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 알렉산더에게 했다는 디오게네스의 말이다. 그 앞에서 알렉산더는 당장 마음을 빼앗긴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처럼 되고 싶다."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이 내용은 유명한 일화다. 그리고 이 내용은 우리가 디오게네스의 통로로 들어가는 입구다.
디오게네스는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며 상상으로 그려낸 인물도 아니다. 그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었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그는 흑해 연안의 시노페라는 도시에서 환전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몰염치하게도 주화를 위조했다가 쫓겨다니기 일쑤였다. 젊은 아들 역시 부지런히 주화를 위조했다. 그 일로 디오게네스는 한 가지를 터득한다. 세상에 고정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는 아테네로 가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철학자 안티스테네스에게서 배운다. 안티스테네스는 인간이 덕성을 갖추면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는 재화와 향락, 외형적인 가치판단을 배척하는 윤리적인 금욕을 제자들에게 요구했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의 말씀을 잘 따르는 모범적인 제자로 성장한다. 결국 세상의 모든 재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는 냉소적인 철학자가 된다.
고향에서 도망 나온 디오게네스는 처음부터 빈털터리였다. 아무 것도 찾지 않고 하려는 것도 없어 보이는 쥐 한 마리를 관찰한 다음 그는 바라는 것 없이 살기로 결정한다. 국가 문서보관서로 쓰이던 키벨레 신전에서 그는 통 하나를 얻어 그 속에서 기거했다. 그러면서도 제우스 신전의 큰 홀이나 국가 건물을 가리키며 아테네 시민들이 자기를 위해 세운 집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시민들이 여느 때처럼 먹고살기 위해 바삐 오갔다. 어떤 사람은 시장으로 물건을 나르고, 어떤 이는 필요한 물건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고, 또 다른 사람은 바쁘게 법원으로 달려갔다. 디오게네스는 자기가 사는 통 안에 누워서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가 살던 통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왜 그러냐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들 저렇게 분주한데 나라고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소?”
그가 통을 굴린 데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 보라고 거울을 들이민 것이다. 저마다 바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큰 의미를 두려하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은 무의미한 분주함일 뿐이다. 결국 그들 역시 디오게네스처럼 무의미하게 이런 저런 통을 굴리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그들이 자각할 수 있도록 디오게네스는 등불을 비춰 준 것이었다.
디오게네스가 비춰주는 등불
디오게네스는 보통사람들이 소중하게 평가하는 것들을 모조리 조소의 대상으로 삼았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 벌어지는 경연을 바보와 말장난꾼들을 위한 잔치라고 했다. 정치가들이 그의 앞에서는 천민의 시중꾼으로 전락했다. 선장이나 조타수, 의사와 철학자들만을 조금 쓸 만한 사람으로 여겼다. 부유한 사람들이나 호화생활을 하는 일반시민들을 그는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람은 지혜를 갖던가 아니면 목 매달 밧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그는 말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당대의 위인들도 그에게는 대수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번은 그가 말린 무화과를 먹고 있을 때, 플라톤이 지나가자 함께 먹자고 했다. 플라톤이 손을 내 밀자 ‘함께 먹자고 했지 준다고 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플라톤에게 술을 좀 달라고 요청했다. 플라톤이 몇 리터의 술을 보내주자, 술 좀 달랬더니 그렇게 조금 보낸 것으로 보아 "둘에 둘을 곱하면 스물"이라고 대답할 사람이라고 빈정댔다.
어떤 때는 시장 복판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를 내다가 사람들이 모여들면, 구경거리에는 시간을 내면서 정작 진지한 일에는 짬을 내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디오게네스는 도무지 재미없는 아테네를 떠나 아이기나로 여행을 하다가 해적에게 잡혀 노예로 팔릴 운명에 처해진다. 다만 그가 떨떠름했던 것은 아무도 자기를 노예로 사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기를 사갈만한 인물인 크세니아데스라는 사람을 스스로 찾아내어 노예상들에게 외친다. "저 사람에게 나를 파시오!!~~저 사람은 [주인]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크세니아데스가 결국 자기를 사자 디오게네스가 말 한다. "비록 내가 당신 노예라 할지라도 당신은 윗사람 말에 따르는 것처럼 내가 하라는대로 복종해야 되오."
디오게네스의 주인은 코린트로 그를 데려가 처음엔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주인의 아들들은 당장 말 타기, 활쏘기, 창던지기 등에 능숙해지고 건강미가 넘쳐났다. 그는 교육내용을 제자들이 쉽사리 기억하도록 다듬고, 간단한 음식과 물로 만족하도록 가르쳤다. 아이들은 선생의 말에 잘 따랐다.
