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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Sep 27. 2024

거대과학과 집단연구의 태동

미국 에너지부 국립연구소 (2)

어느 연구소든 창업자가 있다. 초창기의 철학을 세우고, 자원을 끌어오고, 인재를 키운 사람들 말이다. MPG의 아돌프 하르낙, RIKEN의 니시나 요시오가 그런 역할을 했다. 에너지부 국립연구소도 마찬가지다. 이곳의 창업자는 어니스트 로런스라는 인물이다. 국립연구소는 물론 미국 과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실험물리학자다. 현재 2개의 연구소 –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 가 그의 이름을 쓰고 있을 정도다. 로런스는 과학연구뿐만 아니라 연구소 경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거대과학, 다학제, 집단연구를 골자로 하는 국립연구소의 시스템은 약 100년 전 미래를 내다본 그의 혜안에서 비롯되었다.

     

본래 예일대학의 조교수였던 로런스는 1928년 UC 버클리로 이직했다. 27살의 그는 이미 실험의 대가라는 평을 듣고 있었고, 과학 말고도 다방면에 천재적이었다. 하긴 그 시절 동부의 아이비리그에서 서부의 시골로 홀연히 온 것부터 비범했다. 로런스는 1930년 UC 버클리의 최연소 정교수가 되었고 이듬해 방사선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현대물리학과 미국 과학의 경로를 뒤바꾸는 엄청난 일들을 해내기 시작했다.



     

사이클로트론의 혁신

     

로런스의 대표 업적은 최초의 입자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것이다. 1919년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원자핵을 다른 원자핵으로 변환하는 데 성공하면서 물리학의 새 지평이 열렸다. 물질의 궁극적 한계라고 여겨졌던 원소를 인위적으로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다만 핵반응에 쓰이는 헬륨을 자연계에서 얻어야 해서 실험에 충분한 양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에 러더퍼드는 전 세계 물리학자들에게 고에너지 입자의 대량 생산 방법을 찾자고 제안했다.


로런스가 개발한 사이클로트론은 이에 대한 정확한 응답이었다. 그것은 자기장과 교류전압을 이용해 빠르게 가속한 입자를 원자핵에 충돌시켜,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를 분리해냈다. 이렇게 얻은 방사성 원소의 에너지는 러더퍼드가 쓰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실험적으로 매우 간편하고 값도 싼 방법이었다. 로런스는 이 업적으로 193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역사에서 이렇다 할 논문 없이 실험장비 개발만으로 수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사이클로트론의 과학사적 의의는 어마어마했다. 이것으로 인간은 원자핵 이하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열 수 있었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입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도 사이클로트론 덕분이었다.

      

사이클로트론은 순식간에 전 세계 연구실로 퍼졌다. 노벨위원회에 의하면, “사이클로트론 실험으로 발표된 논문은 눈사태처럼 불어났다.” 로런스가 1931년 최초 제작한 사이클로트론은 직경 5인치(약 12cm)에 제작비는 25달러에 불과했으나, 2천 V의 전압으로 양성자를 8만 eV까지 가속했다. 이후의 업그레이드도 매우 빨랐다. 10년도 채 되지 않아 16 MeV 출력의 60인치(1.5m) 대형 사이클로트론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캘리포니아 시골의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는 세계 과학계의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1931년 최초의 5인치 사이클로트론(왼쪽)과 1938년 60인치로 업그레이드된 사이클로트론(오른쪽)


이것은 단지 과학만의 효과는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골드러시 이후 캘리포니아는 광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파생한 전기공학, 기계공학, 무선공학 등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로런스는 연구소를 둘러싼 이 산업 인프라를 잘 활용했다. 사실 사이클로트론도 당시 진일보한 공학 기술 덕분에 가능한 장비이기도 했다. 로런스는 특유의 사교성을 발휘해 캘리포니아 지역 기업들로부터 상당한 기술지원을 얻어냈다. 사이클로트론의 핵심 부품인 자석이 대표적인 예다. 팔로알토의 연방전신회사는 84톤짜리 거대 자석을 로런스에게 기증했다. 펠튼 수차회사는 이를 사이클로트론에 쓸 수 있도록 개량해주었다. 또한 찰스 리튼이라는 유명 엔지니어가 사이클로트론에 쓰일 발진기의 고주파관을 직접 만들어주기도 했다.

      

연구소를 경영하는 소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금 조달이다. 이 점에서도 로런스는 탁월했다. 거대 장비와 많은 인력을 가동했던 버클리 방사선연구소의 운영비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데 당시 미국 과학의 수준은 지금처럼 세계 최고가 아니었고, 연구자금을 제공하는 곳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런스는 록펠러재단, 주정부, 연방정부 등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원금을 곧잘 받아냈다. 그의 발명품인 사이클로트론의 혁신성을 적절히 어필했던 덕분이다. 물론 그 무렵 후버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세계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냈던 미국인의 자부심도 한몫했다.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는 그렇게 미국 과학의 여명기라는 시간적 배경과 캘리포니아라는 산업적 조건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주어진 상황에서 자금, 인프라, 인재, 기술력 등을 최대한 동원해낸 로런스의 리더십이 주효했다. 다음의 말에서 그의 연구 철학이 잘 드러난다.

