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방랑자로 살아보기로 했다
23.09.26
에세이가 좋은 점은 나의 표현력의 한계로 내가 느끼는 지금 이 감정과, 생각과, 그 의미를 명확히 서술하기 어려울 때 그 간지러움을 긁어주는 것에 있다. 특히나 같은 여행 에세이여도 여행기보다 에세이의 특징을 잘 살린 이 책 같은 책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장소의 영향이 한몫했을 거다. 비행기를 옆에 두고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설렘이 가득모인 공항 창가에서. 그리고 컴컴한 비행기 안, 외부와 연결된 공간으론 작은 타원형의 창 하나뿐인 곳에서 달달한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힐끗힐끗 창문을 보며 읽는 여행책은 이 상황 자체만으로 작가와 한 몸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도 꽤나 현실 속에서 여행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작가님의 마인드와 닮은 점이 너무 많았고, 그랬기에 정말 오랜만에 의미 있게 술술 읽은 책이었던 것 같다. 정말 구절구절 와닿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지만 추리고 또 추려 정말 와닿았던 구절들만 적어보았다.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 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p. 80)
요새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안정감 속에 파묻혀 불안정성을 추구하는 나 자신"에서 오는 혼란이다. '직장 그만두고 워홀 갈 거야' , '외국으로 대학원 갈 거야'를 앵무새처럼 외치던 나였다. 그렇기에 나는 안정감 보다 불안정감에서 인생의 생동감을 느끼는 사람이고, 그래서 불안정성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이 생각에 변함은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안정감을 뒤로한 채” 불안정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불안정성 자체가 곧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가? 는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사실 되돌아보면 난 철저히 현실 안에서, 현실을 깨고 나오기보단 현실을 이용해서 나의 욕구를 충족해 왔다. 휴학을 하고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고,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다. 늘 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다녔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용했고, 지금도 나는 추석을 포함해 휴가를 몰아 3주간의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막 출발한 비행기 안이다. 어쩌면 난 안정감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안정감 속에서 불안정성을 추구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불안정성을 즐긴다 해도, 토대도 없이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면 그 불안정함을 즐기기가 힘들다. 헤쳐 나가기 바쁘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삶의 생생한 안정감이다"라는 말엔 동의한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특히나 이런 아프리카와 같이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볼 때, 오히려 반대로 삶의 안정감을 느낀다. 그것이 '내가 어디서든 잘 살아가겠구나' 하는 안도감이자 자신감이 되나 보다.
결국 안정감과 불안정감 사이에서 지금처럼 안정한 직장을 두고 이것저것 도전해 나가는 삶이 현실과 타협을 통해 얻어낸 내 나름대로의 최선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게 현재시제로 서술된다. 과적 픽업트럭에 실려 이동하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밀림 속으로 들어가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유적의 규모와 그 유적을 부수어버릴 듯 맹렬히 자라고 있는 나무의 위용에 압도된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지만, 그 주체를 초월하는 생생한 현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p. 106)
...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p. 107)
지금껏 나는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글로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단지 그때의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싫어서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정말 내 목적이 "기록"이었다면 나는 브런치가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를 했어야 했다. 사진과 함께 여긴 어디이고, 이때 뭘 했었는지 하나하나 기록했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나의 경험을 나의 언어로 남기는 것이었다. 사진 한 장에 단순히 그 공간에서의 사건의 서술이 아닌, 그 시공간에 얽혀있는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싶은 것이다. 여행의 현재를 미래에서 미래의 생각으로 과거를 서술하며 생각을 정리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여행이 마무리된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좋아서 해오던 내 여행 방식이 나름 여행꾼으로부터 인정받은 진정한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라 생각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p. 108)
길 위의 날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됐고, 지금의 내가 현재를 살아가며 또 다른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선택들이 모여 다시금 조금씩 나아진 나를 만들겠지.
