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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11

악티움 해전

by 우광환

제11장 악티움 해전-제국의 분기점을 낳은 그 하루 (기원전 31년 9월 전후)

대치의 마지막 며칠 – 폭풍과 소모가 만든 결단

아직 악티움의 하루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하루를 떠받칠 조건들은 며칠 전부터 무너져내렸다.

암브라키아 만은 그 시기 거친 바람에 붙잡혀 있었다. 만의 출구는 열려 있으나, 그 열린 공간은 실제 이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파도가 선체를 밀어 올리면 대형 전함은 방향을 잃었다. 그리고 노를 젓는 힘이 조금만 어긋나도 배는 서로의 측면을 건드렸다. 이 며칠 동안의 날씨는 전투를 막았지만, 동시에 전투를 준비하던 두 진영의 체력을 깎아내렸다. 바람은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 바람은 비용을 늘렸을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 진영의 아그리파에게 이 며칠은 계산의 연장이었다.

그는 만 안쪽을 억지로 자극하지 않았다. 출구를 향해 돌진하는 대신, 그곳이 의미를 잃도록 만들었다. 이미 메토네에서 하나의 보급 고리가 끊겼으며, 코르키라와 레우카스에서 서쪽 항로의 숨통이 조여졌다. 이 상태에서 암브라키아 만 안쪽에 머무는 선택은 보호가 아니라 체류가 된다. 체류는 곧 소모였다. 아그리파가 기다린 것은 폭풍이 멎는 순간이 아니라, 상대가 머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암브라키아 만의 봉쇄를 유지하는 방식은 과시적이지 않았다. 대형 충돌을 초래하지 않았고, 출구를 완전히 막지도 않았다. 대신 경량선을 움직여 만 입구의 바깥을 넓게 감싸며 어느 쪽으로 나가든 추적이 가능하다는 인상을 계속 유지했다. 이 배치는 전투 기술이 아니라 심리적 압박에 가까웠다. 나갈 수는 있다. 그러나 나가는 순간 돌아오기는 어렵다. 이 인식이 만 안쪽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이 며칠은 다른 의미로 흘러갔다.

넓은 바다에서 기동에 불리한 대형 전함에 암브라키아 만의 좁은 출구는 약점을 가리는 천연 요새였다. 함대는 만 안에 서로의 간격을 유지했다. 그 가까운 내륙에 육군이 붙어있었다. 이 배치는 결정을 미룰 수 있다는 착각을 지휘부에 심어주었지만, 그 전제는 전황의 변화 속에 곧 무너졌다.

대형 전함은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을 요구한다. 노를 젓는 인원은 정박 중에도 교대가 필요했고, 갑판 위 병력은 습기와 열기에 지쳐갔다. 노꾼 부족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로 바뀌었다.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해 동원된 임시 인력은 전열의 질을 떨어뜨렸다. 노가 맞지 않으면 배는 곧장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이 지휘부의 보고서에 반복해서 등장했다.

육군의 상황은 더 나빴다. 습지와 하천가에 세워진 진영은 병을 키웠다. 열병과 설사가 늘어나면서, 병사들은 해전의 부속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육군 지휘관인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이 변화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는 전술적 이유를 들어 육전을 주장했으나, 그 주장의 핵심에는 심리가 자리했다. 로마 군단은 육지에서 싸워온 집단이다. 바다에서의 지연은 그 정체성을 잠식한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전투 이전에 지휘 체계부터 흔들린다.

안토니우스는 이 보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육전의 논리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여기서 멈췄다. 그 이유는 군사적 계산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드넓은 암브라키아 만을 병력 보존의 공간으로 인식했다. 이집트 선단은 전쟁 비용과 귀환 경로를 함께 싣고 있었다. 해전에서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빠져나갈 길이 남아 있어야 했다. 만 밖의 난전은 그 가능성을 줄인다. 그녀의 판단은 전술이라기보다 정치에 가까웠다. 이집트의 생존 선은 전투 결과와 분리되어야 했다. 이 요구는 안토니우스의 결정을 지체시키는 요인이었다. 지체는 비용을 키웠다. 비용은 다시 동맹국들의 피로로 이어졌다.

