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사랑하고 슬퍼할 시간

그날의 절망은 겨울 강 두꺼운 얼음처럼 쉽게 녹지 않았다

by 우광환

작품 노트

이 작품은 지나간 사랑의 회한을 불러내는 이야기라기보다 너무 늦게 도착한 감정의 결이 현재를 어떻게 흔들어댔는지 따라가는 소설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지나간 사랑의 흔적이 현재 삶 속에 어떤 무게로 남는지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핵심은 끝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깊이에 있습니다. 사랑은 끝났어도 슬픔은 끝나지 않는다는, 또 어떤 작별은 너무 늦게 와서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조명해봤습니다. 이 작품은 살아 있는 동안 끝내 다 소모되지 못한 사랑과 슬픔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랑하고 슬퍼할 시간


1

지난밤 수북하게 눈이 내렸다. 들뜬 연말 기분들엔 축복의 전조였을 풍경이다. 하지만 내겐 창틈으로 스며든 냉기처럼 반갑지 않은 불청객일 뿐이었다.

눈 그친 아침 가라앉은 공기와 투명한 하늘은 꽤 쌀쌀했다.

“나야…… 오랜만이네?”

지난 저녁 그 목소리가 내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기억의 줄을 잡아당겼다. 귀국 후 처음 나간 연말 동창 모임에 남겨둔 연락처로 생각지 못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나는 당장 가슴 속 회오리에 휩싸였다. 아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놀란 내 표정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그래, 한번 만나봐야겠어.’

그날 새벽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작은 설렘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일찍부터 서두르는 자신에게 자책도 들었지만, ‘운전도 서툴면서 눈길을 헤쳐가야 하니.’라는 핑계로 나를 설득했다. 다리로 이어진 섬. 강화는 사실 지척이다. 그러나 그곳은 공간의 통로가 아닌 과거의 기억을 잇는 미묘한 경계기도 했다.



2

은희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오래전 여름날. 우리는 그 애 집 근처 공릉 유원지에서 보트를 탔다.

“나, 퇴원했어. 한 번 와 줄래?”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염치없는 일 같았기 때문이다.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도 염치라는 부끄러움이 나를 짓눌렀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은희 편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편지함엔 덧없는 침묵만 쌓여가던 나날이었다. 그러다 문득 날아오는 편지.

그날은 무척 더웠는데도 보트를 타면서 그 애는 춥다고 했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 때문이야’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직도 척추 보호대를 풀지 않았다는 그 애는 말없이 내 마음속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괜찮아. 네가 미안할 건 없잖아.”

은희 손끝이 내 볼에 닿을 때 참았던 눈물이 흐른 기억이 난다. 말로 다 하지 못한 미안함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던 마음이 그 눈물에 어른거렸다.



사고가 있던 그 전해 가을날, 우리는 파주 통일로를 걸었다. 코스모스 흐드러진 왕복 2차선의 한산한 시골 도로였다. 그렇더라도 남자라면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길 안쪽에서 걸어야 하는 단순한 매너를 나는 잊었다. 서울의 예술고등학교로 전학 간 이후 처음 본 은희 얼굴이 신비롭도록 눈부셨다. 코스모스 향과 어우러진 그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워 내 심장이 제 박자를 잃었던 것 같다.

우리가 모퉁이 길을 지날 때, 맞부딪치듯 나타난 대형 트럭과 버스. 이어서 눈앞으로 몰려든 거대한 쇳덩이들의 경적. 그 순간, 내가 그 애 팔을 끌어당겼던가? 내겐 아직도 풀 더미 위로 튕겨 나간 기억밖에 없다. 그리고 그날의 사고는 내 삶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되었다.


그날은 무척 더웠는데도, 그애는 춥다고 했다.


보트에서 내려 가까운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먹고 나자 은희가 말했다.

“우리 사진 찍을래?”

“카메라도 없는데, 무슨 사진?”

“아니, 사진관에서.”

근처 사진관으로 끌려가 그 애는 앉고 나는 선 채, 사진사 지시에 따라 어정쩡하게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왔을 때, 유난히 붉고 느린 저녁 빛이 거리를 물들였다. 그 빛이 알 수 없는 충동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동안 나 자신도 생각지 못한 말을 은희한테 해버린 것이다.

“너, 나하고 어디든 떠날 수 있어? 그냥.....어디든.”

그 애 눈길이 내게 오래 머물렀다. 내가 그 눈길을 슬며시 피했을 정도로. 저녁이 내려앉은 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발끝에 쌓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애 낮은 목소리가 바람에 스치듯 흘러왔다.

“왜? 내가 너 안 따라갈까 봐, 걱정되니?”

