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12

알렉산드리아 함락 (기원전 31~29년)

by 우광환

제12장 – 알렉산드리아 함락

단일 중심의 확정(기원전 31~29년)


1. 전쟁이 멈춘 자리 ― 동방 결속의 붕괴와 군단의 방향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앞바다에서 전투가 멈춘 시각은 뜻밖에도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 대규모 함대의 해상 충돌이 하루를 넘기지 않아 결판날 때, 수많은 군단이 포진하고 있던 육상에서는 결전이 없었다. 이 믿기지 않는 전투 결과의 핵심은 통솔권의 상실에 있었다.

치열한 전투 함대의 전열을 벗어나 알렉산드리아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을, 불꽃 튀는 전투 현장의 최고 지휘자인 안토니우스가 따라가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주력 함대의 중심까지 한순간 사라졌다. 지휘권을 잃은 대형 전함들은 각기 고립된 채 저항했어도 통합된 명령이 부재한 전투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끝까지 남아 싸운 선박들 가운데 상당수가 나포되면서 다수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옥타비아누스가 손에 넣은 함선이 수백 척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의 향방을 굳힌 진정한 변화는 바다 위가 아니라, 항구와 창고, 그리고 장부가 놓인 탁자 위에서 진행되었다.

전투 직후 안토니우스 측의 해군 잔존 세력은 레우카스와 파트라이 일대로 흩어졌다. 그리스 본토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육군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병력 숫자만 놓고 본다면 전쟁의 패색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적 판세는 보급망과 군사적 권위에서 발생했다.

악티움 전투가 벌어진 그날 이후 그리스 도시들은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도시들이 안토니우스를 향해 공개적인 봉기나 선언의 형태를 띠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안토니우스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지 않았다. 다만 선박 보수에 필요한 자재나 식량 같은 군수 지원의 공급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안토니우스가 동방을 장악하던 시기였다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전투 한 차례로 도시들의 충성 상대가 곧바로 바뀌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승부가 완전히 기울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각 도시의 지도층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계산에 필사적이었다. 악티움 이후 그리스 세계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그 변화였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 진영의 해군은 항구에 닻을 내릴 수는 있어도 오래 머물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지 못했다. 보급이 제때 공급될 수 없는 현실에서 함대는 존재만 유지한 채 기능을 상실해 갔다.

전쟁은 패배한 군대가 사라지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권위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끝난다. 악티움 이후 그 권위는 서서히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이동했다.

정치적으로도 동방 결속의 붕괴는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아뮌타스는 전투 직전 혹은 직후에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갈라티아의 왕으로서, 소아시아 내륙에서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이탈은 동방의 동맹 체계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유대 왕 헤로데 역시 악티움 직후 곧바로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충성을 재확인했다. 그는 안토니우스 편을 들었던 지난 일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통치 능력을 내세워 지위를 보전받았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동방 정치의 본질을 보여준다.

동방 왕국들은 오랜 로마 내전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터득했다. 패배한 쪽에 끝까지 남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라는 점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지원했던 도시들이 필리피 이후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동방 각국은 이미 목격한 바 있었다. 악티움은 그 기억을 다시 소환했다. 결국 신뢰의 붕괴는 안토니우스가 그리스나 아시아에서 재집결할 모든 정치적 기반을 앗아갔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이집트로 향한 이후 그리스에 남겨진 장군들은 이제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중앙의 명령 체계가 사실상 끊긴 상황에서 각 군단은 자신들의 생존을 우선에 두었다. 일부 지휘관은 협상을 타진했고, 일부는 병사들의 동요를 막지 못했다. 군단은 아직 무기를 들고 있었으나, 그 무기를 어디로 겨누어야 할지 방향을 상실했다.

이 당시 병사들은 만약 지속적인 전쟁을 고집한다면 급료와 식량이 불확실한 현실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항복한다면 생명과 복무 조건의 유지가 가능했다.

그리스 도시들의 태도 변화 역시 군단의 판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곡물과 급료가 보장되지 않는 군대는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항구가 문을 닫고, 도시가 중립을 선언하며, 동맹 왕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는 현실에서, 그리스에 남겨진 군단은 자신들이 더 이상 승리할 수 있는 진영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직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틈을 정확히 이용했다. 그는 무차별적 보복 대신, 복무를 지속할 병사에게는 자리를 보장하고 귀향을 원하는 자에게는 해산을 허용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런 정책은 패잔병의 심리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안토니우스 진영 내부의 결속을 해체하는 효과를 낳았다.

여기서 사실상 전쟁의 방향이 바뀌었다. 악티움은 해전이었으나, 그 결말은 육군의 항복을 통해 완성되었다.

