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9

권력 균형의 변동---알렉산드리아의 분봉(分封)과 원로원의 분열

by 우광환

9, 권력 균형의 변동-일리리아 전역(戰域)과 알렉산드리아 분봉(分封), 그리고 원로원의 분열(기원전 35~32년)


기원전 35년에서 32년에 이르는 시기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흐름이 기울기 시작한 기간이었다.

로마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이 시기에,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둔 이탈리아 반도 건너편에 놓인 일리리아 지역(아드리아해 동쪽 지역)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었다. 하지만 이들이 로마를 향해 치켜든 항전의 깃발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오히려 자신의 권력이 뿌리내릴 토대를 확보해 갔다. 그 기반은 로마 군단의 역량과 해상 연결로를 개척해내는 능력에서 비롯된 힘이었다. 이 무렵 아그리파가 해안과 내륙을 묶어 하나의 군사 작전 공간으로 정비하면서, 결국 북동 변경의 여러 부족은 오랜 반항을 접게 된다. 이 정리 과정이 끝나자 로마의 무대는 자연스럽게 다시 동쪽으로 옮겨 갔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는 분봉(分封)식을 열면서 동방의 권위를 중심으로 새로운 통치 구상을 펼쳤다. 이 의식은 로마의 제도와 관습을 벗어난 행위였기에 그 일이 로마에 전해지자 여론이 뒤흔들렸다. 결국 뒤 이은 기원전 33년과 32년에는 파벌이 갈린 원로원의 분열과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행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갈리아와 북동 변경을 정리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중심을 붙들어 두는 동안 동방의 상징과 의례에 기대는 안토니우스의 모습은 로마 시민에게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이 9장에서 그 변화가 어떤 형태로 움직였는지, 그리고 두 권력자는 어떻게 균형을 잃어갔는지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ObYhRSNxaaL0Qjw_1ZFJ0yi3gzhSlYP9u9K5votXUtnYd4VlPyMuxRodMgd-VZcPZXwc2E469pYi-tC4M-JU1w.jpg 고대 로마인들의 도로 건설 장면


일리리쿰과 달마티아 전역(戰役) – 북동 변경을 정리하다 (기원전 35~33년)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로마의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던 기원전 44년 말에서 43년 초 무렵, 로마의 북동 변경인 일리리아 지역 속주들에서 조공 납부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일리리쿰 속주 총독 바티니우스는 이 소요를 진압하려 당장 군대를 출동했다. 그러나 그는 달마타이(지금의 크로아티아 남부 해안) 지역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여러 보병 부대(한개 보병 부대 단위는 약 500명)를 잃고, 군단의 군기마저 빼앗긴 채 철수했다. 그 뒤로 이 지역은 로마의 속주 정책에서 방치된 상황이 지속되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내전이 이어지는 동안, 이 일대는 로마의 시야에서 한동안 멀어졌다. 그러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상 무력 행위를 격파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의 질서를 다시 잡은 후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그는 북동 변경을 안정시키지 못한 채 동방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항구의 안전과 마케도니아, 다뉴브로 통하는 도로 확보, 그리고 이 일대를 불온의 온상으로 잠식하는 부족 세력의 제압이 시급했다.

이 전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그리파는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흩어진 작은 항구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병참 기반을 정리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북동 변경 도시인 세니아와 아퀼레이아 사이의 만과 곶을 살피며 선박이 쉽게 접안할 수 있는 지점을 군단의 보급로로 전환했다. 산악에서 벌어질 공성전이 끊기지 않으려면 이 해상 보급로가 원활해야 했다. 이 정비가 마무리되자 북동 변경은 서로 떨어져 있던 항구와 길목이 같은 작전권 안으로 재편되었다.


image.png 고대 일리리아 지역


기원전 35년, 옥타비아누스는 아퀼레이아와 리부르니아 항구 세니아로 군단을 집결시켜 첫 군사 작전에 돌입했다. 이때 그와 함께한 지휘진에는 아그리파, 푸피우스 게미누스, 타우루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세니아에서 출발해 험하고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벨레비트 산맥을 넘어 리카 평원 쪽으로 진군했다. 이때 달마타이족과 함께 로마에 거센 저항을 보이던 산악 부족인 이아포데스족은 로마군의 이동 경로를 미리 알아채고, 산길에 늘어선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는 방식으로 행군을 방해했다. 그러자 숲과 바위가 이어지는 이 지형에서 군단은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아포데스족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인 테르포누스라는 도시를 큰 저항 없이 점령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주택을 불태우거나 이유 없는 살상, 약탈을 금했다. 그 다음 목표는 이아포데스족의 수도인 메툴룸(지금의 크로아티아의 리카)이었다.

메툴룸은 높은 산악 위에 자리 잡은 산성 도시였다. 로마군이 성벽을 포위하자, 대략 3천 명 수준의 젊은 전사가 안으로 들어가 결사 항전을 준비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들이 성벽에 접근하기 위해 흙과 돌, 목재 등을 쌓아 공성 경사로를 이어갈 때, 메툴룸 수비대는 성 위에서 투석과 투창을 퍼부으며 공사를 방해했다. 당대의 역사가들인 카시우스 디오와 아피안은 이 공방전 과정에서 로마군이 한 겹의 방어선을 무너뜨린 뒤에도, 성 안쪽에 새 방어선을 세운 메툴룸 수비대 때문에 전투가 길어졌다고 기록한다.