동방의 왕국과 그리스 도시들은 이 지연을 견뎌야 했다. 전함과 군단이 오래 머물수록 조세와 보급 요구는 늘어났다. 초기에는 위신으로 받아들였던 정박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으로 다가왔다. 항만의 곡물 가격이 요동치면서 상인들 표정이 달라졌다. 이런 변화는 전장 밖에서 먼저 나타났다.

아그리파는 그 징후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함대가 짧은 기습으로 항만을 점령할 때, 강제 징발을 피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비교가 만들어내는 판단은 칼보다 오래 남는다.

사료에 남은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 시기 두 진영의 회의는 서로 다른 질문을 다루었다.

옥타비아누스 진영의 회의는 배치와 각도, 간격의 문제를 다루었다.

안토니우스 진영의 회의는 출항 조건과 체류 가능 기간을 다루었다.

주제가 바뀌는 순간, 전쟁의 성격도 바뀐다. 전투를 어떻게 벌일지 논의하는 회의에서, 언제까지 머물 수 있는지를 따지는 회의로 옮겨간다는 것은, 이미 주도권이 이동했다는 뜻이다. 이 변화가 아그리파가 의도한 첫 결과였다.

그는 상대를 재촉하지 않았다. 재촉은 오히려 결단을 선명하게 자극한다. 그는 시간을 비용으로 느끼도록 유도했다.

많은 나날 이어진 대치 속에, 안토니우스 진영의 지휘부는 하나의 결론에 다가갔다. 만 안에 머무는 선택은 전투를 늦추는 선택이 된다. 그 선택은 동시에 전력을 깎는 선택이 된다. 이 인식이 공유되는 순간, 출항은 더 이상 공격이 아니었다. 출항은 손실을 멈추는 조치로 변했다.

그때 바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출구는 다시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전환은 의지의 변화가 아니었다. 조건의 붕괴가 먼저였다. 바람이 잦아들면 나갈 수 있다. 나갈 수 있는데도 나가지 않으면 남는 것은 소모뿐이다. 이 단순한 계산이 지휘부의 판단을 밀어냈다. 이제 문제는 나가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 나갈 것인가였다. 바로 아그리파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상대가 스스로 나올 수밖에 없는 조건이 무르익은 순간.

악티움의 하루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하루를 향한 결정은 이미 이 며칠의 대치 속에 굳어져 갔다.

다음 날 아침, 만의 출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전열은, 전투를 여는 동시에 자신이 짊어진 불리함을 바다 위로 끌어내게 된다.

그때 비로소 악티움의 하루가 시작된다.


image.png 암브라키아 만과 악티움의 대치




9월 2일 ― 출구가 열리던 아침

그 아침, 바람은 멎지 않았다.

다만 전날까지 출구를 막아섰던 거친 폭풍이 한 겹 낮아졌을 뿐이었다. 암브라키아 만의 물결은 여전히 불규칙했다. 파도의 방향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안토니우스에게 이 변화는 기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유예의 종료였다.

만 안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보호의 공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보호가 유지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 버렸다. 그는 출구를 바라보며 계산을 반복했다. 오늘 나가지 않으면 내일은 더 나빠진다. 더 나빠진 내일은 다시 기다림을 요구한다. 기다림은 병사들의 사기를 깎고, 노꾼을 소모시키며, 동맹의 인내를 닳게 만든다. 이 작용은 끊기지 않는다. 끊을 수 있는 지점은 하나뿐이다. 나가는 순간이다. 그는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가 곧 안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처음으로 명령을 내렸을 때, 그것은 전투 개시 명령이 아니었다. 그는 “전열을 유지하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출구를 통과하는 동안만큼은 배의 크기와 무게가 방패가 되어야 했다. 대형 전함이 가진 위압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믿고 싶어 했다.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좁은 출구는 오히려 경량선을 밀어낼 수 있다. 그 계산은 정확했다. 문제는 그 계산이 출구를 넘은 뒤에도 유지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은 이 아침부터 유난히 정돈된 모습으로 움직였다. 다른 함대보다 뒤쪽에 배치된 그녀의 배들은 서로의 간격이 좁았다. 그 정돈은 질서의 문제가 아니라 경로의 조율이었다.

