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바닷바람과 동방의 모래바람----패배와 질서의 두 얼굴
타렌툼 협정이 끝나자 바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가 약속했던 동방의 함선 120척이 이오니아의 여러 항구에서 차례로 출항했다. 그리스식 장식이 달린 돛대와 시리아제 노가 달린 배들이 브린디시움으로 들어올 때,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배들은 카이사르 시대 이후 처음 로마로 들어오는 진짜 함대였다.
라틴어가 아닌 선원들의 언어에는 이오니아의 사투리, 안티오키아의 억양, 에게해 상인들의 욕설이 교차했다. 그 속에서 아그리파는 말없이 배를 점검했다. 그의 손끝은 돛대의 균형과 노의 각도, 그리고 선체의 갈라진 틈새들을 훑었다. 브린디시움의 바람에는 짠내와 철냄새가 섞여들었다. 조금씩 갑판이 부서진 배마다 대형 쇠뇌 대신 그리스식 투창기가 걸려 있었다. 아그리파는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육군 출신이지만 지금 그는 바다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야 했다. 그들은 오와 열을 지켜내며 방패와 창을 든 채, 세 겹으로 짜인 코호르스 전열, 즉 대열의 앞뒤가 서로를 보호하며 움직이는 로마 군단의 삼중 방진으로 상대 육군을 섬멸하듯, 바다에서 적의 함대를 그렇게 맞아 싸워야 했다.
그는 함대를 나폴리 만으로 옮겨 포르투스 율리우스 해군기지의 훈련장에 배치했다. 새벽마다 호수에 내려앉는 안개 위로 노 젓는 소리와 북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아그리파의 명령에 따라 노꾼들은 하루 종일 노 젓는 훈련을 거듭했다. 그들은 파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호흡을 맞추는 법을 배워나갔다.
아그리파는 말이 적었다. 그 대신 깃발과 북소리가 그의 언어였다. 이미 함대를 움직이는 언어로 고착된 그의 신호 체계에 따라 300척의 배가 동시에 방향을 틀게 되었다. 그는 쇠사슬 끝에 갈고리가 달린 하르팍스라는 신무기를 통해 전혀 새로운 해전체계를 구상 중이었다.
당시의 해전은 본질적으로 파괴의 전법이었다. 적선을 뱃머리의 충각(衝角)으로 들이받아 침몰시키고, 불화살을 쏘아 돛대와 갑판을 불태우는 것이 전투의 전형이었다. 아그리파는 이 낡은 방식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적선을 부수는 대신 붙잡는 전법을 구상했다. 그가 고안한 하르팍스는 쇠사슬 끝에 갈고리를 매단 발사 장치로, 사슬이 날아가 적선의 돛대나 난간에 걸리면, 노꾼들이 일제히 노를 젓는 힘으로 그 배를 끌어당긴다. 이어서 병사들이 적선 갑판 위로 뛰어올라, 육전에서 익힌 백병전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해전의 방식이 충돌의 전쟁에서 제압의 전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백병전에 익숙지 않은 적의 해군에게 이 전법은 치명적이었다. 아그리파 병사들은 이 하르팍스 갈고리를 일컬어 ‘악마의 이빨’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바다를 육지처럼 다루는 보병 논리로 설계된 해전 방식이었으며, 동시에 탁월한 지략가이자 용감한 육군 전사이기도 한 아그리파다운 구상이었다.
그는 “적선을 부숴라!”가 아니라, “적선을 붙잡아라!”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가 내리는 짧은 명령은 로마 해전의 전통을 바꾸게 된다. 포르투스 율리우스의 병사들은 점차 육군에서 해군으로 변모해갔다. 그들은 노의 박자가 군단의 행군과 다르다는 것과, 바람의 방향이 전략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기원전 36년 9월 3일, 시칠리아 북쪽 해안의 바다는 유난히 조용했다. 거친 파도 위를 덮은 새벽안개 저 멀리서 노꾼 지휘자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항구에서 때를 기다렸다. 검은색 돛이 말아 올려진 함선에 올라탄 그의 노련한 선원들은 ‘폼페이우스의 바다’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 맞은편, 나울로쿠스 만에서는 아그리파가 함대를 정렬시켰다. 포르투스 율리우스에서 단련된 노꾼들이 북소리에 맞춰 마지막 기동훈련을 마친 뒤였다. 그들에겐 바람의 방향, 돛의 각도, 사슬의 길이까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었다. 마치 보병군단처럼 대오를 갖춘 함대와 함께 바다도 숨을 죽였다.