물론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다시 군대를 재편할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상실된 것은 병력의 수보다 서방과 동방을 동시에 압박할 수 있는 그의 전략적 위치였다. 그렇기에 그가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한 순간, 전쟁은 지중해 전역의 문제에서 이집트 방어전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전쟁의 결말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세력이 더 이상 팽창할 수 있는 길은 차단 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즉각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진군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패배자들인 그리스 도시들에 무차별 보복을 가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남은 자들 모두에게 관용을 선포했다. 그의 우선 과제는 군사적 섬멸이 아니라 승리의 제도화였다.

그는 노획한 함대를 정리하면서 항복한 병사들을 흡수하는 한편, 안토니우스와 대치하던 지난 1년여간 곡물 공급이 불안했던 본국 이탈리아를 안정시켰다. 이는 로마 시민들에게 마침내 평화의 도래를 통고하는 절차였다.

전쟁은 전장에서 이긴 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과 민회가 더 이상 다른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때 끝난다는 사실을 그는 명확하게 이해했다.


악티움 전쟁 승리 직후, 안토니우스에게 시달렸던 그리스인들을 위로하는 옥타비아누스


2. 승리의 고정 ― 군단과 본국의 정리

악티움의 승리는 해상에서 결정되었으나, 그 승리가 로마의 심장부에서 통치권으로 굳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칼을 쥔 군단의 안정적 장악이 선행되어야 했다. 해전 직후 브린디시움으로 집결한 병력 안에는 오랜 시간 옥타비아누스를 추종해온 이들은 물론, 악티움 직후 안토니우스 진영을 이탈해 귀순한 자들도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내걸었던 ‘항복자에 대한 복무 조건 유지’라는 약속은 대규모 저항 없는 군단 흡수를 끌어냈으나, 이제 그 약속은 실질적인 보상이라는 시험대 위에 놓였다.

전쟁의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그들에게는 황량한 삶의 무게와 시급한 생존의 민낯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수년째 방치된 고향의 농지, 적체된 급여, 빚더미에 앉은 가족의 생계는 병사들에게 승리의 영광보다 절박한 문제였다. 특히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전향을 택한 안토니우스 측 병사들에게 있어, 새 지휘관이 자신들을 서방 군대와 동등하게 대우할 것인가는 생존과 직결되는 ‘확신’의 문제였다. 그들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질서 정연하게 대오를 유지하며 새로운 지휘관의 행정 결재를 기다렸다. 이는 약속대로 옥타비아누스 군단과 같은 보상을 원하는 무력시위에 가까웠다.

당시 군단병들이 요구한 것은 미지급 급여의 정산, 포상금의 액수, 구체적인 제대 일정과 퇴역 후 정착지 보장 같은 행정적 확답이었다. 전쟁 직후의 군대는 자신들이 가진 무력의 무게를 정확히 인지했다. 만약 보상이 지연되거나 차별의 기미가 보였다면 군단 내부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은 곧 치명적인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미묘한 위기를 직시하고 서둘러 이탈리아로 귀환해 강압적인 진압 대신 군대 해산 일정과 재원 마련 계획을 제시하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는 귀순 병력 또한 복무의 연속선상에 있는 국가의 일원으로 재확인함으로써 군단 내의 심리적 경계를 허물었다. 미지급 급여가 단계별로 정산되면서 제대는 일괄 해산이 아닌 복무연한에 따른 순차적 방식으로 공표되었다. 무엇보다 퇴역병을 위한 식민지 조성 계획이 구체적인 지명과 함께 제시되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 문서로 편입되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 막대한 보상 체계를 지탱할 재원 마련은 또 다른 난관이었다.

아직 이집트의 국고를 손에 넣지 못한 옥타비아누스는 당장 쏟아지는 병사들의 급여 요구에 필요한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행정적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그리고 안토니우스로 이어지는 내전기 동안 무너졌던 동방의 속주 조세 징수 체계를 신속하게 복구했다. 특히 아시아와 시리아 등 부유한 속주 총독들에게 조세의 연속성을 명령하고, 징수된 세입을 지연 없이 로마로 송금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은 내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힘을 실어주는 실무적 파트너였다.

원로원은 우선 ‘토지 분배에 관한 법률적 승인’을 서둘렀다. 병사들에게 줄 정착지는 기존 국유지의 정리와 제국 전역의 도시로부터 용지 매입을 통해 마련되어야 했다. 원로원은 이 매입 자금의 지출과 식민시 건설을 위한 법적 근거를 즉시 통과시켰다. 또한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국 전체의 회복 권한’을 상징하는 여러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군단 정리가 사적인 권력 행사가 아니라 국가의 공적 조치임을 분명히 했다.