전투에서 승부가 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한 귀환의 통로.

출구를 통과한 뒤에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여지.

이집트 선단이 지닌 의미는 전력의 일부가 아니라, 전쟁 이후의 선택지였다. 안토니우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 선단의 배치를 문제 삼지 않았다. 문제 삼는 순간, 이 전쟁이 무엇을 위해 치러지는지에 대한 질문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출구로 향한 전열이 움직이자 만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배들이 하나씩 닻을 올리는 동안, 갑판 위 병사들의 얼굴에는 같은 표정이 없었다. 어떤 이는 긴장으로 굳었고, 어떤 이는 이제 끝이 보인다는 안도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노꾼들의 팔이 지쳐가면서, 그들의 교대는 점점 늦어졌다. 이 모든 모습이 안토니우스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모습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았다. 붙잡는 순간 결단이 흔들릴지 모른다.

출구는 좁았다. 그 사실은 이미 계산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통과하는 순간, 계산은 감각으로 바뀌었다. 대형 전함이 차례로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때 배 사이의 간격이 벌어졌다. 한번 벌어진 간격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되돌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시간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노가 물을 붙잡는 동안 선회가 늦어졌다. 늦어진 선회는 함대의 측면을 드러냈다. 안토니우스는 이 연결축을 머릿속에 되짚었다. 이 ‘연결’은 전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이동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만 바깥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아그리파의 함대는 서두르지 않았다.

경량선들은 출구 앞에서 정면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바깥으로 넓게 벌어지는 각도를 잡았다. 그 움직임은 공격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림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의 전열이 완전히 벌어질 때까지 거리를 유지하는 계산된 정지였다. 안토니우스는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알아차린 순간, 그는 다시 한번 전열을 붙들어야 했다.

흔들리지 말 것.

간격을 유지할 것.

앞선 배를 가리지 말 것.

이 명령들은 전투를 열기 위한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와해를 지연시키기 위한 명령이었다. 이제 한 번만 틀려도 다시 고칠 시간이 없다. 그는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는 확신보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과중한 조건을 짊어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생각이 지휘부 전체로 퍼져나갔다.

출구를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 바다는 달라졌다. 만 안쪽 보호막처럼 보이던 지형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았다.

대형 전함들은 넓은 해면에 나서자 선체의 무게를 그대로 드러냈다. 수면 아래 깊게 잠긴 용골은 선회에 저항을 만들었다. 노가 물을 잡아끄는 순간에도 반응은 즉각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 방향을 바꾸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선회 반경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둔함은 조종의 미숙함이 아니라 선체가 지닌 질량과 관성이 만들어낸 물리적 조건이었다.

반대로 아그리파의 경량선들은 이미 각도를 완성했다. 그 각도는 포위의 예고였다.

안토니우스는 이때 한 가지를 분명히 인식한다. 이 전투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의 여지였다. 그러나 승부의 방향은 이미 이 지점에서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는 출구를 나온 선택이 패배라는 사실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선택이 더 이상 유리함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은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것은 돌파였다. 돌파가 실패하면, 결과는 흩어짐이다. 흩어짐은 곧 지휘의 상실이었다. 이 흐름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열이 무너지기 전에 다시 한번 힘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 순간,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이 전열 중심의 바깥쪽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가 그것을 보았다. 그는 그 의미를 이해했지만, 그 이해는 곧 선택을 요구했다. 그 선택은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 이후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출구를 나온 이상, 이미 많은 것이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전투는 더 이상 ‘어디서 싸우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버리느냐’의 문제로 바뀌었다.

악티움의 하루는 이렇게, 출구를 벗어난 전열 위에서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image.png 로마시대에 조각한 클레오파트라 상


바다 위의 계산 ― 전열이 무너지는 방식

만의 출구를 벗어난 바다는 넓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선택지를 줄이는 공간이었다.

