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13

공화정 복귀라는 거대한 기만 (기원전 28~23년)

by 우광환

제13장 – 아우구스투스

공화정 복귀라는 거대한 기만 (기원전 28~23년)


개선식 함성이 가라앉은 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인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지위의 기반은 여전히 법적 토대가 약한 비상 권력일 뿐이었다. 로마인들의 기억 속에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오른 뒤 어떤 비극적 결말에 이르렀는지 아직도 선명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그 무거운 기억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게 군단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 필요로 한 것은 군단을 움직일 수 있는 합법적 권위였다. 문제는 그 권위가 공화국의 법과 관습이라는 틀 안에서 승인되지 않는 한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그의 권력이 굳어지는 이 과정을 ‘정착’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 표현으로 불리는 기원전 28년의 ‘제1차 정착’ 시기부터, 그의 행보는 바로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낡은 공화정의 외피를 손질해 자신의 권력에 맞게 다듬는 작업이었다.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직함을 탐하지 않는 듯 보이는 거대한 연출이 이때부터 펼쳐진다. 마침내 기원전 23년의 ‘제2차 정착’에 이르러, 제국 로마는 공화국이라는 제도 안에 안정된 일인 지배 체제를 갖추게 된다.

이 장은 한 개인의 의지가 법과 관습이라는 정교한 가면을 쓰고 로마 정치의 전면으로 나서는 과정을 따라간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의 권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들 손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인하게 만든 방식,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성한 이름 아래 제국의 중추인 군대와 재정을 장악해 가는 과정을 차례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원로원에서 연설하는 옥타비아누스


1. 보이지 않는 손 ― 원로원의 정화 (기원전 28년)

기원전 28년, 옥타비아누스는 오랜 동지이자 악티움의 영웅인 아그리파와 함께 이해 공동 집정관에 올랐다. 옥타비아누스로서는 기원전 43년과 33년, 그리고 31년 이후 내전을 거치는 동안 매해 지속했던 집정관직이 벌써 여섯 번째였다. 이 해의 핵심 과제는 내전기 동안 무너진 로마의 전통 질서를 복구하면서, 그 정점에 자신의 위치를 영구히 고정하는 일이었다.

기원전 28년 무렵, 로마 원로원은 천 명에 가까운 인원으로 팽창해 있었다. 내전이 이어지던 시기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서로 권력 기반을 넓히기 위해 하급 관리와 군인들을 원로원에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부터 대대로 존경받아온 귀족 원로원 가문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대거 들어온 원로원은 대중의 존중을 얻기 어려웠다. 존중받지 못하는 원로원이 승인하는 권력 또한 충분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내전기에는 수적 팽창이 곧 힘이었지만, 평화가 찾아온 시기에는 진정한 권위가 힘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의 승자로 로마 정계 중심에 서게 된 지금, 과거에 스스로 팽창시켜 놓은 원로원의 위신을 바로 세워야 하는 현실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이 결정은 한편으로 과거 협력자들을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는 냉정한 결단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국가 정치의 격을 높여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때 그는 심복이자 동료 집정관인 아그리파와 함께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감찰관의 기능을 되살렸다.

로마에서 감찰관은 인구 조사와 시민 재산 등급의 분류, 공공 도덕의 감독, 그리고 원로원 명부 작성 권한을 가진 직책이었다. 특히 원로원 명단 정리 권한은 의원을 명단에서 삭제할 수 있는 권력이었기에, 로마에서 가장 날카로운 정치적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이 직책은 원래 두 명의 전직 집정관이 함께 맡아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로서, 감찰관의 결정은 늘 두 사람의 합의가 필요했다. 어느 한 감찰관의 결정에 다른 감찰관이 거부권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찰관은 보궐 규정도 특별할 정도였다. 집정관을 비롯한 다른 행정관의 경우 한 사람이 유고 될 때 보궐 선거로 한 명만 다시 선출했지만, 감찰관만은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다른 한 사람도 직무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만큼 감찰관 한 쌍은 동시에 선출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 오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감찰관 선출은 중단되었다. 마지막 감찰관이 선출된 것은 기원전 70년, 즉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이던 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약 40년 동안 표류했던 이 감찰관 제도를 부활시킨다. 단지 그는 감찰관이라는 직함을 직접 취하지 않고 집정관의 권위를 이용해 감찰관의 기능만을 행사했다. 겉으로는 기존 직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원로원 명부를 정리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쥔 것이다. 직함의 화려함을 피하고 권한만 취하는 방식이었다.

원로원 정비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약 50명의 의원에게 스스로 물러나도록 권고가 내려졌다. 이 조치는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한 방식이었다. 자진 사퇴한 이들의 이름은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고, 가문의 명예도 보호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 한 이들은 강제로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때 약 140명이 원로원에서 축출된다.

당시 제명된 인물들의 전체 명단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그 가운데 상당수가 안토니우스 진영과 연결된 인물들이었으며, 내전기 동안 급격히 상승한 신흥 가문이나 정치적 기반이 약한 인물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정비를 통해 원로원의 규모는 다시 축소되어 전통 귀족 가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옷 안에 흉갑을 입고 무장한 의원 여러 명으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았다. 원로원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가문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동시에 잃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이 시기 암살 위험에 얼마나 예민하게 대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정비작업을 통해 규모가 줄어든 원로원의 권위는 예전처럼 강화되었다.

원로원 정비작업이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그 정점에서 상징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원로원 명부의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원로원 제1의원’이 된 것이다. 이것은 오랜 공화정 관습에서 이미 존재하던 자리였다. 감찰관이 원로원 명부를 작성할 때 가장 존경받는 인물 이름을 맨 앞에 올려 두는 관행이 있었는데, 그렇게 첫째 자리에 놓인 인물이 바로 제1의원이었다. 이 제1의원에게는 원로원 회의 때 가장 먼저 발언할 권리가 있었다.

사실 원로원 회의에서 첫 의견은 단순한 발언 순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그날 논의의 기준점을 세우는 행위여서 뒤이어 말하는 의원들은 대개 그 견해를 보충하거나 조정하는 선에서 움직였다. 그렇기에 첫 발언을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거스르는 일은 큰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오래된 절차의 힘을 알고 있었다. 이 자리는 집정관의 명령보다 덜 위압적이었고, 독재관의 권한보다 훨씬 덜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 이 자리는 원로원의 논의를 앞에서 이끌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수단이었다. 강제 대신 선도, 명령 대신 권위, 법조문 대신 관습이 작동하는 위치기 때문이었다.

