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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Sep 30. 2016

서귀포, 화가 이중섭의 생이 가장 빛나던 순간

어쩐지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수 있으세요? 한 달? 일 년? 화가 이중섭은 본가에 다녀온다던 아내를 사 년 동안이나 기다렸습니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이별이 길어져, 그들을 결국 이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기다림은 그가 영양실조로 요절하면서 끝이 났죠.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 피난 시절 살았던 방


세상 연인들의 이별 사유를 헤아리자면 수천 수백만 가지가 넘겠지만, 이중섭과 그의 아내 이남덕의 이별 사유를 알고 나면 너무 거창해서 헛웃음이 날겁니다. 2차 대전, 해방, 6•25전쟁 등.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건, 우리나라 근현대의 굵직한 사건들이었어요. 


이 비극적인 사연을 가진 연인이 그나마 행복했던 건, 서귀포로 피난해 보냈던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1평 조금 넘는 좁디좁은 골방에서. 네 식구가 모여 살며, 먹거리도 변변치 않아 바닷게를 잡아 연명하던 삶. 그 시절이 뭐가 그리 좋았을까요? 


서귀포 자구리 해안

 



식민지 시대에 일본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이중섭과 이남덕(당시 이름은 야마모토 마사코)은 중섭의 동경 유학 시절에 처음 만났습니다. 어느 날 남덕은 배구를 하고 있는 중섭을 봅니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 못하는 운동이 없는 데다, 노래까지 잘하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죠. 중섭 또한 작고 귀여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함께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사랑을 키웁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에 조선 남자와 일본 여자의 사랑은 당연하게도 쉽지 않았어요. 많이 알려진 것처럼 이중섭은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덕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일본 여자이기에 결혼을 망설였죠. 


3년의 연애 끝에 중섭은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남덕은 그가 돌아간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해요. 결국 그녀는 중섭을 따라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태평남 전쟁 막바지. 남덕이 탄 배는 일본과 한국을 잇는 마지막 배였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한국행이었던 거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배가 일본과 한국을 잇는 마지막 배였습니다.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계간미술』, 유준상의 이남덕 여사 인터뷰 中




 “가난쯤은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삽시다”

어렵게 재회한 중섭과 남덕은 혼례를 올립니다. 이때 이중섭은 그녀에게 ‘따뜻한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선물해요. 그리고 얼마 후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제 겨우 가정을 꾸리고 살려는 어린 부부에게는 너무도 야속한 일이었죠. 


가족과 자화상, 이중섭 作

 

비장한 각오 없이는 버티기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첫 아이를 전염병으로 잃었고, 남은 가족들은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았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중섭은 그림을 그렸고 그로써 남덕에게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어 담뱃갑이나, 은종이에다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어요. 그에게 예술이란 곧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고리(*중섭의 애칭)가 자기 아내 생각뿐이라며 놀릴지도 모르겠어요. (중략)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모든 것을 바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예술은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라오.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마음은 순수와 청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중섭이 일본에 가 있는 남덕에게 쓴 편지 中




중섭·남덕 생의 가장 아름답던 순간, 서귀포


남쪽으로 남쪽으로 쫓겨가던 중섭과 남덕은 서귀포까지 내려갑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배고팠어요. 하지만 중섭에게 그곳은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1평 남짓한 방이지만, 식구들과 살 붙이고 살 공간이 있고, 바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림도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운 제주도 풍경, 이중섭 作 /씨름하며 노는 아이들과 게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섭과 남덕


아이들은 마냥 해맑았습니다. 전쟁 중임에도 태연하게 씨름을 하고 낚시를 했죠. 가난한 가족은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아서 반찬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중섭이 그린 제주 풍경에는 유난히 게가 많이 등장합니다. (후에 이 맑고 순수한 화가는 “게를 너무 많이 먹어서 미안한 마음에 게를 그리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作


서귀포에 온 지 일 년도 채 못되어, 중섭과 남덕은 다시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매일 같이 아이들과 자구리 해안에 나가 그림을 그리던 시절. 온 가족이 함께하던 그 평화로운 시절이 이번 생의 마지막이었음을. 중섭과 남덕은 알지 못했습니다. 




“엄청나게 귀여운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 조금만 더 참으면 되오”


반찬으로 먹은 게에게까지 미안해하던 이 선량한 부부 앞에 또 하나의 시련이 닥칩니다. 일본에서 남덕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온 거예요. 남덕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이를 두고 중섭은 속으로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언제 끝날 지도 모를 전쟁터에 남편을 외톨이로 남겨 두고 가야 하는 아내의 마음은 또 어떻고요. 



