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으로 가는 길
기원전 32년, 마침내 둘로 나뉜 로마의 권력 중심은 선명하게 가시화되었다. 안토니우스의 분봉식과 유언 공개를 거치며 누적된 균열이 두 권력자의 세계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이렇게 전쟁 선포 이후의 로마는 두 방향으로 분열된 가운데 각자 다음 단계를 향해 움직였다. 한쪽은 이탈리아와 원로원을 기반으로 제국의 중심을 복구하려는 흐름이, 다른 쪽은 동방 왕국과 이집트의 자원을 결집해 새로운 권위를 세우려 움직였다. 이 두 흐름은 그리스 서부 앞바다에서 충돌한다. 그곳이 그 유명한 악티움이었다.
이 시기 로마는 기존 제도 속에서도 실제 권력은 두 진영의 함대와 군단 동원력, 그리고 물자보급 체계와 항해 능력에 따라 기울었다. 정치적 판단이 무게를 잃고, 각 진영의 군사적 능력과 현실적 자원이 제국의 다음 장을 결정짓는 잣대가 된 것이다. 어차피 양 진영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남은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이 전쟁을 제국의 미래로 연결할 수 있느냐는 점뿐이었다.
제10장은 이 시기, 두 진영이 어떤 방식으로 전력을 모으고, 어떤 동맹을 묶어내며, 어떤 전략으로 그리스 서부의 그 좁은 해협까지 밀려 들어갔는지를 따라간다. 악티움의 전운은 아직 피어오르지 않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전투 이전의 준비에서 절반 이상 결정되었다. 이 장은 그 준비의 시간, 정치적 선동과 병참과 심리의 조합 속에서 승부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벨로나 신전 앞마당에 창이 던져지던 날, 로마의 전쟁 선포 절차는 겉으로 보기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사제단 대신 옥타비아누스가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행했을 뿐, 이 의식의 상대는 엄연히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였다. 그러나 로마인 누구도 그 상대 위에 겹친 표적이 같은 로마인인 안토니우스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 이중 구조는 로마 시민들이 겉으로 선언된 적과 실제 겨냥된 대상을 구분해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이 해의 로마에는 결정적인 공백이 자리 잡았다. 집정관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가 안토니우스에게 합류하기 위해 동방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대신할 새로운 집정관은 선출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집정관 두 명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실제 로마엔 최고 행정관이 사라진 셈이었다. 원로원 다수는 이 기형적인 상태에서도 보궐 선출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새로운 집정관을 뽑는 행위는 곧 내전의 공식화라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신중했다.
집정관 부재라는 공백은 곧 비상 체제로 전환되었다. 로마는 이제 외부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이상, 재정, 병력, 행정이 단일한 명령 체계로 정리되어야 했다. 평상시라면 집정관이 나눠 맡을 이 업무들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시기였다. 군단 재배치, 선단 준비, 세입의 용처 지정, 항만의 군용 전환 같은 문제들이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 사안으로 바뀌었다. 당장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은 옥타비아누스밖에 없었다. 정작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 공백을 제도상의 결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제도의 공백이 곧 권한의 집중을 낳는다는 계산을 이미 끝낸 뒤였다.
전쟁 선포 이후 이탈리아 각지와 서방 속주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자연스럽게 그와 측근들, 또는 군 사령부로 흘러들었다. 항만의 사용 계획을 군단 이동과 연계하고, 세입 관리에서 전쟁 대비 항목을 따로 분류하며, 이탈리아 방면 군단의 주둔 구도를 재정비하는 일들이 그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원로원은 이 과정을 ‘특별 결의’로 정식화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전쟁을 앞두고 로마의 행정과 방비의 정리가 원활하고도 신속하게 처리되는 지금, 한쪽으로 쏠리는 권한을 막을 명분도 없었다.
전쟁 선포가 남긴 여파는 원로원 내부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분봉 소식과 유언장 공개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불신은 상당히 쌓였다. 곡물 부족을 직접 겪은 뒤, 의원들은 통치의 견고한 중심이 바다 건너가 아니라 이탈리아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공유했다. 로마 내부의 이런 공감대는 전쟁 선포라는 계기와 집정관 공백이라는 조건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비상 상황에서 국가에 필요한 명령은 일정한 경로를 통해 내려와야 했다. 병력 동원이 중첩되거나 세금 징발이 서로 충돌하면 민심이 급속히 흔들릴 위험이 존재했다. 로마에 남은 원로원 의원들은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옥타비아누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집중된 권한을 제도적 요청으로 받아들이며 세부적인 행정 체계를 정리했다. 상업 항만과 군용 항만을 구분할 방침을 정하고, 세입 가운데 일부를 즉시 군사비로 돌리는 기준을 세웠으며, 해군과 육군의 지휘 계통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보고 체계를 바로 세웠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런 움직임은 국가가 흔들림 없이 운영된다는 사실로 다가왔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비상사태인 지금, 이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중도파 원로원 의원들도 옥타비아누스의 발 빠른 정책 결정을 지켜 보며 결국 그를 지지하는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사실 원로원이 대거 동방으로 이동한 이후, 로마 내부에서 갈등을 되돌릴 방법을 찾는 목소리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약한 그 목소리는 안토니우스를 향해 들끓는 반대 여론에 묻혀버렸다. 그 순간에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원로원은 어째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화해 사절을 보내라고 공식적으로 독촉하지 않았는가.’라는 문제였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당시 로마의 정치 구조 전체가 들어 있다. 갈등이 어느 지점에서 되돌릴 수 없도록 굳어졌는지 설명하려면,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결정 과정에 숨겨진 계산을 먼저 살펴야 한다.
원로원 다수가 동방으로 떠난 뒤, 옥타비아누스는 그 이탈이 곧 정치적 결별이라는 인식을 로마에 확산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또한 동방 세력과 결합하는 안토니우스 역시 사실상 로마의 정치 공간에서 떠나있음을 보여준다고 시민들에게 주지시켰다. 원로원을 빠져나간 인물들의 이름이 로마에서 거론될 때마다, 그는 그 선택을 안토니우스가 공화정의 제도권에 머물 의지가 없다는 증거처럼 제시했다. 옥타비아누스가 보기에 만약 외교적 타협을 통해 안토니우스가 다시 공화국 체제 안으로 복귀할 여지가 남아 있다면, 로마의 불안이 지속될 것임은 자명했다. 이 오랜 혼란을 여기서 끊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체 시민과 공유될 때, 전쟁 책임을 둘러싼 공론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 수 있었다.