성벽 일부가 무너진 뒤 로마군은 다시 나무와 흙을 동원해 접근로를 쌓으면서 여러 개의 가교를 만들어 성 내부로 돌입하려 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 속에 메툴룸 전사들이 가교를 끊어버려 몇 차례씩이나 교두보 확보 시도가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리와 팔에 부상을 입었다고 아피안은 적고, 디오는 무릎 부상을 언급한다. 사료마다 상처의 부위와 경중은 다르게 전하지만, 그가 직접 전투 현장을 이끌었고, 부상 뒤에도 군이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 지휘를 지속했다는 점은 공통으로 전한다. 결국 메툴룸 주민 대표는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랬어도 성 안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과 자살이 뒤섞인 비극이 있었다고 사료는 전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도시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나머지 군단을 이끌어 판노니아(다뉴브강 중류권의 내륙지역) 방면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 행군의 최종 지점은 세게스타였다. 이 도시는 이후 ‘시스키아’로 불리며, 지금의 크로아티아 도시 ‘시사크’에 해당한다. 이곳은 콜라피스강과 사바강이 합류하는 지역이라 다뉴브 중류권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이었다. 마침내 그곳 역시 함락되었다. 결국 이곳은 위치적 영향 때문에 판노니아 전역을 연결하는 핵심 군사기지가 되었다.

이때 아그리파는 북동 변경을 하나의 연속된 작전 공간으로 재편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해안선 곳곳에 남아 있던 작은 항구의 규모와 능력을 조사해, 군단 이동에 적합한 항만부터 우선 정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정비 과정에서 그는 선착지의 수심과 바람길, 배가 접근할 때 흔들리는 정도까지 꼼꼼히 확인해, 군단의 선박이 언제 도착하든 멈춤 없이 필요한 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내륙에서는 군단 보급로가 단절될 가능성부터 따져서, 둔덕과 습지에 놓인 길을 다시 깔고, 급경사 구간의 경로를 우회시키는 방식으로 행군 속도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이런 조치는 그가 전투 지점만 바라보지 않고, 군단과 병참선이 움직이는 모든 구역을 장기간 운영되는 동일한 전선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그리파의 이 지혜로운 행동은 일리리쿰 전역을 다루는 현대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훗날 악티움 해전에서 드러나는 그의 해상 운용 능력의 전조가 이 시기에 이미 나타났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image.png 고대 판노니아 지역



기원전 35년에서 3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세게스타에 주둔한 로마군이 전멸했다는 소문이 로마로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오보였다. 세게스타에서 봉기가 일어나 주둔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남아 있던 병력이 반란 세력을 진압하며 성내 질서를 회복한 사건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급히 북쪽으로 올라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정리된 상태였다. 그는 이 사건을 전선 재배치의 계기로 삼아 작전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다. 그다음 목표는 오래전부터 달마티아 일대를 불안정하게 만들던 달마타이족이었다.

달마타이족은 가비니우스가 총독으로 있던 시절 여럿의 로마 보병 부대를 무너뜨린 사건 이후 줄곧 무장을 유지하며 세력을 확장해온 부족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접근이 알려지자, 이들은 주변 부족과 함께 약 1만 2천 명 규모의 연합군을 편성했다. 지휘자는 베르조라는 인물로 전해지며, 그는 리부르니아 북쪽 경계에 있는 프로모나 성으로 들어가 성벽과 주변 방비를 강화했다. 프로모나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고지대 도시여서 성 자체가 천연의 요새였다. 이 성에서 달마타이족의 주력이 로마군을 기다렸다. 그들은 가까운 고지마다 감시대를 세워 로마군의 이동 경로를 예의 주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평지에서 너비가 큰 포위선을 구축하는 작업을 먼저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숲길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경무장 부대를 따로 뽑아 고지 뒤쪽으로 이동시키도록 지시했다. 밤이 되자 그 부대가 높은 고지의 감시 초소를 급습해 잠들어 있던 수비대를 제압해버렸다. 고지가 확보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증원 병력을 고지 쪽으로 올려보내 프로모나 성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렇게 평지와 고지에서 동시에 공격받게 되자 성 안의 달마타이 병력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아피안의 기록은 이 승리 이후 로마군이 주변의 산지 요새들을 차례로 제압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전한다.

이때 해상에서도 아그리파가 활발히 움직였다. 남쪽 이탈리아에서 출항한 로마 함대가 리부르니아 해적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며 주변의 섬들을 잇달아 확보했다. 그 과정에서 타울란티 같은 해안 부족도 로마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연구자들은 이 해상 작전의 전체 방향을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함께 정했고, 실제 전투는 해적 출신이며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부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한 메나스라는 사람이 맡았다는 점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이렇게 확보된 해상 통로가 달마티아 내륙 공성전의 안정적 병참로로 작용했다.

프로모나 이후 로마군이 지나야 했던 산지 요새들 가운데 일부는 저항을 이어갔지만, 저항을 포기한 지역은 로마의 통제 아래 재편되었다. 그들은 조공과 인질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종속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렇게 각 거점의 상황이 차례로 정돈되면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행군로가 정상적으로 복원되었다.