은희는 전학 간 뒤에도 서울의 내로라하는 미술대회에서 또다시 입상했다. 그러면서도 내겐 내색하지 않았다. 고향의 군 미술대회에서조차 입상하지 못한 나를 배려한 걸까. 그 소식을 학교 미술실에서 들었지만, 나 역시 모르는 척했다. 마음속 갈등을 털어버릴 수 없던 이유였던 것 같다. 어차피 서울로 올라간 은희는 장차 유명한 화가가 될 테니까.

내가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걱정이 아니라, 그냥, 널 계속 만나는 게 미안해서 그래.”

“왜?”

“내 앞날과 네 앞날은 아무래도 다를 거 같아서.”

은희가 걸음을 멈추더니 불현듯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꼭 멀리까지 안 가도 돼. 네 옆이면 돼.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게, 그게 내 미래야.”

그날의 은희 타는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애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후 사진은 내 앨범에서 그대로 빛바래 갔다. 오랜 세월 내 삶의 그늘 속에 은희가 그랬듯이.

“누구예요?”

“친척 누나야.”

내 낡은 앨범에서 처음 발견한 아내가 물어봤을 때도 애써 심드렁하게 말하면서까지 없애지 않은 사진. 아무리 봐도 은희는 나보다 조숙해 보였다. 어차피 은희는 내 시간에서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우리가 사진 찍은 한 달쯤 후에 ‘사진 동봉’이라는 반가운 편지가 날아왔다. 그러나 그 편지엔 척추 수술이 잘못돼 다시 입원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퇴원했다는 은희 상처는 이제 깨끗이 아물 줄 믿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구겨 쥔 그때, 내 안의 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찾아가라는 외침과 알지 못할 두려움으로 붙잡는 목소리. 나는 그 경계에 멈춰 서 꼼짝할 수 없었다. 이후 내 소심함에 저주를 퍼부으며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소식은 오지 않았다. 애가 탄 나는 용기를 내서 은희 집을 찾았지만, 이사마저 떠난 뒤였다. 지난 시간의 공허한 발자국만 그 애 집 안뜰에 쓸쓸히 남아 있었다. 그날의 절망은 겨울 강 두꺼운 얼음처럼 쉽게 녹지 않았다. 나는 몇 해 뒤, 결코 세월로 덮지 못할 상흔을 안은 채, 동경으로 떠났다. 낯선 거리의 웃음과 발걸음은 내게 닿지 않았다. 저마다 목적지로 흘러가는 인파 속에 나 홀로 멈춰 선 느낌이었다. 나는 이방인의 이불처럼 오래된 편지를 덮고, 적막이 부유하는 서늘한 자리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나는 세월로 덮지 못할 상흔을 안은 채, 동경으로 떠났다.



술이 얼근히 오른 동창회 자리에서, 어릴 적 얼굴 그대로 중년의 문턱에 다다른 여자 동창 하나가 술잔을 든 채 다가왔다.

“너 그동안 어디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니?”

“이제야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어.”

“처가 나라에서 여태 있었어?”

“응.”

“너 죽은 줄 알았잖아. 네 소식 아는 친구를 눈 씻고 찾아도 없으니.”

“날 왜 찾았는데? 첫사랑이 그리워서?”

친구는 내 어깨를 치며 웃고는 잔을 채워 내밀었다.

“그래. 첫사랑이 그리워서 널 찾았다. 혹시 널 찾으면 내 첫사랑 소식 좀 알까 해서.”

나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 친구는 은희와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다. 동창회에서 그 친구를 발견하고 슬슬 피하던 중 직접 다가온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서먹한 농담 뒤 친구가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너 걔 소식 모르지?”

결국 피하고 싶던 이야기를 친구가 꺼내버렸다. 그러나 가뜩이나 큰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친구 앞에 나도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안다는 것을.

“모르지.....”

“알고 싶지 않니?”

술기운에 입술을 씰룩이며 작게 웃은 것 같다. 그 웃음의 의미를 친구가 몰라주길 바랐다. 오래 묵은 기억의 무게로 절여 오는 마음을 그 친구가 모른 척이라도 해주기를. 나는 저쪽에서 손짓하는 다른 친구들 핑계로 일어섰다. 하지만 친구가 먼저 말했다.

“네가 나올 줄 알았으면 그 앨 데리고 올 걸 그랬구나. 하긴 그래도 안 나오려고 했겠지만. 걘 밖을 잘 안 나가거든.”

술잔이 끊임없이 부어졌고, 나는 깊이 취했다. 내 안의 정지된 시간까지도.

심한 갈증으로 눈을 뜬 아침, 아무리 물을 마셔도 소용없었다. 지독한 숙취의 고통 속으로 세월의 허기가 파고들 때, 나는 마음먹었다.

‘이젠 동창회에 나가지 말아야겠어.’