옥타비아의 여정 준비만이 이 정치적 계산 속에 특별한 위치일 뿐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그녀가 남편을 설득하고 싶어 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누이의 여정만은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도가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녀의 움직임을 로마 시민에게 공개했다. 실제로 그녀는 안토니우스로부터 동방 입국을 거부당하고, 이어서 이혼 통보까지 받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아내의 진심 어린 노력에 반하는 안토니우스의 냉담한 태도를 여론이 흡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 점이 결국 ‘전쟁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외교 사절을 파견하지 않은 데는 또 다른 계산이 숨어 있었다. 전쟁이 로마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비치면 공화정 지지층에서 반발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그는 갈등의 초점을 로마 밖의 세력에 맞추는 전략을 일관되게 취해왔다. 그 전략은 클레오파트라라는 존재를 키우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로마 시민에게 이집트라는 외부 세력이 정치적 분열을 일으키는 중심축으로 보이게 만들면, 전쟁 준비 과정은 정당성을 확보하고 원로원 다수를 결집하는 효과까지 낳는다. 어차피 그는 처음부터 전쟁을 피하려는 지도자가 아니라, 전쟁의 정당성을 안정된 구조로 만들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동방을 향한 사절단은 이 시기에 절대 등장할 수 없었다. 외부와 내부 중 어느 쪽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 판단해야 했던 시점에, 그에겐 로마 중심부를 움켜쥐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전쟁의 명분을 쌓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한편 동방으로 떠난 집정관과 의원들은 같은 현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로마를 떠난 뒤에도 자신들이 공화국의 집정관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이들과 함께 동방으로 간 안토니우스파 원로원 의원들도 로마 본토에서 열리는 회의를 정상적인 원로원 회의로 인정하지 않았다. 본토 회의란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 속에서 열리는 회합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로마를 떠나온 행동이 비난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본토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영향력 아래 열리는 회의의 중립성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부각했다. 오히려 동방에서 집정관과 로마 원로원 의원이 함께 모여 의논하는 회의에 공화정의 절차를 이어가는 진정한 모습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기존의 권위를 다른 장소에서 유지하려는 조치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이 주장은 로마 본토의 중립적인 시민들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왕국들엔 충분한 논리로서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안토니우스 곁에 로마의 집정관이 있고, 그 집정관들이 소집하는 회의에 다수의 로마 원로원 의원이 참석한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로마의 행정 중심은 안토니우스 진영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동방 왕국들로부터 전쟁 지원을 끌어내는 명분으로 기능했다.
본토의 원로원이 이 두 정치 구조 사이에서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분봉식과 유언장이 전해준 이미지로 안토니우스에 대한 불신이 쌓였고, 해상 봉쇄의 기억에서 동방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에 대한 피로감이 커졌다. 여기에 집정관 부재가 만들어낸 행정 공백에서 의원들이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설명과 변호를 시도하리라는 것은 아예 기대도 할 수 없는 판국이었다. 결국 로마에 남아 있던 의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동방 진영을 제도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당장 이탈리아와 서방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군사 상황 역시 두 진영의 분리를 굳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파르티아 원정 이후 동방 전선은 안정과 거리가 있었다. 아르메니아 왕실 내부의 갈등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안토니우스가 세워놓은 협정도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다. 이 지역의 움직임이 다시 흔들릴 가능성을 통제하려면 로마 군단이 현지에 머물러야 했다. 군단은 불안정한 아르메니아를 지켜보며 동방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역할을 맡은 병력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군단의 본토 복귀는 선택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본토의 시각에서 보면 이 군단이 동방에 묶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불안을 낳는 요소였다. 본토가 직접 통제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대규모 병력이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은 동방의 긴장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했다. 결국 그 긴장은 제국 전체가 두 방향으로 갈라져 움직인다는 인식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서방의 조건도 좋지 않았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해상 전쟁이 끝난 이후 함대 정비가 진행되었지만, 해군력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시점이었다. 항만과 조선 시설의 복구 속도가 병력 운용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지중해 서부에 배치할 전력이 제한된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병력을 자유롭게 재배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외부로 병력 분포를 넓게 펼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제국의 중심은 먼저 자신을 방어할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조건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본토와 인근 속주에 남아 있는 군단을 이탈리아 방비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동방 전쟁에 투입할 병력과 재정을 별도의 단계로 준비했다. 원로원은 이 계획을 세부 항목까지 일일이 심의하는 대신 전반적인 방향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추인했다. 이미 실질 임무의 상당 부분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 있어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응 방식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렇듯 동방과 서방 모두 자신만의 문제에 묶여 두 진영의 판단을 더욱 다르게 만들었다. 본토에서는 이탈리아의 방비를 우선시하는 흐름이 강해졌고, 동방에서는 현지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필요가 안토니우스의 입장을 고착시켰다. 그 결과, 군사 구조 자체가 두 지도자의 분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이렇게 전쟁 선포 직후의 로마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굳어지는 두 중심이 따로 움직였다. 이 두 중심은 같은 정치 공간 안에서 조정되기 어려웠다. 단지 의견이 갈라진 수준이 아니라, 각각의 진영이 자신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그 결과, 제국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 시점부터 로마와 동방은 각각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두 개의 정치 공간으로서, 제국의 중심을 누가 붙들 것인지에 대한 마지막 대결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전쟁 선포가 로마 내부의 정치 구조를 옥타비아누스 중심으로 정리될 무렵, 이탈리아 전 지역도 그 변화에 빠르게 반응했다. 지방 도시와 농촌 지도층 또한 갈등의 초점이 동쪽에 있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전쟁이 본격화되면 가장 먼저 충격을 흡수해야 할 지역이 자신들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런 배경에서 각 도시의 원로와 지방 엘리트는 로마 본토의 안정을 위해 공화국에 직면한 흐름을 따랐다. 그들은 전쟁 준비를 행정 중심의 지시에 따라 통일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여겼다. 이 판단은 곧 옥타비아누스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공감대로 이어졌다. 이렇게 이탈리아 전역에서 올라온 보고와 제안은 자연스럽게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달하는 경로가 형성되었다. 