악티움 직후 옥타비아누스가 직면한 병력은 무려 50개 군단에 육박했다. 이는 로마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한 과잉 동원이었다.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몇 해에 걸쳐 병력을 줄여 나갔다. 이 과정을 거친 뒤 제정 초기의 스물여덟 개 수준으로 자리잡는 이 군단 수치는 악티움 이후 치밀한 정리가 남긴 결과였다. 전시 동원의 군대가 상비 체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이때 옥타비아누스 군단이었더라도 충성도가 낮거나 전투력이 저하된 군단은 해산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군단이라도 전투력이 증명된 군단은 기존 옥타비아누스 군단과 합병하여 ‘쌍둥이 군단’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정체성을 희석했다.

이 당시 그는 한꺼번에 수만 명의 병사를 사회로 내보낼 때 발생할 혼란을 막기 위해, 복무연한에 따른 단계적 제대 방식을 채택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유지되는 ‘상비군’ 체계의 기틀이 잡힌다.

이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들에게는 약속을 이행하는 신뢰의 지휘관으로, 시민들에게는 전후 혼란을 수습하는 유능한 행정가로 각인되었다. 또한 안토니우스 측 정치인에 대해서도 전향 시점에 따른 명확한 사면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무분별한 보복의 공포를 없애고 체제 안정의 토대를 닦았다. 이때의 사면은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의해 이루어졌다.

악티움 해전 이전에 안토니우스를 떠난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나 티티우스 같은 이들은 당연히 지위를 유지했다. 해전 직후에 항복한 안토니우스파 인물들도 대대적인 사면을 해주었다. 그중 집정관 시절 원로원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신랄하게 비난한 뒤 동방의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떠나갔던 소시우스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는 적대 세력의 연합을 해체하고 그들의 행정적 역량을 흡수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을 부추긴 안토니우스파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사면 명단에서 제외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브린디시움에서 시작된 이 정교한 봉합은 이탈리아 전체의 공기를 바꾸어 놓았다. 해상 통제권 회복으로 인한 식량 가격의 안정과 보복 숙청의 부재는, 결국 시민들에게 악티움이 ‘진정으로 끝난 전쟁’이라는 안도감을 선사했다. 본국이 이처럼 행정적, 정치적으로 고정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리아를 향한 최후의 행군은 또 다른 도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를 정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동방 원정은 이미 기울어진 판도를 정리하는 마지막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브린디시움의 군단 병사들


3. 알렉산드리아 ― 상실 이후의 재구성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의 수면 위에서 승부가 갈린 순간 제해권을 상실했다. 이는 곧 지중해 동부를 잇던 보급로와 외교적 신뢰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리스에 남겨졌던 육군 사령관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마저 병사들을 뒤로한 채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하면서, 안토니우스가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은 이집트라는 고립지대로 축소되었다.

악티움 이후의 알렉산드리아는 더 이상 지중해의 중심이 아니었다. 도시는 건재했으며 금고는 가득했지만, 그 화려함은 고립을 견디기 위한 방어벽으로 변모했다. 아직 겉으로 본 항구의 질서는 평온했다. 그러나 유입보다 유출을 기록하는 문서가 늘어날수록 도시의 숨통은 안쪽부터 조여들었다.

가장 치명적인 타격은 지금의 리비아 동부 연안 지역인 키레나이카에서 날아왔다. 그곳에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방어의 서쪽 보루를 맡겼던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와 그의 4개 군단이 있었다. 이 병력은 악티움의 패잔병들이 재집결하여 반격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적 예비대였다.

악티움에서 탈출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먼저 알렉산드리아로 보내고 자신은 알렉산드리아 서쪽 240km 지점인 파라이토니온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스카르푸스의 군대를 소집해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군대의 환호가 아니라 절망적인 침묵이었다. 스카르푸스는 이미 대세를 읽고 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보낸 전령을 처형하고 사절단의 접견조차 거부하며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서 버렸다. 한때 자신의 상관이자 후원자였던 이에게 등을 돌린 이 냉혹한 거절은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스카르푸스의 이 배신은 이집트로 향하는 서쪽 육로의 완전한 봉쇄를 의미했다. 옥타비아누스의 부장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이끄는 군대가 스카르푸스의 군단과 합류하면서, 알렉산드리아는 한순간 서쪽으로부터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지중해 동방을 호령하던 안토니우스에게 남은 것은 이제 나일강 델타라는 좁은 퇴로뿐이었다.