급기야 해가 떠오르며 쇠사슬이 빛을 받아 번쩍일 때, 멀리 적선들의 검은 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바람이 바뀌면서 아그리파가 북을 느린 박자로 세 번 울리니, 그의 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일제히 전진했다.
새벽안개가 물결 위로 깔린 수면 위로 양쪽 함대가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듯 마주쳐 왔다. 바람은 남서쪽에서 약하게 불었고, 파도는 짧고 촘촘했다.
섹스투스의 함선들이 먼저 돛의 각도를 바꾸었다. 햇빛을 덜 받는 검은 돛은 그만큼 표적이 되지 않았다. 가벼운 선체들이 먼저 물살을 할퀴며 측면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그리파가 깃발 신호로 전열을 고정시켰다. 선두의 몇 척이 속도를 떨어뜨리자, 후미가 따라붙어 길고 완만한 활모양을 그렸다. 그 활이 바다에 누워 있는 동안, 중간 열에서 북소리가 빠르게 세 번 울렸다. 그 신호는 곧 하르팍스의 준비를 의미했다.
쇠사슬을 감던 갑판 위의 손들이 동시에 멈추면서 갈고리 끝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노수들도 숨을 길게 들이켰다. 지금부터는 힘으로 버티는 구간이었다.
잠깐 사이 바다 위 물안개를 날카롭게 베면서 섹스투스의 함선들이 좌현과 우현으로 치고 들어왔다. 말발굽처럼 빠르고 일정한 노 젓는 소리와 함께 뱃머리 충각(衝角)이 아그리파 함대의 옆구리를 겨냥했다, 그 순간 아그리파의 기함에서 첫 번째 하르팍스가 튀어나갔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철소리와 잠깐의 정적 뒤에 둔탁한 격음으로 갈고리가 적선의 난간에 물어뜯듯 박혔다. 다음 순간, 하르팍스가 쏘아 올린 수많은 갈고리가 연이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이어서 아그리파의 해군들이 힘차게 적선을 끌어당겨 아군의 배와 맞붙여 버렸다. 그러자 당황한 섹스투스의 선장들이 노를 역으로 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아그리파의 병사들이 먼저 함성을 지르며 적선으로 돌진했다. 무거운 쇳소리가 갑판에 울려 퍼지며, 물과 공기가 함께 떨렸다. 바다 위의 전장은 인간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처절한 영역으로 변해갔다.
이때 우현 쪽에서 첫 균열이 일어났다. 섹스투스의 중장선들이 급히 방향을 틀어 나가려는 순간, 아그리파의 기동선들이 바람을 가르며 비스듬히 파고들었다. 적선들과 서로 맞닿자, 갑판이 맞물려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갈고리가 잇따라 날아가 배는 완전히 고정되었다. 이어진 금속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배는 스스로 기수를 꺾으며 고꾸라졌고, 그 기울어진 틈으로 아그리파 병사들이 방패를 세워 밀고 들어갔다. 바다 위의 전투는 뱃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육지의 군단이 바다로 옮겨온 싸움터로 변했다.
한편 중앙에서는 노 젓는 박자가 승부를 갈랐다.
아그리파가 훈련 시킨 노꾼들은 북소리 하나에 일제히 노를 들고 내리는 각도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세 번의 박자 후, 하르팍스가 공중으로 솟았고, 다섯 번째 박자에 병사들이 건너갔다. 모든 동작이 군단식으로 계산되어 있었다. 그들의 리듬은 군율이었고, 그 박자는 승리의 맥박이었다.
반면 섹스투스의 노련한 수병들은 여전히 바람을 믿었다. 돛에 실린 바람을 타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순간의 바다는 너무도 고요했다. 그 반 박자의 공백과 한순간의 정적에 그들이 꼼짝없이 묶여버린 것이다. 돛이 무게를 잃으면 노 젓는 힘만으로 하르팍스의 끌어당기는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들 함선이 모래 위의 수레처럼 둔해질 때 아그리파의 사슬이 그 틈을 물고 놓지 않았다.