선단 제공이나 병력 지원 같은 요구가 지역별 여건에 맞추어 하나씩 결합하면서, 전쟁 대비라는 이름의 공통된 의지가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내부의 결집 흐름은 지방의 이해관계와 로마의 정치적 재편이 맞물리며 굳어졌다. 곡물 공급이 흔들렸던 경험은 도시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이 불안이 전쟁 초기 단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의사결정의 중심을 찾으려는 심리로 이어졌다. 각 도시의 자치권을 지켜온 지방 엘리트는 전쟁을 앞두고 자신들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는 경로를 선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정비해둔 행정 체계와 군사 보고선이 신뢰를 모으는 기반이 되었다. 그가 항만을 군단 이동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전쟁 준비를 진행할 때 원로원은 이 흐름을 제어하기보다 수용하는 쪽에 가까웠다. 지방 시민들에게 이 모습은 국가가 견고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행동은 이탈리아 전체의 동원을 정착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섹스투스와의 해전이 남긴 경험은 서방 속주의 자치 항구도시들에도 또 다른 기준을 갖게 했다. 그들은 한때 지중해의 물류 길이 끊어졌을 때 어떤 혼란이 벌어졌는지 직접 확인한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 어느 쪽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지를 가장 먼저 살폈다. 해상 통제권을 가진 쪽만이 서방의 곡물을 포함한 모든 물류 흐름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세력에게 협력하는 편이 자신들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믿었다
그 흐름이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모이면서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로마의 방침에 맞추어 정리되었다. 항만의 조선 능력이나 병참 창고의 배분도 그에 따라 조정되었다. 전쟁 대비가 본격화될수록 서방 속주들의 보고와 행정 결정이 로마 본토의 의도와 맞닿으면서 자연스럽게 옥타비아누스가 정한 방침을 기준 삼아 결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정점은 이탈리아 전체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선서’를 올리는 순간이었다. 기원전 32년 봄 무렵, 그는 전쟁 준비에 착수하기에 앞서 이탈리아 각 공동체에 충성을 서약하는 의식을 요구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업적록’에서 이 일을 언급할 때, 이탈리아가 집단으로 자기에게 맹세한 사건을 특별한 전환점으로 적는다. 후대 학자들이 ‘이탈리아의 맹세’라 부른 이 서약은 국가의 직책이 아니라 한 인물에게 향하는 충성 의식이었다.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육지와 바다에서 그와 함께 움직이겠다고 약속하는 형식은 원래 군단의 선서였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병사 집단을 넘어 이탈리아 주민 전체의 대표들로 확대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탈리아의 서약은 곧 서방 속주로 확장되었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포함한 여러 서방 지역에서 비슷한 형식의 선서가 이어졌다. 그 지역의 총독과 지방 엘리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영향력 아래 행정을 운영하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만이 자신들의 지위를 지킬 안전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이해관계를 파악해 서방 속주의 서약을 이탈리아의 맹세와 ‘같은 흐름’ 안에 엮어 넣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이때의 서약을 근거로 서방 전체가 자신을 통해 전쟁을 수행했다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
이 시기 레피두스는 종신직인 최고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그 지위는 비어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의 영향력이 살아있던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총독들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문서에 올리면서도, 전쟁 준비 상황과 병참에 대한 보고서는 로마 본토로 보냈다. 섹스투스와의 해전 이후 항만 정비를 맡았던 레피두스의 행정관들이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이동한 이후 이런 행위는 줄곧 이어졌다. 레피두스는 섹스투스와의 해전 직후인 ‘36년의 실각’ 이후 로마 정치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마지막 남은 속주를 돌보는 일조차 측근에게 맡겨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관할 도시와 총독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담보할 선택이 필요했다. 그 선택이 바로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선서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흐름을 굳이 바꾸려 들지 않았다. 서방이 그의 지휘 아래 정렬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정치 현실로 보이면, 남은 삼두의 외형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전쟁 준비는 곧 구체적인 자원 배치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곡물 생산지에서는 일정 비율의 수확이 전쟁 예비분이라는 명목으로 따로 분류되었다. 곡물 저장고와 수송 창고도 항만과 가까운 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서방 속주의 세입 가운데 일부는 직접 로마로 보내지 않고 군대 보급 항목으로 다시 책정되었다.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는 기존의 공납 구조를 조정해, 육지 수송로와 해상 수송로에 필요한 짐마차와 수송선 확보가 우선순위에 올랐다. 이 변화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정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이전의 내전 시기에 사용했던 병참 체계를 다시 이용하는 과정이었다. 섹스투스와의 전쟁 기간 함대와 항만 관리의 기본형을 만들어두었다면, 이번 전쟁은 그 구조를 동방을 향한 장거리 원정에 맞추어 확장하는 단계였다.
인적 동원도 같은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이탈리아 각지의 도시와 식민지에서는 퇴역병 집단을 포함한 유력자들이 신병 모집에 협력했다. 토지 분배 이후 이탈리아에 정착한 베테랑들은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익숙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지방에서 올라온 신병이 낯선 지휘 체계에 적응하는 시간을 줄여주었다. 서방 속주에서는 이미 주둔 중이던 군단이 우선 대상이어서, 필요한 경우 현지에서 보충병을 끌어올 수 있는 통로가 정비되었다. 이런 준비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이 길어질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다. 초기 결전이 실패하더라도 이탈리아와 서방에서 추가 병력을 끌어올 수 있도록, 동원 체계를 단계별로 구성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서방의 서약과 행정 재편은 전쟁 형식이 로마와 이집트 왕국의 대결이라는 외양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의 도시와 서방 속주가 옥타비아누스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순간, 그는 전통적인 집정관이나 삼두의 지위를 넘어서는 위치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를 중심으로 모이는 재정과 병력, 해상 통제권은 제국 서방 전체가 선택한 전쟁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만들어냈다. 동방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왕국들과 동맹을 묶어갈 때, 서방에서는 그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는 구조가 완성되어 갔다.
서방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판단을 굳혀가는 동안, 동방에서도 마지막 결집이 시작되었다. 이제 다음 장면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어떤 방식으로 동방 왕국과 자원을 모아냈는지, 그 결집의 구조가 서방의 동원과 어떤 차이를 보였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이탈리아와 서방이 옥타비아누스를 중심으로 전쟁 체제를 굳혀가던 같은 시기, 안토니우스는 로마 본토에서 벌어진 전쟁 선포 과정을 사실상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그는 동방 왕국과 이집트의 자원을 최대한 모으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는 로마로 귀환해 변명을 시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토니우스가 선택한 첫 집결지는 에페소스였다. 기원전 32년,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에서 출발해 이 도시로 이동했다. 이미 동방 곳곳에서 모여든 함대와 부대가 정박을 시작한 에페소스로 로마에서 빠져나온 안토니우스파 원로원 의원들도 모여들었다. 이 무렵 안토니우스가 보유한 전함은 약 500척에 이르렀다. 플루타르코스와 후대 연구를 종합하면 그 가운데 상당수가 이집트가 제공한 대형 선박이었다.