스카르푸스의 정치적 결별 사건은 이 시기 키레네에서 주조된 은화에도 극적인 변화로 나타난다. 이전까지 안토니우스의 이름과 승리를 찬양하던 명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옥타비아누스의 이름과 함께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 혹은 옥타비아누스를 상징하는 '열린 손'의 도상이 새겨졌다. 병사들과 상인들의 손을 타고 흐르는 이 화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권위가 이미 종말을 고했음을 알리는 전령이었다.

결국 스카르푸스의 전향은 알렉산드리아를 '제국의 심장'에서 '고립된 요새'로 추락시킨 결정타였다. 안토니우스는 가장 믿었던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누는 것을 지켜보며, 전쟁이 전장이 아닌 행정과 외교의 영역에서 이미 끝났음을 뼈아프게 직시해야 했다.


이 시기를 기록한 두 사료는 안토니우스의 행보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안토니우스가 외부 접촉을 끊고 스스로를 은둔했다고 적었다.

스카르푸스의 배신과 서쪽 방어선의 붕괴 소식은 안토니우스에게 단순한 군사적 패배 이상의 정신적 파멸을 가져왔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의 절망은 심리적 상태를 넘어 물리적인 건축물로 형상화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파로스 등대가 보이는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제방에 작은 거처를 짓고, 그곳을 ‘티모네이온’이라 명명했다. 이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인간 혐오자인 '티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때 로마 전역을 호령하고 디오니소스를 자처하며 화려한 연회의 중심에 섰던 사내가, 이제는 바다 위 외롭게 돌출된 그 작은 방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세상과 담을 쌓았다. 티모네이온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제해권과 옥타비아누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수평선뿐이었다.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이 기괴한 은둔은, 자신이 구축했던 세계가 산산조각이 났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자폐적 저항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절망의 심연에 침잠해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인 생존과 종말을 설계했다. 그녀는 패배가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시했다. 그러나 정복자 옥타비아누스에게 끌려가 로마의 개선식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치욕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궁전의 지하 감옥에서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독극물의 효능을 실험했다. 빠른 죽음을 가져오지만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독과, 고통은 없으나 치사율이 낮은 독 사이에서 그녀는 냉정하게 '최적의 종말'을 찾았다. 결국 그녀가 주목한 것은 아스프(이집트 코브라)의 독이었다. 그것은 신체를 서서히 마비시키며 깊은 잠에 빠지듯 생명을 거두어가는, 그야말로 여왕에게 어울리는 '우아한 자살'의 도구였다.

그러면서도 여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탈출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지중해의 함선들을 육로를 통해 홍해로 옮겨, 이집트의 보물과 함께 먼 동방의 인도로 망명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몇 척의 배가 나일강을 거슬러 수에즈 지협을 통과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도박마저 안토니우스의 오랜 적대 세력이었던 아라비아 나바테아인들의 공격으로 좌절되었다. 홍해 연안에서 여왕의 함선들이 불타오르는 광경은 알렉산드리아 궁정에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는 잔인한 선고와 같았다.


반면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은 훨씬 냉철한 군사적 실체를 보여준다. 디오는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착 직후 항만 시설을 점검하고, 악티움에서 생존한 선박들을 항구 안쪽으로 재배치하며 성벽과 관문을 보강했다고 적는다. 이는 외해 기동전을 포기한 대신, 알렉산드리아를 거점으로 한 ‘고정 방어선 전략’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안토니우스의 은둔은 심리적 체념인 동시에 극도로 축소된 조건 속에 마지막 방어 체계를 재구성하려는 지휘관으로서의 고뇌가 섞인 복합적 국면이었다.

퇴로가 차단당한 클레오파트라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축적해온 금고를 열어 병참 체계를 재정비했다. 나일강 유역의 풍부한 곡물과 창고에 쌓인 보물은 단기간의 수성전을 버텨낼 자산을 제공했다. 그러나 재정적 풍요가 영토의 축소를 보완할 수는 없었다. 지중해 전역에서 세수를 거두던 광범위한 행정망이 붕괴한 이상, 이집트 단독의 재원은 지역 방어를 넘어서는 공세적 전략을 떠받치기엔 역부족이었다.