전역 후반의 중심지는 세토비아였다. 이곳 또한 산악 지형 위에 세워진 견고한 요새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신속하게 포위선을 고정하자, 달마티아 여러 지역에서 모인 증원군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좁은 계곡을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서 포위선이 그 움직임을 억눌러 버렸다. 그래도 치열한 공방전 끝에 그 성 역시 함락되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 전투에서 또다시 부상을 입었다. 아피안은 이 부상 때문에 그가 며칠 동안 전선에서 물러나 있었다고 기록했고, 디오는 이 시점 이후 그가 로마로 돌아갈 준비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그가 귀환 준비를 하는 동안 남은 작전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타우루스에게 맡겨졌다. 그는 오랜 야전 경험을 지닌 지휘관으로, 북방 속주에서 누적된 충돌을 차분히 정리해온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우루스는 결국 세토비아의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기원전 33년은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해였다. 그러나 그는 집정관이 되자마자 다시 달마티아로 향했다. 그는 내륙 산악지역의 세토비아 함락 소식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자 더 이상 저항의 끈을 잃어버린 해안의 달마타이 대표들도 조공 납부와 인질 제공, 빼앗았던 군기의 반환을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때 회수된 군기는 훗날 옥타비아누스가 누이 옥타비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인 ‘옥타비아의 회랑’에 전리품으로 전시된 것으로 전해진다. 달마타이 측에서 보낸 7백 명의 젊은이가 인질 집단의 핵심을 이루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달마타이가 굴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남동쪽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여러 부족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데르바니, 도클레아 주민, 글린티디오네스, 나레스, 인터프루리니, 캄베이, 키남브리, 타울란티, 메로멘니 같은 부족 이름들이 사료에 흩어져 등장하며, 이 지역 부족들은 인질과 조공을 바치는 방식으로 로마의 보호를 요청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대부분을 수락했으나, 당시 건강 문제 때문에 일부 산악 부족 지역까지 직접 들어가지 못했다. 그 때문에 몇몇 집단의 완전한 귀속은 이후로 미뤄졌다는 언급이 카시우스 디오와 후대 연구에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아드리아 해안의 넓은 구간이 로마의 영향권 안으로 편입되면서 일리리아 북동 전선은 이제 고요한 평화를 맞게 된다.





이 전쟁 결과 옥타비아누스는 이아포데스족, 판노니아 일부, 달마티아 여러 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장군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디오와 리비우스 기록에 따르면, 이 승리로 원로원에서는 그의 개선식을 의결했지만 역시 사양했다고 전한다.

북동 변경의 이 정리 사업은 이탈리아와 동방 사이에 놓인 통로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남겼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개인에게는 장차 안토니우스와 맞설 때 활용할 수 있는 군사적 자산을 얻게 되었다.

아그리파에게도 이 전역은 의미 있는 훈련장이었다. 그는 일리리쿰에서 해군과 육군을 서로 연결하는 방식, 섬과 항만을 전초기지로 삼아 봉쇄망을 만드는 방식, 산악 지형의 공성전과 병참선을 결합시키는 방식 등의 소중한 경험을 체득하게 되었다. 북동 변경에서 쌓인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기원전 30년대 후반에 동방에서 벌어지는 해상 전쟁도 연속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역사의 무대는 로마 북동 변경을 벗어나 변화무쌍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정치 중심부로 옮겨간다. 그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기원전 34년에 있었던 안토니우스의 분봉(分封) 선언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분봉식 ― 사건의 구조와 실제 내용 (기원전 34년)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는 안토니우스의 동방 통치 기반을 크게 흔들었다. 그는 이 여파 속에서 활동의 무게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는 선택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이때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합은 정치적 구조를 재정비하는 구도로 작용했다. 그녀에겐 왕가의 계보와 의례에서 나오는 상징적 자원이 있기에 안토니우스는 그 자원을 활용해 동방 각 지역에 일종의 ‘통치 연속성’을 부여하려 했다. 이런 조합이 일정한 형태로 굳어지면서, 그는 동방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묶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진 ‘분봉식’은 이 구상이 현실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 행사는 일정한 논리 속에 움직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전통적 신성성을 지닌 여왕이라면, 안토니우스는 그 신성성을 보완하는 남성 군주의 역할을 맡는 형태였다. 이 결합이 기초가 되자, 두 사람의 자녀가 동방 세계를 잇는 계승권자로 자리잡는 방식이 가능해졌다. 이런 구조를 허용하지 않는 로마의 제도와는 달리 두 사람에게 알렉산드리아는 이것을 제의와 상징으로 구현할 수 있는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체제는 왕권과 신성성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권위를 연출해왔다. 이 때문에 분봉식은 실제 즉위식을 닮은 연출에 따라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는 디오니소스의 복식으로 등장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적 상징을 지닌 왕좌에서 제의를 주관했다. 이처럼 분봉식은 두 사람의 혼인보다 더 강한 결속을 선언하는 의식으로 기획되었다. 이는 동방 세계에 대한 통치 권한이 두 사람의 혈통 안에서 미래 세대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구성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분봉식의 정점은 새로운 영토 배분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왕조의 계승적 발판이었다. 이 정점에 서는 인물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인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었다. 분봉식은 두 사람에게 기존 이집트 왕가의 권위를 넘어 안토니우스가 구상한 동방 지배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기에 분봉식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왕 중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동방의 여러 통치자들보다 격이 높은 여왕이라는 인식이 이 칭호를 통해 확립되었다. 이를 통해 분봉식의 중심축이 이집트 왕권에서 동방 전체로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때 카이사리온은 ‘왕들의 왕’이라는 칭호가 부여 되었는데, 이 칭호는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동방의 여러 군주를 아우르는 최고 권위를 의미했다. 당연히 이 지위는 영토를 나누는 분봉보다 더 강한 의미를 지녔다. 이집트라는 완전한 왕국을 기반으로 삼은 그의 위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리는 의례의 정점이었다.