로마 공화정 역사에서 원로원 제1의원에 오른 인물들은 대개 가문과 경력, 공적에서 모두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은 원로들이었다.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정면 결전을 피하며 시간을 끌어 로마를 지켜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또 다른 예로 거론되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2세기 때의 유력 귀족 정치가였다. 그는 집정관과 감찰관을 지낸 뒤 원로원 내에서 높은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전통적 귀족 질서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레피두스는 제2차 삼두정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그 레피두스의 선조에 속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이런 사례를 함께 놓고 보면, ‘원로원 제1의원’은 로마가 가장 존중하는 원로 정치문화의 화신에 가까운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 지위를 차지한 방식에도 의미가 컸다. 그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자신을 윗자리에 올린 것이 아니라, 원로원 명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먼저 이름이 불리는 인물이 되었다. 이 순간부터 그는 로마 공화정의 기존 제도를 살리면서도 가장 높은 권위를 지닌 인물로 자리 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군사 개혁 또한 치밀하게 진행했다.

그는 내전 종식 후 50개에 달하던 군단을 약 15만 명인 28개 군단으로 과감히 감축하여 정착시켰다. 이는 국가 재정의 부담을 줄이면서, 군대를 지휘관 개인의 사병이 아닌 국가의 군대로 재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병사들에게 퇴역 후 토지나 정착금을 국가가 보장하는 상비군 체제를 확립했다. 이전까지 로마 군대는 전쟁 시에만 소집되는 임시 조직에 가까웠으나, 이때부터 군인은 완전한 직업이 되었다. 군단병들은 이제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부터 봉급을 받았고, 이는 군대의 충성심이 오직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에게 향하게 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28개 군단이라는 숫자는 로마의 국경선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략적 배치 인원이면서, 반란의 위험을 통제할 수 있는 최적의 규모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8년을 기점으로, 내전기 동안 휘둘렀던 초법적인 권한들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그가 포기한 초법적 권한이란,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 결성 당시 부여받았던 ‘국가 재건 3인 위원회’의 대권을 의미한다. 이 권한은 원로원의 승인이나 민회의 투표 없이도 시민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칼날이었다. 그는 이제 전쟁이라는 비상사태가 끝났음을 선언하며, 스스로 이 ‘비정상적인 칼’을 칼집에 넣는 연출을 단행했다.

이런 의지를 시민들에게 시각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그는 호위병의 수부터 조정했다. 삼두정치기 동안 그는 독재관에 준하는 24명의 호위병을 대동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이를 공화정 집정관의 호위병 정수인 12명으로 줄였다. 24명의 호위병이 위압적인 ‘독재자’를 상징했다면, 12명의 호위병은 정상적인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을 상징했다.

특히 그는 동료 집정관인 아그리파를 자신과 대등하게 12명의 호위병을 세우게 했는데, 이는 두 가지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는 행위였다. 첫째, 자신은 카이사르와 같은 독재자가 아니며 동료와 권력을 나누는 겸손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었고, 둘째, 실제로는 자신의 심복인 아그리파를 추켜세움으로써 원로원의 다른 잠재적 경쟁자들을 견제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가 구사한 권력 운용의 묘수는 파스케스(Fasces,)라 불리는 권표(權標)를 다루는 방식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권표는 느릅나무 가지 다발을 가죽끈으로 묶어 도끼에 끼워 넣은 것으로, 집정관의 생사여탈권과 명령권을 상징하는 로마 최고의 권위적 상징물이었다. 공화정의 전통에 따르면, 두 명의 집정관은 한 달씩 번갈아 가며 이 권표를 소유한 호위병들을 앞세워 행차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해에 아그리파와 함께 이 순번제를 엄격히 지켰다. 더구나 자신이 권표를 들지 않는 달에는 동료 집정관인 아그리파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나는 독재관이 아니라 공화국의 법을 준수하는 동등한 집정관일 뿐이다”라는 인상을 로마 시민들에게 꾸준히 심어주었다. 지난 십수 년간 로마인들이 목격한 것은 한 명의 독재자가 권표를 독점하며 공포를 조장하는 광경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한 달마다 권력의 상징이 교체되는 정상적인 공화정의 풍경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이 익숙한 전통의 복구를 보며 안도했다.


권력의 상징인 파스케스를 든 집정관 호위병들


또한 기원전 28년,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중에 내려졌던 모든 불법적이고 임시적인 법령들을 무효화 한다고 선언했다. 이 역시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로의 회귀였으나 그 이면에는 극도로 치밀한 기억의 재구성이 깔려 있었다.

그는 삼두정 초기의 잔혹했던 살생부와 재산 몰수, 그리고 시민권 박탈 등의 행위들을 ‘내전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이 낳은 비극’으로 규정했다. 특히 그는 이 모든 불법적 행위의 책임을 죽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교묘히 전가했다. 자신 역시 그 권력의 한 축이었음에도, 모든 악행은 안토니우스의 광기와 무절제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신은 이제 그 오염된 법체계를 정화하는 복구자임을 자처한 것이다.

이 선언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자기 손에 묻은 피를 합법적으로 닦아냈다. 이제 로마 시민들에게 옥타비아누스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무법천지의 시대를 끝내고 예측이 가능한 법의 시대를 열어준 구원자로 받아들여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업적을 기록한 ‘안키라 기념비’, 즉 ‘업적록’에서 기원전 28년에만 로마 시내의 낡은 신전 82곳을 수리했음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는 로마가 무력의 지배에서 신들의 가호가 머무는 평화의 시대로 회귀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질서의 재확립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국가의 존속이 ‘신들과의 평화’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로마는 인간과 신 사이에 맺어진 계약 공동체였다. 인간은 제사를 올리고 신전을 보살피며 의례를 정확히 수행해야 했고, 신들은 그 대가로 도시와 군대를 보호했다. 이 균형이 깨지면 전쟁의 패배, 역병, 흉년 같은 재앙이 닥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내전은 바로 그 계약이 파괴되었다는 징후와 다름없었다. 파손된 신전과 방치된 제단은 로마가 신들의 호의를 잃었다는 불행한 상징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의 이 은근한 불안을 간파했다. 그는 무너진 지붕을 고치고 이끼 낀 신상을 닦아내며 로마의 신들을 다시 도시로 불러들이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로마 시민들의 눈에 그는 신들과의 계약을 회복시킨 중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복구하거나 새롭게 정비한 신전들은 로마 종교 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장소들이었다. 예컨대 로마의 최고 신인 유피테르 신전은 카피톨리움 언덕 위에서 국가의 운명을 상징했다. 전쟁과 승리의 수호신인 마르스 신전의 제단은 로마 군대의 정체성을 대표했고, 도시의 가정과 공동체를 지키는 베스타 신전의 성화는 국가가 살아 있다는 징표였다. 이 신전들이 다시 정비되고 제사가 복구된다는 사실 자체가 로마 시민들에게는 국가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징표였다.