동경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동창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날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들이 몰려왔다. 그런 뒤 동경 신혼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들었어. 일본인 새댁이 예쁘다며?”

은희였다. 충격 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입 속에서 빙빙 돌았다. 겨우 한마디만 물었을 뿐이었다.

“건강은?”

“응, 건강해.”

나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 물속에서 울고 나와 아내에게 말했다.

“전화번호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우리 둘의 길은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다. 왜 그랬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나는 그저 ‘응, 건강해’라는 목소리를 믿고 싶었다.

아내는 이유도 모른 채, 다음날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그러나 내 손끝에 남은 그 여운은 길게 남았다.



3

도심을 벗어날수록 도로엔 더 많은 눈이 쌓였다. 은근히 불안했다.

나는 되도록 운전을 피해 왔다. 자동차 공포증이라는 과거의 층위가 아직도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강화 입구인 초지대교를 건너면서 은희를 향해 곧장 들어서지 않았다. 은희를 만나기 전에 좀 더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아직 시간도 일렀다.

“아버지가 날 데리고 여기로 들어오셨어. 공기가 참 맑고 좋거든.”

차창 열고 들이마시는 차가운 공기가 오래 잠든 정신을 말끔히 씻어주긴 했다. 한적한 길을 달리니 바다가 나왔다. 그 건너 또 다른 섬이 꿈처럼 뿌옇게 보였다. 차를 세웠다. 한산한 갯벌이 조금밖에 드러나지 않은 밀물 시간. 그래도 거뭇한 갯벌에 새 떼들이 종알거렸다. 온통 하얀 세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내 속에 은희 기억이 중간에 멈춰 선 것처럼.

차에서 내려 주머니 속 사진을 꺼내 보았다. 어느 한순간 정지되어 오랜 세월 색이 바랜 사진. 그것은 어쩜 시간을 붙들려는 내 의지의 퇴색이었는지 모른다. 하늘색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 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은 모습. 은희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서서 웃음 지어보려 애쓰는 나.

“약혼 사진 같다, 그렇지?”

사진 찍고 나서 은희가 말한 것처럼, 이제야 내게도 그렇게 보였다. 잠깐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

돌아보니 뒤쪽에 방긋 웃는 작은 눈사람이 보였다.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빨간색 낡은 베레모 위로 눈이 내려앉았다. 그리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몸통의 어깨 부분에도 눈이 쌓여 마름모 형태였다. 그래도 눈사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누군가 행복한 자신을 표현하려 무던히 애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또 전화번호 바꿀 거야?”

은희 목소리가 어둡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떤 재미있는 게임을 하던 사람처럼 목소리가 맑기까지 했다. 전화기 너머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오기도 했다.

“아이들이 여럿인가 봐?”

“응, 난 아이들이 많아.”

은희가 웃었다. 방금 즐거운 소풍에서 돌아온 듯, 편안한 웃음이었다. 은희 웃음소리가 눈사람에게서 들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전화가 요동쳤다.

“날세. 어제 말한 거, 빨리 좀 처리하라고 했더니, 왜 사무실에 붙어있지를 않는 거야.”

동경의 장인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잠깐 일이 있어서 좀 나왔습니다. 그건 제 사무실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장화도 아니고 그깟 펌프스 디자인 몇 가지 수정하는 거 오래 안 걸릴 겁니다.”

“나는 일을 우리 기무라 제화상사 수석 디자이너에게 맡겼지, 자네 사무실 친구들한테 맡긴 게 아니라고. 왜 사람 불안하게 일 처리를 그렇게 하나?”

“제 직원들도 최고 디자이너들입니다. 그리고 저도 곧 들어갈 거예요.”

장인이 식식대던 숨을 잠시 고르더니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 이야기했던 장화 말인데. 그거 목둘레를 환상적인 금피로 두르면 어떨까. 테두리도 쌍침 금사로 그럴싸하게 때리고, 옆에 큼직한 단추를 나란히 한 대여섯 개씩 주렁주렁 달고 말이야. 굽하고 창도 모조리 바꿔보는 거야. 좀 생경하게 나가는 거지. 요즘 젊은 소비자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고딕양식을 이해 못 하니 차라리 우리도 좀 스타일을 바꿔보세. 아, 우리 기무라 제화상사도 이번 신년 품평회에서 뭔가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닌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래도록 구두회사를 경영해온 장인에겐 조금 새로운 것을 제외하면 뭐든 ‘고딕’이었다.

“그리고 자네 말이야.....”

장인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자네 집에 전화했더니 자네 처가 울고 있던데, 혹시 부부싸움이라도 한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 저녁 뉴스감이군.”