함대의 좌익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거대한 충각을 자랑하는 섹스투스의 대형 함선들이 아그리파 함대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파도가 일렁이며 높이 솟은 물기둥이 햇빛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충돌 직전, 아그리파의 함선이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한 치를 비켜서면서 헛되이 옆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그 배 위로 여지없이 ‘악마의 이빨’이 날아들었다. 이윽고 아그리파의 병사들이 고삐를 잡아당기듯 사슬을 감아올릴 때, 적선의 갑판으로 뛰어든 방패벽이 육지의 군단처럼 진형을 폈다.
바다는 더 이상 기동의 영역이 아니라 ‘붙잡는’ 쪽이 이기는 싸움으로 바뀌어 갔다. 동트면서 불붙었던 치열한 전투 끝에 정오 무렵부터 결국 섹스투스의 우익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흩어진 함선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나오려 해도 사슬에 묶인 전선들이 그들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놓치지 않으려는 쪽과 벗어나려는 쪽이 갑판 위에 얽히면서, 비명과 파도 소리 섞여 바다를 뒤덮었다.
육상 기지의 높은 둔덕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이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해상 지휘를 아그리파에게 맡겼으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곁에 선 기수들을 통해 짧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좌익의 돌출을 막아라. 중앙부의 사슬을 늦추지 마라. 우익으로 다가오는 적선을 경계하라.”
바람보다 낮은 그의 목소리처럼 그의 얼굴에도 동요는 없었다.
지중해의 변화무쌍한 바람이 오후가 되어 다시 바뀌었다.
섹스투스의 잔여 함대가 바람을 타고 후퇴하려는 순간, 아그리파가 함대 좌익을 길게 늘여 그들을 가로막으면서 수많은 하르팍스의 쇠사슬이 빗발쳤다. 도주하던 적선 몇 척이 갈고리에 잡히면 뒤따르던 배들도 서로 엉켜 난파의 사슬로 변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검은 돛 몇 척이 수평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아그리파가 기함의 난간에 서서 손을 들자, 그의 장교들이 북을 울리면서 함대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함성이 멎고 고요를 찾은 바다에는 부서진 노와 깨진 돛대, 그리고 떠오르는 시체들로 뒤덮였다. 포로가 된 수병들이 무릎 꿇은 갑판 위로 피 섞인 분홍빛 파도 거품이 쓸고 지나갔다.
조용해진 바다 위로 마지막 쇠사슬이 덜컥 소리를 내며 감길 때, 멀리 육상 둔덕 위에 옥타비아누스의 깃발이 천천히 올라갔다. 승리의 신호였다.
그날 해가 기울 무렵까지 바다는 본래의 빛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의 곡물 길이 되돌아오면서 시칠리아의 곡창지대와 함께 로마의 권력도 되돌아왔다.
타렌툼 협정이 체결된 뒤, 안토니우스는 잠시 평화를 믿었다. 그는 약속대로 시칠리아로 파견할 함선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옥타비아누스가 보내주기로 한 베테랑 병사들의 증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의 잔불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그 침묵은 명백히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동맹의 균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로마의 제도와 민심을 장악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동방의 장군’이라는 낙인 속에 고립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협정의 균열은 실상 정치적 분리의 서막이었다. 그때부터 안토니우스의 감정은 복잡하게 뒤섞였다. 배신감, 경계심, 그리고 무엇보다 명예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앞섰다. 그는 로마에서의 불신을 단 한 번의 압도적 승리로 씻어내려 했다. 그가 파르티아에서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미완의 원정을 완수한다면, 옥타비아누스와의 권력 균형은 다시 복원될 터였다.
기원전 36년 봄, 안토니우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출발했다. 그의 뒤에는 16개 군단, 6만 명이 넘는 보병과 1만 명의 기병, 그리고 동맹국의 보조병이 따랐다. 그는 스스로를 “카이사르의 복수를 완성할 자”라 칭했다. 로마의 시민들에게는 복수와 명예의 전쟁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것이 정치적 재기의 도박이면서, 제국 내 입지의 시험대였다. 그는 앞서 군중과 왕들 앞에서 로마식 진군을 선포했다. “나는 카이사르의 원수를 치러 간다. 그러나 그가 세운 제국의 경계는 이 강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때 그의 손끝이 유프라테스 강 너머, 모래와 산맥의 대지인 파르티아를 가리켰다.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와 손잡은 것은, 힘이 아닌 계산의 결과였다.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가 유프라테스 동쪽에서 세력을 다지는 동안, 아르메니아는 북쪽 산악 경계에 눌려 침묵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서쪽으로는 로마의 압력이, 동쪽으로는 파르티아의 응시가, 그리고 남쪽에서는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라는 경쟁 왕국의 변덕이 그를 조여 왔다.