옥타비아누스가 특별히 수호신으로 받든 신은 아폴로였다. 그 신은 빛과 예언, 정화와 질서를 상징하는 신이었다. 또한 역병을 몰아내고 인간 세계의 혼란을 바로잡는 신이었으며, 음악과 시, 예언을 통해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오랜 내전 끝에 로마 사회가 깊은 상처를 입은 시대에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균형을 세우려는 지도자에게 아폴로는 가장 어울리는 수호신이었다. 악티움 해전의 승리를 아폴로의 가호로 굳게 믿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 기억을 영구히 남기기 위해 팔라티누스 언덕 자기 집 옆에 아폴로 신전을 세웠다.

사실 여기에도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궁정은 동방 세계에서 널리 숭배되던 디오니소스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와 향락, 광란의 축제를 상징하는 신이었다. 그렇기에 빛과 질서, 절제를 상징하는 아폴로 신전 건립은 로마 시민들에게 한쪽에는 절제와 질서를 내세운 지도자, 다른 한쪽에는 사치와 향락의 궁정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는 계기였다. 그 결과 팔라티누스 언덕은 점차 로마 정치와 종교의 권위가 동시에 집중되는 공간으로 변해 갔다.

이제 내전기 동안 폐허가 되었던 신전들이 다시 대리석으로 빛나면서 제사와 축제가 복구되었다. 또한 그 광경을 보며 로마가 신들의 보호 아래 돌아왔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신전을 보살피고 정성껏 수리한 그는 ‘신의 아들’이자 로마의 전통적 덕목 가운데 하나인 경건함과 의무를 구현한 인물로 추앙받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아폴로 신전 건립


옥타비아누스가 하늘의 신들을 달래며 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동안, 그의 가장 충직한 동지이자 오른팔인 아그리파는 지상의 시민들을 달래는 실무를 맡았다. 그는 집정관이면서도 격에 맞지 않는 낮은 직책인 조영관 업무를 맡아 로마 시내의 고질적인 민생 문제 해결에 뛰어들었다.

그는 먼저 로마의 거대한 신경망이자 오물 배출구인 대 하수도를 직접 시찰하며 정비했다. 기록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배를 타고 하수도 내부를 직접 누비며 퇴적물을 치우고 낡은 벽을 보수했다. 또한 만성적인 용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수로인 ‘아쿠아 율리아’를 건설하고 기존의 수로들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했다. 이 당시 로마 시내 곳곳에 수백 개의 분수와 수조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시민들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목마름의 해소라는 생존의 차원에서 직접 느끼게 하는 대역사였다.

아그리파가 주도한 인프라 건설의 결정체는 오늘날까지 로마에 남아 있는 판테온과 로마 최초의 대중목욕탕인 아그리파 목욕탕이었다. ‘모든 신의 신전’을 뜻하는 판테온은 웅장한 규모와 정교한 설계를 통해 로마가 신들의 비호 아래 있음을 시각적으로 나타냈다. 그 곁에 세워진 거대한 목욕 시설은 시민들이 무상에 가깝게 누릴 수 있는 평화의 실체였다.

고위 정무관이 하급 직무를 맡아 봉사하는 이런 모습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시민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라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나아가 이 건축물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가 공허한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시민들에게 평화는 곧 매일 즐기는 따뜻한 목욕물이었고, 도심 곳곳에 넘쳐나는 깨끗한 물이었으며, 화려하게 변모한 로마의 일상 그 자체였다.

이 시기 거의 모든 공공사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그리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적을 앞세우기보다 옥타비아누스의 권위를 받쳐 주는 역할에 충실했다. 시민들은 도시를 바꾸어 놓는 그의 구슬땀을 알고 있지만, 그 유능하고 강인한 아그리파조차 자연스럽게 중심을 양보하는 모습을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위상을 더욱 분명히 느꼈다.


아직도 이탈리아 로마에 남아있는 판테온


기원전 28년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로마는 겉보기에 완벽한 공화정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부적격자가 사라진 원로원은 다시 위엄을 갖추었고, 내전기의 불법적인 조치들이 폐지되며 법률은 복구되었다. 거리마다 신전은 찬란하게 빛났으며 수로는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기조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옥타비아누스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법과 전통이라는 낡은 부속품들을 정교하게 조립하여 공화정이라는 기계가 다시 돌게 하면서도 그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은 자신의 군사력과 재력임을 철저히 숨겼다. 그는 이제 이 완벽하게 준비된 무대 위에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적 연극의 준비를 마쳤다. 다음 해인 기원전 27년 1월, 그는 국가 전체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충격적인 선언으로 세상을 다시 한번 뒤흔들게 된다.


13-2 아우구스투스 – 정권 복귀 선언과 거절의 수사학 뒤에 남은 신성한 권위 (기원전 27년)

알렉산드리아 함락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에서 더 이상 맞설 세력이 없는 유일한 권력자였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안정된 제도 속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 바탕에는 처음부터 지울 수 없는 불안이 깔려 있었다.

그는 악티움 전쟁이 벌어지던 기원전 31년 이후 해마다 집정관직을 맡으며 통치권을 유지해 왔다. 로마 공화정의 관행에서 집정관의 연임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군대 통수권과 국정 운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이 직위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집정관이라는 직책은 그가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을 공화정의 틀 안에 머물게 하는 유일한 법적 근거였다.

그러나 매년 같은 인물이 선출되는 집정관직은 오히려 그 권력이 지닌 불안정성을 드러냈다. 따지고 보면 그가 행사해온 광범위한 전권은 내전 수습이라는 일시적 명분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이미 네 해가 흐른 시점에서도 이를 그대로 유지하는 일은 카이사르의 전례를 떠올리게 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로마 시민은 예로부터 한 사람의 장기간 권력 독점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는 지속되는 집정관 연임보다, 자신이 행사하는 권위를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합법적인 구조 속에 자리잡을 필요에 직면했다.