암브라키아 만을 빠져나온 안토니우스 함대는 전열을 펼칠 시간을 요구받으면서, 그 자체가 이미 불리함을 전제했다. 대형 전함이 넓은 해역에서 자신의 덩치를 숨길 방법은 없었다. 선회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은 곧 간격을 만든다. 그 간격은 곧바로 전술의 대상이 된다. 아그리파는 이 순간을 위해 속도를 아껴두었다.

그의 경량선들은 출구 앞에서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다만 바깥으로 넓게 벌어진 채 포위 각도를 유지했다. 이 행동은 적을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적이 스스로 벌어지도록 유도하는 전략이었다. 상대 전열이 완전히 정렬되기 전까지 거리를 유지하는 동안, 경량선의 선회 반경은 대형 전함의 측면을 겨냥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처음 몇 차례의 움직임에서 의외로 단단해 보였다.

대형 전함들이 서로를 가린 채 전진하면서, 갑판 위의 병력은 투석기와 쇠뇌를 준비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적선을 높은 갑판 위쪽에서 제압하겠다는 구상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 구상에는 전제가 필요했다. 상대가 정면으로 다가온다는 전제다. 아그리파는 그 전제를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경량선들은 직선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들은 측면을 스치듯 지나가며 각도를 바꾸었다. 그것은 다시 다음 각도로 이어졌다. 대형 전함이 그 움직임을 따라가려면 선회를 해야 했다. 그러나 선회는 곧 속도의 손실을 낳았다. 속도가 떨어진 배는 뒤쪽 배의 움직임을 막는다. 막힌 배는 다시 간격을 벌렸다. 이 연쇄적 반응은 몇 차례 반복된 뒤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이때부터 전투의 중심은 함선 간의 간격이 되었다. 아그리파의 함대는 이 간격 위에 장치를 올렸다.

쇠사슬 달린 갈고리가 날아가면서 돛대와 난간을 붙잡았다. 붙잡힌 배는 즉시 밀착되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했다. 배가 묶이는 순간, 그 배는 움직임을 잃는다. 움직임을 잃은 배는 주변의 전열을 함께 묶는다. 이 효과가 바다 위 전체로 확산되었다.

대형 전함의 장점이었던 높이와 두께는 이 시점에서 성질을 바꾼다.

높은 갑판은 접근을 막는 방패였으나, 동시에 탈출을 늦추는 벽이 된다. 두꺼운 선체는 충돌을 견디는 보호막이었으나, 묶였을 때는 자유를 되찾지 못할 무게가 된다. 경량선은 붙잡힌 배의 측면을 파고들면서 갑판 위로는 보병이 뛰어올랐다. 이제 바다 위의 싸움은 전열의 한 부분이 멈추는 순간, 그 주변이 함께 묶이는 전투로 번져갔다.

안토니우스는 이 변화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전면적인 돌파를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전열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반복했다. 이 지시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명령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열이라는 것은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한 지점의 파열에 더 크게 반응한다. 한 척이 묶이면, 그 주변의 배들이 피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그 움직임이 또 다른 간격을 만들었다.

노꾼 부족의 문제는 이때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경량선의 빠른 방향 전환에 대응하려면, 대형 전함도 잦은 선회가 필요했다. 그러나 노를 젓는 힘이 균일하지 않으면 선회는 늦어진다. 늦어진 선회는 측면을 노출한다. 노출된 측면은 다시 갈고리의 표적이 된다. 이 악순환이 몇 차례 반복된 뒤, 일부 전함에서는 갑판 위 병력까지 노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배는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하는 공간이 아니라 유지되어야 할 구조물로 바뀌게 된다.

아그리파의 전술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는 모든 배를 붙잡지 않고 일부를 비워두었다. 이 비워진 공간은 탈출로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공간은 의도된 공간이었다. 빠져나오려는 배가 들어오면, 경량선은 그 배의 진행 방향을 따라가며 다시 각도를 만들었다. 탈출은 가능해 보였고, 실제로 몇 척은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전열의 중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안토니우스의 시야에서 전투는 이제 선명하게 갈라졌다.

한쪽에서는 대형 전함들이 묶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부 배들이 간격을 따라 흘러갔다. 이 두 전개를 동시에 붙잡을 방법은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다른 쪽을 잃게 된다. 그는 이 판단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이 보였다.