파로스 등대가 내려다보는 알렉산드리아의 수역은 이제 봉쇄된 호수가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잔존 병력을 성문과 요충지에 배치하며 단호한 명령을 내렸으나, 그 위엄이 미치는 범위는 도시의 성벽 둘레로 한정되었다. 확장적 연합 체제가 사라진 자리에, 오직 생존을 위한 ‘도시 집중 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이제 알렉산드리아에 갇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협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바라는 협상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이를 꿰뚫어 본 옥타비아누스는 냉혹한 밀서들을 밀어 넣으며 연인의 유대마저 해체하는 심리적 공성전을 펼쳐나갔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낸 안토니우스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그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아테네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생을 마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때 로마 세계의 절반을 통치하던 권력자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의 항복 선언이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사절에게 어떤 확답도 주지 않았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이미 정치적으로 죽은 인물로 간주했으며, 그와 공식적인 협상을 맺음으로써 그를 다시 대등한 대화 상대로 격상시킬 생각이 없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침묵은 안토니우스를 초조와 광기로 몰아넣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더 현실적이고 영리한 길을 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보다 자녀들의 왕위 계승권에 집착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왕권의 상징인 왕관과 황금 보좌를 보내며, 자신은 물러나되 자식들이 이집트를 통치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는 침묵하면서도,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자신의 해방 노예인 티르소스를 보내 밀서를 전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토니우스와 등을 돌린다면 당신과 당신의 왕국은 안전할 것’이라는 암시를 밝혔다. 이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성애와 정치적 본능을 자극해 안토니우스를 고립시키려는 심리전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사절 티르소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장시간 독대하는 것을 본 안토니우스는 분통이 터졌다. 그는 티르소스를 붙잡아 채찍질한 뒤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하라고 외쳤다.

“그의 오만한 태도가 나를 화나게 했다. 만약 이 처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해방 노예 히파르코스를 잡아다 매질하라고 해라. 그러면 우리는 비긴 셈이다!”

이 신경질적인 반응은 안토니우스가 처한 심리적 붕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적군보다 곁에 있는 여인의 변심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막대한 재화가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불태워지는 것을 방지해야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로마 개선식에서 사슬에 묶인 클레오파트라가 필요했다.

그는 협상을 진행하는 척 시간을 끌며 안토니우스 진영에 남은 마지막 병력을 돈과 밀약으로 포섭해갔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벽은 여전히 높았으나, 이토록 그 안의 마음들은 옥타비아누스의 밀서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티모네이온



4.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 항구의 배신과 묘실의 종결

옥타비아누스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동방 정복'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대신 공화정의 회복과 로마의 평화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 실제 명분은 알렉산드리아라는 독립된 외교 주체를 지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기원전 30년 8월 1일 새벽, 옥타비아누스의 군단이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했을 때, 안토니우스는 아직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인 함대를 항구 밖으로 출격시켰다. 그는 언덕 위에 서서 자신의 함대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들이받아 해상 방어선을 형성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장면은 처참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적에게 다가가더니, 돌연 노를 높이 들어 항복을 표했다. 옥타비아누스의 함대 역시 이에 화답하며 노를 들어 올렸다. 두 함대는 싸우는 대신 하나로 합쳐져 항구 안으로 평화롭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바다의 방어선이 한순간에 증발하는 장면이었다. 이제 옥타비아누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의 항만 시설을 장악하고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해군의 배신을 목격한 안토니우스는 절망했으나 무기를 놓지 않았다. 그는 남은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도심 외곽으로 나아가 옥타비아누스의 전위 부대를 맞이했다. 이 지상전에서 안토니우스는 한때의 영웅다운 기개를 발휘하며 적의 기병대를 밀어내는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궁으로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입을 맞추며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른 병사들을 치하했다.

하지만 그 승기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전열을 재정비하여 전장으로 나간 안토니우스가 목격한 것은 자신의 기병대가 대오를 이탈해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달려가는 광경이었다. 기병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적진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뒤를 받치던 보병대마저 동요했다. 그들은 패배가 예정된 지휘관을 위해 더 이상 칼을 휘두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수비 군대가 붕괴하고 옥타비아누스 군단의 군화 소리가 성벽 너머까지 들려오자, 클레오파트라는 화려한 왕궁을 버리고 미리 건립해둔 거대한 기념비적 묘실로 거처를 옮겼다. 거대한 석재로 축조된 이 요새 같은 묘실 안에는 이집트 왕실이 대대로 축적해온 황금, 은, 에메랄드, 진주와 같은 막대한 보물과 향료, 그리고 횃불용 땔감으로 가득했다.

여왕은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의 방대한 국고를 온전히 손에 넣길 열망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보물 더미 위에 앉아 옥타비아누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나를 벼랑 끝으로 몬다면, 로마가 그토록 원하는 이 모든 보물을 잿더미로 만들겠다.”

묘실은 여왕의 마지막 협상 테이블이자, 적의 탐욕을 인질로 잡은 화약고였다.

