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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01. 2024

한국 원자력 연구의 조상님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로스앨러모스에서 맨해튼 계획을 총괄하던 오펜하이머가 시카고로 출장을 떠난다. 당시 맨해튼 계획은 여러 개의 프로젝트로 나뉘어 수행 중이었다. 이중 시카고에서 한 일은 핵분열의 조절 장치인 원자로를 개발하는 것. 원자폭탄은 방사성 원소와 중성자가 충돌하여 쪼개지는 연쇄반응, 즉 핵분열을 이용한다. 이때 방사성 원소가 너무 적으면 연쇄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많으면 핵분열이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할 위험이 있다. 이 과정을 통제하려면 원자로는 필수였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이탈리아 물리학자 페르미.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계획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이론과 실험이 모두 쌉가능한 천재였던 페르미의 공로도 그에 못지않다. 페르미의 팀은 시카고대학의 풋볼 경기장 지하에서 ‘시카고 파일-1’이라고 불린 원자로를 만들었다. 오펜하이머는 이것의 완성 소식을 듣고 성능 시험을 해보러 간 것이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가 풋볼 경기장을 가로질러 지하로 들어가 페르미와 조우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전쟁이 끝난 후 원자폭탄 개발 시설들은 육군에서 원자력위원회(현 에너지부)로 이관되었다. 전쟁의 산물인 원자력을 이제부터는 산업 발전에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맨해튼 계획의 본거지였던 로스앨러모스, 버클리, 시카고, 오크리지가 최초의 국립연구소로 지정되었다. 페르미가 시카고 파일-1을 만든 곳에는 ‘아르곤 국립연구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가 시카고대학의 원자로 실험실로 가는 장면(위쪽)과 최초의 원자로 시카고 파일-1의 모습(아래쪽)


아르곤 국립연구소는 한국의 원자력 개발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1956년, 원자력 기술을 배우려는 한국인 과학자들이 처음 유학 간 곳이기 때문이다. 4년간 150여 명이 이곳을 거쳐 갔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66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1인당 연수비용은 6,000달러였다. 가난한 후진국으로서는 상당히 큰 투자였던 셈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45년 해방 무렵, 한반도 전력 생산시설의 88%가 38도선 이북에 있었다. 당연히 남쪽은 북쪽에서 전기를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무기로 소련군정은 미군정에게 툭하면 협박하곤 했다.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하면 전기 공급을 끊겠다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1948년, 한국사 최초의 민주적 선거인 5.10 총선으로 남한 단독의 제헌 국회가 구성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남조선노동당을 앞세워 온갖 선거 파탄 공작을 벌였는데도, 투표율이 95%를 넘었다. 빡친 김일성은 4일 뒤 남쪽으로 가는 전기를 끊어버렸다. 이른바 5.14 단전 조치다. 불과 한 달 전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는 “김일성이 전기를 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라며 방북 성과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건 역시 훼이크였다. 많은 사람이 북한의 기만술이라고 경고했지만, 김구는 알고도 그랬는지 정말 몰랐는지 연석회의에 참석했고, 김일성이 한 약속도 그대로 믿어버렸다.

     

남한은 엄청난 전력난을 겪으며 일대 혼란에 빠졌다. 당인리, 영월, 부산 등의 노후 화력발전소를 긴급 보수하고, 미국이 발전함을 보내줘서 급한 불은 껐다. 그러나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 정도로는 날로 증가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1950년 6.25라는 날벼락까지 맞았다. 전쟁이 끝나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력 수급 정책을 근본적으로 다시 마련하는 것이었다.

     

전환점은 1956년 이승만 정부에서 있었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대대적인 육성에 나선 것이다. 이 결정에는 미국 대통령 과학자문위원이었던 워커 리 시슬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에디슨컴퍼니 회장과 세계에너지회의 의장을 지낸 그가 방한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초청했다. 이때 전력난에 대한 이승만의 고민을 들은 시슬러는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우라늄 1g이면 석탄 3톤의 에너지를 낼 수 있다. 석탄은 땅에서 캐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다.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사람의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 지금 당장 인재를 키우기 시작하면 한국은 20년 후 원자력으로 전깃불을 켤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시슬러의 설명은 직관적이고 명쾌했다. 이승만은 당장 실행에 나섰다. 문교부 산하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고 원자력법 제정에 착수했다. 그리고 역사상 미국을 가장 잘 이용해 먹은(?) 지도자답게, 미국을 졸라 한미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다. 아르곤 국립연구소로의 과학자 파견은 바로 이 협정에 근거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이 교육받고 돌아온 덕분에 1959년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 수 있었다. 페르미가 만든 시카고 파일-1과 비교해도 17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같은 해 최초의 국가 연구소인 원자력연구소도 출범했다. 당시 1, 2급 공무원 110여 명 중 20명이 이곳에 배속되었고, 연구원은 공무원의 3배가 넘는 봉급을 받았다. 없는 나라 살림을 그야말로 탈탈 털어서 투자한 것이다. 마침내 1978년, 한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발전소를 준공했는데, 시슬러의 예상대로 20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1959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공부한 국비 유학생들이었다.

     

흔히 ‘한강의 기적’에는 1970~80년대의 경제개발계획과 중화학공업화가 배경으로 꼽힌다. 하지만 1950년대의 원자력 정책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소다. 원자력의 자체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중화학공업화의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에서 원자력이 없었다면, 엄청난 전기를 먹는 중공업, 석유화학, 철강, 반도체 산업은 태동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1956년 원자력 자체 개발을 시작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82세였다. 그 나이에 20년 뒤 성과를 낼 정책을 추진했으니, 대단한 혜안이자 뚝심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원자력이 이승만 혼자의 공은 아니다. 그의 정책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로 꾸준히 계승되어 국책 사업으로 대형화되었다.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점은 야당의 역할이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였고, 제1야당이 평민당이었다. 평민당 김대중 총재는 본래 박정희식 경제개발을 강력히 비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반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 만큼 원자력에도 반대했는데,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조사한 끝에 입장을 바꿨다. 1989년 11월의 목포 기자 간담회에서 김대중은 원자력 개발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원자력 연구자들은 이걸 ‘목포 선언’이라고 부른다. 1997년 정권 교체 후에도 원자력 개발 정책을 이어 나갔음은 물론이다.

     

보통 혁신이라고 하면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선진국의 첨단 산업을 떠올린다. 4차 산업혁명이 시대정신처럼 통용되는 요즘은 더 하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로봇처럼 아직 미완이지만 미래에 구현될 기술이 혁신의 대명사로 꼽힌다. 하지만 그것이 꼭 선진국과 미래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한국의 원자력 개발사는 그 옛날 세계 최빈국에서도 혁신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뛰어난 지도자들의 혜안과 결단으로 국가의 수십 년 먹거리를 만들어낸 것, 그것 역시 혁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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