이 호칭들은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제도 밖에서 새로운 통치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권위가 먼저 확립되어야만, 그 아래에서 다른 자녀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의미가 확정되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 이탈리아 지배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이어받았지만, 피를 물려받은 존재는 아니다. 이 공백을 메워주는 인물이 바로 카이사리온이었다. 이집트의 이 공동 통치자는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실제로 낳은 유일한 아들이면서, 이 혈통이 지닌 무게는 로마의 제도적 틀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고 안토니우스는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상징성이 로마인의 감정에 엄청난 효과로 파급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어서 로마의 속주나 동맹국들의 땅이 ‘왕권에 의한 통치 지역’의 형태로 여왕과 자녀들에게 배분되었다.

실제 영토 배분 내용은 다음과 같은 형태였다.

클레오파트라와 공동 통치자인 카이사리온: 이집트, 키프로스, 리비아, 코일레 시리아(시리아의 남서부 지역)

이 영토는 이집트 왕국의 외연을 넓히면서도 로마의 행정적 구조와는 다른 관습에 따라 통치 체계를 설계했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쌍둥이 아들): 아르메니아 전체, 메디아와 파르티아의 장차 정복될 지역.

이 배분은 안토니우스가 동방 전선에서 얻은 전리품과 미래의 성취를 자녀에게 넘기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쌍둥이 딸): 키레나이카, 리비아의 일부 지역. 이 밖에도 소아시아 서쪽의 일부 도시도 포함되었다. 사실 분봉 당시 리비아에 관한 기록은 혼란이 있다. 일부 전승에서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돌아갔다고 전하고, 다른 전승에서는 셀레네의 몫으로 본다. 후대 연구자들도 이 점을 두고 해석을 달리한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막내아들): 시리아, 킬리키아, 페니키아 지역. 아직 실효적 지배가 굳어지지 않은 지역도 명목상 포함되었다.

이 분배는 실제 군사적 통제에 앞서 정치적 메시지를 우선하는 선언적 조치였다.




기원전 34년의 알렉산드리아 분봉은 로마 공화정 말기, 제국 전체의 권력 분포를 다시 짜는 시도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 분봉은 정치적 의도와 기존 제도와의 충돌을 중심에 두고 바라볼 때 비로소 의미가 뚜렷해진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왕가의 전통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계를 하나의 계승 구조로 묶어 두려 했다는 사실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파르티아 원정 실패 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왕을 포획하면서 한 번 더 명예를 되찾을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그 전리품을 로마로 데려가 원로원과 시민들 앞에서 과시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과 함께 선보인 바 있었다. 이 선택은 그의 다음 행로가 로마가 아니라 동방에 있다는 암시적 징후로서 충분했다. 분봉식은 이 행보의 성격을 더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행사였다.

그가 분봉을 기획한 목적은 세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 동방의 여러 영토를 흩어진 속주들이 아니라 하나의 계승 체계 안에 묶으려는 구상이었다.

사실 아르메니아, 메디아, 시리아, 킬리키아 같은 지역은 각각 독립된 군사와 행정 단위였기에 로마의 통치 구조에서는 일관된 체계로 엮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 지역들을 로마 속주로 관리하는 대신, 클레오파트라와 그 자녀들을 매개로 하는 ‘왕가적 단위’로 재편하고자 했다.

둘째,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합을 제도적 형태로 굳히려는 목적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적인 연정으로 남는다면 동방 전체를 묶어 세우는 힘이 부족하다. 따라서 분봉식은 두 사람의 결합을 왕조의 기초로 격상시키면서 그 아래 자녀들이 계승의 중심축으로 이어가는 위계를 만들어 주었다. 이 구도가 자리 잡자, 두 사람은 동방 영토를 장기적 기획으로 다루게 되었다.

셋째, 로마 정치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 포함되었다.

로마의 혼인 제도 안에서 움직이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의 결혼 관계 때문에 언제나 발목이 잡혀 있었다. 그렇다고 로마에서 그녀에게 대놓고 이혼을 요구하기도 어려웠다. 분봉은 이런 제약을 우회하는 수단이었다. 로마의 법과 제도를 피하면서도 동방의 제의와 상징을 통해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합을 정당한 통치 구조의 뿌리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요소들을 합쳐 동방의 새로운 계승 구도를 세우려 시도했다. 그러나 분봉식은 로마 쪽의 승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진행된 사건이었다. 로마인 지배자가 제국의 영토 문제를 다른 나라의 궁정 무대에서 처리한 셈이었다. 이 일이 로마 민중에게 전해진 모습은 아주 단순했다.

“로마의 영토와 속주가 이집트 왕가의 혈통으로 넘어갔다.”

이 말이 과장된 비난인지 아닌지보다, 그렇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로마 시민들의 분노와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건을 곧바로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다. 그는 분봉의 구체적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안토니우스를 “로마보다 이집트를 먼저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냈다. 클레오파트라와 그 자녀에게 돌아간 영토가 로마의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고, 분봉식 자체가 이집트식 신성 의례로 채워졌다는 이미지를 부각했다.

