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떠나라고, 걸으라고 나를 떠민 건 한 권의 책이었다. 스위스 작가 니콜라 부비에Nicolas Bouvier는 《세상의 용도L’Usage Du Monde》에 이렇게 썼다.
“(…) 여행하고 싶은 욕구가 절로 솟아났다. (…) 그 같은 욕망은 무엇보다도 상식에 어긋나지만, 그런데도 욕망이 계속해서 상식에 저항하면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찾는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억누르기 힘든 욕망, 그걸 뭐라 불러야 할지, 사실 우리는 모른다. 무엇인가가 점점 더 커지다가 어느 날인가 닻줄이 풀리면, 반드시 자신감이 넘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떠나고 보는 것이다.”(니콜라 부비에, 《세상의 용도》, 소동출판사, 2016.)
2010년에는 “뭔지 모를 욕망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어서 “일단 떠났고”, 종교를 갖게 된 2015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떠났다. 2016년 5월에는 그야말로 아무 동기 없이 오직 걷기 위해 걸었다(“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행은 그냥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해주리라.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는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세상의 용도》)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당시 나를 옥죄던 온갖 갈등을 조금이나마 떨쳐버리고 싶어서 짐을 꾸렸다. 마지막으로, 2017년 9월에는 습관처럼 다시 한번 르퓌 순례길을 걸었다.
르퓌 순례길을 단순히 걷고 싶어서 걷든, 타인들과의 만남을 위해 걷든, 프랑스의 유적과 역사를 알고 싶어서 걷든, 영적 추구를 위해서 걷든, 엄밀한 뜻에서 종교적 순례를 위해서 걷든, 아니면 자신의 체력을 확인하고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기 위해서 걷든, 다 제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길은 또 다른 삶의 현장이다. 순례자는 길에서 몸을 움직이고, 걷고, 생각하고,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또 다른 삶의 순간을 산다. 부디 이 책이 그에게 떠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되기를, 그리고 그가 길 위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순례야말로 인간이 이미 거의 상실해버린 유목의 감각을 되찾는 행위가 아닐까? 그렇다면 순례자야말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했던 유목민의 새로운 삶을 살면서 새로운 사유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유목주의는 새롭게 사유하는 자의 이미지다.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개념을 낳고, 그 개념은 새로운 배치를 만든다. 노마디즘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사유하는 자의 모습이다.”(이진경, 《노마디즘 1》, 휴머니스트,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