기원전 27년의 새해가 밝았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일곱 번째 집정관 임기를 이 전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이 해에 지난 십여 년 동안 이어져 온 비상 정국에 마침표를 찍고, 자신이 구축한 새로운 체제가 공화정의 전통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새해가 왔어도 지속적인 침묵 끝에 결국 1월 13일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기원전 27년 1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 원로원 의원들은 연단에 선 옥타비아누스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회의장은 예상하지 못한 선언과 마주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군사권과 행정권,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속주에 대한 통제권을 공식적으로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내전의 종결을 명분으로 확보했던 광범위한 권한을 반납하고, 이제는 한 명의 시민이자 선출된 행정관의 위치로 돌아가 공화정의 법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말의 의미는 로마를 다시 정상적이고도 전통적인 공화정으로 돌려놓겠다는 확실한 의지 표현이었다.

특히 그의 입을 통해 이집트 지배권과 전 군단 지휘권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회의장 곳곳에서 억눌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의원들이 받은 충격은 선언의 파격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이탈리아와 서방 전역에서 이루어진 충성 맹세를 떠올렸다. 이것은 특정 관직이나 국가 기관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제국의 서방 전체가 충성하겠다고 신 앞에 맹세한 사건이었다. 이후 로마 세계의 정치적 결속은 공화정의 제도보다 옥타비아누스라는 한 인물의 권위를 중심으로 묶였다. 이는 어떤 법률적 절차보다 강력한 통치 기반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권위를 스스로 풀어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집트 문제는 의원들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재산과 다름없던 이집트는 로마를 먹여 살리는 거대한 곡창지대였다. 그 막대한 부와 전략적 자산을 국가의 관리 아래 두겠다는 제안은 겉으로 보기에 공화정으로의 완전한 복귀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관리권이 공적 영역으로 넘어갈 때 발생할 행정적 혼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의중을 거스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의원들의 판단을 흔들었다.

군단 지휘권의 반납은 훨씬 더 직접적인 불안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가 군 통수권을 내려놓는 순간, 로마의 수십 개 군단은 다시 독자적 권력을 지닌 군벌 집단으로 흩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의원들은 마리우스와 술라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내전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내전 직후 오십 개에 이르던 군단을 스물여덟 개로 재편하고 국가 재정에 기반한 상비군 체제를 확정했다. 이때 군단병의 연봉이 900세스테르티우스였으며, 전역 후 보상 체계까지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그 막대한 군사비의 실제 원천은 옥타비아누스 개인의 금고와 다름없던 이집트의 세입과 그의 방대한 사유 재산이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보물은 이제 로마 군대의 병참 기지로 흡수되어 원로원의 재정 승인 없이도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끝없는 재원으로 기능했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등 군단 주둔지가 있는 속주 또한 사실상 그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병사들에게 옥타비아누스는 국가라는 추상적 존재보다 훨씬 분명한 보상자이자 생계를 책임지는 후견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군 통수권 포기는 단순히 권한의 반환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군대의 결속을 붙들어 온 중심이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그 결과가 공화정의 부활에 앞서 통제력을 잃은 십오만 대군이 다시 로마를 향해 움직이는 대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인식했다. 그들에게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긴 하지만, 동시에 끝없는 내전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방벽이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연설이 끝나자 회의장에는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은 경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기보다, 깊이 뿌리내린 공포와 의심이 뒤섞인 긴장이었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그의 의중을 읽고 있던 일부 의원들의 질서 정연한 헌사였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이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였다.

플랑쿠스는 로마 격동기의 거친 물결을 누구보다 능숙하게 건너온 인물이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신뢰를 받는 장군으로 갈리아 전쟁에 참여했고, 카이사르 사후에는 안토니우스의 측근으로서 동방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집트 궁정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의 단맛을 체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악티움 전쟁의 기운이 짙어지자 안토니우스의 몰락을 일찌감치 감지한 그는 결국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돌아왔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에 대한 비밀을 넘겨 로마의 여론을 뒤흔든 인물 또한 그였다.

여기에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같은 명망가들이 무게를 더했다. 메살라는 한때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진영에서 공화정의 마지막 불꽃을 지키려 했던 인물이었다. 기원전 43년 삼두정이 수립되고 숙청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살생부의 맨 앞줄에 올랐다. 필리피 전투 이후에도 그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안토니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사이를 오가며 정치적 생존을 이어 갔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능력 있고 명망 높은 귀족을 제거하는 대신 끈질긴 회유와 관용으로 끌어들였다. 공화주의자로서 메살라가 지닌 상징성이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제공하리라는 사실을 그는 정확히 인지했다.

메살라가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사실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변질이었다. 동방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깊이 기울어 로마 정치와 멀어져 가는 안토니우스의 모습은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메살라는 비록 내전만은 피할 수 없지만, 로마의 안정을 회복하려는 세력 가운데 차선의 선택을 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결국 옥타비아누스를 택하면서 곧바로 중용되었다. 메살라는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의 동료 집정관으로서 악티움 전쟁에서도 함대 작전에 참여했다. 공화주의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숙청 명단에 올랐던 정적이 새 체제의 지지자로 서게 된 이 변화는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메살라는 새로운 체제를 옹호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연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원로원에 섰다. 그들의 발언은 회의장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과거의 정적조차 받아들일 만큼 옥타비아누스의 지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며, 로마의 안정을 위해서도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암묵적인 압박이었다. 여기에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의 영향 아래 있던 의원들까지 가세하자, 회의장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다시 통치권을 맡아 달라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구세력을 대표하는 메살라와 신세력의 중심인 아그리파가 같은 방향에서 목소리를 내는 장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옥타비아누스의 권위가 로마 전체의 합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정치적 입지였다.

이날, 옥타비아누스는 줄곧 사양의 태도를 보이며 겸양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시민의 위치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반복해 말하며 권력을 탐하는 인물이라는 의심을 잠재웠다. 원로원의 요청과 그의 사양이 이어지는 가운데, 내전의 승리로 형성된 특별 권력은 점차 원로원 승인의 합법적 권위로 변화되어 갔다. 그것은 무력에 의해 형성된 지배력을 제도적 승인 속에 정착시키려는 옥타비아누스의 복심과 맞닿은 결과였다.

사흘에 걸친 논의 끝에 기원전 27년 1월 16일, 원로원은 그에게 부여할 새로운 칭호를 검토했다. 일부 의원들은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의 이름을 칭호로 삼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내전을 종결하고 국가를 재건한 인물로 그를 두 번째 건국자로 기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로물루스라는 이름은 로마 왕정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며,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 시조의 전설과도 연결된 위험한 상징이기도 했다. 만약 그 이름을 받아들인다면 공화정의 수호자라는 이미지가 약화할 가능성이 컸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정중히 거절했다.