이집트의 배들은 아직 전열 깊숙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간격이 벌어진 바깥쪽에서 일정한 방향을 유지했다. 이 위치는 전투의 중심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 당연히 그 자리는 아직 묶이지 않은, 선택이 가능한 자리였다. 안토니우스는 그 위치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곧 무거운 판단을 요구했다.

전열의 중심을 붙잡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아직 묶이지 않은 힘을 보존할 것인가.

이 질문은 전술의 사고(思考)로 답할 수 없었다. 전술은 이미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전쟁 이후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였다.

바다 위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

갈고리는 더 자주 날아갔고, 묶인 배는 늘어났다. 경량선의 각도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때까지도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그 정지에 가까운 움직임은 곧 어떤 준비로 읽히기 시작했다.

이 순간까지, 이탈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을 가능케 하는 모든 조건은 바다 위에 펼쳐졌다.

다운로드.png 아그리파, 과묵한 성격과 지혜로운 장군으로서의 면모가 얼굴에 드러난다.


이탈의 결심 ― 세 사람의 다른 생각

클레오파트라는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본 것은 전열이 아니라 선택지였다.

암브라키아 만을 벗어난 이 순간, 전투의 양상은 그녀가 기대했던 형태에서 이미 벗어나 버렸다. 대형 전함이 힘으로 밀어붙이며 결판을 내는 장면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전열은 묶이고, 벌어지고, 다시 묶였다. 이 반복 속에 시간은 전투를 돕지 않았다. 더구나 시간은 귀환 경로까지 압박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읽었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전투는 ‘이길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투는 ‘돌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집트 선단은 전열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이 위치는 비겁함의 결과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된 자리였다. 전쟁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한 쪽이 감수해야 할 위험은 전투의 결과와 동일하지 않다.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쪽은 항상 재정과 귀환을 함께 계산한다. 클레오파트라에게 이 전쟁은 로마의 내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집트 왕권의 존속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녀는 계산을 끝냈다. 이 전투에서 모든 것을 잃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갈고리가 날아가고, 대형 전함 몇 척이 묶이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판단은 더욱 굳어졌다. 묶인 배는 회복이 늦다. 회복이 늦어지는 순간, 그 주변의 전열은 함께 묶인다. 이 구조는 단기간에 뒤집히기 어렵다. 설령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일부 구간에서 돌파를 감행해도, 전체가 자유로워질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전쟁의 결과보다 전쟁 이후를 먼저 보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이집트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만 결정될 문제였다.

안토니우스는 같은 바다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는 중이었다.

그의 시야는 여전히 전열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이 순간은 전술의 실패가 아니라, 전환의 지점이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부 전함이 묶였다고 해서 전부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병력이 가진 경험과 인내를 믿고 싶어 했다. 수많은 육상 전투에서 그는 불리한 조건을 버텨냈고, 결정적인 순간에 반전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그 반전이 가능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이 보였다. 그 위치는 점점 더 선명한 의미를 띠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판단을 이해했다. 바로 그 점이 그를 괴롭혔다. 그녀의 냉정한 계산은 정치적으로 타당했다. 그러나 그 계산은 이 전투를 ‘함께 버텨야 할 싸움’이 아니라 ‘조건이 나빠지면 접어야 할 싸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차이는 미묘했지만 치명적이었다.

그는 한순간 선택을 떠안는다. 전열을 붙잡기 위해 그녀의 선단까지 끌어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선택을 인정하고 자신도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