에페소스의 항만과 인근 사원은 이때부터 동방 진영의 병참 기지로 전환되었다. 아시아 속주의 도시들이 내는 공납과 사원의 금고, 그리고 성소의 보물들이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유지할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에페소스에서 어느 정도 군사적 규모가 갖추어지자 안토니우스는 진영의 중심을 사모스로 옮겼다. 사모스는 동방 왕국의 군주들이 한자리에서 얼굴을 맞대는 장소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섬에서 열린 집회를 두고, 여러 왕과 도시 대표들이 머물며 서로 잔치를 베풀고 제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겉으로는 향연이 이어지는 축제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한쪽에서는 마지막 동맹 구도를 논의했다. 각 왕국이 어느 정도의 선박과 병력을 제공하고 재정을 부담할지 이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사실 동방의 군주들은 저마다 사정이 있었다.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 같은 아나톨리아의 왕국은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사이에 끼인 위치 때문에 로마와의 관계가 곧 생존의 기반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동안 이 왕국들의 지배권을 조정하면서 새로운 왕을 세워주거나 기존 왕의 지위를 추인해주는 조치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런 배경 때문에 동방 왕국 다수는 이번 전쟁을 자신들의 지위와 연결되는 문제로 인식했다. 유대의 헤로데처럼 처음에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다가 전세가 기울자 옥타비아누스로 갈아탄 인물들도 이 시점에서는 여전히 동방 진영의 일부였다.
그리스 도시들 또한 한동안 미뤄왔던 조세 납부나 특별 부담금을 요구받았다. 사정이 어려운 일부 도시는 극장과 경기장을 유지하던 기금마저 전쟁 비용으로 바꾸어야 했다. 아시아와 시리아, 키프로스에서 거둔 조세는 이집트의 곡물과 함께 함대 유지 비용으로 재편되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로마 본토의 시각에서는 약탈에 가까운 조치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방 궁정에서는 파르티아와 로마 내전을 거치며 이미 익숙해진 ‘전시 부담’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차이가 이 시기 동방 진영을 움직이는 배경을 이루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위치는 이 집결 과정에서 선명하게 두드러졌다. 이집트는 곡물과 금 같은 현물 자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대형 전함을 거느린 해군 세력의 핵심이었다. 그녀는 전함과 막대한 자금을 부담하는 대가로 자신의 왕권과 자녀들을 중심으로 한 계승 구도를 확인받으려 했다. 전쟁 비용의 상당 부분을 이집트가 감당한다는 것은 동방 진영에서 그녀가 재정과 해군, 정치 구상을 함께 장악했다는 의미였다.
클레오파트라의 동행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이 시기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안토니우스의 일부 로마인 측근과 장군들은 그녀가 이집트에 남아 왕국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다. 그들은 전쟁이 로마인의 내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이집트 여왕의 존재가 여론을 자극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는 만큼 그녀는 재정 부담의 규모, 이집트 해군의 비중, 그리고 오랫동안 왕국을 다스려온 경험을 내세우며 전쟁의 결과에도 자신의 몫을 분명히 하려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는 전쟁 전략의 한 축으로 동방 진영의 공식 무대에 올라섰다.
에페소스와 사모스에서의 집결을 거친 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 말 무렵 본진을 아테네로 옮겼다.
그가 이 도시를 선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섞여 있었다. 아테네는 아직도 그리스 문화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도시였다. 로마의 장군들마저 철학 강의를 듣고 수사학적 연설 방식을 배울 정도로 공화정 말기 정치인들에게는 일종의 명예로운 무대였다. 일찍이 아테네 시민권을 받은 바 있는 안토니우스는 로마와 그리스 전통을 모두 이해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퍼트리며 이 지역을 병참 거점으로 활용했다. 그는 에게해 곳곳에서 올라오는 선박이 아테네 인근 항만을 거쳐 서쪽으로 집결하도록 항로를 정리했다.
동방의 여러 육군부대 역시 이 시점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에 배치했던 군단이 소아시아 해안에 도착했을 때,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이 병력을 통합 지휘하는 야전군으로 편성했다.
이 군단들은 파르티아 전쟁 이후 오랜 기간 동방 방면을 지켜오면서 여러 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만큼 전투력은 검증된 집단이었다. 하지만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전전하며 근무하는 동안 그들에게 로마와의 심리적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그런 병력이 이번에는 이집트와 동방 왕국의 이해관계까지 함께 짊어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동방의 전력을 한데 모은 과정에는 문화적 요소도 끼어들었다. 그는 사모스와 아테네에서 연극과 음악, 경기와 축제를 연달아 열었다. 그리스 세계에서 이름 있는 예술가와 스포츠 선수들을 불러 모으고, 자신이 주최하는 향연에서 이들을 등장시켰다. 다시 말해 전쟁 준비와 축제가 한 무대에서 움직이는 시간이었다. 이런 방식이 동방 진영 안에서는 결속을 다지는 의례로 받아들여졌지만, 로마 본토 시민에게는 안토니우스가 전쟁보다 향락에 기울었다는 평판의 재료가 되었다. 그들에게 이 결집은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수행해온 장군과 황금의 이집트가 손을 잡고 제국의 동쪽 절반을 장악하는 과정으로 보였다. 그리고 동방 왕국의 눈에는 로마 내부의 내전에 휘말리면서도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후견인을 확인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이 두 가지 인식이 공존한 결과, 동방의 결집은 처음부터 긴장과 불안 속에 진행되었다.
이제 동방 진영의 함대와 육군은 그리스 서부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에페소스와 사모스, 아테네를 거쳐 이동한 전력은 악티움 인근 해안에서 최종 진지를 잡게 된다. 이때부터 전쟁의 성격은 명분에서 전장으로 이동했다. 이제 문제는 바다와 육지 가운데 어디에서 승부를 걸 것인가였다. 다음 절에서 다룰 전쟁 준비의 비대칭, 즉 두 진영의 군단과 함대 운영 구도가 어떻게 달랐는지 우리는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악티움 전쟁 준비에서 두 진영의 가장 큰 차이는 병력 규모 자체보다 그 병력을 어떻게 나누고 누구에게 맡겼는가, 하는 지휘 구조에 있었다. 숫자와 배의 크기, 군단의 용맹 여부를 따지기 전에 각 진영이 전쟁 전체를 어떤 구도로 나누어 운영했는지를 살펴보면 악티움의 결과가 그 이전 단계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났음을 알게 된다.
옥타비아누스 측의 지휘 체계는 비교적 분명했다. 해전의 실무 지휘자는 아그리파였다. 고대 사료들은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좌익을 맡고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와 마르쿠스 루리우스가 각각 중앙과 우익을 지휘했다고 전한다. 옥타비아누스의 육군 책임자인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는 해안에 육군을 배치한 뒤 전투 전체를 해안에서 지켜보면서 육상 전력을 관리했다.
전투 당일만 이런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준비 단계에서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육군과 해군 그리고 이탈리아 내부 통치를 서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삼중 구조를 계획했다. 해상은 아그리파, 전장 육군은 타우루스, 로마와 이탈리아의 정치는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오른팔을 맡아왔던 마에케나스가 담당하는 형태였다. 그는 이탈리아와 로마를 맡아 내부 동요와 반란 가능성을 감시했다.