결국 원로원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의 제안에 따라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새로운 칭호를 부여했다. 어차피 개인의 특별 명칭이란 특정 관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어서 공화정의 기존 관직 체계까지 바꿀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 명칭의 의미는 단순한 명예 이상의 것이었다. ‘증대하다(augere)’라는 어근과 종교적 권위를 지닌 ‘징조 해석 제사장’(augur)의 전통을 연상시키는 이 이름은, 그가 로마 공동체의 번영과 안정에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라는 인상을 강조했다.

공화정의 정치 질서는 본래 관직이 부여하는 법적 권한에 기반해 작동한다. 그러나 권한은 임기가 끝나면 소멸하며 다른 관직의 견제를 받는 한계를 지녔다. 옥타비아누스가 추구한 것은 이런 제도적 권한을 넘어서는 영향력이었다. 그는 법적 강제력보다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명망을 뜻하는 ‘아우크토리타스(auctoritas)’를 통치의 중심 원리로 내세워 왔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바로 이런 권위를 상징하는 표지가 되었다. 이 이름은 그의 결정이 개인적 이익이나 군사적 강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로마 공동체의 전통과 안정을 지키기 위한 판단이라는 인상을 강화했다. 그 결과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의 수호자와 시민이라는 형태로 재해석되었다.

칭호 부여와 함께 원로원은 그의 위상을 로마 시민들에게 선명히 각인시킬 시각적 상징물들을 의결했다. 팔라티누스 언덕에 위치한 그의 집 대문 양옆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 가지가 세워졌고, 문 위에는 떡갈나무 잎으로 엮은 시민관이 걸렸다. 시민관은 전장에서 동료 병사의 목숨을 구한 이에게 수여하는 로마 최고의 영예로운 훈장이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의 참화로부터 로마의 모든 시민을 구해냈음을 뜻하는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의 집이 화려한 궁전은 아니었지만, 이 상징물들로 인해 로마에서 가장 신성하고 범접할 수 없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그가 자신들에게 평화라는 생명을 선사한 구원자임을 시각적으로 확인했다.

또한 원로원 의사당 내부에는 황금으로 제작된 방패가 헌정되었다. 이 방패에는 그가 지닌 네 가지 핵심 덕목인 용기, 자비, 정의, 경건함이 새겨졌다. 이는 그가 무력이 아닌 미덕으로 로마를 통치한다는 강력한 선전 도구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훗날 자신의 업적록인 ‘안키라 기념비’에서 이 전환점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이후 나는 권위 면에서 모든 사람을 앞섰으나, 직권에 있어서는 동료 정무관들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지 않았다.”

이 표현은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핵심적인 기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법적으로는 다른 집정관들과 동등한 한 표의 권리를 가졌지만,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이 내뿜는 권위는 원로원의 토론 방향을 결정하고 민회의 투표 결과를 미리 확정 짓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그는 명령하는 대신 조언했고, 강요하는 대신 제안했다. 하지만 로마의 그 누구도 ‘제1 시민’인 존엄한 어른의 조언을 거부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권력은 공화정의 낡은 제도 속에 교묘히 숨어들었고, 시민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공화국에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평화를 누렸다. 기원전 27년 1월 16일, 옥타비아누스라는 청년이 사라지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제국의 상징이 탄생하며 보이지 않는 독재 체제가 이렇게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제정의 서막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등극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


13-3. 속주의 분할과 지배 ― 군단과 세입의 보이지 않는 독점 (기원전 27~24년)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성한 권위가 하늘의 별처럼 로마인들의 머리 위를 비추는 동안, 지상에서는 제국의 골조를 재편하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치밀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후대 역사가들이 ‘제1차 정착’이라고 명명한 기원전 27년의 타협은 로마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신경망을 새로운 중심축으로 연결하는 정교한 수술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원로원과 나누는 형식을 줄곧 이어갔다. 그러나 이 분할의 이면에는 로마의 무력과 재물을 완벽하게 장악하려는 고도의 정치 기술이 숨어 있었다.

당시 로마 세계는 광활했다.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의 모래바람이 불어왔고, 서쪽으로는 대서양의 파도가 쳤으며, 북쪽으로는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울창한 숲이 야만인들의 함성 속에 펼쳐졌다. 이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방식은 이전까지 총독의 능력과 행운에 맡겨졌다. 공화정 시대의 총독들은 임기 동안 속주를 약탈해 가문의 부를 쌓고, 그 돈으로 로마의 군대와 관직을 움켜쥐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전통이 결국 내전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군대를 가진 자가 재물을 얻고, 그 돈이 다시 군대를 움직이는 악순환을 끊지 않고는 평화란 한낱 금방 무너질 모래성일 뿐이었다.

그는 먼저 책임의 분산이라는 가면을 썼다.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그들이 가장 갈구하던 명예와 전통적인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기원전 27년 1월의 합의는 로마 제국의 지도를 두 개의 색깔로 선명하게 갈라놓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모든 속주를 관리 주체에 따라 원로원 속주와 카이사르 속주, 즉 후대인들이 명명한 황제 속주로 이원화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여 통치권을 분점하는 합리적 타협안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권력의 핵심인 무력을 완벽하게 분리해내려는 치밀한 정치 공학적 설계가 숨어 있었다.

분할의 명분은 치안과 안정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바이티카,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처럼 정복된 지 오래되어 로마화가 진척되고 군단 주둔이 불필요한 부유한 지역들은 원로원의 관할 속주로 남겨졌다. 이곳 총독들은 공화정의 전통대로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 중에서 임명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것은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화려한 토가를 입고 로마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부유한 속주로 떠났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는 행정적 자율성과 명예를 대폭 양보함으로써, 구 귀족 세력이 자신을 동료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 화려한 영광은 실질적인 군사력이 제거된 박제된 권력이었다. 원로원 속주에 배치된 병력은 치안 유지를 위한 소규모 보조군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반면 갈리아의 대부분, 히스파니아 북부, 시리아처럼 국경이 적국과 맞닿아 있거나 이민족의 위협이 남아 있어 대규모 군단이 상주해야 하는 속주는 아우구스투스의 직할령이 되었다. 그는 원로원 회의에서 “평화로운 지역은 여러분이 다스리며 안정을 즐기되, 험난하고 위험한 국경 지역에서 겪는 고통과 책임은 내가 온전히 짊어지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더욱 특별한 것은 임기를 10년으로 한정한다는 원로원의 규정에 그가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화국의 전통엔 특정 인물에게 장기간 군사권이 집중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일정한 기한을 두고 권한을 위임해왔다. 그 역시 이런 체제가 공화정의 관례를 존중하는 안전장치라는 것을 분명히 인정했다.