첫 번째 선택은 명예의 논리이고, 두 번째 선택은 생존의 논리였다. 안토니우스는 이 두 논리 사이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머무는 동안 전열은 더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은 더 이상 지휘관의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판단이었다. 동시에 한 개인의 미래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에 예속되었다. 그는 전열을 떠나는 순간이 배반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순간이 공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두 위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 흥분이 자리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 순간은 기습의 성공이나 전술의 묘미를 확인하는 국면이 아니었다. 그는 만을 나오는 그들의 함선 대형을 보면서 눈앞에 펼쳐질 전투 결과를 예감했다. 전열이 묶이는 구조가 시작된 순간부터, 이탈은 시간의 문제였다. 누가 먼저 결심하느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판단은 감정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위치를 보고 그 의미를 정확히 읽었다. 그 선단은 아직 전투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 전력이 아직 소모되지 않은 채 선택의 여지를 보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에게 이런 사실은 전쟁의 끝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서사가 결정되는 분기점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움직이면, 이 전투는 더 이상 로마인의 내전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여왕의 전쟁’이 된다.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그 움직임을 따른다면, 그는 스스로 그 서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판단을 확정된 전제로 받아들여 추가 지시 없이 전장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아그리파의 각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추격은 열어두되 강요하지는 않았다. 강요는 도주를 명확히 만든다. 그는 선택이 자발적인 행위로 보이도록 놔두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때 마지막으로 전장을 훑었다. 그녀는 이미 결정을 끝냈다. 전투의 중심은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묶인 전열은 오히려 더 늘어날 것이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선택지는 사라진다. 그녀는 이 판단을 감정으로 꾸미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결정은 여왕으로서의 판단이었다. 그녀에게 이탈은 도주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는 그 움직임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지켜보는 위치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 이 전투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남은 싸움은 승리를 향한 싸움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싸움이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도주 함대를 결코 추격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전쟁의 의미가 바뀌는 징후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이 전열에서 이탈한 그 순간, 역사의 무게도 함께 기울었다.

악티움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악티움의 승부는 이 순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바다에서 육지로 번지는 붕괴-해체된 함대와 남겨진 군단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선단이 전열에서 벗어난 뒤 바다 위의 전장엔 짙은 혼선이 남았다. 연기로 가려진 시야 속에 서로 얽힌 선체들의 기동은 무력화되었다. 여기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기동력의 차이가 아니라 동방 해군의 상황 인식에 대한 균열이었다. 전열에서 빠져나간 편대의 성격이 규정되지 않았고, 철수와 재배치의 경계가 흐려졌다. 지휘 통제의 향방이 불분명해진 그 순간, 전장은 속도가 아닌 판단의 불확실성에 지배되었다.

이 공백을 먼저 파악한 쪽은 옥타비아누스 진영이었다.

그들이 도달한 판단은 분명했다. 전쟁 수뇌부의 이탈로 비워진 전열의 중심이 확인된 순간, 목표는 더 이상 격침의 수로 설정될 수 없었다. 남은 과제는 잔존 함대가 스스로의 전력으로 기능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전열이 유지되면 패주조차 일정한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전열이 풀리는 순간, 패퇴는 각자도생으로 와해 된다. 아그리파가 노린 지점이 바로 그 ‘와해’였다.

경량선은 속도를 무기로 삼았으나, 그 속도는 정면충돌에 쓰이지 않았다. 측면에서 압박을 걸어 전열의 간격을 더 벌리는 방식이 먼저 나타났다. 한 척이 뒤로 밀리면 주변의 배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 ‘대체’가 늦어지는 순간, 또 다른 빈틈이 생긴다. 빈틈이 생긴 수역은 곧바로 하르팍스의 먹잇감이 된다. 이렇게 전투가 끝나기 전부터 이미 함대의 ‘해체 방식’이 사실상 결정된 상태였다.

동방 함대에 남겨진 문제는 전술이 아니라 지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이탈에 안토니우스의 합류가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전력 손실보다 명령의 공백에 있었다. 계속 싸우려는 장군과 돌파를 따라붙으려는 장군 사이를 체계화할 명령이 사라진 것이다.

지도부의 이탈은 항로가 아니라 군사들의 표정으로 퍼져나갔다.

갑판 위의 병사들은 눈을 통해 믿지 못할 광경을 확인했다. 이어서 노꾼들은 뱃전에 스치는 외침으로 지휘 체계의 흔들림을 눈치챘다.

선원이 부족한 전함에서는 한 번의 충돌이 곧바로 노의 파손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선회 불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전열에서의 이탈로 이어졌다. 이탈한 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이유가 사라진 상태가 이미 전장에 깔렸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광경을 ‘승리의 도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제압이 아니라 분해였다. 그래서 그의 진영은 한 무리로 달려들기보다, 남아 있는 적 함대의 움직임을 갈라놓는 방향을 택했다. 전선의 주도권이 확실해질수록, 옥타비아누스는 추격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그 조절은 전술적 세밀함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조절은 곧바로 각 항구로 번지는 효과를 노렸다.