고등학교 때 까진 다 고만고만하던 친구들이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며 서로 다른 위치에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들을 봐오면서, 인생도 결국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조금씩 다르게 흘러가는 여행이지 않을까 한다. 당연히 훌쩍 떠날 줄 알았는데 2년만 다녀야지 했던 회사에 눌러앉아버린 나와, 같이 교환학생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프라하에 눌러살고 있는 H나,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독일에서 공부를 하며 박사과정의 졸업을 앞둔 K. 모두가 다 다른 각자의 여행을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며, 문득 이 70억 지구인들이 서로 다른 70억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세상이 조금 귀여워졌다. 그러니 삶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이야기, 너는 너의 이야기.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니까.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 하러 그 먼 길을 떠나겠는가.
...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p.237)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본인의 이미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학교나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멋지게 해내는 모습이 좋을 수도 있고, 퇴근 후 친구들과 어울릴 때만 나오는 쾌활한 모습이 좋을 수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가정적인 모습이 좋을 수도 있다.
나는 좋게 말하면 '탐험가', 조금 더 거칠게 말하면 '방랑자'인 내가 좋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내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로 떠날 때의 내 모습, 배낭 하나 둘러메고 낯선 공간에 있는 내 모습이 좋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내 사진 중 하나가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페루 '와라즈'로 이동하는 2박 3일, 장장 버스만 4번, 순수 버스 이동 시간만 34시간인 대 장정 중에 찍힌 터미널 바닥에 앉아있는 사진이다. 3일을 씻지도 못한 채 꼬질꼬질한 상태로 터미널 바닥에 가방과 짐을 널브러뜨리고 앉아서 웃고 있는데 그 웃음이 상황과는 다르게 너무 행복해 보이는, 정말 '방랑자' 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이라 좋아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다 보면 일상 속 이미지가 마치 나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현실에 무뎌지면 그렇다. 나 또한 수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고,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 지루해질 즈음 '여행자'의 내 모습을 만나기 위해 종종 떠난다. 사회에서의 나를 잠시 잊기 위함과 같은 맥락이다.
2019년 이후 정말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다운 여행이었고, 정말 오랜만에 한 달 가까운 여행을 갔다. 학생이었던 2019년 과는 출발 전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그땐 정말 순수하게 호기심과 설렘으로 가득한 여행이라면 지금은 가득 찬 호기심과 약간의 해방감을 같이한다. 학생으로서의 본분은 공부고, 분명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나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환경이었다. 과제를 하더라도 "아 대충 이 정도하고 내자", 시험공부도 "B+만 받지 뭐"가 용납이 됐고, 결과에 대한 책임만 오롯이 내가 지면 되었다.
하지만 직장인으로서의 본분은 일을 하는 것, 그것도 잘하는 것이다. 돈을 받는 만큼 Output을 내야 한다. Output에 대한 평가는 나한테만 돌아오는 게 아니라 함께한 팀원에게까지 영향이 미친다. 벌써 어언 3년을 이런 환경에 있다 보니, 아니 아직 3년밖에 안 했는데도 여기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알게 모르게 따라왔고 이것이 나에겐 꽤나 큰 피로도로 작용했던 것 같다. 늘 주도적으로 살아오다가 하루 8시간은 강제적으로 주도성이 제한된 환경에서 있어야 하는 거니 말이다. 설렘을 찾아가는 것이 전부였던 여행에서 일상의 탈피 목적이 점점 더해지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슬프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만큼(?)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하려 한다. 용기를 가진 나에게도, 그런 나를 포용해 주는 회사에게도.
나는 언제나처럼 모험 소설과 여행기의 세계 속에서 나만의 여행을 계속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아침에 산 바게트 빵 하나로 세끼를 때워야 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지만, 그제야 나는 비로소 진짜 여행이 가져다주는 행복감과 자유로움을 알게 되었다. 매 순간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p. 265)
나이를 먹을수록 휴양지로, 호텔로의 편안한 여행을 추구하게 되기 마련인데, 내가 아직까지 배낭여행에 환장을 하는 것은 어쩌면 나 또한 대학생 시절 정말 가난하게 유럽 전역을 세 달 동안 돌아다녔던 그 기억이 강렬해서 인걸지도 모른다.