묘실의 문을 안에서 굳게 걸어 잠근 클레오파트라는 곧이어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하도록 명령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소식을 듣고 모든 정치적 기반과 최후의 심리적 지지대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순간, 안토니우스의 결단은 급격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여, 그대가 먼저 간 것을 슬퍼하지 않노라. 나 또한 곧 그대 곁으로 갈 것이니.”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칼 위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칼날은 심장을 빗나가면서 그는 곧바로 죽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클레오파트라의 의도를 깊이 복기하게 된다. 그녀는 어째서 이 치명적인 순간에 자신이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냈을까. 이는 두 사람의 결속이 더 이상 정치적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는 냉정한 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 행보의 의도는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안토니우스의 자살을 유도하여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상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냉혹한 정치적 계산이다.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했으나, 클레오파트라와는 여전히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안토니우스가 살아있는 한 옥타비아누스는 결코 이집트와의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은 확실했다. 여왕은 왕국의 존속을 위해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림으로써 안토니우스가 적에게 사로잡혀 치욕을 당하는 것을 막으려는 마지막 배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비겁하게 생명을 구걸하기보다 로마 장군다운 고귀한 죽음을 택하기를 원했다. 비보를 접한 안토니우스가 “그대가 먼저 간 것을 슬퍼하지 않노라”라고 읊조리며 칼을 뽑아 든 것은, 여왕이 계획한 비극의 시나리오가 의도대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거짓 비보는 안토니우스를 무너뜨리는 최후의 일격인 동시에, 클레오파트라가 단독으로 옥타비아누스를 상대하기 위해 던진 승부수였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라는 과거의 잔상을 지우고, 오직 자신과 이집트의 미래만을 위해 묘실의 어둠 속에서 승자의 발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안토니우스에게 여왕이 살아있다는 진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는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 그녀가 있는 묘실로 옮겨달라고 주위에 청했다.

안토니우스의 마지막은 처절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우려한 클레오파트라는 굳게 잠긴 묘실의 문을 여는 대신 2층 창으로 밧줄을 내려보냈다. 피로 물든 육중한 거구의 안토니우스가 두 시녀와 클레오파트라가 잡아당기는 밧줄에 묶인 채 허공에 흔들리며 끌어올려졌다. 한때 지중해를 호령하던 제국의 권력자가 닫힌 공간 안으로 피 흘리며 끌어올려지는 이 장면은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가장 상징적인 삽화였다.

묘실 안에서 여왕의 품에 안긴 그는 슬퍼하는 그녀에게 “옥타비아누스의 측근 중 프로쿨레이우스를 믿으라”는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협상의 주체가 아니며, 전쟁은 이미 무기가 아닌 조건의 언어로 넘어갔음을 인정하는 항복 선언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도시 외곽에서는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전쟁의 한 축이 사라진 지금, 성벽은 더 이상 지켜야 할 이유를 상실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며 질서 정연하게 도성으로 진입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불타지 않았으나 이제 그 주인은 바뀌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은 화려한 전투의 절정이 아닌, 지루한 고립과 배신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제 남은 것은 외교적으로 왕국의 존속을 건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 도박뿐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숨이 끊어진 뒤, 알렉산드리아의 공기는 한 겹 얇아지면서 남은 과제는 무너진 왕국의 잔해를 로마의 통치 체계로 이식하는 일이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붙든 것은 마지막 주도권의 조각이었다. 그 권위는 굳게 잠긴 묘실의 문과 그 안에 쌓인 재물에서 흘러나왔다.

여왕이 들어앉은 묘실은 거대한 금고이자 최후의 협상장이었다. 이집트 왕실이 대대로 축적해온 보물과, 그것을 연기와 함께 사라지게 할 땔감으로 무장한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보물은 내전으로 고갈된 로마의 국고를 채울 유일한 자원이었기에, 여왕이 선택한 ‘자폭의 가능성’은 승자의 발걸음을 늦추기에 충분했다.

이 순간 옥타비아누스는 기만책을 동원했다. 그의 사절 프로쿨레이우스가 묘실 1층의 철문 너머에서 여왕의 주의를 끄는 사이, 군사를 이끌고 온 갈루스 장군이 사다리를 타고 2층 창문으로 은밀히 진입했다. 안토니우스가 끌어올려졌던 바로 그 통로였다.

"불쌍한 클레오파트라여, 당신은 사로잡혔소!"

