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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Feb 11. 2024

로맨스를 꿈꿔요

나는 사랑 얘기를 좋아한다. 10대부터 그랬다. 오만과 편견, 제인에어 같은 고전소설을 좋아했고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장르에 상관없이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집중해서 봤다.


몇 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내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는 피겨스케이팅을 하던 여주인공이 실명하여 실의에 빠졌을 때 남자 주인공을 만나 다시 심신을 회복하는 영화다. 검색을 해보니 "사랑이 머무는 곳에"라는 영화인데,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여주인공이 무척 아름다워서 한 때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영화는 아마도 로맨스가 아닌 스포츠 영화로 나뉠 것이다. 그리고 TV시리즈 중에는 "소머즈"를 좋아했는데 "600만 불의 사나이"에 연인으로 나온 에피소드를 특히 좋아했다.  "블루문특급"은 너무 좋아한 나머지 호주로 어학연수 가서도 꼭꼭 챙겨보던 드라마다. 정작 두 남녀 주인공은 실생활에선 불화가 심해 그로 인해 더 이상 드라마를 찍을 수 없었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한쌍의 재미난 커플이었다. 그런 식으로 원더우먼과 소령, 브이(V)의 도노반과 줄리엣 같은 사랑의 짝대기가 이어진 커플이든, 에어울프의 파일럿과 여자 파일럿(?), 전격 Z작전의 마이클과 보니,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와 스미레 등 로맨스가 없는 등장인물이어도 어떻게든 남녀의 묘한 기류를 혼자 감지하고 괜히 설레어했다.  압권은 엑스파일(the x-files)이다. 엑스필(x-phile)이란 팬덤을 형성,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10년 가까이 이어진 드라마인데, 두 주인공 멀더와 스컬리의 케미스트리는 쉬퍼(shipper) 팬을 양산시키며 열광하게 만들었다.  관련 팬픽(fanfic) 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팬 사이에 유명한 팬픽 작가도 있었다. 쉬퍼들은 non-shipper들과 격렬한 난상토론을 펼치기도 했는데, 난 쉬퍼였지만 게시판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열심히 눈팅했고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 시절 엑파(엑스파일 약자) 동호회에서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쉬퍼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사람에게 흔히 달라붙는 말이 "눈이 높다"이다. 그 말에는 "주제파악 해라."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한마디로 "너는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니, 웬만한 것들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십을 넘으면서 선, 소개팅해보라며 건네오는 남자에 돌싱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생활이 짧은 이혼남. 애는 없는 사람으로. 그러다 마흔이 넘으니 돌싱인데 애가 있거나 사별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십 대 초반 때 소위 '노처녀'라고 불리던 언니들이 '재취'자리로 시집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노처녀'는 진짜 나이가 많아서 초혼은 할 수 없는 언니들인 줄 알았다.  지금 보면 겨우 삼십 초반에서 중반의 언니들이었다. 첫 직장에서 사내 커플이 있었는데 그 언니의 경우가 그랬다. 사별한 남자 직원(아마도 그 당시 과장?)과 결혼한 언니를 두고 다들 "결혼 잘했다"라고 했다. 매일 보던 두 사람이 정이 들고 사랑에 빠져 결혼했을 테니 잘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것보다 혼기 꽉 찬 노처녀가 '재취'자리로라도 시집을 갔으니 다행이라는 의미로 말했다. 그 당시 결혼 적령기는 이십 대 초반에서 중반이었고, 후반부터는 결혼하기 힘든 나이 취급을 했다. 심지어 스물일곱 살에 결혼한 직장 언니의 결혼식을 다녀온 입사 동기가 "난 결혼을 빨리 할 거야, 그 언니 보니까 나이 든 신부는 별로 안 예쁘더라고."라는 망언을 했었다. 겨우 다섯 살 어렸을 뿐인데. 그만큼 우린 어릴 때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적 세뇌를 단단히 당한 상태였다.


그런 세뇌가 깨지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사람을 뭔가 하자 있는 사람으로 계속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혼자인 남자는 진짜 무슨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여자는 혼자여도 괜찮은 여자가 많지만 남자는 아니야. 차라리 한번 이혼한 경력 있는 사람이 나아. 그 사람들은 여자를 아니까."라는 말을 하며 재취를 권한다. 재취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혼자인 남자들에게도 "결혼 한번 안 한 여자보다는 경험 있는 여자가 낫다"라고 말할까? 아님, 진짜 하자 있는 사람들이니 아무도 소개하지 않고 있으려나?  모르긴 몰라도 마흔이 훌쩍 넘은 남자들에게 어리고 예쁜 여자를 소개해줄 거다, 대체로.  


유부녀 지인들은 소개팅 조건을 듣고 꺼리는 내게 현실을 모른다고, 눈이 높다고, 철이 없다고, 사람을 볼 줄 모른다고 훈계한다. 나이를 생각하라며. 나이가 무슨 죄라고. 그들은 호의로 선의로 소개팅을 해보라며 권하지만, 선의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별로 없다. 그들은 끝내 자신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지만. 나란 사람을 사회적 세뇌를 당한 상태에서 보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남편 친구 중에 혼자인 사람이 있어서 너한테 말해볼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안 어울릴 것 같더라고. 아무나 만나면 안돼." 라고 친구는 말한다. "여태 혼자 잘 살아 왔는데 이제와 사람 잘못 만나 고생하면 어떡해" 라고 한다. 아주 친한 친구들은 함부로 누구를 소개하지 않는다. 나를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은 어설픈 지인들이 그런 오류를 일으킨다.   


결혼을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적도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혼을 선언한 적이 없는데 비혼인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 마음에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람을 먼저 만나 좋아졌다면 그의 조건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실제로 결혼할 뻔한 상대는 이혼남이었다.) 조건 먼저 보고 만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조건에 따라 호불호가 생긴다. 호불호가 생기는 건 나이와 상관없다. 나이 때문에 감수할 이유는 없다.


사랑 얘기는 지금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의 만남,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마음을 간질인다. 아직 연애 세포가 죽지 않았음을 웹소설과 웹툰을 보며 느낀다. 결혼을 꿈꾸지는 않지만, 남자와의 로맨스는 언제나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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