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명을 주도한 도시국가들은 에게해에 면한 그리스반도 남쪽 바닷가 또는 그 가까운 곳에 몰려 있었다. 스파르타가 있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와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지방이 그곳이다. 그 북쪽은 척박한 산악지대이기에 예로부터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동방에서 건너온 문명의 혜택 또한 거의 없거나 늦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더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 역시 척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웬만큼 혜택 받은 문명국가들이라면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야만인은 아니었지만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여타 도시국가들과 언어도 달랐다. 올림픽이 열릴 때 이외에는 남쪽의 그리스 선진국들과 이래저래 교류가 별로 활발할 수 없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그런데 마라톤 전투에서 대패한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유지에 따라 그 아들 크세르크세스 왕이 그리스를 다시 침공했을 때, 어느 나라보다도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피해가 컸다. 페르시아 대군이 흑해 입구의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그리스 북쪽을 통해 아래쪽으로 비잉 돌아오는 과정에서 힘이 없는 마케도니아를 초토화 시켰기 때문이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를 침공한 크세르크세스 왕의 군대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페르시아, 아시리아, 메디아, 박트리아, 파르티아 등의 페르시아 영토 내의 민족은 물론이고, 아라비아, 인도, 이집트, 리비아,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피지배민족들에게서 병력과 물자를 동원했다.
당시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해군함선 1207척, 수송선 3000척에 보병이 70만에 달했다. 오죽하면 거의 동시대 인물인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의 최종 병력이 528만에 이르렀을 것이라 말하지만, 그것이야 좀 과장되었다 해도 어쨌든 엄청난 대군임엔 틀림없었다.
대 제국인 페르시아에 비하면 조그만 동네들이 올망졸망 모여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침공을 위해 크세르크세스가 이토록 대군을 동원한 것은 부왕인 다리우스가 어설프게 두 번씩이나 침공했어도 그 조그만 아테네 혼자 너끈히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입로
당시 페르시아가 동원한 군대는 전 세계의 문명국 중 그리스와 중국을 뺀 모든 나라의 군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페르시아군이 화살을 쏴대면 뙤약볕에 그늘이 져서 시원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그들을 대적할 그리스 연합군은 함선 271척에 수천의 병사가 있을 뿐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연합군의 주력함선이었던 3단 노 갤리선
그런데 결론을 말한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대와의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또 패하고 말았다. 골리앗이 소년 다윗도 아닌 어린아이하고 싸워서 3전 전패인 것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3백의 결사대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페르시아군 2만을 죽이면서 전멸했지만, 이 전쟁의 분수령은 페르시아 해군이 테미스토 클레스의 아테네 해군과 맞붙은 살라미스 해전이었다. 결국 크세르크세스는 좁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테미스토 클레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후 페르시아는 유럽 침공을 완전히 포기한다.
살라미스 해전도
그러나 그들이 남기고 간 상처는 엉뚱하게도 북쪽의 마케도니아에 깊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로부터 100년 후에 태어난 필리포스에게까지 선명히 전해졌다. 이토록 불행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당대 그리스의 가장 강국이었던 테베에서 불모 생활을 했다.
그 때 테베의 영웅 에파미논다스에게서 정치와 군사전술에 대해 많이 배운 것은 물론, 그리스 반도의 사정에 대해서도 철저히 공부를 해 두었다. 에파미논다스는 기원전 371년 그리스의 최강자인 스파르타 군을 맞아 승리한 명장이었다.
그것은 스파르타의 국세가 옛날 같지 않다는 징조기도 했지만,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잘 나가던 다른 강국들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번창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명운이 그만큼 쇠퇴기로 접어든 것이었다.
모든 도시국가들이 똘똘 뭉쳐 크세르크세스에게 대승을 거둔 살라미스 해전 이후, 비대해진 힘의 우열이 부딪치자 그리스의 양대 강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기원전 431년부터 28년간이나 펠레폰네소스에서 전쟁을 치른 것은 그만큼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공멸을 자초했다.