아르타바스데스는 로마의 대군이 동방으로 향하자, 최소 비용으로 최대 안전을 확보하려 잔꾀를 부렸다.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길과 짐수레, 안내자와 기병을 약속하는 대신, 원정이 성공할 경우 영토 조정과 왕권의 승인을 얻어내려 했다. 로마가 이길 때는 로마의 동맹으로, 로마가 흔들릴 때는 파르티아의 이웃으로, 그의 동맹은 언제든 철수의 여지를 남겨둔 동맹이었다.
행군로는 산악을 가르는 길로 잡았다. 메소포타미아의 넓은 평야를 정면으로 건너면 파르티아 기병에게 노출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고원을 타고 내려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수도 프라스파를 기습 점령한 뒤, 거기서 보급을 보강해 동심원처럼 파르티아의 심장부로 파고들 계획이었다. 그는 공성 병기와 식량, 화살과 예비 무기로 가득 찬 거대한 공성대를 따로 편성했다. 주력은 속도를, 공성대는 안전을 택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기습은 그 빈틈을 정확히 노렸다. 그들은 전면적인 결전을 피하면서, 모래와 바람의 무기, 즉 말과 활을 앞세운 빠른 속도전을 이용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그들은 먼지구름 너머에서 갑자기 나타나 원형으로 에워싼 뒤 화살을 퍼붓고는 사라졌다. 해 질 무렵엔 사막에 늘어선 채 천천히 물러나며 로마군의 추격심리를 자극했다. 그런 다음 어둠이 깔리면 측면의 낮은 고개를 돌아 후방의 보급대를 공격했다. 이른바 가장 느리고 가장 비싼 표적인 ‘공성대’를 찾아내기 위한 유인과 차단의 연속 작전이었다.
로마 보병군단의 코호르스 삼중진(트리플렉스 아키에스, 방패를 이용한 삼열의 거북모형 방진)이 정면충돌에는 철벽이었으나, 그 완벽한 대열조차 보급선의 길이만큼은 방패로 가리지 못했다.
결정타는 공성대를 노린 습격이었다. 공성대를 호위하던 부대가 고원 능선의 완만한 굽이를 도는 순간, 파르티아 기병이 사선으로 파고들어 선두와 후미를 동시에 깨뜨렸다. 앞선 수레들이 뒤엉키자 진로가 막히면서 말들이 하얀 김을 내뿜는 그 몇 분 사이에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로마 보급병들은 수레를 뒤집어 임시 보루를 만들었으나, 일시적 후퇴와 재집결, 재돌입으로 이어지는 파르티아군의 박자감 살린 타격 앞에 방어선이 조각나버렸다. 이때 수레에 실린 투석기 부품과 공성 사다리가 불탔고, 곡물 자루들이 터지며 모래 위로 흩어져버렸다.
안토니우스는 그제야 작전 계획이 어긋났음을 깨달았다.
공성 무기를 잃으면 성을 공격할 수 없고, 그것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견고한 수도 프라스파 공략이 가능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제 안토니우스 군단의 산악로 진격은 곧 지리한 노출 행군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왕인 아르타바스데스가 바로 그때 “길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병을 거두어 가버렸다. 로마가 이기면 돌아오고 지면 떠난다는 냉혹한 방침을 이번에는 그가 노골적으로 실행했다. 동맹의 사라짐은 곧 현지 보급의 붕괴를 의미했다. 길잡이와 말, 창고와 징발권을 제공하던 왕의 그늘이 걷히자, 로마군은 낯선 산악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후의 몇 주는 기습과 회피의 연속이었다. 파르티아의 말발굽은 끝없는 원을 그리며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들어왔고, 로마군은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덮으면서 거북이처럼 뭉친 방진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전열을 지킬수록 속도는 느렸고, 속도가 느릴수록 물의 소비가 늘어났다. 샘과 웅덩이는 지리에 훤한 적이 이미 차지해버려 군단은 점점 추격에 응할 기력을 상실해갔다.