내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집을 나설 때 문간에서 배웅하던 아내를 생각해 보았다. 새벽부터, 그것도 평소와 달리 차 열쇠를 챙겨 나서는 내게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한 외에, 어딜 가는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내가 지난 저녁 은희와 통화할 때, 그다지 관심을 두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리고 통화 후 사진을 빼내고 팽개쳐둔 낡은 앨범이 오늘 아침 제자리에 꽂혀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구예요?”

“친척 누나야.”

아내는 이후 그 사진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잊었다. 아니, 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당신을 빼앗았다고 한국에 있는 당신 여자들이 저한테 항의하는 일은 없을까요?”

결혼이 결정된 직후, 도시락을 싸 들고 기무라 제화상사 디자인실로 찾아온 아내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미안하지만 당신 남자는 여자들한테 그다지 인기가 없었어. 다시 말해 당신 눈도 썩 높다고는 볼 수 없다는 거지. 그 덕에 장가들기 희박했던 나는 구제받은 셈이야.”

“그럼, 평생 저를 은인으로 생각하시겠네요?”

“당연하지. 한국 속담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집 말뚝에도 절한다는 말이 있어. 난 조금 전에도 이 책상에 절했거든. 저기 서 있는 옷걸이에도 절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어.”

아내는 그때 행복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행복의 관문을 넘어서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젠 정말 새로운 삶의 곧은 방향으로 뿌리내릴 것으로 믿었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가까웠을 때 장인에게 스스럼없이 말했다.

“아이들에게 한국식 교육을 받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자니 제 사무실을 서울로 옮겨야겠네요.”

처음엔 놀랐지만, 그 역시 말리지 않았다. 그저 단서를 달았을 뿐이었다.

“자네가 어디에 있든, 기무라 제화상사를 책임져야 하는 자네 입장을 잊지 말아 주게.”

물론, 지금 내 삶이 가파른 절벽 위 불안한 밧줄에 매달린 삶이라고는 인정하기 어렵다. 이제는 거의 잊혀간 기억을 뜬금없이 끄집어내 고통에 빠질 이유도 없다. 그동안 깊게 자리 잡은 내 삶의 견고한 뿌리에 의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나 자신을 스스로 붙잡아 두려는 막연한 마음이 출렁일 뿐이었다.

‘은희가 제대로 사는 모습을 한 번 확인해보는 거야.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천천히 은희를 향해 갔다.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또는 어떤 갈등이 내 안을 엮어가고 있는지, 그 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천천히 은희를 향해 갔다.


4

도착해 보니, 일제 강점기 때쯤 지어졌을 고색창연한 단층 양옥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래전 시골 유지의 저택이나, 재산 많은 서울 귀족의 별장으로 사용한 듯, 지금은 없지만, 그 전엔 육중한 대문을 달았을 큼직한 문설주가 마당 입구 양옆에 버티고 섰다. 낡은 건물인데도 현관 앞에 눈 덮인 화단과, 그 앞으로 줄지어 선 향나무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단정해 보였다.

눈이 절반이 치워진 마당 한쪽에 장화를 신은 노인이 눈삽으로 눈을 그러모으는 중이었다. 마당 귀퉁이엔 눈 덮인 노란 승합차가 보였다. 마당에 둘러쳐진 얕은 돌담 바깥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제법 명당자리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현관 옆 유리창에 앙증맞은 여러 원색으로 ‘동그라미 미술학원’이라고 씌어 있었다. 잠깐 머릿속이 복잡한 미로에 갇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집 안에서 누군가 내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봐도 여자 얼굴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노인이 눈 치우는 곳을 피해 승합차 옆으로 다가가 차를 세우고 잠깐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차 문을 열고 내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눈삽을 든 노인이 어느새 앞에 다가와 섰다.

“아, 눈을 치운 곳도 저렇게 넓은데, 차를 여기 세우면 어떡하오?”

노인이 얼굴을 씰룩이며 삽으로 눈이 치워진 쪽을 가리켰다.

“어서 저쪽으로 차를 옮겨놔요!”

황급히 차에 오르려는 내 등 뒤에서 이번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왜 내 친구한테 화를 내고 그래? 그 사람은 날 찾아온 친구란 말이야, 친구!”

“아, 네 친구면 이 늙은이가 눈 치우는 것도 안 보인단 말이냐?”

돌아보니 머리를 뒤로 묶어 단아해 보이는 여자 얼굴이 현관문 사이로 보였다.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의 강을 건너온 은희였다. 그런데 현관문이 열리면서 은희가 나오기까지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다. 얼른 손을 들어 인사하려는 순간, 나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반가움보다는 충격이 더 컸다. 밖으로 나온 은희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난 아이가 많아.”

나는 지금까지 은희 건강한 모습만 상상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했던 결과였다. 나는 애초부터 그랬다. 이사 간 은희네 텅 빈 집에서도 나는 위안을 찾으려는 몸부림 가운데 절망했는지도 모른다.