옥타비아누스 진영은 이토록 전쟁 지휘와 후방 통제가 서로 분리된 구조였다.
군단과 함대의 전체 규모를 두고 고대 기록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약 250척의 전함과 8만 명가량의 보병을 거느렸다고 적고, 다른 사료에는 그가 400척 안팎의 갤리선을 동원했다고 기록한다.
어쨌든 전체적인 구성은 분명했다. 옥타비아누스가 가진 전력의 중심은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에서 모은 보병과 기병, 여기에 섹스투스와의 해상 전쟁을 거치며 건조해왔던 함대가 더해졌다. 그의 해군은 크고 무거운 전함보다 가벼운 3~4단 노인 중형 갤리선과 1~2단 노인 경 갤리선이 주력이었다. 바다에서 속도를 내고 방향을 빠르게 바꿀 수 있는 이런 함선들을 이용해 적선에 접근한 뒤 갑판 위에서 싸우는 방식은 이 함대의 강점이었다.
아그리파가 공성기를 이용해 쇠사슬 달린 갈고리 장치로 개발한 하르팍스는 바로 이런 해군 운용 구도와 맞물린 무기였다. 작은 배가 적선을 붙잡고 끌어당겨 다가간 뒤, 보병이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전법은 이제 아그리파의 해군에서는 보편적 해상 전투방식으로 굳어졌다.
이에 비해 안토니우스 병력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내부 구조에는 갈등의 씨앗이 존재했다. 안토니우스 측은 애초 500척에 육박하는 함대를 그리스 서부까지 끌고 왔으나, 실제 전투가 벌어질 무렵에는 인력 부족과 탈영 문제로 이 가운데 상당수를 운용하지 못했다.
안토니우스 함대의 주력은 무겁고 넓은 대형 갤리선이 주종이었다. 오히려 그중 일부는 그보다 더 큰 8단 노와 10단 노 급인 초대형 전함까지 포함되었다. 이런 함선은 높고 넓은 갑판 덕분에 많은 병력과 무거운 무기들을 싣기에 유리했지만, 조류를 거슬러 선회하거나 좁은 수역에서 기동하기 어렵다는 약점을 지녔다.
육군 쪽에서도 비대칭 구조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안토니우스 진영의 육군은 19개 군단에 1만 2천에 이르는 기병을 보유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동방 동맹군까지 합치면 숫자만 보았을 때 훨씬 큰 세력이었다.
이 군단을 직접 지휘한 사람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였다. 아르메니아와 캅카스 방면에서 군대를 이끈 경험이 있는 그는, 이번에도 육상 전투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략의 권한은 함대와 동방 왕국을 끌어모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함대를 쥔 클레오파트라에게 있었다. 육군 지휘관이 계산하는 전선과 정치 지도부가 구상하는 전쟁 방향 사이의 간격이 처음부터 지휘 체계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다.
안토니우스 진영의 육군은 멀리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에서 출발해 그리스 서부까지 이동한 군단이라 보급선이 길었다. 그들이 악티움 일대에서 일정 기간 머물려면 주변 도시와 항구에 조세와 식량을 강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동맹 도시들의 피로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에 비해 옥타비아누스의 육군은 이탈리아와 인근 속주에서 출발하면서 상대적으로 탄탄한 보급선을 유지했다. 타우루스가 지휘한 야전 군단은 해안에서 일정 거리를 둔 후방 거점에서 해전의 추이를 지켜보며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배치를 유지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전쟁의 여러 축이 한 지점에 겹쳐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왕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관리하는 동시에, 함대 지휘와 전체 전쟁 전략을 직접 쥐고 있어야 했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육군을 책임졌지만, 그는 그리스 서부에 묶여 있는 군단을 이끌고 안토니우스의 결정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함대와 전쟁자금을 움켜쥔 입장에서 해전으로 전선을 돌파한 뒤 필요하다면 전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현실적인 선택으로 열어두었다. 그 결과 함대를 얼마나 남길 것인지, 육군을 어디까지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서로 다른 계산 위에서 이루어졌다. 육군 지휘관과 정치 지도부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움직인다고 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함대 편제에서도 두 진영의 비대칭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옥타비아누스 측 함대는 상대적으로 소형 함선을 운용하면서, 선수가 가볍고 조타 성능을 높이는 방향으로 준비를 진행했다. 이 전쟁에서 함선의 덩치보다 항구와 해협을 선점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아그리파는 이 구도를 바탕으로 그리스 해안의 요충지들을 차례로 압박하면서 상대 함대가 좁은 암브라키아 만 안쪽에서 벗어나기 어렵도록 해상 전선을 짜두었다.
안토니우스 측은 거꾸로 한 척의 전함이 움직이는 성채와 같다는 감각을 중요시했다. 높고 두꺼운 선체 위에서 대형 쇠뇌와 투석기가 쏟아지는 장면을 상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물론 이런 구상은 넓은 해역에서 정면충돌이 일어날 때는 나름의 효과를 가질 수 있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좁은 만 입구에서 기동력을 잃으면 무거운 배는 오히려 약점이 된다.
마에케나스의 역할은 이런 군사적 비대칭에 또 다른 유리함을 더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전선에 묶여 있는 동안, 그는 로마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세 징수, 치안, 선전 활동을 조율했다. 만약 필요할 경우 옥타비아누스의 서신 내용을 마에케나스의 국내 관리에 도움이 되도록 수정할 권한까지 행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렇게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없는 상황에서도 로마와 이탈리아를 관리하면서 후방의 안정과 여론 조정을 맡았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전선과 후방이 서로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전쟁 지도와 후방 조정이 한 사람의 어깨에 몰려 있던 것과 비교하면, 두 진영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악티움 앞바다에서 펼쳐질 단 하루의 전투는 이 비대칭 구조 위에 올라선 싸움이었다. 다음 단계에서 그리스 서부를 둘러싼 실제 이동과 해상 작전을 살펴보면 이 구조가 어떻게 전장의 현실로 나타나는지 한층 더 선명해진다.
기원전 31년 초, 안토니우스가 아테네를 떠난 순간, 동방 함대와 왕국의 병력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웅장한 그의 함대에 이어 왕들의 전함도 금장식을 단 채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 행렬 뒤에는 항상 긴박한 사정 또한 따라다녔다. 진영의 규모가 큰 만큼 보급이 무거워져 진영이 오래 머물면 주변 도시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늘어났다.
아테네를 떠난 안토니우스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암브라키아 만의 입구는 좁고 내부가 깊어 함대를 숨기기 쉬운 곳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지형에서 해군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사실 이 결정은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움직임에 대한 늦은 반응이었다.