숱한 고민 끝에 중섭은 남덕과 아이들을 일본에 보내기로 합니다. 몰랐을 겁니다. 그 이별이 이렇게 길어질 줄. 중섭은 곧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중섭의 대표작인 ‘소’도 이때 탄생한 작품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엄청나게 귀여운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 조금만 더 참으면 되오. 우리 서로 더욱더욱 힘을 냅시다. 태현이와 태성이에겐 꼭 자전거 한 대씩 사주겠다고 분명히 일러 주시오. 그럼 몸 성히 힘을 내어 기다리시오. 소중한 몸을 더욱더욱 소중히 해서 기다려주시오. 발가락 군(*남덕의 애칭)에게도 뽀뽀를 보냅니다.                                                                

이중섭이 일본에 가 있는 남덕에게 쓴 편지 中 


나의 호흡 하나하나는 귀여운 아내, 남덕의 진심에 바치는 대향(*중섭의 애칭)의 열렬한 사랑의 언어라오. 다정하고 따뜻하고 살뜰한 당신의 모든 것만을 나는 생각하고 있을 뿐이오. 하루빨리 알뜰하고 살뜰한 당신과 하나가 되어 작품 표현을 하고 싶은 소망만이 가슴에 가득하오.                                                                                                                                  

이중섭이 일본에 가 있는 남덕에게 쓴 편지 中 


떨어져 있는 동안 중섭과 남덕은 애절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중섭이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은 이런 식으로 시작합니다. ‘나의 귀엽고 소중한 남덕군’, ‘내 마음을 끝없이 행복으로 채워주는 오직 하나의 천사, 나의 남덕군’ 2016년에 사는 제가 봐도 닭살스러운 표현이에요. 가부장적 질서가 확실했던 당시 시절을 고려하면 중섭이 상당한 아내 바보였다는 걸 알 수 있죠. 


중섭이 남덕에게 쓴 편지 실물. 글자로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은 여백에 그림으로 표현했다. 어떤 편지에는 ‘뽀뽀’라고 가득 써서 보내기도 했다.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때도 있어요”


중섭과 남덕은 다시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지만 둘의 고난은 끝나질 않아요. 해방 직후, 조선인이 일본으로 혹은 일본인이 조선으로 넘어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중섭은 허덕이는 이웃과 조국을 등지고 저 혼자서만 처자식을 찾아 일본으로 간다는 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신, 아고리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너무너무 기다려서, 어쩐지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때도 있어요.   
                                                                                                                                                          
남덕이 중섭에 보낸 편지 中


그렇게 그들의 만남은 번번히 좌절됐습니다. 남덕이 떠난 지 1년 후에, 중섭이 일본으로 건너가긴 했으나, 일주일 만에 홀로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죠. 유일한 희망이었던 일본행마저 좌절되자 중섭은 크게 낙담합니다. 그의 건강은 가난과 아내에 대한 향수로 점점 더 나빠졌어요. 결국 중섭은 서대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중섭이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조금만 참고 견뎌달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어요. 


건강에 주의하고 조금만 참고 견디시오. 도교에 가는 것은 병 때문에 어려워졌소. 도쿄에서 당신과 아이들이 이리로 올 수 있는 방법과, 내가 갈 수 있는 방법을 피차에 서로 모색해서 빠르고 안전한 방법을 취하기로 합시다.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시 연락하겠소. 그럼 건강한 소식 기다리오.                                                                                                                                                                                          
이중섭이 일본에 가 있는 남덕에게 쓴 편지 中

*이중섭이 쓴 마지막 편지.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남덕과 재회하겠다는 희망은 잃지 않았다.   




“아직도 가끔 제주도에서 바닷게를 잡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려요”


7년간의 짧은 결혼 생활 끝에 남편을 잃고, 두 아이와 남겨진 이남덕 여사. 그녀는 올해(2016년) 96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삯바느질로 중섭이 남긴 빚을 갚고, 두 아들까지 키워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었을까요. 인터뷰를 위해 그녀를 찾았던 사람들에 의하면, 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남덕의 표정이 수줍어졌다고 합니다. 마치 서귀포에서 바닷게를 잡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요. 


이중섭이 남긴 유일한 유품인 팔레트


그녀는 중섭이 남긴 유일한 유품인 팔레트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 미술관에 기증했어요. 남편의 분신과도 같던 물건을 어떻게 기증할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는 “남편에게 받은 사랑을, 그의 작품을 아껴 주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네요.  



서귀포 자구리 해안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70-1 


이중섭 미술관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로 27-3

자료제공 이중섭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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