이런 헌신적인 발표에 원로원 내의 중도파와 친위 세력은 열광했다. 그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국가의 가장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가는 불가결한 수호자로 보였다. 그러나 이 고통의 분담이 가져온 실체는 제국의 무력을 한 손에 쥐는 것이었다. 더구나 임기 10년이라는 이 제한 역시 큰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제국의 안정을 그에게 의존하는 현실에서 원로원은 임기 만료가 다가올 때마다 같은 권한을 다시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10년의 위임은 이후 지속적으로 갱신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군사 지휘권은 사실상 종신 권력의 성격을 띠게 된다. 당시 로마가 보유한 28개 군단 중 절대다수가 카이사르 속주에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그가 직접 임명한 인물들의 지휘를 받았다. 이제 로마의 칼날은 오직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된 것이다.


당시 원로원 내부의 여론은 표면적으로는 압도적인 찬성이었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를 필두로 한 친위 세력은 이를 “공화정의 미덕과 지도자의 헌신이 만난 위대한 합의”라고 칭송했다. 오랜 내전에 지친 일반 시민들 역시 군대가 한 사람의 강력한 통제 아래 놓임으로써 지휘관들끼리의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끊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이 기만에 속은 것은 아니었다. 공화정의 골수 신봉자들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 조치가 원로원의 손에서 무력을 영구히 박탈하는 교묘한 숙청임을 직감했다.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사석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게는 가시 없는 장미를 주고, 자신은 장미를 지키는 가시를 가졌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28개 군단의 급료가 이집트 세입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나오는 현실 앞에, 이런 반대는 조직적인 저항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침묵하는 냉소에 그쳤다. 아우구스투스는 반대파의 목소리를 힘으로 누르는 대신, 그들이 스스로 명예라는 허울에 취해 실권을 양보하도록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끝내 완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로마 각 속주들의 일인당 소득 분포


속주의 이원화가 군사적 칼자루를 쥐기 위한 포석이었다면, 이집트에 부여된 전례 없는 특수한 지위는 제국의 돈줄을 독점하여 정치적 자립을 완성하려는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대담한 승부수였다. 그는 기원전 30년 알렉산드리아 함락 이후, 이집트를 로마의 일반적인 속주로 편입시키는 대신 자신의 개인적 직할령으로 고정했다. 이는 로마 공화정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행정 조치였다.

그는 이집트 총독의 자리에 명문 귀족인 원로원 의원이 아닌, 자신의 가신 그룹인 기사 계급을 임명했다. 이는 수도 로마의 식량을 좌우하는 지역이 다른 정치 세력의 손에 들어가는 위험을 애초에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이 자신의 허가 없이 이집트 땅을 밟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했다. 타키투스는 이를 두고 “이집트의 지리적 요충지라는 점과 기근을 일으킬 수 있는 곡물 생산력을 고려할 때, 혹시라도 야심 있는 자가 이곳을 점유하여 이탈리아를 굶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분석했다.

이집트는 이렇게 로마 제국의 속주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것은 사실상 로마 시민들의 식량을 통해 영원히 권력을 떠받치는 정치적 기반으로 작용한다. 이미 초대 총독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으로서 이집트 왕조의 관료 조직을 그대로 흡수하여 운영했다. 이는 원로원의 감시망을 완전히 차단하고, 오직 아우구스투스 한 사람에게만 보고되고 운영되는 사적 통치 기구를 구축한 것이었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 국가 재정이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금고로 전용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가 로마로 보내던 곡물은 연간 약 2,000만 모디우스,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13만 톤에 달했다. 이는 당시 수도 로마가 소비하던 곡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게다가 이집트에서 거두어들인 현금 세입은 다른 모든 속주의 세입을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기원전 20년대에만 네 차례 이상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국가 재정의 결손을 보전하거나 시민들에게 하사금을 뿌렸다.

그는 스스로를 ‘국가의 파산을 막는 구원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사실상 원로원의 공적 자금줄을 고립시키고 자신의 사적 재정에 제국 전체가 의존하는 고도의 재정 예속화 전략을 구사했다. 시민들이 받는 ‘빵과 서커스’의 비용이 원로원의 승인이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수중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누구를 로마의 진정한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언의 지침이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전통적인 재정 기구와 아우구스투스의 금고 사이에는 팽팽한 행정적 긴장이 흘렀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마다 세밀한 인구 조사를 시행하여 징세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카이사르 속주와 이집트에서 징수된 세금은 국고를 거치지 않고 직접 아우구스투스의 관리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기록이 정교해질수록 지방 세무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줄어들었으나, 그만큼 중앙의 통제력은 강화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위해 노예와 해방 노예들로 구성된 방대한 사적 비서 조직을 가동했다. 원로원 의원들이 법률과 관습을 논하는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서기관들은 장부를 기록하며 제국의 맥박을 조절했다. 겉으로는 권력의 공유였으나 실상은 완벽한 재정적 독점이었으며, 이 불균형한 안정이 바로 그가 설계한 새로운 평화의 물질적 본질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 통치권의 재편과 함께 로마 군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군단병들이 더 이상 지휘관 개인의 야망에 휘둘리는 사병이 되지 않도록, 복무와 보상의 전 과정을 국가의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켰다. 이는 로마가 군벌의 시대를 끝내고 제정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

그는 내전 직후 50개에 달하던 군단을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할 28개 군단으로 과감히 감축했다. 이후 기원전 13년경에 이르러서는 군단병의 복무 기간을 16년, 속주 보조병은 25년으로 고정했으며, 기원후 5년에는 이를 20년으로 연장하되 퇴역 후의 보상을 엄격한 법으로 보장하게 된다.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기원후 6년에 창설된 군인 연금 기금이었다. 이전까지 퇴역병의 정착금은 지휘관의 사비나 점령지의 몰수 토지에 의존했기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총독이나 사령관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타파하기 위해 5%의 상속세와 1%의 판매세를 신설하여 독립적인 군사 기금을 마련했다. 사료에 따르면 그는 이 기금의 초기 자금으로 자신의 사재에서 1억 7,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쾌척했다. 이제 병사들은 사령관의 변덕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한 국가 시스템으로부터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모든 전선에 서는 대신, 자신의 명의로 군대를 지휘할 부관들을 임명하여 각 군단에 배치했다. 갈리아의 티베리우스나 게르마니아의 드루수스 같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부터, 아그리파와 같은 검증된 측근들이 이 자리를 맡았다.

하지만 지휘권의 위임은 철저히 통제된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모든 승리의 영광은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인 아우구스투스의 ‘신권 적 지휘권’에 귀속되었다.