이 설명은 민중에게 강한 자극을 남겼다. 로마의 군대와 속주가 이집트 왕가의 아이들에게 흩어지는 그림은 다른 차원의 불안을 불러왔다. 이는 “공화정의 기반이 타국 왕정에 잠식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분봉은 원래 동방의 지지를 결집시키기 위한 정치 행사였다. 실제로 동방 속주와 이집트 궁정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위상이 눈에 띄게 높아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로마 본토의 정치 환경에서 이 행위는 반대로 작용했다. 안토니우스가 점점 “동방의 왕”에 가까운 이미지로 굳어지면서 로마 시민은 자신들이 속한 공화정 구조 위에 이집트의 왕정이 덧씌워지는 상황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 상상은 분노가 스며든 여론 기반을 한층 견고하게 만들었다.


image.png 로마제국 지도



알렉산드리아 분봉 이후 로마 시민들은 두 지도자의 행보를 다른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안토니우스의 활동 무대가 동방으로 고정된 순간, 시민들은 그의 정치적 선택을 로마와 다른 흐름으로 보게 되었다. 그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일상 가까이에서 안정의 이미지를 쌓았고, 이 대비로 인해 시민들의 판단이 점차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울게 된다.

그 세부적 이유는 아래 항목들에서 선명해진다.



1. 옥타비아누스의 이탈리아 기반 정착: 행정, 군사, 사회적 지지의 축적

옥타비아누스의 이탈리아 기반 강화는 사실 전쟁 지도자의 명성보다는 이탈리아의 도시와 농촌을 하나의 관리 체계로 묶어내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반란군 토지 문제를 정리할 때, 주민들의 불만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각 도시의 귀족과 지방 원로들이 그에게 협조하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토지 분배와 군단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던 시기, 이탈리아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흔들던 불확실한 동원 방식이 안정되는 경험을 가지면서, 그것은 곧바로 그의 이름과 연계되었다.

그는 각 지역의 곡물과 자금 흐름을 명확하게 관리하는 과정에서 지방 행정관들을 새롭게 임명했다. 어느 정도 강제 통치에 가까운 조치가 포함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로마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일정한 흐름을 갖게 된 점에서 원칙을 체감했다. 페루시아 전쟁 이후 농촌 지역에 남아 있던 반감도 시간이 지나며 잦아들었다. 정착지에 분배된 퇴역 군단병들이 이탈리아 곳곳에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자, 그는 전쟁 기반의 정치를 행정 기반의 정치로 전환하는 발판을 확보했다. 논어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중의 믿음이 없으면 정권이 바로 설 수 없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대중의 신임이 뒤따른다면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시기의 로마 본토를 어렵게 이끌어 가던 옥타비아누스를 일컫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반복된 내전으로 피폐해 있었지만, 도시 간 연결망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 기반이 이후 해상 봉쇄와 곡물 부족 사태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작용했다.

2. 안토니우스의 동방 장기 체류: 전선 유지와 왕국 네트워크 조성

필리피 전투 이후 안토니우스가 동방 정비를 맡으면서, 그의 활동 반경은 점차 시리아, 킬리키아, 유대, 아르메니아, 이집트로 넓어졌다. 이 지역들은 왕국 또는 자치 구조여서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장군이 여러 왕국의 조세, 군역, 외교를 조정, 감독하려면 장기 체류가 불가피했다. 실제로 그는 기원전 41~40년, 그리고 페루시아 전쟁 뒤 재정비 기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동방에서 보냈다.

안토니우스가 동방의 왕들과 맺은 관계 가운데 일부는 군사적 필요에서 시작되었고, 또 일부는 시리아 방면의 파르티아 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구조였다. 파르티아는 그가 필리피에서 얻은 승리를 상쇄할 만큼 강력한 적이기 때문에 로마 군단은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 전선에서 언제든 압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위협을 제압하기 위해 군단을 동방에 계속 묶어둠으로써 결국 장기 주둔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군단들의 이 장기 주둔 문제는 사실상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동방 왕국 간 경계는 늘 불안정했다. 그렇기에 로마가 직접 행정 체계를 심기 어려운 지역의 특성상, 그가 떠나면 여러 왕국이 다시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파르티아 전선과 소아시아 후방을 함께 관리하려면, 시리아와 길리키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군사적 압박과 외교적 통제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했다. 이 균형을 안정시키려면 안토니우스의 장기 체류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눈은 이 체류를 정치적 필요보다 개인적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여러 의례나 궁정 장면들이 로마로 전해지면서, 시민들은 그가 로마의 가치와 멀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3. 군단 운용의 구조적 문제: 동방 전선에 묶인 병력과 서방의 병력 공백

파르티아 원정 준비는 로마의 병력 배치를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기원전 37~36년 사이, 안토니우스는 16개 군단을 동방 전선에 모았지만, 원정 실패 이후에도 군단의 이동 경로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일부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억류 문제로 묶였고, 일부는 시리아 방면의 방비 유지를 위해 돌아갈 수 없었다. 로마와 파르티아가 유지하던 힘의 균형이 아르메니아의 이탈로 무너지자, 그 결과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동방 전선 전체가 통제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움직였다.

군단이 본토로 복귀하지 못하는 상태가 길어지면서 제국의 병력 분포에 불균형을 초래했다. 그것은 실전 병력을 기준으로 볼 때 더 명확했다. 서방에는 이미 섹스투스의 해상 봉쇄로 병력 운용이 제한되었고, 북이탈리아와 갈리아에서 움직일 예비 병력도 충분치 않았다. 이 시기 로마의 병력 분포는 서방의 해상 공백과 동방의 병력 정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례적인 형태로 움직이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병력이 동방에 오래 묶이는 흐름이 제국 전체의 균형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그는 이탈리아 주변의 대비가 점점 느슨해질 수 있다는 판단을 시민들에게 제시했고, 해상 봉쇄로 이미 불안을 겪고 있던 사람들은 그 판단을 현실의 위협과 겹쳐 받아들였다.