전투는 살아남기 위한 이동으로, 그리고 그 이동은 후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때의 상황을 플르타르코스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더 이상 승리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단지 죽지 않기 위해 고투했다. 전투가 아니라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끝없는 행군이 그들의 목을 조여왔다.”
마침내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침공이라는 거대한 전략의 방향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라스파 공략을 포기하고, 남은 병력과 함께 산 능선을 이용해 결국 귀환하기로 결정한다.
보급선이 끊기자 군단은 사막에 갇힌 섬처럼 고립되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기병이 퇴각한 고원의 빈자리는 파르티아군의 화살로 덮여버렸다. 굶주림이 명예를 갉아먹고, 무너진 동맹으로 군단의 침묵이 이어질 때, 뒤돌아본 고원에는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와 배신의 흔적만이 안토니우스의 눈에 어른거렸다.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앞바다는 ‘바다의 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버렸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을 때, 그가 자랑하던 삼백 척의 함대는 좌초되거나 나포되어 버렸다. 섹스투스는 몇 척의 경선을 이끌고 밤바다를 빠져나왔다. 이제 바다는 그의 제국이 아니라 도주의 길일 뿐이었다.
이탈리아 남단의 해안선을 따라 동쪽을 향하며 그는 칼라브리아와 브루티움의 작은 포구들을 더듬었다. 잔당을 모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미 옥타비아누스의 장군들인 칼비시우스와 스태틸리우스 타우루스가 시칠리아를 봉쇄해버렸다. 로마 국고의 표식으로 봉인된 항만의 창고들은 섹스투스라는 이름의 소멸을 선언했다. 곡물 운송을 담당하던 선주들도 그와 위험 프리미엄을 흥정하지 않았다. 섹스투스는 방향을 바꾸어 이오니아해를 가로질러 그리스로 향했다. 그는 동방의 인맥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속주와 항만을 마지막으로 기대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 계산이 남아 있었다. ‘폼페이우스’라는 이름의 상징성인 아버지 ‘마그누스 폼페이우스(Magnus Pompeius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병사와 시민에게 뚜렷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었다. 만일 항구 하나, 조선소 하나, 조달 창구 하나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는 다시 바다의 지배자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를 맞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파르티아 침공이 실패로 막을 내린 지금, 섹스투스라는 위험한 존재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새로운 충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동방의 모든 항만은 섹스투스에게 입항 허가를 거부했고, 방파제의 수문은 밤에도 열리지 않았다. 섹스투스의 선단은 지도에 없는 정박지만을 찾아 헤매야 했다.
기원전 35년 초, 섹스투스는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 근방으로 간신히 도피했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그 섬에서 그는 소수의 호위대와 함께 은닉했다. 그때 안토니우스 휘하의 지휘관이자 소아시아 방면의 실무 책임자였던 마르쿠스 티티우스가 움직였다.
티티우스는 기원전 43년, 호민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티티우스 법’을 통과시켜 제2차 삼두정을 법적으로 성립시킨 인물이었다. 이후에는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들어가 동방의 행정을 맡았지만,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로 주군의 운이 기울자, 그의 관심은 다시 서쪽의 옥타비아누스로 옮겨갔다. 그가 섹스투스의 체포에 나선 것은, 이렇듯 기회적인 계산 결과였다.
티티우스는 섹스투스의 평판이 아직도 높은 도시들에 먼저 서신을 돌렸다. 그 서신을 통해 그는 섹스투스를 맞이하거나 숨기는 자에게는 로마의 분노가 뒤따를 것임을 경고했다. 이어서 그는 소규모의 신속 부대를 곳곳에 파견했다. 해안과 포구를 차례로 봉쇄하되, 대군을 과시하지 않고 병력의 소문만을 흘리면서 그를 기다렸다. 이 작전은 목표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는 지점으로 오도록 유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둔다. 섹스투스가 결국 뭍으로 올라와 티티우스 군사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티티우스는 그를 로마로 호송하지 않고, 재판도 없이 즉석에서 처형해버렸다. 폼페이우스 가문의 마지막 남자이며 한때 ‘바다의 신’이라 일컫던 자의 죽음은 이렇듯 공허했다. 섹스투스가 사라지자, 시칠리아와 사르데니아의 로마 곡창과 수송체계가 곧바로 국고의 회계 안으로 돌아왔다.