전장에서 승리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개선식의 영예는 오직 그와 그 가족에게만 허락되었으며, 장군들에게는 ‘개선 장식’이라는 제한된 명예만이 주어졌다. 이는 실제 개선 행렬을 금지하는 대신, 개선식에서 사용되는 상징적 복장과 휘장만은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수훈 장군에게는 개선식에서 입는 자주색 장군 망토와 월계관을 착용할 권리, 개선장군의 조각상을 세울 명예, 그리고 원로원 의례에서 개선장군의 복장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 앞에서 전리품을 행렬로 보여주며 카피톨리누스 언덕까지 행진하는 진짜 개선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장군들은 승리를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그 영광이 정치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길은 차단되었다. 이는 군사적 영웅이 그 위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적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단의 사기를 관리하기 위해 '시각적, 종교적 충성심'을 활용했다. 모든 군단 기지에는 그의 초상이 세워졌고, 병사들은 매년 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신 앞에 갱신했다. 군단병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매달 급료를 지급하고 퇴역 후의 삶을 책임지는 위대한 후견인이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라인강과 다뉴브강, 히스파니아의 최전선을 직접 방문하여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기원전 27년부터 24년 사이, 그는 북부 히스파니아의 칸타브리아 전쟁을 직접 지휘하며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들과 같은 먼지를 마시며 행군한다는 사실은 병사들에게 강렬한 동질감을 심어주었다. 사료는 당시 병사들이 아우구스투스를 향해 가졌던 감정이 단순한 복종을 넘어,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권위에 대한 절대적 신뢰였음을 전한다.

이렇듯 병사들의 생사여탈권과 지갑은 단 하나의 정점인 아우구스투스에게 수렴되어 어떤 장군이 반란을 꾀하려 해도 병사들은 자신들의 연금을 쥐고 있는 ‘제1 시민’을 배신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무력의 독점을 넘어 충성의 독점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국경 속주를 순방하며 군단의 기치를 점검하는 그의 행보는, 로마가 보유한 모든 칼날이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전 로마 제국에 소리 없이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설계한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지탱하는 가장 날카롭고도 단단한 물리적 토대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칼날보다 무서운 것이 정확한 기록임을 간파한 최초의 통치자였다. 그는 기원전 27년부터 24년 사이에 제국 전역에 걸쳐 세밀한 인구 조사와 자산 평가를 단행했다. 이는 로마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인적, 물적 자원을 그의 집무실 안으로 수렴시키려는 고도의 통제 전략이었다.

그는 속주마다 토지 대장과 인구 명부를 작성하게 하여, 공화정 시대의 고질적 폐단이었던 징세 청부업자들의 약탈을 차단했다. 사료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 치세 로마 제국의 연간 총세입은 약 4억에서 5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이집트 한 곳에서만 곡물 이외에도 연간 1억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현금 세입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록이 정교해지고 서기관들의 장부가 두꺼워질수록 속주 총독들의 부정부패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중앙 권력의 비대화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 전역의 자산 상태를 파악한 뒤 ‘국가 상태 일람표’라는 장부에 기록해 두었는데, 이는 그가 제국의 맥박을 수치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원로원 의원들은 이제 자신이 다스리는 속주의 자원 규모조차 그의 허락 없이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여전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부유한 원로원 속주로 부임하며 공화정 시대의 명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기묘한 상실감과 냉소가 공존했다. 총독으로 부임하는 의원들은 화려한 토가를 입고 호위병을 거느리며 위세를 떨쳤으나, 실질적으로 군대를 움직일 권한은 없었다.

당시의 한 일화에 따르면, 원로원 속주의 한 총독이 국경 근처의 소규모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하자, 인근 카이사르 속주의 부관이 “아우구스투스의 승인 없는 군사 행동은 반역”이라며 이를 가로막은 사건이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속주 통치는 이제 화려한 유배이자 책임 없는 명예에 불과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관용을 찬양했으나, 사석에서는 “우리는 그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되었다”며 한탄했다.


기원전 24년경에 이르렀을 때, 로마의 지도는 아우구스투스의 의지에 따라 완벽하게 재구조화되면서, 로마 시민들의 분위기는 안도감으로 가득 찼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화정의 고결한 가치보다 당장 먹을 빵과 거리의 안전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의 부를 독점하여 정기적으로 곡물을 배급하고 대규모 경기를 개최하자, 대중은 그의 통치를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대다수 원로원 역시 전쟁의 공포를 다시 겪느니 차라리 실권을 양보하고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는 길에 만족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무력과 재정이라는 국가의 두 기둥을 완벽하게 독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인’이라 불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제1 시민’의 가면을 쓰고 원로원의 조언을 구하는 형식을 일관되게 취했다.

이 불균형한 안정, 즉 권력의 실체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으나 형식은 모두에게 나누어진 듯한 기만적인 평화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평화가 지닌 차가운 본질이었다. 이렇듯 로마인들은 옛 자유 일부를 잃는 대신 번영을 얻었으며, 그 번영의 구가 속에 공화정의 영혼은 소리 없이 증발해갔다.


신 앞에서 이루어지는 군단의 충성 서약식


13-4. 제2차 정착 ― 황제 체제의 완성과 새로운 시대의 정오 (기원전 23년)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한 이른바 ‘제1차 정착’ 체제는 예상치 못한 내부의 위기에 직면했다. 여기서 제1차 정착이란 기원전 27년 1월, 그가 비상대권을 반납하는 형식을 취한 뒤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10년 임기의 주요 속주 통치권을 부여받았던 합의를 뜻한다. 하지만 이 체제는 그가 매년 집정관직을 독점해야만 군대와 행정을 장악할 수 있다는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이는 공화정의 전통을 중시하는 원로원 귀족들에게는 여전히 눈엣가시였고, 아우구스투스 개인에게는 정치적 표적이 되는 위험한 짐이었다.

이런 정치적 긴장 속에 아우구스투스의 육체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기원전 27년부터 24년까지 이어진 히스파니아 북부 칸타브리아 전쟁을 직접 지휘하던 그는 혹독한 기후와 강도 높은 군무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사료에 따르면 이때 그를 괴롭힌 고질병은 심한 간 질환에 따른 복수(腹水), 거기에 만성적인 하복부 통증이었다.

기원전 23년 초, 급히 로마로 돌아온 그의 병세는 절망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해 인장 반지와 국가 재정 장부, 그리고 군대 명부를 그해 동료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심복인 아그리파에게 넘겨줄 정도로 사경을 헤맸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안토니우스의 주치의였던 안토니우스 무사가 처방한 냉수욕과 찬 음식을 활용한 파격적인 요법 덕분에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이 일은 그에게 중요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가 한 개인의 생존과 군사적 위세에만 의존한다면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로마는 다시 내전의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제국이 핵심 후계자들인 디아도코이들로 인해 사분오열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그는 이 당시 절감했던 것 같다.