지는 해가 있으면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이 있는 법. 그리스 반도 남쪽의 국가들이 힘을 잃어가자 북쪽의 마케도니아가 새롭게 그 힘을 대체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죽어지내던 마케도니아 민족의 울분에 찬 기지개였지만, 무엇보다도 필립포스 왕 개인의 야망과 능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필리포스2세(좌)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우)
기원전 383년에 태어난 필리포스는 청년시절 사모트라케 섬에서 비밀의식을 치른 바 있었다. 에게해의 북동쪽에 있는 이 섬에는 아시아에서 전래 된 카비렌 신들의 은밀한 성소가 있었다. 최근 그 섬에서 제물을 바쳤던 동굴이 발견됐지만 비밀의식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종교적 행사에는 남자뿐 아니라 여성들도 참가했기에 미르탈레라는 에피루스 공주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곧 올림피아스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이 여인은 매우 야성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그 외에도 공주는 특별한 면이 많았다. 꿈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들을 찾아내 이들과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부모가 없었다. 에피루스의 왕이던 아버지가 죽자 숙부인 아림바스가 형을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 욕심 많은 남자는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아서, 필리포스가 조카딸에게 손을 내밀 때부터 곧바로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했다.
그는 영특하게도 필리포스가 마케도니아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라는 계산을해낼 수 있었고, 결정이 내려지자 조카딸은 당연히 필리포스의 품에 안겨졌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결혼날 밤 올림피아스가 꿈을 꾸었는데, 뇌우가 쏟아지는 꿈이었다. 번개가 그녀의 몸을 때리고 번개가 떨어진 자리에서 맹렬한 불길이 타 올랐다.
필리포스역시 꿈을 꾸었다. 자기가 아내의 몸을 봉인하고 그 봉인에 사자가 각인되어 있는 꿈이었다. 필리포스는 당장 로도스 섬 동쪽에 있는 바닷가 도시까지 한 달음에 달려가 해몽가를 찾았는데, 아리스탄드로스라는 유명한 점쟁이였다.
그는 델피의 신탁으로도 알아맞히지 못한 리디아의 왕 크리우소스의 운명을 정확하게 알아맞힌 사람이었다. 당시 유럽과 소아시아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가졌던 크리우소스는 그의 말대로 끝내 전쟁터에서 다리우스의 포로가 되었다. 이토록 아리스탄드로스는 당대의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점쟁이였다. 그런 그가 필리포스의 이야기를 듣고 해몽을 해 주었다.
"빈 통은 봉하지 않는 법입니다. 왕비는 이미 뱃속에 후계자를 품고 있습니다. 왕비는 불 같고 사자 같은 남자아이를 출산할 것입니다."
이 꿈 이야기는 필리포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 더 나아가 온 인류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토록 이 꿈은 필리포스의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알렉산더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 꿈이었다.
영화 '알렉산더'에서 필리포스 왕 역으로 분한 발 킬머
이야기를 전해들은 올림피아스는 당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다. 자신이 신의 어머니로 점지되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올림피아스는 사모트라케 섬에서 신들을 받드는 신비스러운 의식에 더욱 몰두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의 무녀들과 합창을 하는가 하면 축제행렬 속에서 무아지경에 빠져들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길들인 큰 뱀을 들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기겁을 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잠자리에서조차 뱀을 놓지 않았다.
필리포스는 뱀과 사귀는 아내, 지하세계의 죽음과 노니는 위험한 아내, 장차 지상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신을 하데스에게 이끌고 갈 수도 있는 아내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가장 용맹스러웠던 필리포스에게 두려운 것이라곤 아내의 악마적인 요소 말고는 없었다.
올림피아스는 디오니소스의 무녀들과 무아지경에 빠져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올림피아스가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와 교감하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물론 필리포스도 그런 생각을 가졌고, 또 그의 신에 대한 경외심이 올림피아스의 신성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당시는 필리포스같은 무소불위의 통치자도 신을 존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었다.
마침내 필리포스의 명령으로 카이론이라는 사람이 아폴론 신전으로 달려갔다. 신탁을 받은 무녀들은 제우스-암몬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그녀를 각별하게 공경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아폴론은 뱀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제우스-암몬은 그런 아폴론의 아버지인 것이다.
올림피아스가 신과 어울린다는 소문은 신이 뱀으로 변해서 아내 곁에 누워있는 것을 필리포스가 문틈으로 들여다보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로까지 비화됐다. 그러나 필리포스가 애꾸가 된 것은 전쟁터에서였다.
통치자로서 또 군 통솔자로서 필리포스는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그리스 반도 북쪽을 통일했고 남부의 도시국가들을 점령해 나가면서도 그의 시선은 늘 페르시아에 가 있었다. 그가 기원전 338년 남쪽으로 군사들을 돌렸다는 말을 듣고 테베와 아테네가 연합하여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정말이지 너무도 손쉽게 그 전설적인 나라들을 병합했다.