노인이 가리킨 곳에 차를 옮겨 세울 때까지 나는 심한 통증을 가슴에서 다시 느꼈다. 요동치는 속을 억눌러 진정시키고 차 밖으로 나오니, 어쩐 일인지 노인이 다가오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은희 옛날 학교 동창입니다.”

노인이 눈자위를 조금 치켜올리더니 이내 뒤로 물러섰다. 나를 알 리 없는 노인이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인사하며 은희에게 다가갔다. 멀리 붙들어 두었던 세월이 눈앞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반가움과 아픔이 뒤섞인 감정이 가슴 속으로 번져갔다. 그것은 오래 미뤄온 시간이 결국 내 앞에 닿았다는 실감이었다. 그러나 은희는 마치 이웃 친구를 맞이하듯 해맑게 웃었다.

“우리 아버지가 아침부터 심통이 나서 저러신다, 얘. 엄마 산소에 가서 눈을 치워드린다고 하시는 걸 내가 못 가게 차 열쇠를 감추었거든. 이 눈길에 차 몰고 나가면 너무 위험하잖니. 너도 찾아오느라 힘들었지?”

나 역시 어두운 속을 감춘 채, 희게 빛나는 바깥 풍경처럼 넉살 좋게 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그저 가다듬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로 어렵지 않았어. 주소대로 찾아오니 아무 탈 없이 와지더구나.”

“하필 너 온다는 날 이토록 눈이 쏟아져서 은근히 걱정했지 뭐니. 아무튼 다행이다. 밖이 꽤 춥다 그치? 우리 들어가자.”

은희 말투는 흔들림 없이 천진스러웠다. 휠체어 바퀴 돌리는 것을 보며 밀어주려 하자 은희가 웃었다.

“나 혼자도 잘해. 그냥 따라 들어와.”

방문들이 닫히거나 열려있는 복도엔 옥수수차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현관부터 방들까지 모든 문턱을 없앤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신을 신고 들어갈 수 있도록 화강암 석재로 마감한 바닥이 윤이 날 정도로 깨끗했다. 나무판자 마루였던 것을 휠체어 생활이 가능하도록 모두 개조한 것으로 보였다. 복도에서 능숙하게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앞서가는 은희가 말했다.

“그림 그리러 아이들이 몰려오면 정신이 없어. 하긴 걔네들이 없는 아침나절에도 아버지하고 입씨름해야 할 때가 많긴 하지만 말이야. 난 그래도 아이들이 올 때면 즐겁단다. 아이들 그림 보여줄까? 선생님이 훌륭하다 보니 우리 애들이 제법 잘 그리거든. 너 내가 그동안 잘나가는 화가를 몇 명 배출했는지 아니? 조금 있으면 뉴욕에서 돌아와 교수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을 애도 있다 너? 파리에서 정기적으로 편지를 하는 아이도 있는데, 그 편지들 이따가 보여줄게. 근데 우습다. 너 많이 의젓해졌네? 어릴 때하고는 전혀 딴판인걸. 하긴 사십이 넘었는데, 어릴 때와 비교하면 안 되겠지. 하지만 나는 의젓할 여유가 없단다. 아이들하고 매일 살아봐라. 말투까지도 걔네들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니까. 네가 보기에도 나 아직 어린아이 같지 않니?”

은희는 계속 떠들어대면서 명랑하게 웃었다. 은희가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이 아침 햇살로 들어찼다. 그 빛이 벽에 걸린 그림 액자들을 선명하게 비춰주었다. 아이들 그림으로는 믿기지 않을 그림들도 여러 점이었다. 그중 조금 큰 액자 하나는 실제 화가가 그린 것이 틀림없는 유화였다. 혹시 은희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두커니 보고 있자니, 은희가 다가와 말했다.

“그건 아까 말했던 뉴욕에 간 아이가 그려서 보내 준 거야. 정말 잘 그렸지 않니? 얘는 어릴 때부터 달리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림에서는 그 양반 냄새가 전혀 없는 게 대견하거든. 어렸을 땐 그렇게 흉내를 내더니 말이야. 아 참, 너 아침 먹고 왔니? 이렇게 일찍 온 걸 보니 너 그냥 온 거 같은데, 토스트 구워줄까?”

벽에 기댄 여러 개의 이젤과 벽장에 정리된 그림 도구들. 거기서 은희 소담스러운 향기가 묻어나는 착각에 빠져들며 내가 말했다.

“난 아침은 안 먹어. 커피나 한잔할게.”