그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아그리파, 즉 악티움 전쟁의 서막을 열어젖힐 인물이 누구인지 로마인 대부분이 알고 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의 판도를 손바닥 내려다보듯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그리파가 처음 공격한 곳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부의 메토네였다. 이 항만은 안토니우스 함대가 이집트와 동방에서 실어 나른 곡물과 전쟁 물자를 임시로 보관하는 곳이었다. 아그리파는 폭풍 몰아치는 밤을 이용해 접근한 다음, 폭풍이 잦아든 다음 날 새벽에 상륙을 감행했다. 방어 병력은 소수였다. 아그리파의 이 기습공격에 항만은 하루 만에 서방의 손에 들어갔다.
메토네가 무너지면서 안토니우스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서남부를 따라 움직일 공간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항만에 의존하던 보급 경로 하나가 끊긴 결과, 함대 운용과 작전 구상 전반에 조정이 불가피했다. 이 첫 상실은 전쟁 개시 단계에서 안토니우스 측 지휘부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첫 타격은 곧바로 두 번째 작전으로 이어졌다. 아그리파는 코르키라(현 그리스의 코르푸)섬을 목표로 삼았다. 이 섬은 이오니아 해와 아드리아해가 맞닿는 길목이었다. 이곳을 확보하면 안토니우스가 서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해로가 차단되었다. 아그리파는 섬의 정박지 일부를 불태우고, 주둔하던 선박을 빼앗으며 단숨에 섬을 로마 서방 진영의 해군기지로 바꾸었다. 이 점령 이후 안토니우스 함대는 이전처럼 자유롭게 항로를 선택하기 어려웠다. 대형 전함 위주의 편성은 안전한 정박지와 넓은 기동 공간을 요구한다. 따라서 서쪽으로 열려 있던 해로가 제약되니 해군의 작전 반경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아그리파의 해상 압박은 안토니우스의 육군에게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보급과 기동이 제약되면서, 그 많은 병력은 점차 고정된 진지에 묶인 채 상황의 변화를 견뎌야 하는 처지로 밀려났다. 전투 능력이 뛰어난 부대였지만, 아그리파는 한순간에 그들로부터 선택의 여지를 빼앗는 개가를 올렸다.
아그리파는 멈추지 않았다.
코르키라를 확보한 뒤 그는 레우카스 섬으로 손을 뻗었다. 레우카스는 암브라키아 만 북쪽으로 이동하려는 함대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었다. 그가 항구와 도로를 순차적으로 점령해 나가자, 그리스 서부 도시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파트라이(오늘날 그리스의 펠레폰네소스 반도 북쪽의 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여름 동안 주둔지를 요구할 때 불만을 드러냈고, 나우파크토스(코린토스 만 입구 동쪽, 파트라 맞은편 해안)에서는 일부 귀족이 비밀리에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소식을 전달했으며, 레프카스(이오니아해의 섬인 레프카다, 지금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됨)에서는 안토니우스 군의 보급 요구가 지속되자 시민들이 조세 부담을 견디지 못해 항구 근처에서 항의가 일어났다.
아직은 도시들이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오래 머물면 도시 자체가 고갈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반대로 아그리파는 짧은 기습으로 항만을 점령하면서도 군량을 강제로 징발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그리스 서쪽 도시들의 여론이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이즈음, 안토니우스의 육군을 지휘하던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보병군단 전체를 이끌고 암브라키아 만 동쪽의 내륙 지점에 진영을 세웠다. 그는 도착 직후 보병과 기병을 분리된 진영에 배치해 각각의 지휘 체계를 따로 유지하는 쪽으로 편성했다. 주변의 산지 능선에는 감시초소를 세워 소규모 경비대를 순환 배치하는 방식으로 외곽 방어선을 정비했다. 그러나 동방에서 이곳까지 이어진 긴 행군으로 병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었다. 더구나 해군 위주의 전쟁에서 보병군단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육상 전투로 승부를 가르자고 누차 주장한 사람이었다. 전쟁의 축이 해상에서 육상으로 옮겨 오면, 보병군단의 사기도 올라갈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해전 승부를 택한 안토니우스와 크레오파트라에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면 옥타비아누스의 육군을 맡은 타우루스는 암브라키아 만 북쪽의 평탄한 지대에 부대를 배치했다. 그는 진영을 세울 때 각 부대가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며, 보급 경로를 정비했다. 이후 해안에서 일정 거리를 둔 지점에 방어 진지를 만들어 돌발 상황을 흡수하는 완충지대를 구축했다. 타우루스의 배치는 육군이 해전 결과에 즉각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미리 여지를 확보하는 구조였다. 그는 전투의 중심이 반드시 바다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육군은 전투 공간의 균형추 구실만 할 수 있는 전략을 고수했다.
아그리파가 해상 작전을 지휘하고, 타우루스가 육군을 관리하고, 마에케나스가 로마 후방을 안정시키는 삼중 구조는 악티움 전쟁을 특징짓는 구도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서부로 이동하면서 이 세 사람에게 서로 다른 권한을 부여했다.
아그리파: 독자적 판단으로 항만과 섬을 점령할 권한.
타우루스: 육군 병력 재배치와 방어진 구축의 전권.
마에케나스: 로마 후방 여론, 치안, 조세 관리, 심지어 옥타비아누스의 편지 일부를 수정할 권한.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육군과 해군의 양 전선이 단절되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았다. 그렇게 그는 매번 전선의 상황에 따라 지휘관에게 새로운 지시를 전달했다. 그 지시들은 즉각 아그리파와 타우루스 사이에 조정되면서 전선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또한 해군과 육군이 서로 역할을 침범하지 않았고, 명령 역시 충돌하지 않았다. 이 구조는 안토니우스 진영에 없던 요소였다.
기원전 31년 여름, 악티움 앞바다는 두 진영의 전력이 정면으로 마주 보는 지점이 되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암브라키아 만 깊숙한 곳에 거대한 전함들의 정박지를 마련했다. 그 주변의 습지와 하천가에서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의 보병군단이 진흙과 열병을 견디며 진영을 유지했다. 도시는 연일 이어진 징발 요구를 감당하지 못해 곡물의 양은 점차 줄어들었다.
반면 아그리파는 경량 전함을 계속 이오니아 해로 내보내 암브라키아 만 입구를 좁히는 봉쇄선을 유지했다. 타우루스의 육군은 북쪽 평지에 긴 방어진을 구축한 뒤 만약의 사태를 위한 후퇴로와 보급로까지 정돈한 상태였다.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에서 오는 보급물자는 도로와 해로를 따라 끊이지 않았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해상에서는 봉쇄가 굳어지고 육지에서는 보급의 차이가 벌어지는 구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악티움의 결정적인 하루가 오기 전까지 남은 것은 이 봉쇄와 정체의 환경에서 두 진영의 지휘부가 어떤 선택으로 기울어가는지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악티움 앞바다의 대치가 끝없이 이어지자, 동방의 동맹 구조가 서서히 흔들렸다. 전쟁이 장기전이 될수록 각 왕국과 도시들이 한 둘씩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그들을 불안케 했다.
