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창작 열정

2025. 3. 23

by 지홀

체육관에서 스트레칭을 하려고 매트에 누웠다. 최근 실내 인테리어 중 하나가 천장 마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열어놓는 것이다. 천장이 좀 더 높아 보이는 효과가 있는데 거기에 수많은 배관(냉온수, 전기, 공조, 소방 등)이 지나가고 환풍기, 시스템에어컨 등이 본연의 모습 그대로 보인다. 거기에 이 체육관은 마감은 아니지만 인테리어 용도의 실내조명을 설치해 그 줄도 보이고 일부 구간은 마감처리를 해서 하얀 천장이 보이는 곳도 있다. 매트에 무심코 누워 고관절 운동을 하며 천장을 보는데 사람 얼굴이 딱 보였다. 나는 어디에서든 사람 얼굴 모양을 잘 찾는 편이다. 벽지, 욕실 바닥, 구름, 바위 등에서 얼굴이 보인다. 어떤 때는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그 얼굴 모양은 내 상상으로 붕대를 한 것처럼 보였다. 한쪽 눈이 굉장히 커 보이는데 다른 한쪽 눈은 붕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진으로 찍어놓고 싶었는데 휴대폰을 락커에 놓고 와 머릿속에만 입력했다. 오늘 화실에서 그 이미지를 모티브로 그림 스케치를 했다. 그림을 그릴 때 언제나 창작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드디어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얼굴을 사각형으로 그리는지, 붕대는 어떤 의미인지 내가 그리는 것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어떤 색으로 칠할 지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신나고 흥분되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떠오른 걸 잊어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1차 스케치와 초벌 색칠을 하고 나자, 그리려던 이미지를 잊지 않고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마음에 안심되었다.


화실을 나와 카페로 갔다. 원래는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그 이미지로 희곡 스토리가 떠올라 생각나는 대로 마구 끄적였다. 두서없는 내용을 적다 보니 3페이지가 되었다. 그림도 희곡도 내 인생 명작이 탄생할 것 같은 고양된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돌아보면 졸작일지언정 지금 이 순간은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가 솟아난 것 같다.


퇴직 후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것이다. 창작하는 삶. 어려서부터 공상에 가까운 상상을 많이 했는데 현실에 닥친 일들을 하느라 그 상상력이 줄었다. 다시 그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책, 연극, 음악, 그림 등을 더 많이 접해야겠다. 3페이지로 열심히 끄적인 시놉시스가 부조리극인 걸 보면 어제 본 낭독극의 영향이다. 이 시놉시스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될지 알 수 없으나, 일단 단초를 만났으니 끌고 가봐야겠다.

바이올린, 기타, 거문고, 가야금 등 현악기가 떠오른다 (12:26, 14:18)
전깃줄이 정말 많다 (14:19, 17:1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부조리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