“그러니? 그래도 아침을 잘 먹어야지 건강하다고 하던데. 부인이 아침을 안 차려 주는 건 아니고? 하긴 자기 남편에게 그렇게 함부로 할 여자는 없겠지. 네가 부인 말을 잘 안 듣는 모양이구나? 너 부인한테 잘해야 해. 더구나 외국인이라면서 얼마나 대견하니. 한국까지 와서 같이 살아주는 게. 어쨌든 할 수 없지 뭐. 그럼, 우리 내 방으로 갈까?”

은희가 앞서 나갔다. 복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 이번엔 문이 열려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재 겸 응접용으로 사용하는 방인 것 같았다. 그 방으로 따라 들어서다가 안쪽의 집안 구조를 보니 복도가 기역 자로 휘어져 들어갔다.

한쪽 벽을 차지한 서가와 그 앞에 놓인 책상, 또 그 앞으로 긴 마호가니 탁자와 의자들. 탁자 건너편엔 큰 장식용 도자기가 받침대 위로 위엄있게 빛났다. 역시 이 방에도 창문 맞은편 벽면에 그림 액자들이 걸렸다. 옆방 그림들과 달리 모두가 반듯한 그림들이었다.

은희가 탁자 너머로 말했다.

“여긴 원래 소파하고 응접탁자가 있던 자린데, 치워버리고 이 탁자를 놓은 거야. 학부모님 같은, 손님들이 오시면 휠체어에 앉은 나하고 눈높이가 맞지 않아 불편했거든.”

은희가 맞은편에 앉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런데 너 참 멋지다. 그 연 카키 가죽 재킷이 참 잘 어울려. 그 베이지색 머플러 하며. 부인이 코디를 해주니? 어쩜 그렇게 너한테 잘 맞는 색으로 옷을 골랐니? 게다가 그 긴 머리하며. 미경이한테 네 긴 머리 이야기를 듣고 상상이 잘 안됐거든. 네가 머리 기른 걸 본 적이 있어야지. 고등학교 때 스포츠머리밖에 못 봤잖니. 막상 보니 정말 미경이 말이 맞네.”

은희가 쉴 새 없이 말하면서 격의 없는 손길로 내 양모 머플러를 쓸어내리던가,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내가 그 행동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은희가 다시 말했다.

“너, 아이는 몇이니?”

“둘이야.”

“아들하고 딸?”

“딸만 둘.”

“어머, 너무 예쁘겠다. 그러니 네가 이렇게 당당하게 변했지. 예쁜 딸을 둘씩이나 두었으니. 너 옛날엔 수줍음이 참 많았잖아. 너 기억나니? 미술실에서 내 얼굴 스케치하다가 나한테 딱 걸려서 얼굴 빨개진 거. 너 그날 참 우스웠는데.”

“너도 나 몰래 내 얼굴 그린 거로 기억하는데?”

은희가 다시 깔깔거렸다.

“그래. 맞아. 고등학교에서 너를 처음 본 이후부터 말 수도 없이 외톨이로 떠도는 네가 자꾸 눈에 아른거렸어. 친구도 없이 땅만 쳐다보며 외롭게 걸어가는 네가 운동장 저쪽에 보이면,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랬어. 넌 그때도 참 멋졌거든. 여학생들이 자꾸 훔쳐보던 거 넌 모를 거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네가 미술실에 앉아 있는 거야. 그래서 ‘아, 쟤도 그림을 그리는구나.’ 생각했지. 네가 내 가까이 있는데, 안 그릴 수가 있니? 근데 넌, 왜 날 그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만나 데이트할 때도 그걸 안 물어봤네?”

사실 나는 은희를 중학교 때부터 알았다. 은희가 우리 군에서 열리는 학생 미술대회를 거의 휩쓸었기 때문이다. 대회장 저만치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은희는 무척 도도한 애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난 은희는 낯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다정했다. 더구나 그 애가 한 번 활짝 웃으면 미술실이 환하게 밝아왔다. 낯을 심하게 가리던 나는 은희를 보면 가슴이 뛰면서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창을 등지고 앉아 몰래 은희를 스케치하던 날, 내 스케치북에 그림자가 드리워도 모를 정도로 열중했다.

“이거, 나 그린 거니?”

뒤를 돌아보니 은희가 창가에 서서 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둘러댈 말을 찾으려 할 때, 은희가 내 입을 자기 손으로 막았다. 그러더니 가방을 열어 스케치북을 꺼내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 스케치북에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린 은희 얼굴보다 더 선명하고 생동감이 살아있는 내 얼굴이었다. 그날부터 은희는 나한테 둘도 없는 천사였다. 하지만 얼마 후 도내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은희가 예술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내가 은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커피 안 줄 거야?”

그러자 은희가 웃으면서 박수를 치더니 말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커피 탈 생각은 안 하고, 수다만 떨고 있었네?”