이윽고 주인은 그에게 집안일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삼았다. 얼마 후 주인집에서 그를 풀어주려 하자, 진정한 노예는 자기가 아니라 이 집 주인이라며 거절했다.
어느 부자의 초대로 호화주택에 들어갔다가 집주인이 바닥에 침을 뱉지 못하도록 하자 디오게네스는 그의 얼굴에 대고 침을 뱉았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공연히 침 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군."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그는 가끔 거리에 나가서 사람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가 말했다. "나는 사람을 부른 것이지 오물덩어리를 부르지 않았다."
배우겠다는 사람이 찾아와 철학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했을 때, 디오게네스는 그에게 청어 한 마리를 주고 따라오게 했다. 얼마간 따라오던 학생이 창피하다며 청어를 내던지고 가버리자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너와 나의 관계를 청어 한 마리가 망쳐놓았군."
사람들이 그에게 결혼은 몇 살 때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청년은 아직 안되고, 나이든 사람은 더 이상 안 되지."
이 철학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는 것을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를 '개'라고 불렀다. 견유학파(犬儒學派 )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 된다.
견유학파의 창시자로서 온 시대를 통 틀어 가장 지혜로웠던 디오게네스는, 모든 것은 신에 귀속되는 것이고, 신은 지혜로운 자들의 친구이며, 친구들 간에는 모든 것이 공유 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온 세계가 자기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천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중 앞에서 대소변을 치러서 사람들이 질겁하곤 했다. 그는 평생을 구걸 하면서 살았다. 구걸 할 때도 배고플 때 뿐이었다. "전에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있으면 그런 것을 나한테도 주시오. 그런 일이 없다면 이제 시작하시오." 그의 이런 말에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를 설득하시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응수했다. "내가 당신을 설득할 능력만 있었다면 당신 스스로 목매달라고 벌써 설득했을 걸!"
디오게네스는 여성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 큰 즐거움이란 것은 쾌락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 "저기 개가 있네." 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웃어댔다. 디오게네스는 이런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갔다.
그가 데리고 있던 유일한 노예가 도망을 갔을 때, 그는 노예를 찾으려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노예가 디오게네스 없이 살 수 있는데, 디오게네스가 노예 없이 못산다면 우스운 일이지."
그의 말에는 마력이 있었다. 인간 심리 깊은 곳까지 도달한 그의 통찰력 때문이었다. 그는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대단히 불가항력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든 납득시킬 수 있었고 누구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철학에 매력을 느끼도록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유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세계시민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불결한 장소라는 것은 없었다. 그는 말했다.
"아무리 지저분한 곳을 비추더라도 햇빛이 더러워지는 일은 없다."
그는 자신이 시민들의 태양이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의 스승 안티스테네스는 평생 저작에 몰두했다. 이에 비해 디오게네스는 글 한 줄 쓰지 않았다. 그러고도 나이 90세가 넘도록 뻔뻔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그가 헛된 삶을 살았을까.
디오게네스는 모든 것을 지녔다. 완벽하고도 넉넉한 삶에 더해 세기를 넘어 먼 미래까지 전해질 슬기도 갖추었다. 사람들은 신들이 주는 모든 것이 힘들이지 않고 댓가도 없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쾌락을 찾느라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힘든 인생이 신들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큰 소리로 외쳐주고 싶어했다.
"햇볕을 가리지 말고 좀 비켜주시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정복에 나서던 알렉산더였지만 저렇게 당당하고 행복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디오게네스가 부러웠다.
"디오게네스여!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말했다.
"별로 어려울 게 없소. 이리 와서 당장 그 왕의 옷을 벗고 내 옆에 누워 함께 일광욕을 즐기면 되오."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세상을 정복 중입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군. 세계정복의 야망이 당신의 지혜를 막았어. 지혜가 없다면 자유를 가질 수도 없지. 그 소중한 자유를 그깟 세계정복과 맞바꾸다니."
알렉산더는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디오게네스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걸인은 제국을 건설한 자기보다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위대한 성인들처럼 디오게네스도 자기가 한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영향은 그리스를 넘어 멀리까지 미쳤다. 지상의 모든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오로지 선한 것에만 몸을 바치겠다는 그의 비전은 서양의 탁발 수도사들에게까지 이어져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