4. 로마 여론의 이동: 안토니우스의 동방 이미지와 옥타비아누스의 대비 서사

서방의 불안이 커지고 곡물 부족이 반복되자,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 주변의 방비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체감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실제 사실과 일치하는지와 무관하게 정치적 판단으로 굳어지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이 여론의 흐름을 자신의 권한과 연결했다. 그가 외부 위협이 언제든 가까워질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자, 시민들 또한 그 근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가 더 넓은 역할과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토니우스의 지속적인 동방 체류는 이 여론의 흐름을 더 빠르게 밀어올렸다. 그는 여러 왕국과의 협의와 분봉 이후의 조정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로마에 전해진 소문들은 그의 활동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화려한 행렬과 연회, 각종 의례가 반복된다는 이야기가 과장되게 퍼지면서, 그의 동방 체류는 정치적 책무보다 이탈리아를 떠나 동방 중심의 방향 전환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해석이었지만, 시민들은 그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 분위기를 이용해 자신의 정당성을 한층 더 강화했다.

5. 명분 경쟁의 결말: 제국 중심의 방비를 앞세운 옥타비아누스의 우위

이 모든 흐름이 결합되자, 시민들은 제국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옥타비아누스의 실질적인 권한 확대로 받아들였다. 동방 전선에 묶인 군단들, 해상 봉쇄가 남긴 불안, 분봉 의례가 낳은 이미지, 로마 중심주의의 전통이 한데 모이며, 그는 ‘제국의 안전을 지키는 인물’로 규정되었다. 반대로 안토니우스는 동방 세계의 정치와 얽혀 움직이는 ‘불온’의 얼굴로 비춰졌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가치와 점점 더 충돌하는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이 흐름이 바로 악티움 전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토대였다. 군단의 실제 위치보다, 군단이 어디에 있어야 “정당해 보이는가”가 더 중요한 시대에, 그 판단 기준이 시민들 마음속에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형식상 ‘삼두정’, 실제로는 폭풍전야 (기원전 33년)

제2차 삼두정의 법적 시효가 끝나가던 기원전 33년,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로마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그 해의 동료 집정관인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는 경험 많은 귀족이었지만, 이 해의 정치적 무게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쏠렸다.

그해 옥타비아누스는 지난번 때의 ‘보궐’로서가 아닌, 처음으로 정식 집정관 직에 오른 것이다. 그는 자신을 ‘특별 권한을 받은 삼두’가 아니라 ‘원로원을 통해 선출된 최고 집정관’으로 보이려 했다. 다시 말해 원로원에 출석하는 순간, 그는 이제 ‘예외적 지위를 가진 임시 권력자’가 아니라, 공화정 체제 속에서 움직이는 집정관이라는 얼굴을 내세운 것이다. 원로원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 또한 이전과 달랐다. 삼두로서 위원회 권한을 행사하던 시기의 당당한 모습보다, 공화정의 절차를 다루는 집정관으로서의 침착한 얼굴에 더 가까웠다.

이 시기 원로원 회의의 의제는 주로 변경 속주와 이탈리아의 현안을 다루는 가운데, 동방 문제도 중요한 축으로 올라왔다. 파르티아와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 안토니우스 원로원 의원은 안토니우스의 장기적인 동방 체류를 불안의 배경으로 삼았다. 그의 움직임이 제국의 중심과 멀어지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내부의 난제들을 직접 다루며 안정의 기준을 마련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속주 보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군사와 재정 구조가 동방의 장기 전력에 지나치게 묶여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이 지적은 특정 인물을 직접 비난하는 방식이 아니었지만, 의원들은 그 말의 방향을 쉽게 읽어냈다. 동방의 전선이 불확실한 만큼, 로마 내부의 균형을 더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는 명제는 자연스럽게 옥타비아누스에게 힘을 더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원로원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정비 계획, 변경 속주의 조세 문제, 그리고 시칠리아와 곡물 공급의 재정비 등을 의제로 올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질의마다 침착한 태도로 답변하면서, 문서와 보고를 꼼꼼히 대조하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수의 원로원 의원은 그 모습에서 예외적 권위의 상징이던 삼두의 얼굴이 아니라, 공화정 절차를 다루는 행정 책임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게 된다.

이토록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쿰 방면의 혼란을 정리하는 한편, 국가 관리에 정력적으로 임하는 행정가의 모습을 보여 주려 애썼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 전해인 기원전 34년,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함께 현직 집정관일 때조차 실제 행동의 무대는 여전히 동방이었다. 그래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와 루키우스 문키우스 플랑쿠스 같은 안토니우스파는 그가 동방의 문제를 정리한 뒤 로마로 돌아올 경우 정치적 균형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는 삼두정의 임무가 이미 소멸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거기엔 공화정의 절차를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중심에 두었다.

이 시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충돌은 없었지만, 두 권력자의 판단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동방의 사안을 직접 비난하지 않으면서 불필요한 자극을 피하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 또한 로마로 복귀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조심스러운 정적 속에서도 두 사람은 각자의 선택이 로마의 진로를 서로 다른 지점으로 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아그리파의 로마 재정비-옥타비아누스 체제의 귀착점 (기원전 33년 )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이던 기원전 33년은 연초에 일리리쿰 사태가 가라앉으면서 삼두정 시대의 전쟁이 잠시 멈춘 시기였다. 이 해에 아그리파는 로마 시내의 공공시설을 전면적으로 다듬는 임무를 맡았다. 그에게 부여된 직책은 로마의 공공건축과 도시 행정 전반을 관장하는 고위 행정관에 해당했다. 이 지위는 정비와 건설, 수도와 공공 관리까지 포괄하는 역할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일리리쿰 전선에서 얻은 군사적 명성을 로마 시민의 일상에 체감되는 형태로 전환하려는 계획이 그가 움직인 이유였다.