갈루스의 외침과 함께 로마 병사들이 내부를 장악했을 때, 여왕은 단검을 뽑아 저항했으나 즉시 제압당했다. 그녀의 옷 속에 숨겨진 독약까지 회수되면서, 여왕의 신변은 옥타비아누스의 완벽한 관리 아래 놓였다. 이날 클레오파트라를 사로잡은 이 기사 계급인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훗날 초대 이집트 총독이 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직접 묘실을 방문했다. 여왕은 초췌한 모습으로 침상에 앉아 과거 카이사르와의 인연이 담긴 편지들을 꺼내 보이며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냉정했다. 그는 여왕의 매력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직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다.

“부인, 안심하시오. 그대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것이오.”

이 부드러운 약속은 여왕에게 가장 잔혹한 선고였다. 그것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 로마로 데려가 개선식의 화려한 전리품으로 전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승자가 자신을 살려두려는 이유가 자비가 아닌 ‘장식’임을 간파했다. 더구나 카이사리온의 처형 소식은 그녀가 붙들던 마지막 미련마저 앗아갔다.

이제 클레오파트라에게 남은 권력은 오직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일뿐이었다. 감시의 눈길을 피해 무화과 바구니 속에 숨겨진 독사, 혹은 독약을 손에 넣은 그녀는, 안토니우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장 화려한 왕복을 입은 채 침상에 누웠다. 밖을 지키던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들이 묘실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이미 숨이 멎은 여왕 곁에 시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알렉산드리아 저항의 완전한 종결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을 개선식에 세우지 못한 아쉬움을 그녀의 황금상으로 대신했다.

그는 이집트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행정적 절차를 따랐다. 왕실 금고는 봉인되었고, 관료들의 장부는 로마의 서류로 대체되었다. 나일강의 곡물은 이제 로마 시민의 식탁을 책임지는 국가 전략 자원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집트는 원로원이 관리하는 여타 속주들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직할령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이 자신의 허가 없이 이집트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금지하며 이곳의 막대한 부와 식량을 자신의 직접 통제 아래 두었다. 전쟁의 불길이 꺼진 자리에는 그가 설계한 정교한 세입 체계와 로마식 질서가 들어섰다. 이렇게 한 시대의 종말은 승리자의 장부와 행정 문서 속에서 고요하게 완성되었다.


묘실로 끌어올려지는 안토니우스


5. 삼중 개선식-승리자의 귀환과 닫히는 야누스의 문

기원전 29년 8월, 옥타비아누스는 사흘에 걸쳐 연달아 개선식을 거행했다. 형식은 공화정의 전통을 계승했으나, 그 본질은 십수 년에 걸친 내전을 종결짓고 단일 권력의 시대를 선포하는 거대한 서사의 장이었다. 그는 이 의식을 통해 로마 시민의 기억 속에 동족상잔의 흔적을 지우고, 국경의 수호와 질서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기억을 이식했다.

첫 번째 개선식은 제국의 변방 일리리쿰에서의 승리를 기념했다. 행렬의 전면에는 포획된 발칸 부족들의 기괴한 무기와 방패, 거친 가죽 깃발들이 실렸다. 이는 로마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외부의 적에 대한 승리’를 상기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의도적으로 내전의 승리보다 국경의 안정을 먼저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개인의 야욕이 아닌 국가의 안전을 위해 칼을 들었음을 증명했다. 로마 시민들은 변방의 소요가 잠잠해졌음을 확인하며 비로소 안보의 실감을 얻었다.

둘째 날의 주인공은 악티움 해전이었다. 행렬에는 거대한 적함들의 선수(船首) 장식과 닻, 육중한 해상 무기들이 등장했다. 바다에서 끌어올린 전리품들은 로마의 뜨거운 태양 아래 그 위압적인 형체를 드러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이날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오직 '해상의 적'을 물리치고 지중해의 항로를 평정했음을 강조했다. 이로써 악티움은 로마인끼리의 살육전이 아닌, 바다를 어지럽히던 혼란을 잠재운 신성한 전투로 규정되었다.


이집트에 대한 승리는 가장 화려하고 이질적이었던 셋째 날에 기념했다.

그날의 태양이 떠오르자, 개선식 행렬은 도시 성벽 밖의 마르스 광장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곳은 무장을 갖춘 군대가 로마 시내로 진입하기 전 대기하는 신성한 집결지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네 마리 백마가 이끄는 전차에 올라 군단의 선두에 섰다. 개선문이 열리고 행렬이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 시민들은 전쟁의 결과를 황금 행렬의 실체로 목격했다.