당시 육신의 위기와 더불어 정치적 암살 음모도 그를 덮쳤다. 원로원 내부에서 파니우스 카이피오와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를 중심으로 한 전복 음모가 발각된 것이다.

파니우스 카이피오는 골수 공화주의자로서 아우구스투스의 일인 지배를 로마의 수치로 여겼던 인물이었다. 반면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는 훨씬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외교적 조력자였던 마이케나스의 처남이었으며,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으로 선출될 만큼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다.

무레나가 음모에 가담한 결정적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의 오만함과 법적 절차 무시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마케도니아 총독 마르쿠스 프리무스가 자기 허락 없이 트라키아를 공격했다는 죄명으로 재판받을 때, 법정에 직접 출석하여 증언과 압력을 행사했다. 변호인이었던 무레나가 그 자리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쏘아붙였고, 아우구스투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네.”라고 맞받아쳤다. 이 사건은 원로원 귀족들에게 아우구스투스가 표방한 공화정 복구가 얼마나 얇은 가면인지를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레나와 카이피오는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하고 진정한 공화정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거사 직전 음모가 발각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가 이 사건의 고발자로 나서면서 재판이 열렸고, 결국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면서, 보궐로 뽑힌 집정관이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다. 이 재판은 단순한 법정 사건을 넘어,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이 이미 로마 정치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자신의 최측근 가문에서조차 반역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기존의 ‘제1차 정착’ 방식으로는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음을 뜻했다.

건강을 회복하고 음모 사건을 진압한 아우구스투스는 칼을 휘두르는 대신 권력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권력의 외형을 더욱 낮추되 실제 통제력은 영구화하는 최후의 정교한 조정을 기획했다.


히스파니아 칸타브리아 전쟁 당시 군단을 직접 지휘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모습


기원전 23년 7월 1일,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이때 기원전 31년부터 8년 연속으로 유지해 온 집정관직을 전격 사임했다. 이는 다른 원로원 의원들에게 최고의 관직을 양보하는 관대한 처사로 보였으나, 사실은 집정관이라는 직위가 가진 행정적 번거로움과 정치적 표적의 위험을 벗어던지는 치밀한 행위였다.

이런 파격적인 행보 이면에는 그해 초 발생한 암살 음모와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치명적인 질병이 숨어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권력이 단지 매년 선출되는 집정관이라는 불안정한 직함에 기대어 있음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는 자신을 향한 귀족들의 질시를 잠재우는 동시에, 어떤 직위에도 구애받지 않는 영구적인 권력 기반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 당시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 율리우스 회당의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과 기묘한 안도감이 교차했다. 의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직을 내려놓겠다는 선언을 듣자마자 술렁였다. 누군가는 진정한 공화정의 귀환을 꿈꾸며 가슴 벅차 했으나, 대다수는 그가 사라진 뒤 닥쳐올 혼란을 두려워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심리적 균열을 파고들었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하는 그에게 원로원은 오히려 장황한 설득을 통해 더 강력하고 정교한 권한을 헌납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집정관의 옷을 벗는 대신, 원로원 의원들을 통해 ‘호민관 특권’을 영구히 부여받게 된다.

본래 호민관은 평민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관직으로서, 평민이 아닌 귀족은 그 직책에 오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호민관들에게는 신체 불가침의 특권이 있었다. 호민관은 그 외에도 민회를 소집하고 법안을 상정할 수 있는 권한과, 대부분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상정한 법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귀족 신분이기에 법적으로 호민관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이 아닌 특권만을 갖게 됨으로써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는 그가 전면에 나서 통치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의 모든 의사결정을 단 한 마디로 마비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감독권을 가졌음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호민관 특권을 자신의 통치 연호를 세는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이 권한이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핵심임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상급 속주 통치권(imperium proconsulare maius)’을 확정받았다. 임페리움이라는 말의 의미는 본래 로마에서 군대 지휘권과 행정 집행권을 포괄하는 속주 총독들이나, 사령관급의 군 지휘자에게 부여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부여받은 것은, 일반적인 총독이나 사령관의 위계를 넘어선 상급, 또는 우월한(Maius) 권한이었다. 기원전 27년의 제1차 합의에서는 그가 직접 관리하는 카이사르 속주 내에서만 명령권을 가졌지만, 이제는 법적으로 다른 모든 총독의 권한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원로원 속주에서 발생하는 긴급한 군사 위협에 직접 개입하거나, 그곳의 재정과 행정 문제에 관여할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여전히 속주를 통치하는 형식을 유지했으나, 실제로는 아우구스투스의 보이지 않는 권위의 거대한 질서 안에 편입되었다.

결국 기원전 23년의 제2차 합의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집정관이라는 구시대적 외투를 벗겨주는 대신, ‘호민관 특권’이라는 방패와 ‘상급 통치권’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쥐여주었다. 그는 이제 왕이나 독재관으로 불리지 않고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제국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영구적인 권력의 갑옷을 입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설계한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체제, 즉 황제 체제의 법적 완성이었다.

이제 그의 거부권 앞에서는 어떤 법안도 통과될 수 없었고, 그의 명령 앞에서는 제국 전역의 군대가 멈춰 섰다. 그러면서도 권력은 공화정의 전통적인 직함 속에 완전히 가려졌으며, 시민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공화국에 살고 있다는 환상에서 안정을 누렸다.


로마는 이제 아우구스투스의 평화가 정오의 태양처럼 뜨겁게 내리쬐는 시대로 진입했다. 내전의 공포는 희미한 기억이 되었고, 이집트와 속주에서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자원은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원로원은 항상 정책을 토론했지만, 그 결말은 팔라티누스 언덕의 의중과 일치해야만 했다.

기원전 23년의 두 번째 정착이 마무리되었을 때, 로마의 정치 지형은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칼날을 직접 휘두르는 대신 법과 관습의 그물망으로 제국의 권력을 완벽하게 쟁취했다. 공화정은 죽지 않았어도, 그 영혼은 이미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권력 속에 흡수되었다.

내전의 불길이 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완벽한 질서와 그 질서가 강요하는 고요한 침묵이었다. 옥타비아누스라는 청년이 피의 내전 가운데 잉태했던 새로운 시대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의 존엄한 체제로 완성되어 역사의 본궤도에 올랐다. 공화정의 복구라는 거대한 연극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면서, 그 무대 뒤에 오직 한 사람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졌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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