그가 먼저 손을 댄 곳은 로마의 상수도 체계였다. 공화정 후기의 상수도들은 노후된 구간이 많아서 불법 수로 시설이 만연했다. 그러다 보니 물의 흐름이 어지럽게 뒤엉킨 상태가 지속되었다. 아그리파는 공적인 수로 구조를 모두 조사해 훼손된 구간을 복구하고 무단 수로 연결을 처벌하면서 물의 흐름을 본래 경로에 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새 정비조직을 꾸려 로마 시내의 배수와 저장을 담당하는 관리 체계를 구축했다. 이런 조치가 시행되자 일반 시민들의 주택은 물론, 분수대와 목욕 시설의 물 공급도 안정되었다.

그는 이어서 도로와 가도 정비에 착수했다. 당시 시내 주요 도로의 포장석들이 마차들의 잦은 운행으로 손상된 부분이 많았다. 그렇기에 시장과 공공건물이 밀집한 구역은 통행이 자주 막혔다. 아그리파는 사람의 흐름과 상업 활동이 집중되는 도로부터 포장을 다시 깔고, 배수로의 경사를 조정해 배수 체계를 안정시켰다. 이런 정비작업으로 포룸과 대로에 고였던 오물이 빠르게 정리되면서 시민들은 도심 이용에서 이전보다 확연히 나아진 환경을 체감했다.


image.png 고대 로마의 수도교



image.png 고대 로마사람들이 도시로 물을 끌어오는 방식의 단면도.



또한 그는 공공시설의 수리와 보수에도 힘을 쏟았다. 목욕장, 체육장, 분수, 원형 정원들을 잇따라 손 보았고, 일부는 아예 새로 지었다. 당시 로마에는 대규모 체육장이나 유원지 기능을 하는 장소가 부족했는데, 아그리파는 포룸 옆과 마르스 광장 주변에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원을 조성했다. 시민들은 이런 공간에서 원로원 회기일 외에도 자유롭게 모여 담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젊은이들은 체육 시설을 자주 찾게 되었다.

이 공사의 모든 비용은 놀랍게도 아그리파 개인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가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전쟁 승리만으로는 ‘옥타비아누스 체제’의 정통성이 시민에게 완전히 각인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그리파는 로마의 중심부가 눈에 띄게 개선되는 모습을 통해 옥타비아누스가 가져온 ‘안정의 시대’가 실제 생활 속에 안착했다는 인상을 심고자 했다.

안토니우스파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그의 활동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전쟁 지도자였던 아그리파가 도시 행정에서도 능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곧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기반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들 대다수는 여전히 삼두정의 권력 구조에 경도된 상태였으나, 로마의 중심부가 빠르게 정비되는 현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개선을 곧바로 체감하는 민중 사이에는 “요즘은 숨통이 트인다”는 반응이 널리 퍼졌다.

사실 아그리파의 활동은 정치적 흐름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어떤 방식이든 안토니우스와 대립이 이어질 시점에서 로마 시민의 지지를 견고하게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아그리파는 이 해를 시작으로 로마의 도시 기반을 장기간에 걸쳐 정비해나간다. 그 시점 이후의 로마는 공화정 말기의 혼란스럽던 도시가 아니라 제국이 될 준비를 갖추기 시작한 수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파 집정관의 전면 등장- 원로원의 분열 (기원전 32년)

기원전 32년의 집정관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였다. 두 사람 모두 안토니우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로, 동방 전쟁에서 그와 함께 참전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삼두정의 시효가 끝난 바로 이 해에, 로마 최고 집정관 자리가 안토니우스의 측근 두 명에게 돌아간 셈이었다.

새해 첫날, 소시우스는 집정관 자격으로 원로원에 출석했다. 그가 연단에 서자 회의장은 어느 쪽으로 기울지 가늠하기 어려운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료에 따르면 그는 연설에서 안토니우스를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전쟁에서 로마의 명예를 세운 장군으로 묘사했다. 동시에 동방 여러 왕국과 협의를 정리하며 국경을 조정한 인물, 전쟁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공화국의 안전을 지켜낸 장군이라는 이미지를 그려 냈다. 소시우스는 이렇게 그려낸 그림에 대조되는 인물로 옥타비아누스를 끌어들였다.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에 군단을 모아두고, 그 병력을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런 방식이 공화국의 전통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비판한 뒤, 연설 끝에는 이런 취지의 결의안을 채택하려 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된 여러 특권을 원로원이 다시 검토하는 한편, 안토니우스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그에게 쇄도하는 비난을 거두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결의안은 표결에 들어가지 못했다. 옥타비아누스파의 한 호민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혼란에 빠진 회의장에서 그날 회의는 명확한 결정 없이 끝났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이 일은 작은 절차 싸움처럼 보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 측면에서 보면 이 사건은 안토니우스파 집정관이 로마 여론을 되돌리려 시도한 조직적 공격이었다. 같은 시도가 한두 번 더 반복되면 원로원의 중도 세력이 안토니우스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소시우스의 연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 상징의 힘을 잘 아는 정치가로서 그는 이번에도 상징적 효과를 선택했다. 다음 회기에서 무장을 갖추고 무장한 호위병까지 대동한 그가 원로원 회의장에 나타났다. 로마 전통에서 집정관이나 유력 정치인이 무장을 한 채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서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이 행동은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탈리아 군단이 누구 손에 있는지를 원로원 의원 눈앞에서 다시 확인시키는 효과, 그리고 원로원 회의장에서 안토니우스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 몸으로 느끼게 하는 효과였다.