근교 여행처럼 교통비가 추가되거나 박물관 등 입장권이 포함된 날을 제외하곤 하루 오만 원 예산안에서 생활하려 했고, 숙박은 안전한 거리에 적당히 평점 보장되는 곳 중에 제일 저렴한 곳, 점심은 마트에서 산 요거트나 빵으로 때우곤 저녁에 맥주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다녔다. 그땐 먹는 것보다 돌아다니며 직접 몸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 더 중요했고, 무엇보다 부실히 먹어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있었다. 지금 그때 내 나이가 되어가는 동생을 보니 마냥 어리기만 한데, 어떻게 혼자 저렇게 다닐 생각을 했는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고 새삼 대단하기도 하다. 이제는 돈을 준데도 망설일 것 같은데 말이다.
남들이 볼 땐 불쌍한 여행일지 모르겠지만 글쎄, 사실 그 시절 나는 정말 행복했다. 정말 몸뚱이 하나로 행복감과 자유로움에 충만했던 시절이다. 내 삶이 주인이 되는 느낌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 지 일찍이 깨달아 버렸고, 결국 그 느낌을 못 잊어 현실을 살면서도 여전히 떠나고 있다. 이때의 경험이 결국 지금까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 되어 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p. 275)
같은 부류의 인간으로서 정말 위로가 많이 됐던 구절이다. 다름의 이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고 '나' 대로 나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지금의 나한테 '잘하고 있구나'라며 스스로 다독일 수 있는 구절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 속에 있고 이 여정은 평생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 정체성 만으로도 한국에 사는 것이 외로울 때가 이따금씩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그 속에서 나 혼자 따로인 느낌. 특히나 흔히들 말하는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근래 어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때가 더더욱 많은 것 같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과 있는데도 이렇게도 다른지, 당연하면서도 신기하다. 그나마 간간히 나타나는 잘 맞는 사람 한 둘씩을 간택하여 그들과의 대화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는데, 그마저도 해외로 각자의 길을 찾아 간 이후엔 이들 대신 책을 통해 위안을 얻고 있다. 책이랑 대화한다는 느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근래 독서량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사주팔자에 물이 4개랬다. 한 동네에서만 20년을 살았는데도 어쩌다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한 번씩은 다 옮겨 다녔다. 사는 곳은 대전이었지만, 광주와 대구가 고향인 엄마 아빠 덕에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국내는 많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대학생 때부턴 서울에 혼자 살며 서울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돌아다녔고, 어쩌다 해외로 눈을 돌려 이번 추석을 기점으로 6 대륙 모두에 발자취를 남겼다. 어쩌면 한없이 안정적일 수 있는 환경이었음에도 살아왔던 날들을 돌아보니 결국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인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도 이를 이젠 그냥 받아들이려고 한다. 남들과 다름을 고민하기보단 여태 해왔던 것처럼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가 살아가는 각자의 환경을 받아들이고 이 속에서 나의 길을 찾아가려고 한다.
결국 글의 마무리는 '떠돌며 살 운명인 게 아닐까 싶다'였지만 모순적이게도 원인을 생각하기 귀찮아 결론을 쉽게 내버리려는 것 같은 기분이라 운명론적 결과로 도달하는 걸 선호하진 않는다. 그런데 오늘 만큼은 그렇게 해보려 한다. 치열하게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은 때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방법이란걸 알아가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게 그냥 나의 운명인 것이고, 그러니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듯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프라하 외노자 H가 그랬다. “남들 생각 말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면 돼. 야, 우리대로, 그것도 아무 도움 없이 우리의 힘으로 이렇게 사는 게 멋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