그러더니 휠체어 바퀴를 돌려 문을 향해 굴려 가다가 멈추고 다시 돌아섰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응? 내가 금방 커피를 가져올 테니. 그동안 저 그림들이나 보고 있으렴. 내가 그린 것들이야. 저쪽이 학교 때 그린 거고, 이쪽으로 올수록 최근 거거든. 어때?”

“너야 원래 잘 그렸잖아.”

그러면서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은희한테 다가갔다.

“같이 가 줄까?”

은희가 내 손을 슬쩍 잡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는 그 애 흰 목선이 어릴 때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림이나 보고 있어.”

그러고는 그 애가 휠체어를 움직여 복도로 나갔다.

넓은 창에 흑자주색 벨벳 커튼이 양옆으로 걷혀있어 고풍스러운 이 집에 잘 어울렸다. 거기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비추었다. 대개가 유화지만, 간혹 누군지 모를 인물을 그린 수채화도 보였다. 액자들을 훑어보다가 내 눈 조금 높은 곳에 걸려있는 한 사진이 들어왔다. ‘5인 초대전 기념’이라는 금색 글씨가 적힌 사진이었다. 남자들 가운데 휠체어에 앉은 은희가 웃고 있었다. 해맑은 웃음이 오래전 그 애를 보는 듯했다.

그때 안쪽에서 그릇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어쩌나.’ 하는 은희의 탄식 소리와 함께. 나는 얼른 방을 나와 복도를 돌아갔다. 은희 무릎에 놓인 쟁반에서 커피잔 하나가 출렁였다. 나머지 잔과 설탕 병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채 뒹굴었다. 그쪽에도 복도 옆으로 닫힌 방문이 보였다. 복도 끝은 주방이었다.

“내가 이런다니까. 너를 부를까 하다가 바퀴를 살살 굴려 가면 되겠지, 하고는 그냥 오다가 이랬다, 얘. 이거 어쩌지. 네가 좀 주워서 이리 가져오겠니? 커피를 다시 타야 할 것 같다. 에이그 어쩜 좋아. 주방에 대걸레가 있거든. 그걸로 좀 닦아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아버지 오시기 전에 우리끼리 처리해야겠다. 아버지 보시면 잔소리하실 거 뻔하거든.”

나는 깨진 잔과 병을 주워 처리하고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쏟아진 커피가 복도 옆 문턱 없는 문을 지나 방으로 흘러갔다. 그 문을 조금 열고 흘린 커피를 따라 걸레로 닦아냈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다 손을 멈추었다. 방안 벽에 걸린 그림이 눈에 띄었다. 은희는 주방에서 수도를 틀고 커피 엎지른 쟁반과 옷을 닦는 중이었다.

침대 건너편에 족히 50호는 될 그림 액자가 무언의 시선처럼 나를 향했다. 그러나 창문 커튼이 드리워진 방이 어두웠다. 문을 좀 더 열었다. 복도 창문으로 흘러든 빛이 방 안을 채우자, 봉인된 진실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순간 내 숨이 멎었다. 우리 옛 사진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러나 사진과 달리 그림 속 우리는 더 원숙한 얼굴이었다. 더구나 은희는 연분홍 드레스, 나는 감색 정장 차림이었다. 둘의 웃음은 오히려 더 선명해, 오래전 시간이 우리를 새롭게 빚어낸 듯했다. 가슴이 요동치며 현기증이 덮쳐왔다. 눈앞의 세계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나 내 발이 무엇엔가 걸려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넘어진 자리는 은희의 앙상한 무릎 위였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바로 앞에서 무언가를 말했다. 그 순간 들려온 것은 눈물의 떨림과 숨결의 진동뿐이었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흔들며 내 깊은 곳에서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어두운 방 안의 그림 액자가 무언의 시선처럼 나를 향했다


5

돌아오는 길엔 눈이 거의 녹아 있었다. 그러나 교차로에서 녹색 등이 들어와도 움직이질 않아 뒤차들의 경적이 이어졌다. 텅 빈 머릿속에 기억이 희미했다. 내가 지금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 무엇을 위해 다녀온 것인지. 앞을 가리는 건 은희 눈물뿐이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그래도 오래전 나를 절망케 했던 의문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랬어. 이사를 가버린 뒤, 소식을 왜 끊은 거야!”

내 어깨를 감싸 쥔 은희가 한동안 오열했다. 밝은 얼굴로 애써 가장했던 노력이 무너진 것 같았다.

“처음엔 나도 몰랐어. 네가 어째서 나한테 연락하지 않는지. 그래, 나도 처음엔 너만 원망했거든.”