악티움 일대의 그리스 항구들은 전투의 종결을 기다리지 않았다.

동방 함대가 남아 있는 한, 그들은 보급과 수용이라는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은 승패가 확정되기 직전, 함대가 해체되기 시작하는 순간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소리 없는 방식이었다. 정박 허가는 늦어졌고, 물과 목재의 가격이 올랐다. 징발 요구가 줄지 않는다는 소식이 퍼지자, 창고 문은 평소보다 일찍 닫혔다.

이 반응은 공개적인 배신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이런 작은 차단을 통해 더 빠르게 기울었다. 배는 물과 목재, 돛과 밧줄, 노꾼의 식량 위에서만 전투를 연장할 수 있다. 항구가 그 필요를 끊는 순간, 함대는 전장의 연장선을 잃는다.

아그리파의 전략은 이 취약점에 맞춰졌다.

그는 잔존 함대가 닿을 수 있는 항구들을 강력하고도 재빠르게 압박했다. 해상에서의 압력이 유지되는 동안 항구는 결정을 미루게 되었다. 머뭇거림이 길어질수록, 도주 중인 배들이 더 먼 항로로 밀려나면서 식량과 물 부족은 그들 사이의 합류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것이 잔존 함대를 해체하는 진짜 추격방식이었다.

이 시점부터 동방 진영의 배들은 더 이상 ‘함대’로 불리지 못했다.

어떤 배는 불타는 선체를 피해 방향을 틀었고, 어떤 배는 바람에 밀려 전장에서 멀어졌다. 투항을 선택한 배들 또한 있었다. 그 결정은 명예나 공포의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받아줄 항구가 없다는 현실 앞에 내려진 생존을 위한 판단이었다.

전투를 계속하려는 배, 이탈을 택한 배, 항구를 향해 움직인 배가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은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분열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바다는 그 불일치를 즉시 결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결과를 곧바로 정치적 논리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전장을 하나의 국면으로 고정했다. 돌아올 수 없는 해로, 머무를 수 없는 항구, 전쟁의 부담이 동방 진영에만 남는 조건이 차례로 굳어졌다. 이 조건이 유지되는 동안, 악티움의 승부는 바다 위에 머물지 않았다.

이때부터 핵심은 바다에서 달아난 자들의 종착지가 아니라, 육지에 남아 있는 군단이 이 소식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로 떠올랐다. 그들에게 불타는 전함의 연기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항구들이 문을 닫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정보는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의 육군 진영에 이르자마자 보급과 후퇴, 지휘의 가능성을 동시에 흔드는 충격으로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악티움은 하루에 일어난 단일한 전투로 규정되지 않는다. 승부는 이제 육지로 이행되었으며, 이후 시간은 그 결과가 단계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군단의 항복-동맹의 이완

바다에서 벌어진 일은 신속하게 육지에 도착했다.

그 소식은 ‘패배’라는 단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소식은 더 구체적인 형태를 띠었다. 항구가 닫혔다는 말, 보급이 늦어진다는 보고, 바다 쪽에서 더 이상 명확한 명령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먼저였다. 이 내용들은 한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쟁을 지탱하던 축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이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전투를 가능하게 하던 조건이 이미 무너졌다는 점을 보았다. 육군은 여전히 숫자로 존재했으나, 숫자는 곧 전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군은 먹고 움직이며 명령을 받아야 한다. 그 명령이 바다에서 끊기고, 먹을 것이 항구에서 멀어지는 순간, 군단은 전장에 남아 있으면서도 고립된다.

그의 진영에서 처음 나타난 변화는 소란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병사들은 함대의 연기를 보았고, 밤이 되자 바다 쪽에서 들려오던 함성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당장 다음 날부터 상인들이 진영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곡물 배분이 지연되었다. 이런 변화는 명령보다 먼저 사기를 건드린다. 이제 병사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가.