섹스투스의 삶은 여기서 끝났지만, 그의 기능은 로마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 그는 공화정의 마지막 잔광이며, 내전 시대 바다 위에 이룬 자치의 상징이었다. 그가 떠나며 남긴 것은 행정의 승리를 통해 굳어진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다. 로마의 바다가 다시 하나로 통합된 그날 이후, 그 바다의 주인은 이름이 아니라 ‘체제’로 바뀌었다.
옥타비아누스의 귀환과 새로운 체계 ― 로마의 권력 정비
섹스투스가 무너진 후, 옥타비아누스는 곧바로 재정과 병참의 정비에 착수했다. 그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니아의 파괴된 항만을 복구하고, 세금 징수권을 로마 국고로 환수했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농토를 다시 경작지로 등록함으로써 농민과 제대병을 동원해 지중해 남부의 생산망을 복원했다. 로마의 권력은 처음으로 군사와 행정, 재정이 일체로 움직이는 체제로 바뀌어 갔다. 곡물의 유통과 조세의 흐름이 한 사람의 명령으로 통제되자, 로마 시민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의 명예는 승리의 환호보다 행정의 효율 위에 세워졌다. 원로원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사절단을 꾸렸고, 모든 군단은 그를 ‘임페라토르’로 추대했다. 하지만 그는 영예를 독점하지 않았다. 승전의 공은 아그리파에게, 내정의 실무는 마에케나스에게 돌렸다. 그러나 모든 결정은 옥타비아누스 본인이 내리면서 실행은 위임했다.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모든 공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구조를 만들었다. 일찍이 그가 배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통치의 기술이었다.
그는 곧 토지 분배에 착수했다. 시칠리아와 캄파니아의 농토 일부를 몰수해 베테랑에게 나누어 주면서, 병사들의 충성심을 토지라는 물적 기반 위에 세웠다. 지주들의 불만이 터졌을 때, 마에케나스는 이를 보조금과 감세로 무마했다. 이렇게 모든 불만이 제도 속으로 흡수되면서, 전쟁의 피로조차 행정으로 봉합했다. 해군의 선박 운용 또한 군사 명령이 아닌 행정 명령서로 기록했다. 이때부터 로마의 전쟁과 평화는 더 이상 원로원의 토론이나 장군의 결단이 아니라, 통치자가 서명하는 명령서 한 장으로 결정되었다.
나아가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보고 절차를 단축시켰다. 그의 모든 명령은 ‘비상대권’이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다시 ‘공화정의 임시 조치’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그 ‘임시’라는 형식은 점점 영구 형태를 띠게 된다. 군사와 재정이 한 축으로 묶이고, 행정 명령이 법의 위에 놓이면서, 로마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단일 지도 체제로 굳어진다. 그는 군단의 배치와 곡물 유통망을 한 지도 위에 그렸다. 사실 군단과 세금이 겹치는 그 도면이야말로 그가 계획한 새로운 통치방식이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여전히 동방에 머물러 있었다.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가 채 아물지 않은 그때,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보호 아래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체류는 치유이자 속박이었다.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행정과 군권을 정비하며 시민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침묵으로 상대를 고립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말보다 강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그 둘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한 사람은 여인 곁에 있고, 한 사람은 로마 시민 곁에 있다.”
핵심을 찌르는 정치적 표현일수록 그 말은 단순한 법이다. 그리고 그 단순한 대비가 정치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의 곁에는 이미 두 개의 확고한 축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무력의 이성인 아그리파, 또 다른 하나는 통치의 이성인 마에케나스였다. 그들의 손에서 로마의 군사와 내정, 외교와 재정이 움직였다. 삼두정은 여전히 형식상 존속했으나, 현실은 이미 한 사람의 통치로 기울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형태’를 보존하며 ‘본질’을 장악하는 기술을 익히고 있을 뿐이었다. 기원전 35년, 섹스투스의 시신이 바다에 던져졌다는 소문이 퍼지던 날, 로마의 항만에서는 곡물선이 떠나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 소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이제 바다는 한 사람의 것이다.”
