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모자

by 우물

'서쪽 마녀' 엘파바(Elphaba)의 피부는 왜 하필 불길한 초록색이어야 했을까. 그리고 그녀가 머리에 눌러쓴 그 기괴할 정도로 높은 뾰족 모자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뮤지컬과 소설로 재해석된 <위키드> 속에서 그녀의 초록색 피부는 태생적인 '다름'이자 세상의 편견이 투사된 낙인이었으며, 누군가 장난처럼 던져준 뾰족 모자는 조롱의 산물에서 이내 그녀만의 투쟁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창작물 너머, 실제 역사 속에서 마녀의 모자가 뾰족해지고 그들의 삶이 초록빛 독약처럼 취급받았던 배경에는 인류가 가장 연약한 존재들에게 가했던 서슬 퍼런 폭력의 연대기가 숨어 있다.

태어나면서 내가 받아들였던 마녀의 모자는 끝이 뾰족하고 챙이 넓은 형태의 모자였다.
그랬기에, 지금까지도 마녀의 모자라고 한다면 아마 우리 세대의 모두가 그 모자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의심할 것 없이 그 모자와 마녀를 동일시하는 구조 속에 던져졌다.
대중의 유희 속에 박제된 그 형상 위로 역사가 차마 기록하지 못한 시린 통곡이 겹쳐진다.
그것을 마법의 상징이라 부르나, 그 날카로운 끝이 가리키는 진실은 인류가 가장 연약한 존재들에게 가했던 서슬 퍼런 폭력의 기록이다.

본디 그 뾰족함은 차별의 낙인이었다.
13세기의 교황청이 유대인들에게 강요했던 노란색 첨탑 모자(Pileum Cornutum)는 '기독교인'과 '이교도인'을 가르는 비정한 경계선이었다.
이단과 부정의 상징으로 고착된 그 기묘한 실루엣은 세월의 파고를 넘어 점차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여성들의 머리 위로 옮겨졌다고 한다.
한때는 귀족 여성들의 고결함을 뽐내던 높은 모자 '헤닌'조차, 유행의 뒤편으로 밀려나자 노파의 기괴함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전락하였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가난과 고립이, 누군가에게는 악마와 내통하는 징표가 된 것이다.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밤하늘을 난다는 전설은 또 어떠한가.
빗자루는 여성이 거처하는 폐쇄된 공간의 비루한 일상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매일같이 먼지를 쓸어내며 가사 노동에 매몰되어야 했던 이들이, 그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에 몸을 싣고 대기를 가르는 상상을 했다면 그것은 비행이 아니라 절박한 비상(飛上)이었으리라.
고통을 잊기 위해 약초 연고를 바르고 환각 속에서나마 공중을 떠다니던 감각은, 자신들을 옥죄던 가부장적 질서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처절한 자유의 갈망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비명을 '악마와의 유희'라 명명하며 불꽃 속으로 몰아넣었다.

마을의 아픈 아이를 위해 약초를 달이고 생명을 받아내던 산파들의 커다란 가마솥은 본래 지혜의 정수였다.
대학의 문턱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절, 여성들은 자연의 섭리를 온몸으로 익히며 생명을 보듬는 지식을 대대로 이어왔다.
하지만 권위를 앞세운 남성 중심의 공식 의학과 교단은 이들의 치유를 마법이라는 죄악으로 규정하였다.
생명을 담던 가마솥은 독약을 끓이는 솥이 되었고, 홀로 된 여인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고양이는 사탄의 화신으로 둔갑하였다. 공동체의 온기를 담당하던 이들은 순식간에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는 암적인 존재로 몰려 거세당했다.


이 잔혹한 광풍의 본질은 결국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편협함과, 약자의 희생을 통해 체제의 불안을 잠재우려던 비겁함이었다.
홀로 된 자, 재산을 가진 과부, 혹은 남들보다 뛰어난 지혜를 지닌 여성. 그들의 독립성은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균열이었고, 사회는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그들을 '마녀'라는 이름의 제단 위에 올렸다.

우리는 이제 그 뾰족한 모자의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다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당한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른바 '시온의 폭력'의 현장이었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미가 3:10>
성경 속 예언자의 일갈처럼, 당시의 권력자들은 신의 나라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실제로는 무고한 약자의 피를 짜내어 그들의 질서를 공고히 했다.
이는 밀란 쿤데라가 경고한 '정치적 키치(Political Kitsch)'의 전형이다. 존재의 모든 추악함을 부정하고 감상적인 정의로 포장된 거대한 거짓의 세계 말이다. 그들이 외친 '거룩한 정의' 뒤에는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시각에서 지워버리는 잔인한 위선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정치적 키치'는 현대에도 여전히 옷을 바꿔 입으며 자행되고 있다.
가까이는 노동조합의 파업을 보며 멀리는 중동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당장 내가 입을 불편과 손해를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은 대중이라는 이름의 다수를 끌어들여 그렇게 생각하게끔 여론을 몰아간다.
하지만, 다수의 안녕과 사회적 질서라는 숭고한 이름 아래,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초록색 피부를 덧칠하고 뾰족한 모자를 씌워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희생을 담보하는 '시온의 폭력'이 반복되는 한, 중세의 마녀사냥은 결코 박물관 한켠에 걸려있는 과거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만우절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