누가 우리를 책임지는가.

이 질문은 반란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생존의 언어일 뿐이었다. 카니디우스는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육군 지휘관으로서 그는 전투를 지휘할 수 있으나, 전쟁의 방향을 결정할 권한은 없었다. 바다에서 이탈이 발생한 순간, 육군은 더 이상 주전력이 아니라 남겨진 전력으로써 선택을 강요받는다. 버티거나, 흩어지거나,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

동맹 왕국들의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거리 두기는 공개적인 배신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회신이 늦어지다가 약속된 지원이 ‘사정상 지연’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이어서 일부 왕국은 국경 방위를 이유로 병력을 불러들였다. 이 움직임은 서로 약속한 적이 없었어도 동시에 일어났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패배의 책임과 지속의 부담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육군의 사기는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군단은 여전히 정렬을 유지했으나, 그 정렬은 전투를 향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동을 준비하는 정렬이었다. 누군가는 귀환을, 누군가는 투항을, 누군가는 조건부 협상을 입에 올렸다. 이런 말이 등장하는 순간, 군단은 하나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카니디우스는 마지막까지 육전을 시도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탁자 위에서만 존재했다. 육전을 치르려면 보급선이 필요하고, 그것은 항구와 연결되어야 했다. 그러나 항구들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 현실 앞에 그는 결단을 미루지 않았다. 미루는 동안 병사들이 흩어질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가 택한 길은 항복이었다.

이 항복은 패배를 인정하는 결과가 아니라, 군단을 보존하는 선택이었다. 병사들 또한 이 선택을 배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안도했다. 싸울 수 없는 전쟁을 끝내는 결정이 그들에게는 명확한 명령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악티움의 결과는 바다에서 끝나지 않았다.

바다에서 시작된 붕괴는 육지의 군단을 통과하며 제국의 동쪽 절반을 비워냈다. 남아 있는 것은 이동뿐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향해야 할 방향은 이제 한곳으로 좁혀졌다.



알렉산드리아 ― 전쟁의 무게가 이동하는 과정

악티움 이후의 시간은 전쟁 종결이라기보다 이동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정도로 선택지가 줄어들었다. 동방의 왕국들은 침묵으로 거리를 두었고, 도시들은 부담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더 이상 확장될 수 없는 것은 물론, 유지될 수도 없었다. 남은 전쟁은 장소를 옮겨야 했다. 처음부터 정해진 그 장소는 어차피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이동은 패주의 형식을 띠지 않았다. 그것은 재배치처럼 보이도록, 실제로 그렇게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 연출에 설득력이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의 필요성이라는 사실은 곧 옥타비아누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에게 악티움의 승리는 군사적 결말보다 정치적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더 컸다.

옥타비아누스 진영에서는 전쟁을 설명하는 기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투의 승패보다, 누가 남았고 누가 떠났는지의 선명한 비교가 전면에 놓였다.

로마는 남았고 이집트는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 속에 안토니우스의 위치는 급격히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로마의 장군이 아니라, 이집트 여왕을 따라 이동하는 인물로 자연스럽게 재구성되었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이 일을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사실을 정리했을 뿐이었다.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선택지를 다시 검토했다.

협상, 재정비, 장기전. 그러나 이 모든 선택지는 조건을 요구했다. 바로 동맹과 병력, 그리고 재정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선택지는 곧바로 사라진다. 악티움 이후 그들이 확보한 것은 장소 하나뿐이었다. 그 장소가 이집트였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을 ‘끝내러’ 가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이미 끝났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집중했다. 남은 싸움은 군사적 필요보다 정치적 연출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그는 꿰뚫고 있었다. 누가 제국의 중심에 남았는지, 누가 그 중심에서 벗어났는지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악티움은 하루의 전투였으나, 그 하루는 제국의 방향을 바꾸는 시간이었다. 바다에서 벌어진 결과는 육지를 통과하며 도시들의 계산을 끝냈고, 권력의 중심은 되돌릴 수 없게 굳어졌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그 중심이 어떻게 마지막 무대를 향해 움직였는지,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되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악티움은 끝났지만, 역사의 정리는 이제 시작된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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