그 문장은 이윽고 로마 전체의 문법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공화정은 존재했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손끝에서 움직이는 공화정이었다. 즉 제도는 그대로면서 권력의 방향은 따로 정해진 것이다. 그가 아직 ‘황제(Princeps)’라 불리지 않았을 뿐, 로마는 이미 그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시리아로 돌아왔을 때, 원정은 이미 군사사(軍史)의 실패를 넘어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전황 보고는 숫자보다 형식에서 그를 배신했다. 전리품보다 부상자 명단이 길었고, 점령 도시는 없었으며, 공성대를 잃었다는 사실 하나가 모든 설명을 무력화했다.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재정 관리들은 추가 징세를 논했지만, 상인들의 호응은 차가웠다. 파르티아 국경과 맞닿은 변경의 조세는 군수품 조달 명목으로 미리 징발한 상태였다. 군단병들은 급식과 급료의 지연이 불만이었으며, 전쟁 지휘부의 석연치 않은 판단도 의심스러워했다. 그 의심을 로마의 광장은 정치적 언어로 번역했다. 섹스투스가 사라진 서방에서 곡물선이 다시 오르내린다는 소식이 퍼질수록, 안토니우스가 동방에서 “왕의 흉내”만 내다 돌아왔다는 수군거림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의 측근들이 장악한 서방의 여론 장치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복수 미완’과 ‘보급 상실’이라는 기사의 뼈대에 사치와 연회의 살을 덧입혔다. 그런 다음 알렉산드리아의 향과 음악, 디오니소스적 의례, 화려한 행렬, 동방의 방탕이라는 가면을 그의 얼굴에 씌웠다. 반면 옥타비아누스 자신은 미세눔과 나울로쿠스 이후 로마의 건설자라는 이미지를 다졌다. 항만이 회복되면서 로마의 곡물 가격표가 먼저 그의 편을 들었다. 곡물값이 안정되고 항구의 돛대가 늘어날수록, 시민들은 논리가 아니라 빵의 무게로 통치자를 평가했다.
문제는 가정에서도 일어났다. 로마에서 옥타비아는 남편의 원정을 위해 병사와 돈을 모아, 기원전 35년에 아테네까지 와서 남편을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가져온 것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로마로 돌려보냈다. 장교단은 이를 사적인 문제로 치부했지만, 병사들은 장군이 가정과 명예 사이에서 방향을 잃었다고 느꼈다. 로마의 여론은 더 단순했다.
“어질고 절제된 로마의 아내를 돌려보내고, 향과 금사(金絲)로 수놓인 동방의 궁정으로 돌아가는 남자”
이 대비는 선전이 필요 없을 만큼 강렬했다. 로마인들의 입에서 오간 소문만으로도 그의 명예는 충분히 흔들렸다.
안토니우스는 이 균열을 권위의 형식으로 봉합하려 했다. 그는 동방의 속주들을 돌며 잔여 병력을 재편하고, 파르티아에 빼앗긴 명예를 다시 세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피로와 행정의 혼란은 그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로마의 행정관들은 그를 더 이상 정복자로 보지 않았다. 파르티아 원정 이후의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불안정한 주재자에 가까웠다. 명령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이를 수행하는 손들은 점차 머뭇거렸다. 로마의 냉담함은 무엇보다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다. 그는 원정 중 막대한 지원을 요구했으나, 귀환 후에는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병사들에게는 부상과 체불된 급료가, 동맹자들에게는 약속의 파기가, 조달업자들에게는 미수금과 손실이 남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동방에서 독자적 권한을 유지하려 했고, 여러 왕국들을 묶어 자신의 통치권을 보완하려 했다. 로마가 불신한 것은 권력의 방향이었다. 그는 삼두정의 한 사람으로 여전히 합법적 권한을 지녔지만, 그의 통치 행위는 번번이 공화정의 체계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로마인들의 불안을 키웠다.
이때 옥타비아누스의 침묵은 다시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발언 대신 행정의 성과로 비교를 유도했다. 항만의 복구와 도로의 보수, 재정의 정리, 군단의 토지 분배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반면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파르티아에서의 철수, 동맹의 이탈과 함께 언급되었다.
이러한 대조는 별도의 선전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했다. 로마 시민들은 점차 두 인물을 안정과 모험의 상징으로 구분했다. 안토니우스의 명예는 전장에서가 아니라 여론의 저울 위에서 무너졌다.