내 가슴에 남아 있던 의문을 정리하기엔 혼란이 가득했다. 내게서 떨어진 은희가 눈물을 삼키면서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닫히며 밖으로 나가는 장화 발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것 같았다. 곧바로 은희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토록 편지를 보내도 소식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는 네가 원망스러웠어. 나중에야 아버지가 내 편지를 부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단다. 아버지는 내 척추신경이 처음부터 잘 못 됐다는 걸 아신 거야. 말을 안 해주니 난 몰랐어. 아버지는 당신 딸이 누군가에게 짐 되는 게 싫으셨대. 두 번째 수술도 실패한 걸 알고는 나도 결국 아버지 뜻에 따른 거야. 다리가 조금씩 마비되는 걸 느낄 수 있었거든.”

그 말에 잊은 줄 알았던 오래전 고통의 기억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은희 어깨를 흔들면서 다그쳤다.

“나는 네가 아프든, 건강하든, 그냥 속이 타들어 가도록 네 편지만 기다렸다고. 더구나, 네가 사라진 너희 집 문 앞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흔들릴 걸, 네가 몰랐단 말이야? 그래 놓고, 왜 이제야 나를 불러낸 거야.”

은희가 눈물 너머 내 손을 더듬어 찾았다. 그리고 세월을 뿌리치듯, 애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서울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미경이한테 듣고 참을 수가 없었어. 너를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어. 딱 한 번만. 나이 든 너를 다시 그리고 싶었단다. 그리고 오늘 그냥 자연스럽게 헤어지면 그만이었거든. 널 봤고, 네 냄새를 맡았으니, 오늘 이후엔 더 이상 널 보지 않으려 했어. 네가 혹시 다시 온다고 해도, 내가, 내가 거절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은희가 휠체어 바퀴를 돌려 돌아섰다.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쌀쌀하던 아침과 달리 햇살 퍼진 한 낮의 도로는 포근했다. 관광지인 강화도를 향하는 차들이 아침보다 늘었다. 하지만 반대 차선은 아직도 한산했다.

나는 강화를 떠나기 전 초지대교 앞에 차를 세우고 다리 위로 걸어갔다.

은희 집을 나설 때 마당 입구에 서 있던 노인이 말했다.

“부탁이네. 이제 다시는 오지 말게. 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

그는 거기서 울고 있었다.

어쩌면 노인은 은희 침실에서 오랜 세월 딸과 함께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처음부터 나를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편이 눈물을 삼킨 고요하고도 안정된 삶이 보장될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딸에게 뿌리내려야 했으리라. 그것이 노인이 설계한 은희만의 완전한 삶이지 않았을까. 따지고 보면 은희와 나를 이어온 건 더 이상 약속도 눈물도 아니었다. 이미 희미해져 버린 시간의 무늬였을 뿐이다. 언젠가 이날의 기억 또한 세월에 희석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는 노인에게 그러리라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그 약속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한 판단도 서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의 원을 들어주었다. 그의 간절한 눈을 보며 그렇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다리를 흔들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을 오래 붙들고 서서 그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노인과의 약속을 다짐하듯 끝내 다리 밑으로 던져 보냈다. 사진은 마치 내 혼란스러운 갈등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다 바닷물로 떨어졌다.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을 오래 붙들고 서서 그 바람을 맞았다.


6

길을 달리며 틀어 놓은 라디오 음악이 이젠 귀에 들어왔다. 앞뒤로 차들이 지나가도 그 흐름이 멀게 느껴졌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켰다. 핸들에서 양손을 떼지 못했던 나로서는 뜻밖의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 잡은 핸들이 견고한 느낌이었다. 자동차 공포증 같은 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여유로운 한 손으로 룸미러에 매달린 아이들 사진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가 연초 휴가 때 동경에 올 거냐고 물으셨어요.”

아내 목소리가 조금 침울했다. 하지만 나는 밝게 말했다.

“가야지. 장화 품평회 때문에 어차피 가야 하거든. 어르신들도 우리 애들 보고 싶어 하실 거 아냐.”

“당신이 그럴 줄 알고 좀 전에 비행기 편을 예약해 뒀어요. 연말이라 좌석이 많지 않아 간신히 예약했거든요.”

“거, 다행이네. 아주 잘했어. 당신 없었으면 난 어쨌을까 몰라.”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스산한 계절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미련 가득한 소용돌이로 춤추는 것 같았다. 가버릴 사랑에 대한 아쉬운 목소리로 오래전 여가수 노래가 라디오로 흘러나왔다.

왜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 거죠?

아직은 사랑하고 슬퍼할 시간이 남아 있어요

세상은 온통 아쉬움으로 가득 찼다. 날카로운 햇빛이 차창을 뚫고 들어와 시야를 찔러댔다. 눈물이 떨어지며 입에 문 담배가 젖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온 힘을 쏟아 가속기를 밟았다.

여가수의 애수 어린 목소리가 무심하게 차 안을 떠돌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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