카파도키아의 아르켈라오스 왕도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기에 병력과 자금을 내놓으며 확고한 협력자로 보였던 그는, 전선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신중한 침묵으로 물러섰다. 파르티아와 맞서는 구조적 부담이 그의 왕국을 짓누르며 국경 방위가 흔들릴 위험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 이유였다.
유대의 헤로데도 비슷한 계산으로 움직였다. 전부터 호시탐탐 유대를 탐내왔던 클레오파트라를 여전히 경계하는 그는, 이집트 측이 전쟁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어가는 모습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카시우스 디오와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가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국경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대안을 찾으려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작은 도시들의 움직임은 이보다 더 빠르게 나타났다.
악티움 일대의 그리스 서부 도시들은 안토니우스 함대가 머무는 기간 동안 더 많은 부담을 짊어졌다. 대형 전함과 군단을 유지하기 위해 각 도시는 추가 조세와 보급을 요구받으면서 그 압박이 곡물 가격과 항만 비용을 끌어올렸다. 이 변화에 가장 먼저 흔들린 상인과 부두 노동자들은 점점 지쳐갔다. 초반엔 왕들의 방문과 전함의 정박이 도시의 위상을 높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화려함은 곧바로 과중한 조달 의무로 이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 조용히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전황과 항만 상황을 전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는 안토니우스파의 정치권에서도 숨길 수 없는 흐름으로 드러났다. 그 가운데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가 가장 특징적인 사례였다. 그는 기원전 32년의 집정관 지위로 안토니우스 진영에 외형적 권위를 세워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악티움 일대의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더 큰 부담이 되었다.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병사들의 기력이 떨어지는 모습과 함대가 활력을 잃어가는 변화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점차 무거워졌다. 병사들 사이에 병이 퍼지고, 보급 체계가 흔들리는 현실을 보며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는 결국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건너갔는데, 뒤이어 군단병 약 3천 명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는 소식에 놀랐다고 한다. 이 사실은 병사들이 전황을 지켜보다가 결국 안토니우스 진영의 앞날에 희망을 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점을 밝혀준다.
원래 동방의 병사들은 전부터 안토니우스를 전쟁 영웅으로 바라보았다. 아르메니아, 메디아, 시리아에서 수년간 전쟁을 지휘해 온 장군, 카이사르의 계승자 중 하나라는 명성, 클레오파트라의 왕국에서 제공된 끝없는 자금과 보급. 그러나 악티움 해협에 도착한 뒤 병사들은 습한 공기, 수많은 모기떼, 염분이 많은 바람,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보급품에 시달리는 와중에 지휘부의 갈등을 지켜봐야 했다. 이런 현실은 그들의 사기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클레오파트라의 존재는 동방 진영 내부의 갈등을 더 깊게 끌고 들어갔다.
그녀가 해군과 재정의 축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병사들에게 단순한 전략 문제가 아니었다.
“이집트 여왕을 위해 로마인이 싸우는 것인가?”
이 질문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군단 내부에서 잦아졌다. 플루타르코스는 “병사들 사이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영향력에 대한 불만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났다”고 적고, 디오는 “로마 군단이 정당성을 묻기 시작한 순간 전쟁의 균열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 도시들의 불만, 동맹 왕들의 흔들림, 로마 귀족의 이탈, 군단의 피로감을 한 맥락으로 묶어 작성된 선전문을 전선에 뿌렸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개입, 동방 재정이 작전 전반을 좌우하는 구조, 로마적 전통이 주변으로 밀려난 상황을 지적하며 로마 시민으로서의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이런 정보가 계속 흘러 들어가자, 전선 내부의 분위기가 차츰 흔들렸다.
안토니우스가 주재한 전략 회의에서도 의견이 정리되지 않았다. 해전을 서둘러야 한다는 쪽과 육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쪽이 맞서면서, 지휘 체계가 단일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지휘부의 이런 혼란으로 장기전이 이어지면 전쟁을 지탱할 기반이 약해진다는 우려가 진영 전체에 퍼졌다.
그러나 해군과 육군, 후방이 일정한 전략 속에 움직인 옥타비아누스 진영은 그리스 도시들의 지지 속에 안정적인 보급이 이어졌다. 악티움 해협에 나타난 이런 변화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승부의 향방에 대한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일전을 앞둔 악티움 앞바다, 두 진영이 마주 선 마지막 시기에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암브라키아 만 남쪽 곶, 즉 악티움 반도에 육군과 함대를 붙여 두었고, 옥타비아누스는 만 북쪽의 니코폴리스 쪽 언덕을 점거했다. 두 진영은 바다와 육지를 따라 각각 진을 치고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면서도 결정을 미루었다.
병사들의 규모만 놓고 보면 아직 동방 진영이 훨씬 방대했지만, 전쟁이 지연되는 동안 병사들의 지친 표정과 염려가 겹치면서 두 진영의 심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시기 안토니우스의 육군 지휘는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에게 맡기면서, 해상 지휘는 명목상 자신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 자원과 함대 구성은 클레오파트라가 장악했다. 이집트가 제공한 대형 전함과 자금, 선원들이 해전 전체의 축으로 묶이면서 전투 양식도 바다에서 승부를 보려는 구도로 굳어졌다. 사실 안토니우스는 육전에서 훨씬 우세했음에도 클레오파트라의 꺾이지 않는 주장에 따라 해전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이 선택은 지휘관의 성향과 동맹 관계의 균형, 그리고 정치적 계산이 뒤섞인 결과였다. 파르티아 원정 실패 이후, 대륙 깊숙이 들어가는 육상 전역보다 화려한 함대를 앞세운 단번의 승부가 그의 명예를 되살릴 길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옥타비아누스 쪽 구조는 완전히 달랐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악티움 해전 당일, 타우루스는 육군을 해안선에 늘어세운 뒤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그리파는 함대의 좌익을 맡아 포위 각도를 넓히는 방식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우익을 직접 관할했지만, 실전 운용은 전적으로 아그리파에게 맡겨놓았다.
이 구조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해전에서 쌓아 올린 경험의 반영이었다.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해군 지휘관’으로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검증된 부하에게 바다를 맡기고 본인은 전선 전체의 조율을 담당한 셈이었다.