이후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다. 그에게 그곳은 여전히 세력 재정비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여론은 이미 돌아서 있었다. 그 냉담한 침묵이 곧 그의 정치적 종말을 예고한다.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로 명성이 흔들린 뒤, 안토니우스는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아르메니아를 선택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분명했다. 기원전 36년 원정 당시,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가 약속했던 지원을 철회해 로마군의 보급이 끊겼고, 그 결과 원정 전체가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에는 다른 계산이 작용하고 있었다. 파르티아를 다시 공격할 전력이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신속한 군사적 성과를 통해 로마의 냉담한 여론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르메니아 원정은 실질적인 보복이라기보다 상징적 회복의 성격이 강했다.
그는 이 전쟁을 ‘배신에 대한 응징’으로 규정함으로써, 동방의 여러 군주들에게 로마의 권위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려 했다. 즉, 패배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고, 군사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뢰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고원을 향해 진군했다. 이번 원정에서 그는 대규모 공성 장비를 동반하지 않았다. 현지 조달과 기동성을 우선시하며, 파르티아 기병의 기습을 차단하기 위해 행군로를 좁게 유지했다. 평원보다 산악과 협곡이 많은 아르메니아의 국경 방어는 귀족 영지들의 성채에서 담당했다.
안토니우스는 군사 충돌에 앞서 외교 교섭을 시도했다. 그는 아르타바스데스 왕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와의 동맹 갱신을 제안하고, 회합 장소로 접근이 용이한 구릉지의 별궁을 지정했다. 제안을 수락한 왕은 제한된 호위병만을 대동하고 회담에 나섰다. 연회 형식으로 진행된 만남은 외견상 화해의 자리였다.
그러나 회담이 진행되던 중, 안토니우스는 경호 병력의 배치를 변경하도록 명령했다. 의례상의 ‘경의 표시’라는 명목 아래 병사들을 왕의 측근들 사이에 배치해서 은근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그리고 잠시 후 별다른 저항 없이 아르타바스데스가 체포될 때, 왕의 호위대 역시 짧은 충돌 후 무장 해제되었다. 무력 대신 의례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한 점에서, 그는 이번만큼은 전투가 아닌 외교의 틀 안에서 목적을 달성했다.
아르타바스데스를 포로로 확보하자, 아르메니아의 귀족들은 대부분 침묵으로 대응했다. 파르티아가 즉각 개입하지 않는 한, 그들은 현실적인 세력 관계를 우선시했다. 안토니우스는 각 성채에 사절을 보내 인질과 서약을 교환하며 복종을 확보했고, 저항의 조짐이 보이는 지역에는 단기간의 군사 시위를 실시했다. 그는 장기 포위전이나 전면전을 피하고, 권위의 과시만으로 통제력을 확인하려 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군사 작전이라기보다 정치적 시위에 가까웠다. 안토니우스는 전투의 완전한 승리보다 ‘왕을 사로잡은’ 단일한 수확을 통해 상징적 효과를 노렸다. 실질적인 전리품은 많지 않았지만, 왕의 포획 자체가 그 어떤 전과보다 큰 정치적 가치가 있었다.
아르메니아 원정을 마친 뒤, 안토니우스는 귀환로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 그는 파르티아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할 무대를 이집트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는 군수, 항만 시설뿐 아니라, 연출의 자유를 제공했다. 로마의 절제된 의례 대신, 이집트의 상징적 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러한 그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녀는 개선식을 로마 장군의 영예가 아닌, 이집트 왕권의 위엄을 보여주는 의식으로 이해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목적을 결합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식 개선의 형식을 빌려 권위를 복구하려 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를 통해 동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기원전 34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개선식은 로마의 군사적 의식과 이집트의 왕권 의례가 결합된 형태였다. 행렬의 선두에는 포로가 된 아르타바스데스가 세워졌고, 그 뒤를 군단과 제사 행렬이 이었다. 금과 향, 음악과 깃발이 어우러진 그 행사는 군사 승리보다 정치적 상징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이 의식의 핵심은 로마와 이집트가 하나의 권력 무대로 결합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로마 본토의 시선은 냉정했다. 안토니우스가 개선의 장소로 로마가 아닌 이집트를 택한 결정은, 그가 제국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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