     

“과학자가 아무리 헌신적이더라도 물질적 도움 없이 홀로 중대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는 우리 과업에서 가장 자명한 사실이다.”

사이클로트론 개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로런스는 오늘날 국립연구소 시스템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다학제 집단연구 체제

     

사이클로트론을 기반으로 조직된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는 과학의 새로운 연구방식을 창출했다. 그것은 과학연구의 집단화로 요약된다. 사이클로트론은 자연의 근본을 이루는 입자와 원소를 탐구하는 물리·화학적 실험에 주로 쓰였다. 그러나 이 장비를 활용하려면 물리학자나 화학자를 넘어서는 폭넓은 범위의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사이클로트론이라는 거대한 장비에는 변압기, 검파기, 전송선, 발진기 등의 복잡한 장치들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클리 방사선연구소에서는 실험하고 논문을 쓰는 과학자들 외에, 기계와 장비를 다루는 기술자와 개발자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 또는 과학의 각 분야 -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 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그 대신 사이클로트론을 활용한 다학제, 다목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물리학자들은 입자를 충돌시킨 부산물로 우주의 기원을 추적했고, 화학자들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원소를 분리해냈으며, 의사들은 방사성 동위원소로 암세포를 죽이는 치료법을 고안했다. 전기공학자나 기계공학자는 사이클로트론의 출력을 높이도록 장치와 부품을 개량했다. 이러한 모습은 동양 고전 『논어』의 유명한 문구인 화이부동(和而不同) - 조화롭되 같지는 않다 – 과 비슷한 것이었다.

     

로런스가 연구소라는 조직 형태를 고수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만약 로런스가 교수로 재직하던 물리학과에서만 연구했다면,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이는 체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를 꿰뚫어 본 로런스는 특정 학과에 구속되지 않는 연구소를 세우고, 전통적 학문 구분에서 벗어나 핵과학이라는 포괄적 영역을 주력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사이클로트론 실험이 필요한 핵물리학, 핵화학, 핵의학, 방사선생물학 등이 포함되었다. 버클리 방사선연구소가 확립한 이런 대형 장비 기반 집단연구, 거대과학 연구는 오늘날 에너지부 국립연구소들의 기본 골격이기도 하다.



     

원자폭탄 개발 경쟁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는 설립 3년 만에 중대한 전기를 맞았다. 독일보다 빨리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하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소재로 다룬 그 사건 맞다. 흔히 이 계획은 아인슈타인의 편지로 시작해서 오펜하이머가 성공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계기만 제공했을 뿐 관여하지는 않았고, 오펜하이머 외에도 여러 프로젝트를 책임진 과학자들이 있었다.

      

로런스 역시 그중 하나다. 본래 원자폭탄 연구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한 MAUD 위원회는 1년여의 이론 검토 끝에 원자폭탄 개발 방법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하지만 자원이 부족하고 독일의 폭격 위험도 큰 영국에서 추진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결국 영국은 1941년 10월 이 보고서를 미국에 넘겼는데, 가장 먼저 본 인물이 로런스였다. 대통령을 자문하는 S-1 위원회에 있던 그는 자료를 보자마자 원자폭탄 개발이 가능함을 확신했다. 로런스는 동료들을 모아 이에 필요한 세부 기술들을 보고서로 정리하였다. 여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맨해튼 계획의 막이 올랐다.

1941년 3월 발간된 MAUD 위원회의 원자폭탄 개발 방법에 대한 보고서. 이 자료가 미국으로 넘어가 맨해튼 계획으로 이어진다.

     

맨해튼 계획은 군사 작전이면서 물리학의 집단연구였다. 이 전무후무한 계획의 총책임자는 대통령 직속 과학연구개발국장이자 MIT 교수였던 버니바 부시다. 부시는 계획을 군사 부문과 과학 부문으로 나누고, 최종 단위에서는 군이 과학자들을 지휘하게 했다. 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육군 공병대의 레슬리 그로브스다. 과학 부문에서는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수장을 맡았다.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실험물리학자이자 UC 버클리의 동료였던 로런스와 특히 케미가 좋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두 절친이 이념적으로는 극과 극이었다는 점이다. 오펜하이머는 급진적 사회주의자였으나, 로런스는 보수 성향의 공화당원이었다. 이 차이는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학생들의 정치 집회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를 통해 그려진다.

     

그 밖에도 엔리코 페르미, 한스 베테, 에드워드 텔러, 아서 콤프턴, 리처드 파인만, 해럴드 유리, 존 폰 노이만 등도 참여했다. 이들은 노벨상을 이미 받았거나 앞으로 받게 될 석학들이었다. 한 마디로 '20세기 물리학의 올스타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현대물리학 교과서는 이들의 이름 없이는 서술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중 상당수는 히틀러를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을 탄압한 나치 독일을 겨냥해 원자폭탄이라는 복수의 불벼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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