행렬은 먼저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와 그 주변 도로를 따라 굽이치며 나아갔다. 길가에 늘어선 시민들 앞으로 이집트에서 가져온 보석 박힌 가구들과 정교한 황금 장식품들이 쉼 없이 지나갔다. 희귀한 향료 냄새가 로마의 건조한 공기를 가득 채웠고, 햇빛을 받은 이국의 비단과 직물들이 광장의 포장도로 위에서 눈부시게 산란했다. 시민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움직이는 이 압도적인 부를 보며, 자신들이 속한 제국이 흡수한 거대한 전리품의 무게를 실감했다.

이어서 행렬은 비아 사크라라고 불리는, 로마에서 가장 신성한 길에 접어들었다. 이곳은 역대 승리자들이 걸었던 길로, 로마의 영광이 응축된 통로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전차 뒤로 패배한 이집트의 수많은 상징물이 뒤따랐다.

행렬에는 나일강을 형상화한 거대한 기계 장치와 이집트 신들로 가득 찼다. 클레오파트라는 비록 죽었으나, 그녀를 상징하는 정교한 황금상이 독사에 팔을 물린 채 누워 있는 모습으로 행렬에 포함되었다.

시민들은 이 장면을 통해 동방의 왕권이 로마의 법에 따라 굴복했음을 목격했다.

행렬이 포로 로마노의 중심부에 진입했을 때, 환호성은 정점에 달했다. 로마의 정치적 중추를 가로지르는 이 광장 위에서, 승리자는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의 눈을 마주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선포했다. 수많은 전투와 협상, 배신으로 점철되었던 십수 년의 세월이 이 짧은 행진 속에 하나의 승리 서사로 수렴되었다.

마침내 행렬은 최종 목적지인 카피톨리노 언덕을 향해 가파른 길을 올랐다. 개선장군은 전차에서 내려 유피테르 옵티머스 막시무스 신전 앞에 섰다. 그는 로마의 최고신 앞에서 자신을 보좌했던 장군들을 치하하고, 승리의 영광을 신에게 돌리는 엄숙한 제의를 올렸다. 흰 소가 제물로 바쳐지고 향료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순간, 옥타비아누스는 단순한 사령관을 넘어 신의 축복을 받은 로마의 구원자로 거듭났다.

이집트의 부와 신비가 로마의 가장 높은 곳에서 신성한 의식과 결합 되는 순간, 시민들의 기억 속에 내전의 상처는 말끔히 씻겨 나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단일한 중심 아래 결속된 제국의 자부심이었다. 이로써 전쟁은 전장이 아닌, 로마의 돌길과 신전의 제단 위에서 진정으로 종결되었다.


삼중 개선식 중 이집트에 대한 승리의 날

개선식의 절정은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하며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는 의식이었다. 로마가 전쟁 중일 때 열려 있고 평화 시에만 닫히는 이 문은 지난 8백 년의 로마 역사상 단 두 번밖에 닫힌 적이 없었다.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는 로마인들에게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로마에 의한 평화인 ‘팍스 로마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적을 제거한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를 가져온 구원자의 모습으로 시민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기원전 29년 여름의 사흘은 로마의 공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군단은 더 이상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지 않았고, 이집트에서 온 곡물은 시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권력은 이제 원로원의 관습과 법률 위에 군림하면서도, 공화국을 존중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공화정의 외형은 유지되었으나 명령의 최종 지점은 하나로 모였다. 공화정은 마지막 숨을 길게 내쉬며 장엄한 시대의 막을 내렸고, 로마는 이제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거대한 체계로 진입했다. 마침내 단일 중심의 시대가 확정된 것이다.


개선식이 끝난 뒤 로마 전역에는 전례 없는 규모의 하사금과 축제가 이어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막대한 국고를 풀어 로마의 성인 남성 시민 한 사람당 400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현금을 지급했다. 이는 단순한 시혜를 넘어, 내전의 고통을 견뎌온 시민들에게 보내는 실질적인 보상이자 승리자가 약속한 새로운 시대의 계약금이었다.

로마의 거리는 거대한 연회장으로 변해 수천 개의 식탁이 차려졌다. 거기엔 이집트와 동방에서 들여온 진귀한 음식과 포도주가 넘쳐났다. 시민들은 기쁘게 먹고 마시며 지난 십수 년간 자신들을 괴롭혔던 굶주림과 물가 폭등의 공포를 씻어냈다. 이집트의 황금이 로마 시민의 주머니와 식탁에 구체적인 물리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옥타비아누스의 권위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고정하기에 충분했다. 시민들에게 평화는 더 이상 정치가들의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손에 쥔 은화의 무게와 가득 찬 식탁의 풍요로 기억되었다. 이제 전쟁의 이유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단일한 지배자가 가져다준 안정에 대한 순응이었다. 로마는 그렇게 한 사람의 중심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기꺼이 발을 내디뎠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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