악티움 앞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두 진영은 상반된 모습을 드러냈다. 안토니우스 함대는 크기와 높이 면에서 압도적인 전함을 여럿 보유했지만, 노를 젓고 돛을 다룰 숙련 선원 확보가 어려웠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그리스 각지에서 농부와 짐꾼, 마부, 젊은이까지 닥치는 대로 징발해 노꾼으로 채웠다고 전한다. 그래도 함대의 규모에 비해 인원이 부족해서 갑판 위의 무장병까지 노를 맡아야 할 정도였다. 반대로 옥타비아누스 쪽 함대는 소형의 경쾌한 배들로 구성되었다. 선체 규모보다 조종성과 선원의 숙련도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선택이었다.
아헤노발부스와 함께 집정관 신분으로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왔던 가이우스 소시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육군 지휘관인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이 상황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로 돌려보내고, 군대를 트라키아나 마케도니아로 옮겨 육지에서 결전을 치르자고 거듭해서 주장했다. 해상전은 이미 시칠리아 전역을 통해 단련된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의 장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전장이고, 안토니우스에게는 수많은 전투에서 단련된 중무장 보병이 있다고 크라수스와 소시우스는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의 조언은 끝내 거부당했다. 이집트 함대와 재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클레오파트라가 전쟁 결정권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갈라티아의 아뮌타스 왕이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돌아섰고, 갈라티아 지역의 제후 데이오타루스도 그에 합류했다.
왕들이 떠나는 모습은 수치심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동방의 왕국들이 안토니우스 곁에 서는 이유는, 군사적 보호뿐 아니라 로마의 제도적 후원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본토에서 안토니우스를 공적으로 보는 여론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원로원 다수를 등에 업은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어 가는 동맹 왕들의 선택은, 그동안 안토니우스가 가졌던 정당성의 중심이 흔들린 결과였다.
안토니우스파 정치인들도 그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전해의 집정관이었던 도미티우스 아헤노발부스는 안토니우스 함대의 핵심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소형선을 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분노하면서도 그의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짐과 노복까지 모두 돌려보냈다.
이 관대한 처분은 남아 있는 원로원 의원들과 병사들에게 잠시나마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지도자가 배반한 자에게조차 품위를 지키는 장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미티우스는 옥타비아누스 진영에 도착한 뒤 곧 죽음으로서,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탈주 사례 하나를 추가하는 효과에 그쳤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 진영의 분위기는 대규모 전투를 앞둔 긴장 속에서도 자신감이 팽배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늦은 밤까지 함선을 일일이 둘러보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 길에서 그는 당나귀를 몰고 가는 한 그리스 남자를 만나 이름을 묻자, 그 남자는 자신을 “프로스페르(Prosper, 번영)”, 당나귀 이름을 “빅토르(Victor, 승자)”라고 소개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들은 이 일을 두고 전쟁 승리를 미리 알리는 징조로 해석하며 환호했다. 실제로 훗날, 악티움 전승 기념비에 당나귀와 남자의 상이 함께 새겨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시기 안토니우스와 관련된 징조들 또한 열거한다. 피사우룸이라는 그의 개척 도시에서 땅이 갈라지며 토지가 삼켜졌고, 알바 근처에 세워진 그의 대리석상에서 땀이 계속 흘러내렸다고 적는다. 이어서 아카이아의 파트라이에서 헤라클레스 신전이 번개를 맞아 파괴되었고, 아테네의 거대한 조각상들 가운데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새긴 일부만 강풍에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사람들은 안토니우스를 헤라클레스나 디오니소스와 동일시되는 인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런 징조가 동방 진영 병사들의 마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의 군단 내부에서는 더 직접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투 준비 과정에서 한 백인대장이 안토니우스 앞에 나와 온몸의 상처를 보이며 항의했다. 그는 “이 칼과 이 상처들을 믿어 주십시오. 바다에서 싸우는 일은 이집트인과 페니키아인에게 맡겨도 됩니다. 우리에게 육지의 전투를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이 말은 전술적 논쟁을 넘어, 동방 전쟁에 동원된 로마 군단병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압축한 표현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육상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병사들에게, 이집트 함대에 기대를 거는 전쟁 구도는 그만큼 설득력이 약했다.
사실 전쟁이 장기화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도 세금 징수와 징발로 인한 동요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시민에게는 수입의 4분의 1, 해방 노예에게는 8분의 1 규모의 특별세금이 부과되면서 격렬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전체적인 전쟁 양상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울어가자, 시민들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훗날 자신이 기록한 ‘업적록’에서 그는 “이탈리아 전체가 자발적으로 내게 맹세하고 악티움 전쟁의 지휘를 맡아 달라고 요구했다”고 회고한다.
나중 세대의 기억이지만, 이 진술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악티움 전쟁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알게 해준다. 로마인들 눈앞에 펼쳐진 싸움은 개인 간의 내전이 아니라, 로마와 이집트라는 상징적 대립으로 굳어지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었다. 이탈리아의 광장과 포룸에서는 악티움 쪽에서 들어오는 소식이 곧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여전히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행동하는지, 동방 왕국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 군단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에 관한 전장 소식들이 로마 시내 각지로 퍼져나갔다. 베르길리우스와 더불어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가 훗날 악티움 전쟁을 회상하면서, “한 로마인이 여왕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라는 표현을 남겼다는 점은, 이 시기 전쟁이 어떤 구조로 이끌려갔는지 잘 보여준다.
이렇듯 대다수 로마인은 악티움이 ‘여왕과 거세된 시종들, 이집트의 부패한 궁정’을 겨냥한 전쟁으로 이해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전쟁 상대로 내세운 전략은 바로 이런 인식 변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기원전 31년 늦여름, 악티움 앞바다에서 양쪽 함대가 본격적으로 맞서게 된 며칠 동안 폭풍이 불어 전투는 계속 미루어졌다. 그런 뒤 닷새째 되는 날에야 날씨가 잠잠해졌다.
그 사이 양 진영은 각자의 방식으로 마지막 결정을 다졌다.
안토니우스는 해상 돌파를 감행할 준비를 끝냈고,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선단을 후방에 두고 만의 출구 쪽으로 달려갈 경로를 미리 확보했다. 한편 타우루스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의 육군은 해안선을 따라 침착하게 서서 지켜보았다. 아그리파는 좌익을 길게 펼쳐 상대를 바깥쪽으로 끌어내려는 포위 각도를 계산했다. 그리스 서부의 좁은 바다 위에 양 진영은 서로를 응시하며, 자신의 정치적 선택과 심리적 부담을 그 전장 위에 올려놓았다.
악티움의 하루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진영이 어떤 자원에 기대고, 어떤 전장을 택했는지, 또한 어떤 심리로 그 결정을 떠안았는지는 이미 이 시점에 드러났다.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9월 2일의 해전은 이 준비의 시간 위에 쌓인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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