그 자리에서 연단에 올라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파 집정관들을 향해 이집트 왕비의 자금과 군대를 의지하는 사람들, 로마 시민보다 알렉산드리아 왕실을 먼저 생각하는 세력이라는 연설로 공격을 퍼부었다. 또한 동방에서 치른 의례와 분봉이 로마의 법과 관습 위에 행하도록 방치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져 묻기도 했다. 사료는 이날 옥타비아누스 연설의 세부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않지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 분봉식, 동방 군단의 집중 문제를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어 원로원과 시민의 불안을 자극했다는 점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날 이후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집정관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와 소시우스를 비롯해, 많은 안토니우스파 원로원 의원이 로마를 떠나 동방의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건너갔다. 이때가 기원전 32년 초였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나아가 현대 연구자들은 로마를 떠난 원로원 의원을 대략 200명 안팎으로 추정한다. 당시 원로원의 공식 정원은 카이사르의 개혁 시기 속주 대표들까지 합쳐 900명까지 늘어난 적은 있었지만, 내전과 숙청이 이어지면서 실제로 회의에 참여하던 의원 수는 훨씬 적었다. 기원전 32년 무렵에는 600명 안팎 정도의 규모였다. 그렇기에 로마를 떠나 동방으로 가버린 원로원 의원은 당시 활동하던 인원의 삼분의 일 수준이었다. 결국 로마에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중립에 머물던 의원들만 남았다. 이 시점부터 원로원은 ‘로마의 대표 기관’으로 보기 어려웠다. 이제 로마에 남은 쪽은 옥타비아누스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정치 기구에 가까워진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 공개-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 선포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파 원로원 의원들이 집단으로 떠난 뒤, 옥타비아누스는 마지막 승부수를 꺼냈다. 그가 선택한 수단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었다.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미리 비밀리에 유언장을 작성해서 측근들과 함께 봉인한 후 베스타 신전에 보관했다. 그 유언장의 봉인에는 여러 인물이 참여했지만, 사료는 그 이름을 전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 가운데 몇몇이 뒤늦게 옥타비아누스와 가까워지면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신전에서 유언장을 꺼내 오도록 조치한 뒤, 원로원 회의장으로 가져가 낭독하게 했다. 사적인 유언을 국가 회의에서 공개 낭독하는 행위는 로마 관습에 어긋나는 행위였지만, 그에게는 당장 관습보다 정치적 효과가 중요했다.

유언장의 세부 내용은 사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몇 가지 요소만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기를 바란다는 의사 표현, 카이사리온을 비롯한 클레오파트라 자녀들에 대한 동방 영토 후계 구상, 그리고 로마보다 이집트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 표현들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이 내용을 듣게 되자, 알렉산드리아 분봉 때 처음 떠올랐던 불안이 되살아났다. 카이사리온은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친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양자라는 법적 지위를 통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혈통만 놓고 보면 카이사리온이 더 직접적인 계승자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은 이 문제를 말로만 떠도는 소문에서 의식적인 정치 쟁점으로 끌어올리는 사건이었다.

이제 원로원과 시민들은 안토니우스의 분봉식과 유언장을 하나의 묶음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분봉식이 클레오파트라와 아이들에게 동방 영토를 나누는 의식이었다면, 유언장은 그 그림을 사후 세계까지 이어가려는 장기 계획처럼 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여기서 가장 약한 지점을 정확히 집어냈다. 그는 “카이사르의 이름과 유산이 이집트 왕가로 넘어갈 위험”을 강조하면서, 자신이야말로 로마에서 그 유산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세웠다.

유언 낭독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전쟁 선포를 제안했다. 대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전쟁 선포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벨로나 신전으로 몰려갔다. 포룸 밖에 자리한 이 신전은 전통적으로 외국에 대한 전쟁 선언을 집행하는 장소였다. 로마는 전쟁을 선포할 때마다 그 신전에서 적국의 영토를 상징하는 무대로 의식을 치러왔다. 전통적 절차에서는 페티알레스 사제단(Fetiales, 전쟁과 조약, 의례를 담당한 로마의 사제단)의 장로가 나서서 로마의 요구와 상대의 위반 행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날만은 의식의 집전을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관장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조약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점을 낭독한 뒤, 로마 시민의 이름으로 그 행위를 비난했다. 그런 다음 적대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로 적국의 영토를 상징하는 신전 앞마당을 향해 의식용 창을 던짐으로써 로마와 클레오파트라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디오는 이 행위를 일컬어 “이 전쟁 선포가 공식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를 향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모두가 안토니우스를 겨냥하고 있었다”는 취지로 정리한다.

이 순간 삼두정은 사실상 종말을 맞는다. 법적 시효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 이름이 남아 있던 삼두정이라는 틀은, 클레오파트라를 겨냥한 전쟁 선포와 함께 무너졌다. 로마에는 이제 두 명의 강력한 ‘군벌’이 마주 서 있을 뿐, 그 관계는 협력이나 공존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분봉에서 출발한 사건의 파도는 이렇게 몇 해를 건너 로마 원로원의 회의장과 광장, 그리고 벨로나 신전 앞 계단까지 도달했다. 그것은 결국 공화정 말기의 정치와 군사, 여론 모두를 뒤흔드는 또 다른 혼돈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어집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