는 로마 본토의 베테랑 군단이 필요했다.

결국 타렌툼에서 합의된 교환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건조한 함선 120척과 거기에 따른 해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제공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이탈리아에서 충원한 3~4개 군단의 베테랑 보병과 기병을 동방 원정군으로 파견한다.

이 맞교환은 각자가 자신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안토니우스에게 함선과 해군이 중요치 않은 것처럼 옥타비아누스는 보병이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서로의 잉여가 서로의 필요를 충족했고, 그 필요가 이 계약을 필연으로 만들었다.

타렌툼에서 맺어진 합의는 곧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계약이 현실을 만날 때,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안토니우스는 약속대로 동방 함대를 서방으로 파견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병력 지원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탈리아 내 베테랑 징병은 퇴역 병들의 토지 분배 문제와 충돌했고, 국내 정치 상황도 변수로 작용했다. 결국 동방에 보내기로 한 군단 규모를 제때 충족하지 못하면서, 안토니우스는 부족분을 동방 속주와 동맹 왕국에서 보충해야 했다.

이 미세한 지연은 협정의 신뢰를 흔들었다. 결국 타렌툼 협정은 전쟁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신의 씨앗만을 잉태했을 뿐이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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