마케도니아 보병
게다가 그는 뛰어난 웅변가이기도 했다. 그리스의 모든 정치가들을 코린토스 의회에 모아놓고 장차 페르시아를 정복해야만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살 수 있다고 선언하여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그리스 사람들은 정복자인 필리포스의 말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라는 존재는 갈수록 그가 이룩한 모든 분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플루타르크는 온 나라가 왕비의 병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올림피아스는 까다롭고 질투가 강한 데다가 남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거기엔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 '알렉산더'에서 올림피아스 역으로 분한 안젤리나 졸리
필리포스는 왕비 이외에도 네 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일리리아의 공주 안다타, 라리세의 필리나, 페라에의 니케시폴리스, 케트의 공주 메다가 그들이었다. 이처럼 여러 명의 여자가 있었지만 올림피아스만이 엄연한 왕비였다.
그런데 필리포스는 갑자기 또 다른 젊은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이 처녀는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비록 한쪽 눈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매력에 빠져버린 필리포스는 그만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그녀만은 후궁으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필리포스는 그녀를 어떻게든 왕비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더구나 그녀는 필리포스를 섬기는 유능한 장군의 조카딸이었다. 그는 기원전 336년 봄 필리포스가 페르시아와 원정을 다녀왔을 때 함께 갔던 장군이었다.
필리포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을 때 그녀의 삼촌인 아탈로스 장군은 승승장구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결혼식 축하연에서 대부분의 마케도니아 남자들이 그렇듯 많은 술까지 마신 상태에서 그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해버렸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필리포스 왕과 내 조카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왕의 후계자가 태어나도록 모든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신께 기원합시다."
갓 열아홉 살이지만 아버지의 정복지가 늘어날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할 정도로 이미 용맹하게 커버린 왕세자가 그 소리를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는 어찌나 화가 나는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벌떡 일어나 공적이 많은 그 장군에게 술잔을 내던졌다.
대노한 필리포스 왕이 일어나 아들을 향해 칼을 빼 들었지만 이미 그 역시 만취한 상태였다. 그의 위대하고도 막강한 외눈에 초점 없이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거친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술을 엄청나게 마시길 좋아했다. 아버지의 그 꼴을 본 알렉산더는 비아냥 한껏 담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친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이여. 이 식탁에서 저 식탁으로 건너가기도 힘든 저 사람을 보라. 저자가 아시아를 정복하겠다는 바로 그자다."
마치 사슬에 묶인 사자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난 필리포스가 아들을 죽이려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가까스로 말렸다. 위험한 그 순간에 올림피아스는 다행이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올림피아스의 정령과 복수심은 그 자리에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 정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알렉산더는 병든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에피루스로 떠났다. 어머니를 그 곳에 머물게 한 다음 젊은 왕자는 마케도니아의 숙적인 일리리아로 갔다. 그렇기에 어떤 연구자들은 이 부분을 들어 알렉산더가 아버지에 대한 모반을 계획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알렉산더의 정복지
하지만 알렉산더는 아버지를 향해 칼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부탁으로 찾아온 코린트 사람 데마라토스의 설득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 화해했다. 그랬어도 처음엔 아버지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했다. 카리아 지방을 다스리는 페르시아 총독 딸을 이복형제와 맺어주려는 아버지가 아직도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의 의중을 눈치 챈 필리포스가 말했다.
"네가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다. 그 아비가 누구더냐. 야만인인 페르시아 왕의 노예가 아니더냐. 그런 자의 딸에게 어찌 내가 너를 장가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제야 필리포스에게 중요한 것은 넓은 영토보다도 알렉산더라는 것을 아들은 알았다. 필리포스는 원대한 사업을 구상하며 분명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냉철한 역사의 창조자는 자신이 기초를 다지는 데 따라 자기 왕국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만큼은 생각처럼 길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계획에 의하면 완성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 그는 아들에게 더 많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바람일 뿐 신의 뜻은 아니었다. 신은 이미 알렉산더의 몫을 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필리포스는 페르시아의 원정 계획을 수립해 놓고, 서기전 336년 여름 알렉산더의 누이동생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른다.
영화 '알렉산더'의 한 장면,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군과의 전투에 앞서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 자리엔 그리스 전역에서 수많은 명사들이 참석했다. 이제 한창 나이인 마흔일곱의 필립포스가 그들과 함께 이루어 갈 계획들은 원대했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갑자기 찾아왔다. 결혼 축하 피로연이 열린 극장 입구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그를 찔렀다. 경호원들이 달려오기 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도망가려던 암살자는 사람들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난도질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필리포스의 암살 배후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필리포스의 암살에는 페르시아가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난무했다. 실제로 그 일은 아직도 고대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그 배후인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